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가상방 개망나니 83화
뿌득!
염평은 다시 한번 이를 갈고 천천히 검에 자신의 모든 진기를 쏟아붓기 시작했다.
이제 다음은 없었다.
그렇기에 만약을 대비하기 위해 내공을 배분할 이유도 없었다.
‘이 한 수에 모든 것을 건다!’
염평은 땅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말했듯이 허공에서는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그렇기에 어지간한 상황에서는 아무런 계획도 없이 이렇게 몸을 띄우는 것은 금기였다.
그럼에도 염평이 뛰어오른 이유는 하나였다. 어차피 그에게는 지금 펼칠 한 수를 제외하고는 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만약 풍백이 피해 낸다면 아무런 방법도 없다는 걸 알지만, 그렇다고 지금 펼치는 초식은 아직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지 못한 터라 다음을 떠올리며 펼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모든 것을 걸었다고 할 수 있었다.
‘저 멍청한 놈이 적어도 적풍백이 피하지 못할 정도라도 해낸다면…….’
쓸데없는 생각은 모두 비운 염평은 검파를 두 손으로 잡고 하늘 높이 치켜올리더니, 풍백을 향해 일도양단의 기세로 내리쳤다. 그러자 그의 검에서는 두 줄기의 예리한 기운이 튀어나와 풍백을 향해 쏘아졌다.
절정고수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검기(劍氣)였다.
‘서…… 성공이다!’
너무 막대한 진기를 쥐어짜는 바람에 정신마저 아찔해졌던 염평은, 풍백을 향해 쏘아지는 두 줄기 검기를 보고 희열이 가득한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설마 이렇게 완벽하게 초식을 펼칠 수 있을 거라 스스로도 예상하지 못했었다.
두 줄기의 검기에 담긴 힘은 막강했다. 검기 하나에만 이전에 펼친 초식에 해당하는 힘이 담겨 있을 정도였다.
심각하게 얼굴이 굳어진 풍백은 현란하게 수장을 움직이며 염평의 검기를 받아 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염평에게는 다행스러운 결과였다.
뒤에서 몰래 기회를 엿보고 있던 마적삼은 풍백이 곧 검기와 부딪칠 상황이 되자, 미리 준비하고 있던 탈명살조의 펼쳤다.
“죽어라!”
마적삼의 탈명살조는 비록 벽공장의 형태이기는 하지만 풍백의 훤히 드러난 등판을 향해 빠르게 날아갔다.
그걸 보며 마적삼은 확신했다.
‘절대 피할 수 없다!’
만약 염평의 태산십삼검을 피한다면 자신의 탈명살조에 걸려 검기 쪽으로 밀려날 것이었고, 그렇다고 탈명살조를 먼저 처리하려다가는 태산십삼검으로 만들어 낸 검기를 맨몸으로 받아 낼 판국이었다.
이렇게 두 사람이 풍백의 죽음을 확인하고 있을 때, 서서히 풍백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처음 한 걸음.
이전에 펼쳤던 난화보와 달랐다. 단 한 걸음이었지만 풍백이 발걸음을 내딛는 순간, 그의 신형이 마치 허공에 두둥실 뜬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풍백이 허공에 떴다는 말은 아니었다. 그저 그렇게 느껴졌다는 것일 뿐.
그리고 그런 풍백을 향해 두 줄기의 검기와 마적삼의 탈명살조가 날아들었다.
풍백의 몸은 마치 떠다니는 구름처럼 움직였다. 그리고 두 줄기의 검기와 탈명살조는 그런 구름을 밀어내는 바람이었다.
하늘거리며 움직이는 풍백의 신형은 믿기지 않을 정도로 허망하게 검기와 탈명살조를 피해 냈다. 정말 검기와 탈명살조에 밀린 것처럼 신비로운 움직임이었다.
황룡사 삼대절기 중 하나인 부운연화미리보(浮雲蓮花迷離步)였다.
불문의 무공에는 사람들의 입으로 전해지는 전설적인 보법이 많이 있다. 그리고 그중 하나가 바로 이 부운연화미리보였다.
