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가상방 개망나니 71화
남궁진은 서문세가에 사절처럼 오는 것이 별로 탐탁지 않았다. 딱히 중요한 날도 아니고, 그저 누구나 한 해에 한 번은 있는 단순한 생일이지 않은가.
그래서 처음 자신이 사절로 정해졌을 때는 불만을 쏟아 냈었다. 굳이 내가 갈 필요가 있겠냐는 둥 그렇게 중요한 자리면 내가 아니라 형님을 보내야 한다는 둥 말이다.
하지만 아버지가 가주의 권위를 내세우며 명령을 내리는 순간, 이 모든 반항은 종지부를 찍고 말았다. 아무리 아들이라고 하더라도 가주의 권위에 대거리를 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사건을 뒤로하고 도착한 서문세가의 연회는 딱 남궁진이 생각한 그대로였다.
“오! 소문이 자자하던 남궁세가의 자제분이셨군요!”
“처음 뵙겠습니다. 개천문(開天門)에서 온…….”
“저는 좀 멀리서 왔습니다. 산동(山東)에서…….”
“얘기로만 듣던 것보다 훨씬 헌앙하시군요! 하하하!”
오만 가지 사람들이 다가와 자신을 소개하고 인사를 나눴다. 그들은 모두 어떻게 남궁세가와 연이라도 만들어 볼까 궁리라도 하는 것처럼 조금이라도 틈이 있으면 다가와 인사를 나눴다.
남궁진은 이런 형식적인 인사를 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차라리 이럴 시간에 무공이라도 수련하는 것이 더 생산적이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어차피 이렇게 사람을 만나고 관계를 맺는 것은 형님이 훨씬 잘하는 분야였다. 자신은 그저 뒤에서 조용히 무공이나 익히는 걸 아주 좋아했다.
그랬기에 가주는 애초에 생각도 하지 않는다고, 제발 무공 익히는 걸 방해만 하지 말아 달라며 말하고 다녔던 남궁진이었다.
그랬던 남궁진이었는데…… 한 사람을 보는 순간, 과거의 남궁진은 어디론가 먼지처럼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구석진 자리에서 은은하게 미소를 짓고 서 있는 서문세령은 그의 심장에 불똥이 튀도록 만들었다. 마치 세상에 혼자 존재하는 것처럼 후광이라도 뿜어내는 듯한 엄청난 서문세령의 미모는 그녀가 인세에 존재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느끼게 만들 정도였다.
남궁진은 저도 모르게 서문세령이 있는 방향으로 발걸음을 내디뎠다. 그런 남궁진의 모습에 남궁세가에서 같이 온 사람이 그를 불렀지만, 남궁진은 누가 자신을 불렀다는 것도 인지하지 못했다.
멍하니 걸어가던 남궁진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진정하자! 이러다가 멍청이 같은 모습을 첫인상으로 남겨 주겠어!’
다른 사람은 눈치채지 못하게 가볍게 심호흡을 한 남궁진은 마침내 멀쩡한 모습으로 다가가 부드럽게 말했다.
“재미있는 얘기를 하고 계신 것 같은데, 저도 같이 이야기에 끼어도 괜찮겠습니까?”
남궁진의 등장에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당연하게도 서문표였다.
“어? 남궁 소협!”
“안녕하십니까, 서문 소협.”
“하하하! 마침 자리가 하나 남아 있습니다. 앉아서 같이 얘기를 나누시죠.”
그러면서 서문표는 자연스럽게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하나씩 소개를 해 주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을 소개받으면서 보여 주지 않았으나, 서문세령의 소개를 받으며 남궁진의 눈빛은 달라졌었다.
풍백은 그런 남궁진을 아주 흥미롭다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왕삼이나 문약란, 고우길은 같이 앉아 있기는 하나, 그 위치가 시종과 시비, 호위무사다. 그렇기에 따로 소개를 하지는 않았다.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지금까지 보통 사내라면 문약란에게 한 번 이상은 시선을 빼앗겼었다.
그런데 남궁진은 전혀 그런 것이 없었다.
대부분은 대화를 나누는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틈만 나면 은근히 서문세령만 바라보고 있었다.
‘흐음…… 아무래도 남궁진이 여기서 처음으로 서문세령을 만나 한눈에 반하게 된 모양이네.’
대체 언제 남궁진이 서문세령에게 마음을 빼앗겼나 싶었는데, 그날이 바로 오늘인 것 같았다.
안타까운 점은 정작 서문세령은 그런 남궁진에게 전혀 관심이 없는지, 처음 인사를 했을 때를 제외하고 그쪽으로 시선조차 주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사실 풍백은 남궁진과 서문세령 사이의 이야기를 대부분 모른다. 알고 있는 것이라고는 단지 서문세가가 무너지고 안휘성으로 거점을 옮기는데 남궁세가가 많은 도움을 줬다는 점과 그 이후 남궁진과 서문세령이 혼인을 하게 된다는 것 정도였다.
그래서 지금까지는 서문세가가 무너진 이후에 남궁세가의 도움을 받으며 두 사람이 서로 눈이 맞은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것 같았다.
