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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가상방 개망나니-90화 (90/313)

적가상방 개망나니 90화

콰당!

마중을 나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난 적호경이 한 걸음도 떼기 전에 문이 부서져라 열리며 거의 울 것 같은 얼굴의 왕삼이 뛰어 들어왔다.

“아무도 없…… 어?”

회의실로 뛰어 들어온 왕삼은 적가상방의 모든 중역들이 모여 일제히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보고 울 것 같은 얼굴에서 어색한 표정으로 서서히 변해 갔다.

“……다들 회의 중이셨나 봐요. 헤헤헤…… 죄송합니다!”

꾸벅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한 왕삼이 서둘러 문을 닫으려고 하자 적호경이 물었다.

“백아가 돌아온 것이냐?”

“도련님이요? 아니요, 도련님은 다른 일 하나가 더 있다고 저만 돌려보내셨습니다.”

“너만 보냈다고? 왜 너만 돌려보낸 것이냐?”

풍백의 가장 가까운 곁에서 시중을 들며 거의 떨어지는 일이 없었던 왕삼을 먼저 보냈다는 게 뭔가 이상했다.

그 물음에 왕삼이 품에서 풍백에게 받은 계약서를 꺼내 얼른 적호경에게 건넸다.

“이것 때문에 저를 먼저 보냈습니다. 상방이 급한 상황일지 모른다고요. 중요한 계약서라 전서구로 보낼 수도 없어서 제가 직접 달려왔습니다.”

뜬금없이 계약서를 받은 적호경은 이게 대체 무엇인가 싶은 얼굴로 계약서를 확인했다.

그리고 내용을 읽어 가는 적호경의 눈이 점점 커다랗게 변하더니, 종국에는 표정마저 경악스러운 얼굴로 바뀌곤 손마저 부들부들 떨었다.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진덕양은 점점 변해 가는 적호경을 보고 물었다.

“왜 그러시는 겁니까?”

“…….”

“상방주님?”

“…….”

대답도 못하고 멍하니 계약서만 보고 있는 적호경의 모습에 진덕양이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갔다.

“무슨 계약서이기에 그러는 겁니까?”

진덕양이 다가오자 적호경이 여전히 떨리는 손으로 들고 있던 계약서를 넘겨줬다.

계약서를 읽어 보는 진덕양은 왜 적호경이 손마저 부들부들 떨었던 건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 역시 지금 손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떨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적호경은 휘청거리며 걸어가 자신이 앉아 있던 의자에 다시 털썩 앉았다. 그리고 그것이 신호라도 되는 것처럼 진덕양이 두 손을 번쩍 들어 올리며 소리쳤다.

“마, 만세! 만세에!”

이런 진덕양의 행동에 회의실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당황해서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왔다.

“초, 총관 어르신?”

“진 총관님, 왜 그러십니까?”

“뭐 때문인지 저도 좀 보여 주십시오!”

그리고 진덕양에게서 받은 계약서를 함께 읽어 본 사람들 역시 자리에 털썩 주저앉거나, 진덕양처럼 괴성을 질렀다.

“우아아아!”

“마, 맙소사!”

“만세! 소방주님 만세!”

“살았다아!”

왕삼은 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눈만 꿈뻑거렸다. 분명 엄청난 물량을 납품하는 계약서였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난리를 부릴 정도인가 싶은 것이다.

하지만 지금 자신이 가져온 계약서가 단순한 납품 계약서가 아니라는 걸 그는 몰랐다.

양식이라든지, 아니면 내용에 숨겨진 어떤 것이 있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이 계약서에 찍힌 직인이 도지휘사의 직인이라는 것이 문제였다.

백호소와 천호소에서 소비되는 물품은 위지휘사사(衛指揮使司)에서 구입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위지휘사사는 다섯 개의 천호소를 지휘하는 곳으로, 물자의 구입 및 공급 역시 위지휘사사의 업무 중 하나였다.

그런데 지금 왕삼이 가져온 계약서는 도지휘사사에서 직접 구입을 하고, 각각 위지휘사사와 천호소, 백호소에 배송까지 책임지는 것으로 나와 있었다.

이건 대단히 특별한 경우였고, 심지어 도지휘사의 직인이 찍혀 있다는 것은 아주아주 이례적인 일이었다.

사람 사는 곳은 모두 똑같다.

까마득한 상급자가 한 번 내린 명령은 어지간하면 바뀌는 일이 없다. 행여나 함부로 바꿨다가 눈치도 없는 놈으로 찍히면 답도 없으니까 말이다.