부운연화미리보는 단순히 보법이지만, 실제로 황룡사 최대 절기를 하나 손꼽으라면 가장 많은 사람이 선택하는 것이 바로 이 보법이었다.
불문의 보법 중에서 현묘함으로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며, 이 보법을 익히면 수백만의 군사가 격돌하는 가운데로 들어가도 터럭도 다치지 않는다는 전설적인 소문을 가지고 있을 정도였다.
실제로 과거 적웅은 이 보법을 사용하여 무인 수십 명 사이를 헤집고 다니며 싸웠던 일도 있었다. 전설처럼 터럭도 다치지 않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수십 명이 병장기를 들고 있는 사이를 돌아다니면서도 미약한 부상만 입었던 걸 보면 보법의 신묘함은 의심할 여지가 없으리라.
그런 부운연화미리보의 초현에 염평과 마적삼은 입을 쩍 벌리고 말았다. 그들의 눈에는 마치 풍백이 자신들의 공세에 둥실거리며 떠다닌 걸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 두 사람에게 풍백의 수장이 펼쳐졌다.
마적삼은 언제 날아왔는지도 모를 벽공장에 가슴이 움푹 패이며 쓰러졌다. 겉으로는 큰 상처가 없는 것처럼 보여도 아마 부검을 해 본다면 심장이 터진 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염평은 어느새 다가온 풍백에게 보리패엽장 특유의 다라수 나뭇잎 모양을 만들어 낸 쌍장으로 가슴을 얻어맞았다.
쩌억!
쿠당탕!
쌍장을 맞자마자 거의 오 장을 부웅 날아간 염평이 바닥에 처박혔다.
너무나 극심한 통증에 몸을 벌벌 떨고 있는 염평의 앞에 사뿐히 내려선 풍백이 고요한 모습으로 곧게 서서 그를 내려다봤다.
“미…… 미친…… 쿠엑!”
입을 벌리자마자 염평의 입에서는 어린아이 머리 크기의 선지피를 쏟아 냈다.
이미 내상을 입은 상태에서 막대한 진기를 머금은 풍백의 수장에 다시 한번 염평의 내장은 치명적인 손상을 입은 상태였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대라신선이 온다고 해도 살려 낼 수 없을 정도였다.
염평은 이제야 알았다.
풍백이 어떤 사람인지, 그가 펼친 무공이 무엇이었는지 말이다.
이걸 알아보지 못하기도 힘들었다. 강호에 전설처럼 구전(口傳)되어 와서 그 특징이 너무나 잘 알려진 무공이 바로 황룡사의 무공이었으니까.
‘내가 멍청했어…….’
애초에 풍백이 새로운 무공을 꺼내 들었을 때 도망을 쳤어야 했다. 과연 풍백이 자신보다 경공이 빠를지 알 수 없는 일이기는 하지만, 적어도 사람이 많은 항주에 들어섰다면 무공을 숨기려고 했던 풍백이니 추적을 포기할 가능성도 있는 것 아니겠는가.
이렇게 후회를 하고 있는 염평의 앞으로 풍백이 다가왔다. 풍백을 잠시 바라보던 염평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황…… 룡사의 진전을 이…… 어받은 건가?”
“거창하게 황룡사 진전을 이어받았다고 하기에는 조금 애매한 것 같소만.”
“왜…… 왜…… 무공을 숨…… 기는 건가?”
정말 궁금했다.
만약 풍백이 무공을 숨기지 않고 이 정도 고수라는 걸 알았다면, 아예 습격을 포기하거나 아니면 지금처럼 혼자 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풍백은 그런 염평을 보고 피식 웃었다.
“이제 곧 숨을 거둘 상황에서 그게 궁금한 거요? 차라리 다른 유언을 남기는 건 어떻소?”
“…….”
“딱히 이유는 없소. 단지 지금처럼 내가 무공을 선보일 그런 일이 없었을 뿐.”
사실대로 얘기를 해 줄 필요는 없었다.