풍백이 이런 생각을 하는데, 옆에 앉아 있던 문약란이 입을 풍백의 귀에 가까이 가져와서 속삭였다.
“아무래도 저희는 자리에서 일어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눈치가 보인 것 같았다. 아무래도 그들을 제외하고 모두 강호의 무인이었고, 손님들을 앉으라고 마련한 자리에 자신들이 앉아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풍백은 고개를 저었다.
“굳이 그럴 필요는 없어. 어차피 지금 온 사람들도 예상하지 못했던 사람들이고, 이 사람들 말고 더 이상 올 사람도 없거든.”
“그래도…….”
“걱정 말고, 흔히 볼 수 없는 음식들인데 마음껏 즐기도록 해. 왕삼을 봐 봐. 입이 찢어지게 처먹는 중이잖아.”
아까는 다른 사람의 시선이 어쩌고 하더니, 지금은 같은 자리에 서문표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이 왔는데도 신경도 쓰지 않고 있었다. 그저 주둥이에 음식을 가득 집어넣고도 부족한지 젓가락으로 돼지고기를 쑤셔 넣고 있었다.
두 사람이 피식 웃으며 바라보고 있자, 그걸 느꼈는지 고개를 돌려 풍백과 문약란을 바라보고는 이상한 소리를 냈다. 주둥이에 음식이 가득하니 제대로 말을 못하는 것이다.
“오어?”
“아니야. 아주 보기 좋다. 마음껏 처먹어.”
“아아아이아.”
히죽 웃은 왕삼이 더욱 열정적으로 음식을 입에 쑤셔 박기 시작했다. 아무리 자주 볼 수 없는 음식이라고 하지만, 저렇게 밥을 먹으면서 게걸스럽지 않다는 말을 기대했다는 것이 어이없었다.
사마장위는 사마중을 따라 다니며 여러 사람들에게 인사를 했다.
사마세가를 떠나 강호에 처음으로 나온 사마장위는 오늘을 많이 기대했었다. 또한 강호에서도 이름이 널리 알려진 사람이 많이 참석할 거라고 생각했기에 긴장도 했었다.
실제로 이 자리에서 여러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자신이 사마세가의 사람이라는 것과 곧 정식으로 강호행(江湖行)을 나올 거라는 사실도 알렸다.
아마도 오늘 만들어진 친분 덕분에 나중에 강호행을 하며 이들의 문파에 들르면 제법 좋은 대우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평소라면 대단히 기쁘고 뿌듯함을 느껴야 했겠지만, 사실 지금 사마장위의 신경을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다.
그곳은 풍백이 앉아 있는 구석진 자리에 있는 식탁이었다.
사마장위는 사마세가의 직계 중 하나였다. 그렇기에 어렸을 때부터 특별한 대접을 받고 살아왔다.
그런 그에게 당가타는 안중에도 없는 문파였다. 특히 군웅회를 통해 당가타를 무려 이백 년이 넘도록 지원하고 있었다는 얘기를 들은 이후로는 거의 거지를 보는 듯한 눈으로 바라봤다.
이런 사실을 만약 당한수나 당세기가 들으면 어이가 없을 것이다.
사마세가는 신진세가 중 하나였다. 그리고 그들이 군웅회에 들어온 이후, 전통적인 명문세가를 제외하고 신진세가는 당가타에게 지원을 해 줬던 적이 없었다.
오히려 지속적으로 당가타를 지원하는 것이 무용(無用)하다고 외치며 지원하던 것을 멈추도록 종용했었다. 그 결과, 군웅회의 지원이 끊기게 되었고 말이다.
또한 연회에 참석하기 전 만났던 풍백의 무례함은 사마장위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당해 보는 일이었다. 오죽하면 나중에 따로 만나면 혼을 내 주겠다고 다짐했겠는가.
이렇게 꼴도 보기 싫은 당가타의 두 사람과 풍백이 함께 앉아 있는 식탁은 시선도 주고 싶지 않은 곳이었다.
그런데…… 그곳에 도저히 시선을 줄 수밖에 없는 두 사람이 있었다.
서문세령과 문약란이었다.
서문세령의 미모는 그녀가 절강제일미라 불린다는 걸 알았을 때부터 기대를 했었지만, 직접 보니 상상을 뛰어넘는 미모였다. 그리고 문약란은…… 그야말로 환상 그 자체였다.
이곳에 두 사람을 제외하고 다른 여인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두 사람만큼 시선을 잡아끄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런데 왜 두 사람 다 저기에 있는 거야!’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부럽게 문약란은 당장 한 대 때려 주고 싶은 풍백과 일행인 것 같았다. 그렇지만 서문세령은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돌아다니며 인사를 해야 하는 것 아닌가?
‘백부님께 인사를 하려고 오면 멋진 내 모습을 보여 주고 인사를 할 수 있을 텐데…….’
질투가 났다.
특히 꼴 같지도 않은 문파 출신인 당세기가 서문세령을 보고 넋이 나간 것처럼 멍하니 있는 걸 보면서 더욱 극대화됐다.