그렇기에 지금 왕삼이 가져온 납품 계약서는 실질적으로 특별한 일이 발생하기 전까지는 절강성 남부에 있는 거의 모든 위지휘사사와 천호소, 백호소에 물품을 납품할 수 있는 계약서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었다.

즉, 삼 개월 이후에도 각 위지휘사사에서는 계속해서 적가상방에 물품을 주문할 것이 분명했다.

이런 내막도 제대로 모르는 왕삼은 그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머리만 긁적이고 있을 뿐이었다.

적호경은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다가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허허…… 이 계약을 따내기 위해 얼마나 고생이 많았을꼬…….’

적가상방이 가지고 있는 관부와 인맥은 아주 얄팍했다. 기껏해야 상산현의 실무진 몇 명과 약간의 정보를 건네받는 수준이었다.

그나마 매번 어느 정도 뒷돈을 찔러 주지 않으면 연락도 미리 주지 않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적가상방이라고 더 높은 위치에 있는 관리와 선을 대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니다. 그만큼 어렵다는 것이다.

대부분 한자리 차지하고 있다고 말하는 관리들은 그 뒤에 방귀 꽤 뀌는 사람들이 포진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렇기에 나중에 그 자리에 들어가려고 해도 각종 인맥 관계에 치여 들어가지 못했다.

그런데 풍백은 항주에서 대체 무슨 일을 했던 것인지, 절강성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권력자가 직접 계약서에 직인을 찍어 줬다.

그 말은 다시 말하자면 적가상방의 배경으로 도지휘사가 들어섰다는 말과 같았다.

“으흐흐흐흐! 형님! 정말 형님 아들 하나는 끝내주게 키웠습니다!”

진덕양은 얼마나 기쁜지 공적인 자리에서는 절대 내뱉지 않았던 형님을 들먹이며 크게 소리쳤다. 그러자 회의실에 있던 중역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이며 너도나도 소리쳤다.

“정말 소방주님이 대단하시지!”

“나는 소방주님이 어렸을 때부터 이렇게 뛰어난 상인이 될 거라고 알고 있었다니까!”

“내가 얘기하지 않았었나? 소방주님이 태어났을 때 말이야, 내가 꿈을 꿨는데…….”

“뭔 말이 그렇게 길어? 닥치고 만세나 불러!”

“만세!”

근래에 풍백이 대단한 공적을 많이 세웠었지만, 그래도 중역들 중에서 풍백에게 소방주라 부르는 사람은 없었다. 워낙 개망나니였던 과거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기에 은연중에 거리를 두려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누구 하나 풍백을 도련님이라 부르는 사람이 없었다. 이제 이들의 머릿속에서 개망나니였던 풍백의 모습은 모두 사라진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그 모습을 보던 적호경이 자리에서 일어나 호통을 쳤다.

“다들 뭐하고 있는 게야? 계속 이러고 있을 거야? 방금 계약서가 들어왔잖아! 이제 일해야지!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거야?”

호통을 치면서도 적호경의 얼굴에는 흐뭇한 웃음이 자리하고 있었다. 중역들 역시 환하게 웃으며 소리쳤다.

“알겠습니다!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일단 휴가를 보냈던 사람들 모두 빨리 상방으로 오라고 전해야겠어!”

“그래야지! 지금 일할 사람이 하나도 없다고!”

“그것만이 아니야. 여기 물품 중에 창고에 없는 것도 있단 말이야.”

“그건 내가 연락을 해서 모레까지 준비를 하도록…….”

“모레는 무슨! 내일까지 준비해야지!”

“빨리 서둘러! 어서!”

요란하게 소리치며 중역들이 회의실을 달리듯이 빠져나갔다. 이제부터 정신없이 물품을 준비해야 했지만, 중역들 얼굴에는 온통 웃음꽃이 피어 있었다.

진덕양이 적호경의 옆으로 다가와 웃는 얼굴로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렇게 좋소?”

“내가 언제 좋다고 했던가?”

“……입가에 미소나 지우고 그런 말을 하시오. 아주 입이 귀에 걸리게 웃고 있구만.”

그 말에 적호경이 얼른 입가에 저도 모르게 짓고 있던 미소를 풀었다. 그 모습을 본 진덕양이 히죽 웃으며 왕삼의 어깨를 부여잡고 회의실을 나섰다.