세상의 모든 무공을 풍백이 알고 있는 것도 아니고, 정말 기괴망측(奇怪罔測)한 사술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러니 괜히 쓸데없는 얘기를 해서 찜찜한 구석을 만들고 싶지도 않았다.
“그런…… 가…….”
그럼에도 염평은 쉽게 납득을 했다. 어쩌면 정말 풍백이 왜 무공을 숨기고 있었던 것인지가 궁금했던 건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차츰 숨이 가늘게 변하고 염평의 눈동자에 초점이 사라지더니 이내 숨을 거뒀다.
염평이 죽은 걸 확인한 풍백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한쪽에 뒹굴고 있는 염평의 검을 찾았다. 염평의 검을 집어 든 풍백이 마적삼의 시체로 다가가 그의 심장에 검을 박아 넣었다.
이어서 이번에는 다시 주변을 두리번거려 마적삼의 분수도를 찾아내고선 염평의 머리통에 꽂았다.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주변에 찍힌 싸움의 흔적을 조작하기 시작했다. 풍백이 만드는 싸움의 흔적은 당연히 염평과 마적삼의 싸움이었고, 자신의 흔적은 지우는 것이다.
이렇게 흔적과 증거를 지우고 조작하는 일은 아주 익숙했다. 과거에 군부에서 배운 다음에 꽤 쏠쏠하게 써먹었던 잔재주였다.
사실 아예 작정하고 모든 증거를 숨길 생각이었다면 싸울 때부터 미리 가정을 했어야 했다. 당장 마적삼을 부검하기만 하더라도 사인이 장력에 의한 심장 파열로 나올 것이다.
‘이래서 증거 조작은 암살이 편해.’
깔끔하게 암살을 끝내면 암살자의 증거는 거의 없는 상태가 된다. 이 상태에서 증거를 조작하는 건 식은 죽 먹는 것처럼 쉬운 일이다.
간혹 암살로 인해 죽었다는 걸 들키지 않기 위해 몇몇 사람을 추가로 더 죽이고, 그들이 서로 싸우다 죽었다는 걸로 만들기 위해 손이 제법 많이 가는 경우도 있기는 했다.
아무튼 쉽게 증거 조작이 들킬 수 있음에도 이렇게 손을 쓰는 건, 어차피 관부에서 이들의 시체를 입수한다고 하더라도 부검까지 하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귀찮기 때문이다.
보아하니 이들의 연고자는 나오지 않을 것이고, 그렇다면 굳이 귀찮게 수사를 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그냥 강호 무인이 서로 모종의 일로 싸우다가 양패구상(兩敗俱傷)을 당했다고 하면 끝나는 일이니까.
적당히 증거 조작을 끝마친 풍백이 한쪽에 벗어 놨던 젖은 겉옷을 걸치기 시작했다.
이제 서문세가로 돌아가도 될 것 같았다.
‘아! 그 전에 젖은 옷을 새로 맞춰야겠지.’
시간이 많이 늦었다. 포목점이 문을 닫기 전에 서둘러야 될 것 같았다.
이렇게 풍백이 떠난 자리에는 염평과 마적삼의 시체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 * *
하오문 광주 지부 지부장은 꽤 기분이 좋았다.
‘요즘 일들이 술술 잘 풀리는 게 아주 끝내주네. 계속 이런 식으로 실적을 올리면 충분히 본문으로 들어갈 수도 있겠어.’
흐뭇하게 웃는 지부장은 최근 비싸게 팔아먹었던 정보들이 떠올랐다.
재미있는 건 비싸게 팔아먹은 정보가 대부분 청해상방과 적가상방에 관련된 정보였다는 점이다.
자신이 정보를 팔아먹은 덕분에 청해상방이 적가상방에 칼을 겨누고, 지금 실시간으로 말라 죽어 가는 중이라는 건 안중에도 없었다.