‘감히 너 따위가 쳐다볼 여자가 아니라고!’
사마장위의 머릿속에서는 이미 서문세령이 자신의 여자가 된 모양이었다.
당세기가 저런 미녀들 사이에 있다는 점에서 화가 치밀어 오른 사마장위는 눈에서 불똥이 튀고 있었다. 저 자리는 자신이 있었어야 했다면서 말이다.
이런 사마장위에게 사마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슬슬 준비를 하거라.”
그 목소리를 들은 사마장위는 퍼뜩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오늘 사마중은 사마장위가 정식으로 강호출도를 하기 전, 여러 사람이 모인 자리에 그를 소개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려고 계획했다.
이 계획은 어렵지도 않고, 그다지 무례하지도 않았다.
연회를 하는 도중, 사마중이 나서서 강호에 곧 출도하게 될 사마장위를 소개하며 가벼운 연무를 시연하는 것이다.
강호의 무인들이기에 사마세가의 후기지수(後起之秀)가 시연하는 연무는 꽤 많은 관심을 받게 될 것이다. 그리고 아주 운이 좋다면, 이 자리에서 별호(別號)를 받게 될지도 몰랐다.
무인에게 별호는 아주 중요했다. 별호를 받게 된다는 것은 곧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고, 인정을 받았다는 말이 된다.
애당초 주목을 받지 못하는 무인은 별호조차 없었다. 그렇다고 별호를 스스로 짓고 다니면 앞에서는 아무 말을 하지 않아도 뒤에서는 많은 조롱을 받게 된다.
사마장위는 방금 떠오른 생각을 바로 사마중에게 말했다.
그 얘기를 들은 사마중은 꽤 흥미롭다는 표정이 되었다.
“나쁘지 않구나. 자신은 있는 거겠지?”
“당연히 자신 있습니다.”
당당하게 말하는 사마장위의 태도에 사마중은 미소를 지으며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곧 악사의 연주가 끝나고 무희들이 연무대에서 내려갔다. 그리고 다음 순서에 맞춰 사람들이 연무대에 오르려고 하는데, 사마중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먼저 연무대로 올라 사방에 포권을 하며 인사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사마세가의 사마중입니다.”
와룡검이라는 별호를 가진 사마중은 강호에서 꽤 인지도가 높은 사람이었다. 아무래도 사마세가와 관련된 대외 활동을 많이 했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들이 식사를 하거나 얘기하던 것도 멈추고 사마중에게 시선을 돌렸다.
“서문세가에서 마련해 준 연회를 즐기시면서 여러 동도분들이 즐거운 시간을 갖고 계신 것 같습니다. 이 자리를 더 즐겁게 보냈으면 하는 마음에 제 조카가 좋은 여흥이 되시라고 가벼운 연무를 보여 드리고자 합니다.”
“오오!”
“사마세가의 후기지수가 직접 연무를 보여 준다고?”
“어서 보여 주시오!”
사람들은 박수를 치며 환호를 했다.
아름다운 무희가 춤을 추고, 좋은 음식으로 귀를 즐겁게 하는 것도 좋다. 그러나 강호 무인들에게 가장 큰 관심을 받는 건 아무래도 무공일 수밖에 없었다.
특히 사마세가는 신흥세가지만, 그들이 하남에서 갖는 영향력은 대단했다. 그렇기에 그들의 무공 시연을 볼 수 있다는 건 많은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사마중과 눈을 마주친 사마장위가 가볍게 발을 구르더니 연무대 위를 향해 경공을 사용해 뛰어올랐다. 공중에서 꽤 멋들어진 회전을 하자 사람들의 박수 소리가 더욱 커졌다.
포권을 한 사마장위가 입을 열었다.
“강호 선배님들께 인사를 올립니다. 사마세가의 사마장위입니다.”
“잘생겼군.”
“경공을 보니 실력이 대단하겠는데?”
“아주 깔끔한 경공이었어.”
사람들의 호의가 섞인 시선을 받으며 사마중과 잠시 시선을 교환한 사마장위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백부님께서 제가 연무를 시연할 거라고 말씀하셨지만, 그러면 무슨 재미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조금 급작스럽기는 하지만, 비무까지는 아니고 가벼운 대련을 하면 어떨까 싶습니다.”
그 말에 사람들이 환호를 보내며 반겼다.
“그래, 연무는 무슨 연무야? 그런 건 혼자 하면 되는 일이지.”
“맞아, 맞아. 그리고 비무도 좀 그렇잖아. 오늘은 축하를 하는 자린데 피를 보는 건 좀 그렇지.”
“대련이 딱 좋네. 좋은 생각을 했어.”
호의적인 사람들 반응에 뜻대로 분위기가 흘러간다는 확신을 한 사마장위는 준비했던 말을 꺼냈다.
“그렇다고 제가 감히 선배님들과 손을 나누는 건 그리 좋은 모습이 아닐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마침 이곳에 딱 알맞은 분이 계신 것 같더군요.”
사마장위가 당세기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당세기 소협, 어떻습니까? 한번 저와 대련을 해 보시지 않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