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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가상방 개망나니-76화 (76/313)

적가상방 개망나니 76화

당한수와 당세기가 떠난 이후로도 풍백은 오로지 무공 수련에만 매진했다.

다만 아무래도 여러 사람들의 눈에 띌 수 있기에 초식을 수련하지는 못했고, 거의 대부분 방에서 내공 수련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슬슬 저녁 식사를 해야 할 시간이 되어서야 방에서 나온 풍백은 마당에 있는 의자에 앉아 있는 문약란을 볼 수 있었다.

문약란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멍하니 노을 지는 하늘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고 보니 저러고 있는 걸 꽤 많이 봤던 것 같은데?’

언제 봤었는지 기억을 더듬는 풍백의 뒤로 왕삼이 슬그머니 다가왔다.

“걱정되십니까?”

“……깜짝 놀랄 뻔했다.”

이미 기척을 느끼기는 했었다. 하지만 풍백의 말에도 왕삼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별로 놀라지도 않았으면 깜짝 놀라기는 뭘 깜짝 놀랍니까? 그리고 놀랐다면, 무슨 죄 지은 거라도 있는 겁니까?”

“누가 죄를 지었다고 했냐?”

“죄 짓지도 않았으면 놀랄 것도 없지요.”

“하하…… 그런 개 같은 논리는 대체 어디서 주워들은 거냐?”

“저잣거리에서 사람들이 다 그렇게 말하던데요.”

“넌 저잣거리 좀 작작 나가야겠다. 아무튼 적당히 기척 좀 내고 돌아다녀라. 그러다가 진짜 깜짝 놀라서 인중을 주먹으로 때려 버리면 너만 손해야.”

“……그거 다음에는 주먹으로 때리겠다고 예고하시는 거죠?”

“눈치챘으면 앞으로 조심 좀 해.”

“아무튼 걱정되시냐고요.”

재차 묻는 왕삼의 말에 풍백은 한쪽 눈썹을 슬쩍 올리며 되물었다.

“무슨 걱정?”

“뭐가 무슨 걱정입니까? 당연히 저기 앉아 있는 소란이죠.”

“내가 소란이를 왜 걱정하는데?”

“제가 걱정되어서 그렇지요.”

이건 또 무슨 소린가 싶었다.

평소에 딱히 문약란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왕삼이다. 그건 왕삼이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문약란이 사실은 청해상방 사람이라는 것 때문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문약란이 걱정된다니,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지 알 수 없었다.

“네가 소란이를 걱정한다고? 왜? 이제 수월이는 옆으로 치워 두고 소란이로 갈아타려고?”

“그건 또 무슨 근본도 없는 소립니까? 제가 수월이를 왜 옆으로 치우겠냐고요!”

“흐음…… 이제는 딱히 부정도 안 하네?”

“……사람을 두고 치우네 마네 얘기하는 게 좋지 않다는 말이지요.”

“쓸데없는 소리는 집어치우고, 네가 왜 소란이를 걱정하는지나 설명하시지?”

그 말에 왕삼이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도련님도 너무하시네요. 소란이가 점점 저러고 있는 시간이 길어지고 있다는 것도 모르셨나 봐요.”

“당연히 몰랐지. 나 바쁜 사람이야. 왜 저러고 있는지 자세히 설명이라도 해 봐. 왜? 마음에 드는 남자라도 나타난 거야?”

“차라리 그런 이유라면 다행이겠네요.”

“그럼 이유가 뭔데?”

“솔직히 이유가 하나밖에 더 있습니까?”

“뭐? 또 청해상방?”

출발하기 전에 충분히 알아듣도록 얘기를 했다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슬슬 약발이 떨어져 가는 모양이었다.

이해는 됐다.

벌써 적가상방을 떠난 지 한 달이 지나고 있었다. 그사이 적가상방에서는 극적으로 위기를 타파하고 있다는 얘기는 들려오지 않고 있었다.

사실 풍백이 생각해도 방법이 없었다.

돈으로 밀어붙이는 이런 싸움에 무슨 다른 방법이 있겠는가? 그렇다고 적가상방이 끝내주는 인맥이 있거나 엄청나게 강한 무력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그러니 적가상방이 위기를 헤쳐 나갈 방법은 근본적으로 없었다.