세상은 약육강식(弱肉强食)이라는 걸 어렸을 적 뒷골목을 전전하면서부터 뼈저리게 배웠던 지부장이다. 그러니 무너질 상방은 굳이 자신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언제든지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그러니 죄책감은 발톱의 떼만큼도 없었다. 오히려 또 이런 쏠쏠한 이익을 남길 수 있는 정보를 찾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이런 지부장에게 하오문도 하나가 슬그머니 다가와 물었다.
“지부장님, 제가 재미있는 소식 하나를 물어 왔습니다.”
“어떤 소식? 참고로 요즘 이 지부장님이 제법 배가 따땃해서 어지간한 소식 가지고는 방귀도 뀌지 않는다.”
“진짜 재미있는 소식이라니까요.”
“뭔데?”
“요즘 광주에 못 보던 놈들 몇 놈이 들어와서 여기저기 쑤시고 다니더라고요.”
“못 보던 놈?”
광주는 광동성의 성도였다. 그러니 오죽 많은 사람이 방문을 하는지 세어 볼 의욕도 나지 않을 정도다. 그런데 굳이 몇 놈이 눈에 띄었다니, 벌써부터 관심이 사라지려고 했다.
그런 지부장의 마음을 알았는지 하오문도가 서둘러 말을 이었다.
“그런데 이놈들이 백련문에서 나온 놈들이었던 겁니다.”
“백련…… 문? 백련문이 어디지?”
광동성만 떠올리고 있다 보니 백련문이 전혀 떠오르지 않는 지부장이었다. 그런 지부장의 모습에 하오문도가 서둘러 첨언했다.
“강서성 응담현에 있다는 백련문 말입니다.”
“……어? 강서성 절반은 지배하고 있는 그 백련문?”
“맞습니다! 바로 거깁니다!”
백련문이라는 말에 지부장이 느긋하게 누워 있던 몸을 황급히 일으켜 세웠다.
정사지간(正邪之間)으로 분류되는 백련문은 강서성에서 세 손가락에 들어가는 거대 문파였다. 비록 역사는 짧지만, 그들이 가진 힘과 적으로 구분되면 가차 없이 휘두르는 무력을 생각하면 아무런 흠도 되지 않았다.
“아니, 백련문이 왜 광주에 와서 돌아다녀?”
“저도 그게 이상해서 바쁘게 돌아다니며 알아봤다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뭐 때문에 광주에 왔다는 거야?”
그 물음에 하오문도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청해상방에 대해서 조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아니, 그놈들이 왜 상방을 조사해? 그것도 광주에 있는 상방을?”
“저도 이유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조사하는 걸 보면, 청해상방의 구조나 자금력 같은 걸 알아보는 게 아니었습니다.”
“그러면?”
“청해상방주 가족에 대해서 조사하고 다니더라고요. 이거…… 잘하면 우리 한 번 더 정보를 팔아먹을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지부장 역시 하오문도의 얘기를 듣자마자 슬슬 코에 돈 냄새가 맡아지고 있었다.
‘음…… 비싸게 팔아먹기에는 애매한 부분이 많아. 목적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그래도 정보를 통으로 넘기면 제법 짭짤할 것 같은데…….’
대충 계산을 마친 지부장이 하오문도에게 명령을 내렸다.
“좋아, 그러면 가서 그놈들에게 거래에 관심이 있는지 한번 떠봐.”
“관심을 보이면요?”
“뭘 물어봐? 당연히 여기로 데리고 와야지.”
“흐흐흐! 알겠습니다!”
하오문도는 후다닥 달려 나갔다. 아마 이번 일이 제대로 이뤄지면 지부장이 성과금(成果金)을 내려 줄 것이기에 달려 나가는 하오문도는 희희낙락거리고 있었다.
지부장 역시 마찬가지였다.
‘좋아, 또 한번 비싸게 팔아먹을 수 있겠어! 정보 하나를 가지고 이거 얼마나 우려먹는 건지 아주 좋아 죽겠네! 흐흐흐!’
말했듯이 자신이 팔아먹은 정보로 인해 벌어질 여파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는 지부장이었다.
그는 돈만 벌 수 있으면 뭐든지 팔아먹을 각오가 된 참된 하오문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