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가상방 개망나니 77화
성황각에 도착한 풍백 일행은 비싸고 맛있다는 음식을 왕창 주문했다. 왕삼의 입이 귀에 걸린 건 당연한 얘기였고, 고우길조차 눈을 반짝이며 바삐 젓가락을 놀렸다.
하지만 문약란은 그런 분위기에서 한 발짝 떨어져 있었다.
풍백은 술을 사서 왕삼과 고우길에게 마시라고 건네줬다.
정석대로 한다면, 호위무사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고우길은 술을 마시면 안 된다. 그러나 지금 고우길은 그런 것은 손톱만큼도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다.
애초에 고우길이 풍백을 어떻게 지키겠는가?
풍백이 고우길보다 무공이 훨씬 강하다는 것도 있지만, 지금까지 풍백을 지켜보며 그가 얼마나 철두철미한 사람인지도 알고 있는 그였다.
그때부터는 그저 자신이 풍백의 무공을 숨기기 위한 방패막이라는 걸 인정하고 딱히 호위에 큰 신경을 쏟지 않고 있었다.
비싼 술병을 받아 든 두 사람은 서로 술잔을 나누며 신기한 경험을 나누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
이러는 사이 풍백은 문약란에게 조용히 물었다.
“기분이 별로 좋지 않은 것 같네.”
“죄송해요. 이렇게 비싼 음식을 시켜 주셨는데…….”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했는데도 여전히 걱정하고 있는 거야?”
주어가 빠진 말이었지만, 그녀는 풍백이 무슨 말을 한 건지 단번에 알아들었다.
“그게 아니고…….”
부인을 하려던 문약란은 지그시 바라보는 풍백의 시선에 고개를 푹 숙이고 말았다.
“의식하지 않으려고 하는데…… 쉽지 않네요.”
“쯧쯧…… 아무런 걱정도 할 필요가 없어. 어차피 적가상방이 무너질 일은 없으니까.”
“정말 그럴까요?”
뭔가 간절해 보이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문약란의 모습에 피식 웃은 풍백은 적가상방이 무너질 수 없는 이유에 대해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과 달리 현재 적가상방은 호초를 손에 쥐고 있는 이상 무너질 수 없다는 간단한 계산을 말이다.
설명이 거의 끝났을 때는 문약란의 표정이 많이 풀려 있었다. 그런 문약란을 보며 풍백이 마지막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적가상방이 무너질 수 없는 가장 결정적인 이유 하나가 더 있지.”
“그게 뭔데요?”
“내가 절대 그렇게 놔두지 않을 거라는 것.”
그 말에 문약란은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아마 풍백이 자신의 기분을 풀어 주기 위해 가벼운 농담을 한 거라 생각한 것 같았다.
하지만 이건 풍백의 진심이었다.
만약 적가상방이 정말 청해상방 때문에 무너질 것 같다면, 그냥 어느 날 밤에 은밀히 백건상방으로 들어가 모든 사람들을 영원히 일어날 수 없도록 만들 것이다. 그다음은 청해상방으로 가서 나머지를 처리하고 말이다.
과거 부대에 있을 때, 가장 많이 했던 일 중 하나가 바로 암살이었다.
자신보다 강한 사람도 암살을 하고 다녔던 풍백이었다. 그런 풍백에게 백건상방에 있는 사람을 하룻밤 사이에 암살하는 것은 가벼운 산보를 하는 것과 같은 수준이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상방이 강호의 무인을, 특히 사파의 무인을 두려워하는 이유다.
수틀리면 언제 몰려와서 자신들을 죽이고 모든 것을 빼앗아 갈지 모르기 때문에 말이다.
물론 풍백은 당장 그럴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이번 청해상방 건은 예상외이기는 했어도, 나머지는 그의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는 중이니까.
풍백에게 중요한 것은 정의도, 대의도 아니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아버지인 적호경과 숙부인 진덕양, 적가상방이었다.
앞으로 어떻게 달라질지는 모른다. 그저 지금 기준으로 적호경과 진덕양, 적가상방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피를 뒤집어쓰더라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을 자신이 있을 뿐이다.
