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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가상방 개망나니-93화 (93/313)

적가상방 개망나니 93화

동해상방의 연락이 온 것은 그로부터 사흘이 지나고 나흘째 되는 날이었다.

“적가상방의 적풍백 공자님을 찾아왔습니다.”

상인인지, 아니면 어디 흑도패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험상궂게 생긴 건장한 사내가 풍백을 찾았다.

풍백은 그를 바라보며 가볍게 손을 들어 보였다.

“내가 적풍백인데, 누구시오?”

“동해상방에서 나왔습니다. 저희 상방주님께서 적 공자님과 긴히 할 얘기가 있다고 하시며 만남을 청하셨습니다.”

동해상방이라는 말에 눈을 반짝인 풍백이 물었다.

“어디서 보자고 하시오?”

“힘들지 않으면 동해상방에서 만나자고 하시는데, 어려우시면 다른 장소로 정하셔도 괜찮다고 하십니다.”

“그럼 갑시다. 굳이 다른 자리를 잡을 이유는 없으니 말이오.”

선뜻 따라나서겠다는 풍백의 태도에 사내가 살짝 놀라더니 머뭇거리며 말했다.

“그럼 저를 따라오시지요. 동해상방으로 안내를 하겠습니다.”

사내를 따라 풍백이 움직이자, 그의 뒤를 문약란과 고우길도 따랐다.

동해상방은 공교롭게도 풍백이 있던 객잔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아니, 이건 어쩌면 상산현 자체가 너무 작기에 어쩔 수 없는 건지도 몰랐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동해상방이 엄청난 규모를 자랑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곳 상산현 현청이 워낙 작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아무튼 상산현 현청보다도 컸고, 심지어 풍백의 적가상방보다도 컸다. 어쩌면 항주에 있는 서문세가와 비견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규모였다.

‘이해는 한다만…… 아무리 그래도 제대로 된 상품은 소금 하나밖에 없으면서 이런 규모라고?’

적가상방은 워낙 다양한 상품을 취급하면서 상방 내부에 각종 창고가 자리 잡고 있기에 규모가 커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서문세가는 무가인 터라 연무장을 비롯한 온갖 것들이 있기에 규모가 클 수밖에 없고 말이다.

그에 비해 동해상방은 소금을 제외하고 나머지 상품은 그저 구색 맞추기 수준이었다. 상방의 규모가 이렇게 클 이유가 없다는 말이었다.

사내를 따라 움직이며 이런 생각을 하는 풍백이 도착한 곳은 거대한 전각이었는데, 안으로 들어가자 거대한 회의실에 열 명의 사람들이 긴 책상을 둘러앉은 것이 보였다. 가장 상석에 앉아있는 덩치가 산만 한 사내가 동해상방의 상방주 여만경이라는 건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자리부터 신경전을 벌이네.’

이대로 앉게 된다면 풍백은 아홉 명의 중역들과 같은 자리에 앉아야 했다.

지금 화오염장의 소금 전매권은 풍백이 쥐고 있었다. 만약 동해상방이 계속 소금을 팔아먹고 싶다면, 오히려 풍백의 앞에서 꼬리를 흔들어야 정상이었다. 그래야 풍백이 그들에게 싸게 소금을 팔 테니까.

그러니 자리의 상석은 당연히 풍백에게 내줘야 정상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상석에는 여만경이 앉아 있었다. 마치 소금 전매권을 쉽게 놔주지 않겠다는 것처럼.

히죽 웃은 풍백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중역들이 앉아있는 것처럼 편한 자리 아무 곳에나 앉았다. 그런 풍백의 뒤로 문약란과 고우길이 섰다.

동해상방의 사람들은 풍백이 들어왔을 때는 일제히 눈을 부릅뜨며 노려보듯이 바라봤었다. 그런데 풍백의 뒤를 따라 들어온 문약란을 보는 순간, 그들의 눈에 들어갔던 힘이 순식간에 빠지며 풀려 버렸다.

‘사, 살벌하게 예쁘네…….’

‘진짜 저런 게 시비라고?’

‘대체 저 여자는 뭐야?’

이들의 물음에 대답을 해 줄 사람은 당연히 없었다. 그저 풍백의 뒤에 조용히 시립해 있는 문약란을 더러운 욕망이 번들거리는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 그들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여만경 역시 다른 이들과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눈가가 붉게 번들거리는 모습이 다른 이들보다 더 정욕에 사로잡힌 듯한 모습이었다.