진덕양에게 끌려 나가던 왕삼이 회의실을 나가기 전, 슬쩍 고개를 돌려 적호경을 확인해 봤다. 아니나 다를까 적호경은 혼자 남아 있자 다시 입이 귀에 걸려 있었다.

‘엄청 좋으신 것 같네.’

풍백이 인정을 받는 자리였는데, 괜히 자신이 뿌듯해지는 왕삼이었다.

* * *

덜컹! 덜컹!

달리는 마차 안에서 제법 두툼한 서류를 읽고 있던 풍백이 문득 귀를 후비적거렸다.

‘누가 내 얘기를 하나?’

생각을 해 보면 자신에 대해 이런저런 얘기를 할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니었다. 청해상방과 백건상방은 물론이고, 서문세가와 도지휘사사나 승선포정사사에서도 자신에 대한 얘기가 조금이나마 돌고 있을 터였다.

‘지금쯤이면 왕삼이도 적가상방에 도착했을 테니, 적가상방에서 내 얘기를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네.’

왕삼은 도지휘사사에서 나온 계약서가 어떤 의미인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었지만, 적가상방에서는 그 의미를 알아차릴 사람이 너무 많았다.

그 계약서의 내용대로라면 거의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상황이니만큼 다들 정신없이 기뻐하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 말은 내가 꽤 여유 있게 움직일 수 있다는 말이지.’

만약 도지휘사사에서 나온 계약서가 아니었다면 풍백은 꽤 마음이 급해졌을 것이다.

호초가 있는 이상 쉽게 무너질 수 없는 적가상방이라고 하더라도, 세상 일이 마음먹은 대로 이뤄지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천 번, 만 번을 계산하고 계획을 짜더라도 아주 사소한 변수 하나에 완전히 뒤엉키는 일이 허다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런 말을 하지 않던가.

일을 꾸미는 건 사람이지만, 일의 성사는 하늘이 결정한다[謀事在人 成事在天]고 말이다.

하지만 왕삼이 가져간 계약서 하나로, 설령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져 더욱 암담한 상황에 처한다 할지라도 당분간 적가상방이 무너질 일은 완전히 없어지게 되었다고 볼 수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지. 상방이 정상화되면 수입이 두 배로 늘어나게 될 테니까.’

그리고 지금 자신이 화오염장에서 일을 잘 처리하면 이런 수입은 비교도 할 수 없는 수준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소금을 앞세워 거의 대부분의 지역에 수월하게 진출할 수 있게 될 것이고 말이다.

다시 말하자면, 이제 적가상방은 대상방으로 올라갈 수 있는 토대를 만들 수 있다는 것과 같았다. 소금과 호초를 손에 쥐고 있는데 대상방으로 못 올라가기도 힘들 것이다.

‘그러려면 여기하고 일이 잘 처리되어야 한다는 말이지.’

풍백은 다시 서류로 시선을 돌렸다.

지금 풍백의 손에 쥐여진 서류는 화오염장으로 오면서 잠시 암향거에 들러 받아 온 동해상방에 대한 자료였다.

마차를 타고 이동하는 사이, 풍백은 꽤 여러 가지 준비를 했다. 동해상방에 대한 자료는 그가 준비한 것들 중 하나였을 뿐이고, 심지어 암시장에 가서 몇 가지 물건을 구입하기까지 했다.

‘기왕이면 좋게 넘어갔으면 싶은데…… 동해상방에 대해 읽으면 읽을수록 별로 좋게 끝날 것 같지 않단 말이야.’

풍백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 문약란이 창밖으로 멀리 보이는 것을 보고 탄성을 지르듯이 말했다.

“아…… 바다다…….”

그 말에 풍백이 문약란을 바라보며 물었다.

“광주에서 살면 바다는 많이 봤을 텐데?”

“……아뇨, 못 봤었어요.”

문약란은 청해상방을 탈출하기 전까지 내원에서 갇히듯이 살았기에 제대로 바다를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청해상방을 탈출한 다음에는 도망치느라 바다를 볼 정신도 없었고 말이다.

멍하니 수평선을 바라보고 있는 문약란을 잠시 바라보던 풍백이 다시 시선을 서류로 돌리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상산현에 도착하면 바다 한번 보고 가도록 하지.”

“네? 그럴 필요는…….”

“바다에 왔으니 해산물도 한번 먹어 봐야 할 것 아냐. 딱히 너 때문에 가는 것 아니니까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말고.”

“……네, 알겠어요.”

면사로 가려진 문약란의 얼굴이 발그레 상기된 걸 풍백은 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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