이런 풍백의 마음을 모르는 문약란은 그저 자신에게 신경을 써 주는 풍백의 모습에 기분이 좋아져서 미소를 짓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도련…… 적 공자님은 나를 어떻게 생각하실까?’
문약란은 서문세령을 떠올렸다. 그녀가 보더라도 서문세령은 너무 아름다웠다. 남자라면 눈을 떼지 못할 정도로 말이다.
물론 풍백은 서문세령에게 딱히 관심을 주지는 않았다. 그걸 떠올리면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지만, 정작 자신을 볼 때 역시 여자로 보는 것 같지 않다는 걸 생각하면 우울해졌다.
‘전에는 신분에 대해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는데…….’
따지고 보면 지금 문약란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청해상방의 영애라는 위치는 청해상방을 나오면서 버렸다. 청해상방주 문태성이 자신의 아버지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된 이후로 스스로를 청해상방의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적도 없었고 말이다.
그런데 서문세령을 본 이후로 풍백의 옆에 있기에는 스스로가 너무 초라하게 느껴지고는 했다.
그렇다고 문약란에게 이 상황을 바꿀 어떤 것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스스로 단단히 다짐을 할 뿐이다.
‘그래! 돈이나 신분이 무슨 상관이겠어? 적 공자님도 이렇게 나를 신경 써 주시는데. 어떻게든 적 공자님의 마음을 쟁취하면 되는 거야.’
다시 한번 굳은 결심을 한 문약란은 갑자기 배가 고파 오기 시작했다. 풍백의 설명을 듣고 마음에 짐을 덜었기 때문인 것 같았다.
문약란은 이내 젓가락을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다.
휘황찬란한 식사를 마치고 성황각을 나온 풍백이 문득 걸음을 멈추며 말했다.
“나는 할 일이 있어서 다른 곳에 좀 들러야 할 것 같다. 그러니 너희들은 먼저 들어가도록 해.”
뜬금없는 풍백의 말에 세 사람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아니, 이 늦은 시간에 대체 어디를 가시려고요?”
“이제 해시(亥時, 21~23시)경인데 늦기는 뭐가 늦은 시간이란 거냐.”
“이 정도면 충분히 늦은 시간이죠. 빨리 자는 사람들은 벌써 잠자리에 들어갈 시간입니다.”
“어디서 씨알도 먹히지 않을 소리를 하고 있어? 헛소리하지 말고 어서 들어가.”
“설마…… 술이라도 드시려고 그러는 건 아니죠?”
왕삼은 진심이라는 것처럼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풍백은 그에 대한 대답 대신 한심하다는 눈으로 왕삼을 바라봤다.
“내가 굳이 술을 먹으려고 하는 거였으면 굳이 너희들을 데리고 나왔겠냐? 나 혼자 나왔지. 그리고 지금까지 지켜봤으면 내가 요즘 술 안 먹는다는 것도 알잖아.”
“그건 그렇지만…… 갑자기 어디를 가신다니 그렇죠.”
“신경 꺼라. 시커먼 남자가 관심 갖는 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으니까.”
말을 마친 풍백이 고우길을 바라봤다.
“고 무사는 두 사람을 데리고 안전하게 서문세가로 돌아가시오.”
“알겠습니다.”
고우길은 풍백의 말에 의문을 갖지도, 그렇다고 굳이 따라다니며 수행하겠다고 하지도 않았다. 이제 풍백은 보호해야 할 대상이 아니다. 섬겨야 할 대상이었다.
풍백이 이렇게 나오자 왕삼도 더 이상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물러섰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마지막까지 한마디 하는 걸 주저하지 않았다.
“제가 끝까지 안 자고 기다릴 겁니다. 만약 술 냄새 나면 나중에 총관 어르신에게 다 이를 거예요.”
“하여간 의심만 많아 가지고.”
“이게 다 도련님 모시면서 생긴 거라는 생각은 왜 못하시는 겁니까?”