문약란은 이런 시선을 너무나 많이 받아 왔었다. 그러나 지금처럼 다수의 사내들이 노골적으로 정욕을 드러내며 뚫어져라 바라보는 경우는 아직까지 당해 본 일이 없었기에 점점 얼굴이 창백하게 변해 갔다.

회의실의 이런 분위기를 본 풍백이 조소를 짓더니 한 손을 들어 책상을 내려쳤다.

탕!

느닷없이 들려온 소리에 동해상방의 중역들이 살짝 놀라며 일제히 풍백을 바라봤다. 풍백은 그런 동해상방의 사람들을 보며 여전히 조소를 짓고 있었다.

“아주 볼만하군요. 제가 지금 상방의 초대를 받아 중요한 대화를 나누기 위해 이곳에 온 건지, 아니면 야밤에 뒷골목 홍등가를 온 건지 헷갈릴 정도입니다.”

그 말에 사람들이 어색하게 기침을 하며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여만경은 오히려 비릿하게 웃으며 잘 걸렸다는 듯이 말했다.

“말이 좀 험하시군. 이 자리에는 동해상방의 모든 중역이 모여 있는 자리요. 그런데 뭐? 뒷골목 홍등가? 전매권을 손에 넣었다고 눈에 뵈는 것도 없는 것이요?”

풍백은 눈을 가늘게 뜨며 여만경을 바라봤다. 그 시선을 받는 여만경 역시지지 않겠다는 듯이 눈에 잔뜩 힘을 주며 그 시선을 맞받아쳤다.

겨우 한 번씩 말을 했을 뿐이지만, 풍백은 여만경과 동해상방이 어떤 선택을 했는지 알아챘다.

상석을 내주지 않는 것은 그나마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었다. 협상을 하기 전에 기선 제압을 하려고 한다고 생각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여만경과 동해상방이 풍백의 손에 있는 전매권을 인정하고 화오염장에서 나오는 소금을 조금이라도 싸게 구입하려고 했다면 지금처럼 행동할 수 없었다. 이건 협상을 하자는 것이 아니라 시비를 거는 것이니까.

‘상인의 탈을 쓰고 있다고 하더라도, 원래 흑도패였던 놈들이니 제 버릇은 못 버리는군.’

동해상방은 본래 흑도패가 시작이었다. 그것도 하나의 흑도패가 아니라 상산현 뒷골목에 있던 무려 열 개의 흑도패가 연합을 해서 만든 것이다.

그렇기에 원래라면 단순히 동해상방이라 부를 것이 아니라 동해상방연합이라 부르는 것이 맞았다.

과거 포정사는 화오염전을 손에 넣으면서 기존에 있던 상방을 완전히 박살을 내 버렸다.

이 부분은 포정사가 아주 잘한 일이었다. 절강성에 있는 대부분의 소금을 유통하던 상방은 뒤에서 많은 돈을 착복하고, 염전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함부로 부리며 제대로 보수조차 주지 않았던 악덕 상방이었으니까.

‘그래 봐야 결국 자기 주머니를 채우기 위해서 했던 일이지만 말이야.’

이후 포정사는 자신의 말을 들을 상방을 새로 만들기로 했다. 그래야 별다른 뒷말 없이 소금을 판매하며 나오는 돈을 챙길 수 있으니까.

그래서 포정사는 뒷골목에 있던 열 개의 가장 큰 흑도패를 모아 동해상방을 만들게 하고, 화오염장의 소금 전매권을 주며 판매하도록 만들었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포정사는 감히 동해상방이 자신의 말에 반기를 드는 일에 대해서는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동해상방이라는 허울 좋은 현판 아래에는 뒷골목 흑도패라는 실체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동해상방은 점차 분위기가 변해 가기 시작했다. 포정사 역시 이걸 눈치챘지만, 그래 봤자 흑도패라 생각하며 무시하고 지나갔다.

그 결과, 포정사가 자신의 배당을 늘리려고 했던 일을 거부하는 사태가 벌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분노한 포정사는 당장 동해상방을 제재하려고 했다. 그런데 상황은 포정사의 생각보다 조금 더 복잡해졌다.

단순히 흑도패가 만든 작은 상방이었던 동해상방은 어느새 이곳 상산현에서 유지로 자리를 잡아 가고 있었고, 무엇보다 화오염장에서 일하던 대부분의 일꾼들마저도 동해상방에서 휘어잡고 있었던 것이다.

과거 화오염장에서 일하던 일꾼들은 아주 힘든 삶을 살고 있었다. 고된 일을 하면서 제대로 된 보수를 받지도 못했고, 심지어 금전적으로 문제가 생긴 일꾼들을 상대로 염왕채(閻王債)를 놓으며 사실상 노비로 부렸었다.