‘뭐…… 서문세가에서 적극적으로 나서 준다면 상황은 조금 달라질 수 있기는 하겠지. 단지 서문세가도 지금은 그럴 여력이 없을 뿐이고.’

서문세가는 영파상방과 분쟁 중이다. 이런 상황에 거대 상방인 청해상방과 또 다른 싸움을 만들 여력은 부족할 거라고 단언할 수 있었다.

현재 적가상방은 상방으로서 기능을 거의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기능을 못하는 것과 상방이 망할 것 같은 것과는 다른 얘기다.

적가상방은 기존 거래처를 비롯하여 점포마저도 거의 운영을 못하는 수준이기는 하나, 그에 비해 금전적으로 대단히 힘든 상태는 아니었다.

판매는 타의에 의해서 못하는 상태였지만, 그에 비해 값비싼 호초는 경쟁 상대가 없어서 순조롭게 판매를 하는 중이었다.

이 말은 적가상방이 호초에서 나오는 수입밖에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반대로 말하면 쓸데없이 제 살 깎아 먹기 수준의 판매를 하지 않아 쓸데없는 지출을 줄인 상태라는 말과 호초에서 나오는 수입이 많기에 상방 유지에는 문제가 없다는 말이기도 했다.

만약 호초가 없는 상태라면 적가상방은 예전에 무너졌을 것이다. 다시 한번 각 상방마다 지역에 독점적인 공급 물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었다.

문약란은 이런 자세한 상황까지는 짐작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적가상방이 힘들어서 무너지는 것은 아닌가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왕삼이 풍백에게 말을 툭 던졌다.

“도련님이 어떻게 좀 해 주시죠?”

“내가? 내가 뭘 어떻게 해?”

“원래 이런 경우에는 지위가 높은 사람이 부하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무언가 해 주는 것 아닙니까?”

“……경극 좀 그만 봐라. 그리고 심란한 건 내가 더 심해야 되는 것 아니냐?”

풍백의 말에 왕삼이 쓰윽 시선을 피했다.

사실 왕삼이 지금은 이렇게 말을 했어도 이번 여행에서는 왕삼 역시 대체로 말이 없었다.

심지어 그렇게 시시때때로 입에 올리던 항주에 다시 왔는데, 풍백이 거처에만 있어도 관광을 나가자는 얘기를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아무래도 적가상방이 이 지경이니 아무리 왕삼이라고 하더라도 알아서 조심하는 것이리라.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관광을 가는 것은 조금 그렇고, 이 녀석 말대로 오늘 하루만큼은 나가서 맛있는 거라도 먹을까?’

마음을 정한 풍백이 문약란을 불렀다.

“소란아.”

“네, 네?”

넋을 놓고 있던 문약란은 풍백의 부름에 화들짝 놀라며 일어났다.

설마 넋을 놓고 있다가 식사를 가져와야 할 시간마저 지난 것은 아닌지 놀란 문약란이 허둥지둥 밖으로 달려 나가려고 했다.

“어딜 가?”

“시, 식사를…….”

“아직 식사 시간 아니야. 그리고 오늘은 모두 함께 나가서 식사할 예정이니까, 음식을 가지고 올 필요도 없어.”

그게 무슨 말이냐는 것처럼 문약란이 눈을 커다랗게 뜨며 물었다.

“외식이요?”

“생각해 보니 항주에 온 이후로 한 번도 서문세가를 나가 본 적이 없더라고. 그래서 오늘은 밖에서 맛있는 것 좀 먹고 오려고. 너희들 모두 다 데리고.”

“도련님, 싸랑해요!”

풍백의 말에 느닷없이 왕삼이 뒤에서 와락 끌어안았다. 정작 얘기를 들은 문약란은 가만히 있는데 말이다.

“짜증 난다, 좀 놔라.”

“사랑한다고요!”

“아! 말로 해서는 못 알아먹는구나? 진짜 인중 때려 버린다.”

“헉! 떨어졌습니다, 떨어졌다고요!”