“알았으니까, 좀 닥치고 가시지?”
“갑니다, 가!”
왕삼이 먼저 발걸음을 옮겼다. 문약란은 조금 주저하는 듯했지만, 뭐라 말하지는 못하고 이내 고개만 꾸벅 숙이고는 왕삼을 따라 서문세가로 향했다. 마지막으로 고우길이 그런 두 사람의 뒤에서 조용히 따라갔다.
혼자 남은 풍백은 주위를 잠시 둘러보다가 시선이 서호에 닿더니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서호는 항주의 가장 대표적인 관광지라고 할 수 있었다.
일반적으로 관광을 하러 온 사람들은 서호를 낮에 구경하러 나온다.
서호의 삼면을 둘러싸고 있는 빼어난 구릉과 산맥, 아름다운 정자와 누각, 사원과 탑 등이 주위의 자연과 어우러지며 아름다움을 뽐내기에 낮에 볼 것이 많다.
그렇다고 밤에는 사람이 적느냐?
그건 아니었다.
밤이 되면 어두운 호수에 연인들이 배를 띄우거나, 풍류를 즐기려는 문인이 가기(歌妓)를 태우고 술을 마시기도 하고, 홍루의 기생을 대동하고 배를 타는 사람도 있었다.
이렇게 사람들이 탄 배는 당연히 호롱불을 하나 이상 매달고 있는데, 성황각 같은 곳에서 밤에 서호를 바라보면 호롱불을 달고 있는 배가 야경을 신비롭게 만들어 준다.
풍백은 그렇게 사람이 몰리는 서호를 향해 휘적거리는 여유로운 걸음으로 걸어갔다.
사람들을 헤치며 포구(浦口)에 도착한 풍백은 정박해 있는 배들을 둘러보다가 거의 열 명이 탈 수 있을 법한 중형 크기의 배를 발견하고 사공에게 물었다.
“배를 빌리는 데 얼마나 필요하오?”
“철전 서른 개입니다.”
가격이 꽤 비쌌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아직 윤마철에게 빼앗아 온 전낭에는 은자가 두둑이 들어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것도 오늘 다 탕진할 예정이었다. 바로 지금 말이다.
“그럼 당신의 배를 그냥 내가 구입하려면 얼마를 주면 되는 거요?”
이게 무슨 소리가 싶은 사공이 풍백을 바라봤다가 이내 눈살을 찌푸렸다.
“이 배는 파는 배가 아니오.”
풍백은 그런 사공에게 윤마철의 전낭을 통째로 툭 던졌다.
엉겁결에 전낭을 받은 사공이 당장 욕이라도 하려는 것처럼 얼굴을 구겼다. 하지만 곧 전낭이 생각 이상으로 묵직하다는 걸 알아채고 슬그머니 전낭을 벌려 봤다.
“헐…….”
생각 이상으로 대단한 금액이 들어 있는 걸 확인한 사공의 눈이 커다랗게 변했다. 이 정도 금액이라면 다 낡은 지금 배를 버리고 새로 배를 마련하고도 충분히 많은 돈이 남을 그런 금액이었다.
가늘게 떨리는 손으로 전낭을 다시 여민 사공이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물었다.
“아, 아니 대체 왜 내 배를 사려는 겁니까?”
퉁명스럽던 사공의 말투가 다시 존칭으로 바뀌었다. 그런 사공의 물음에 풍백은 슬그머니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게 중요하오?”
“그건 아닙니다만…… 이 정도 금액이라면 차라리 새로 배를 산다고 하더라도 남는 금액이라는 걸 모르시는 것 같아서…….”
생각보다 사공은 대단히 양심적인 사람이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좋다고 냉큼 받아서 도망갔을 텐데 말이다.
그런 사공의 궁금함을 풍백은 쉽게 풀어 줬다.
“나는 지금 당장 배가 필요하고, 적당한 배를 당신이 가지고 있으며, 나는 당장 당신 손에 있는 돈이 아쉽지 않으니까?”