이런 상황에서 동해상방이 화오염장의 소금 전매권을 손에 쥐게 되자 일꾼들은 자신들의 처우가 조금이라도 좋아질 것을 기대했다.

‘지나가는 일면식도 없는 사람을 믿는 한이 있더라도, 최소한 흑도패을 믿지는 말았어야 했지.’

동해상방을 만든 이들은 상인이 아니라 흑도패였다. 세상에 흑도패가 사정을 봐주며 전보다 좋은 대우를 해 줬다는 일이 얼마나 있겠는가?

일꾼들은 처우는 전혀 좋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동해상방의 흑도패들은 폭력을 행사하며 일꾼들을 규합하여 하나의 조합을 만들도록 위협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조합의 수장은 당연히 동해상방의 중역이, 정확하게 말하자면 흑도패 수장 중 몇 명이 틀어쥐게 되었고, 일꾼들은 이런 동해상방에게 끌려다닐 수밖에 없는 상황이 완성되고 말았다.

일꾼들마저 휘어잡은 동해상방은 포정사가 압박을 하려고 하자, 일꾼들을 움직여 소금 생산을 거부하는 작전을 내밀었다.

포정사는 이 상황에 크게 당혹했다.

물론 다 무시하고 동해상방을 박살 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뒷돈을 지금까지 챙겨 왔던 포정사였기에 이전처럼 강력하게 제재하기는 힘들었다. 잘못하다가 안찰사가 치고 들어와 조사를 벌이면 대책도 없었으니까.

이런 상황에서 등장한 것이 바로 적가상방과 풍백이었다.

풍백이 제시한 조건이 훨씬 마음에 들기도 했지만, 사실 그보다 풍백을 내세워 사냥개로 쓰려는 생각이 더 강했다.

‘일꾼들만 불쌍하지.’

여만경을 가만히 바라보던 풍백이 입을 열었다.

“그럼 어쩔까? 그냥 갈까?”

그 말에 여만경이 잔뜩 흥분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감히 어디서 함부로! 여기가 네가 있던 상산현이라고 생각하는 것인가!”

이 말이 신호라도 되는 것처럼 중역들이 너도나도 소리치기 시작했다.

“아주 건방진 새끼구만!”

“여기가 어디라도 함부로 주둥이를 놀려!”

“너 이 새끼, 항상 사람 많은 곳에 있어라. 야밤에 길가에 나오면 숨통을 그냥!”

자신들이 원래 흑도패라는 걸 과시라도 하는 것처럼 온갖 욕설이 튀어나오고 위협하는 말이 흘러나왔다.

워낙 살벌하게 소리를 지르는 이들의 모습을 보면 어지간한 상인은 그대로 겁을 집어먹고 눈치를 살필 것 같았다.

풍백은 가만히 앉아서 무표정한 얼굴로 이들의 이런 위협을 고스란히 받기만 하고 있었다.

하지만 고우길은 아니었다.

동해상방 사람들의 위협이 도를 넘었다고 느낀 고우길은 미간을 찌푸리며 앞으로 한 걸음 나섰다.

그러자 마치 그것이 신호라도 됐던 것처럼 회의실 문이 열리며 일단의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그리고 그들은 각각 동해상방 중역들 뒤에 자리를 잡고 섰다.

그걸 본 고우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모두 무인이다!’

풍백 정도의 안목은 없었지만, 고우길은 이들이 모두 무인이라는 걸 알아볼 정도는 되었다. 또한 몇몇 사람들은 자신마저 승기를 잡을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을 것 같기도 했다.

이런 고우길을 본 여만경이 한쪽 입꼬리를 한껏 위로 끌어 올렸다.

“왜? 뭘 어쩌려고? 한번 붙어 보자는 건가? 감당할 수 있겠어?”

대놓고 조롱하는 여만경의 모습에 동해상방의 중역들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 비웃음을 정면에서 당하고 있는 고우길만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제길…… 한칼에 죽을 놈들이…….’

아마 이전이었다면 자존심이고 뭐고 눈부터 깔았겠지만, 서문세가에서 일검단악이라는 별호를 받고 난 이후 그의 성격은 점차 변해 가고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지금 대놓고 목숨을 걸며 싸우겠다는 건 아니었다. 적어도 풍백의 허락이 떨어지지 않는 이상은 말이다.

풍백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상단끼리 협상을 하자는 말인 줄 알았더니, 뒷골목 흑도패 버릇을 못 버리고 협박이나 하는 자리였군.”

그 모습을 본 여만경이 차갑게 말을 던졌다.

“앉아. 뒈지고 싶지 않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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