풍백은 왕삼과 문약란, 그리고 호위무사이자 이제는 일검단악이라는 별호도 생긴 고우길과 함께 서문세가를 나섰다.

왕삼은 정말 오랜만에 서문세가를 나왔다는 해방감 때문인지 선두에서 먼저 걸어가고 있었다.

“어서 이쪽으로…… 그냥 제가 먼저 가서 자리를 잡아 놓을까요?”

환하게 웃는 얼굴로 묻는 왕삼을 보며 풍백이 되물었다.

“우리가 어디로 가는 줄 알고?”

“반점으로 가실 것 아니었나요?”

“그러니까 반점 어디?”

“저 앞에 있는 반점이 맛이 좋다고 하던데, 그쪽에 자리를 잡으려고…….”

“그쪽으로 안갈 거야.”

“네? 그럼 어디로 가시려고요?”

“성황각.”

“지, 진짜요?”

왕삼이 깜짝 놀라더니 이내 얼굴이 환희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이전에는 서문표가 습격을 받았던 일 때문에 제대로 식사를 하지도 못하고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적가상방에 돌아온 이후로도 오랫동안 아쉬움을 삼켰어야 했는데, 다시 성황각으로 간다니 기쁜 표정을 감출 수가 없었다.

하지만 문득 떠오른 생각에 왕삼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거기 비싸지 않습니까?”

“비싸지.”

“어…… 지금 상방 사정도 좋지 않은데 굳이 그렇게 비싼 곳까지 갈 필요는…….”

풍백은 솔직히 왕삼이 이런 얘기를 할 줄 몰랐다. 당연히 비싼 곳으로 간다니 좋아서 뛰어다닐 거라고만 생각했던 것이다.

“이야아! 이게 무슨 일이야? 네가 이제 그런 것도 신경 쓰는 거야?”

“그게 무슨 섭섭한 말씀이십니까? 저도 상방의 일꾼입니다. 당연히 상방 사정을 살펴야지요.”

“평소 네 행실을 생각하면 놀랄 수밖에 없잖아.”

“아무튼 굳이 그런 비싼 곳으로 갈 필요는 없으니 그냥 가까운 반점으로 가시지요?”

왕삼의 말에 풍백은 품에서 전낭 하나를 꺼냈다. 그런데 그 전낭은 풍백의 것이 아니었다.

“그게 누구 전낭입니까?”

“내 친구가 항주를 간다니까 굳이 이렇게 전낭을 통째로 주더라고. 고맙게도 말이지.”

예전에 포목점 윤마철을 두들겨 패며 챙겼던 전낭이었다. 굳은 피가 몇 방울 묻어 있기도 했는데, 화려한 문양 때문에 잘 보이지는 않았다.

“도련님 친구요? 그게 누군데요? 도련님 친구 없잖아요.”

“있어. 그러니까 닥쳐.”

누구 돈이든지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비싼 성황각을 갈 수 있다는 것이 중요하지.

“도련님, 싸랑…… 꾸엑!”

“내가 들러붙지 말라고 했지!”

다시 성황각으로 간다는 말에 왕삼이 또다시 풍백을 와락 끌어안으려고 했지만, 이번에는 풍백에게 멱살이 잡혀 종이인형처럼 허공에서 휘둘리는 신세가 되었다.

말로 해서는 도저히 들어 먹지 않는 왕삼이었다.

이렇게 풍백 일행이 약간 소란 이후 성황각으로 떠났다.

그리고 잠시 후, 다루에서 나온 사람 하나가 어딘가로 향했고, 주점에 있던 사내 하나가 또 어디론가 향했다.

* * *

우당탕!

문을 부술 것처럼 열고 들어온 사내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외쳤다.

“헉! 헉! 문주님! 그 새끼…… 헉! 헉! 그 새끼가 드디어 나왔습니다!”

사내의 말에 장내에 있던 사내들이 모두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내들은 모두 팔뚝에 하나같이 뱀 한 마리가 똬리를 틀고 있는 문신을 새기고 있었는데, 그들의 숫자가 적어도 서른 명은 넘는 것 같았다.

“이제야 나왔어!”