어차피 자신의 돈도 아니었다. 아쉬워도 윤마철이 아쉬울 것이다.
“그래도…… 이건 너무 당신이 손해를 보는 것 같은데…….”
“싫으면 그냥 전낭을 넘기시오. 다른 사람과 얘기를 해 보면 되니까.”
그 말에 사공이 전낭을 꽉 움켜쥐었다.
“아니, 싫다는 것이 아니라…… 어험험!”
“그러면 거래를 하시겠소?”
“합시다, 거래!”
냉큼 대답한 사공이 배에서 내렸고, 풍백이 배에 올랐다. 그러자 사공이 물었다.
“그런데 배는 몰 줄 아시는 겁니까?”
“오랜만이기는 하지만…….”
노(櫓)를 쥔 풍백이 가볍게 휘젓자 배가 스르륵 움직이며 서호를 가르고 나아갔다. 너무 간단하게 배를 모는 솜씨가 사공보다 더 익숙한 것 같았다.
잠시 멀어지는 배를 보던 사공은 이내 전낭을 얼른 품에 집어넣고 집을 향해 달려갔다. 아마도 사공은 오늘 운이 좋았던 얘기를 술자리에서 제법 오랫동안 주워섬길 것 같았다.
서호로 배를 몰고 나온 풍백은 적당히 사람들이 없는 곳으로 가서 멈췄다.
그리고 노를 놓고 배에 서서 가만히 하늘을 보고 서 있었다.
하늘에는 보름달이 떠 있었다.
그렇기 때문인지 하늘에 떠 있는 보름달을 바라보는 풍백의 모습을 보면 딱히 유생처럼 보이지는 않아도 당장 소동파(蘇東坡)가 자주 읊었다는 시를 읊기 시작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이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멀리서 배 한 척이 천천히 풍백이 있는 곳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 배에는 경장을 입은 중년 사내가 서 있었고, 뒤에는 늙은 사공이 열심히 노를 젓고 있었다. 중년 사내의 허리에는 꽤 고풍스럽게 생긴 검 한 자루가 매달려 있었다.
풍백은 배가 다가오고 있는데도 딱히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배가 대략 풍백이 탄 배와 오 장가량의 거리를 두고 멈췄다. 그러자 중년 사내가 작은 나무 널판을 꺼내더니 풍백이 타고 있는 배 사이에 두세 개를 던졌다.
그러곤 배를 박차고 뛰어오른 중년 사내는 자신이 던진 나무 널판을 징검다리 밟듯이 가볍게 밟으며 호수를 가로질러 풍백의 배에 올라탔다.
절정고수가 선보일 수 있다는 초상비(草上飛) 수준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충분히 대단한 경공이었다. 이 정도 경공을 보일 수 있는 일류 고수는 거의 없었다.
풍백의 배에 올라탄 중년 사내가 늙은 사공에게 손을 내저었다. 그러자 늙은 사공은 공손히 인사를 하고는 노를 저어 다시 돌아갔다.
중년 사내가 배에 오르는 사이, 하늘을 올려다보던 풍백은 어느새 시선을 돌려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누구시오?”
풍백의 물음에 중년 사내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포권을 했다.
“염평이라고 하네.”
“딱히 당신 이름을 물어본 것은 아니었는데…… 그보다 왜 내 배에 올랐는지 묻고 있는 것이오.”
생각보다 담담한 풍백의 목소리에 염평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예상보다 침착하군. 조금 더 놀랄 거라고 생각했는데.”
“호수 중앙에서 이렇게 당신이 배에 올라탈 거라고 생각은 못하고 있었소.”
풍백의 말에 염평은 살짝 미소를 짓다가 문득 고개를 갸웃거렸다.
말이 조금 이상했다. 마치 누군가 찾아올 것은 알고 있었다는 말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그게 무슨 말이지? 내가 따라올 거라고 예상했다는 건가?”
“당연한 것 아니오? 계속 나를 따라다니고 있었지 않소.”
그 말에 염평이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맙소사, 설마 그게 미행이었던 거요?”
풍백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