“망할 새끼!”

“우리가 대기한 시간이 대체 얼마냐?”

“몰라. 난 열흘이 지나고 날짜 세는 것도 잊어버리고 있었어.”

사내들이 일제히 소리를 지르며 누군가를 향해 욕을 날렸다. 꽤 화가 났는지 사내들의 얼굴은 모두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너도나도 욕을 하는 분위기에서 누군가가 팔걸이를 내려쳤다.

탕!

“모두 닥쳐!”

그 외침에 사내들이 일제히 입을 닫고 소리친 사람을 바라봤다.

사내들이 바라보는 곳에는 사십대로 보이는 사내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의 팔뚝에도 똑같이 뱀 문신을 하고 있었는데, 무엇보다 그의 얼굴을 사선으로 가로지르는 흉측한 검상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청사파 문주 마적삼은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을 보며 혀를 찼다.

“쯧쯧…… 얼마나 기다렸다고 이렇게 소란들이야?”

“헤헤! 다들 대기만 하고 있다 보니 좀이 쑤셔서 그렇습니다요.”

“어차피 의뢰인이 시간이 길어지는 만큼 돈도 챙겨 준다고 했잖아. 우리 청사파가 언제부터 이렇게 가벼운 놈들만 있었어? 이 새끼들이 빠져 가지고.”

서슬이 퍼런 마적삼의 일갈에 바짝 긴장했다. 행여나 성격이 더러운 마적삼에게 걸려서 시범 대상으로 두들겨 맞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새끼가 어디로 갔는데?”

“성황각 방향으로 갔습니다!”

“한 놈은 계속 쫓아가고 있지?”

“넵! 조심해서 따라가라고 했으니, 절대 놓치지는 않을 겁니다!”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인 마적삼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외쳤다.

“좋아. 그럼 모두 무기 챙겨서 대기해. 적당한 곳으로 빠졌다는 소식이 들어오면 바로 달려가서 처리한다. 알겠지?”

마적삼의 명령이 떨어지자 청사파 무사들이 병장기를 챙기기 시작했다. 그러는 사이, 무사 하나가 마적삼에게 다가와 조용히 물었다.

“그런데 저희가 모두 몰려갈 필요가 있습니까? 어차피 무공도 모르는 상인 하나만 죽이면 되는 일인데, 굳이 문주님까지 오실 필요가…….”

“소문 못 들었어? 그놈 호위무사가 이번에 꽤 대단한 무공을 가졌는지, 서문자건에게 별호도 받았다고 하더라고.”

“아무리 그래도…….”

“괜히 시간 끌다가 서문세가에서 지원이라도 오면 골치 아프니까, 서둘러 처리하고 바로 항주를 뜰 거야. 그러니까 작업 끝나면 모두 한 번에 항주에서 빠져나갈 준비까지 끝내도록 해.”

* * *

“적풍백이 서문세가를 나왔습니다.”

“쯧…… 너무 오래 기다리게 만들었어.”

보고를 받은 경장을 입은 중년 사내가 혀를 차며 말했다.

“혼자던가?”

“시비와 시종을 대동하고 있었고, 이번에 일검단악이라는 별호를 받았다는 호위무사도 같이 있었습니다.”

“그렇군.”

사내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옆에 있던 검을 패용했다.

“혼자…… 가실 겁니까?”

“혼자면 충분해.”

“들리는 소문에 호위무사 무공이 만만치 않다고 하던데…… 기왕이면 무사들을 대동하심이…….”

그 말에 사내가 콧방귀를 뀌었다.

“흥! 겨우 호위무사 따위가 무서워서 무사를 대동한다고?”

“하지만 만약을 대비하시는 편이 좋지 않겠습니까?”

“나도 소문은 들었다. 그래 봐야 강호 초출인 사마세가 애송이를 상대로 대련을 한 것뿐이더군. 그것도 일방적으로 밀리다가 운이 좋아서 이겼다는 말도 있고.”

“그렇기는 합니다만…….”

“그 정도면 수준은 알 만해. 굳이 무사를 데리고 갈 필요도 없다. 안내나 하도록 해.”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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