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가상방 개망나니 70화
소연무장에 들어서자, 가운데 소연무장을 중심으로 큼직한 식탁이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것이 보였다. 식탁 하나하나는 꽤 커서 거의 아홉 명은 앉을 수 있을 정도였다.
풍백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가장 사람의 시선이 닿지 않을 구석 자리를 찾을 수 있었다.
말했듯이 풍백은 연회에 관심이 없었다. 그렇다고 연회에 참석한 유력 인사들과 딱히 인사를 나눌 의향도 없었다.
지금은 굳이 유력 인사와 인사를 나눈다고 득이 될 부분도 없었고, 유력 인사 역시 한낱 조그만 상방의 소방주인 풍백에게 관심을 보이지도 않을 터였다.
실제로 지금도 소연무장으로 들어선 풍백 일행을 보고 누구 하나 아는 척하는 사람이 없었다. 혹시나 하고 잠시 봤다가 모르는 사람이라는 걸 확인하곤 고개를 돌릴 뿐이었다.
이런 상황에 굳이 풍백이 누군가 앉아 있는 식탁의 남은 자리를 차지할 생각은 없었다. 그러니 유일하게 남은 자리로 갈 수밖에 없었다.
“저쪽에 앉도록 하지요.”
풍백은 당가타 사람들에게 말하고 아무도 앉지 않는 구석진 식탁에 앉았다. 당한수와 당세기는 그 맞은편에 앉았다.
두 사람이 자리에 앉은 것을 본 풍백이 고개를 돌려 왕삼과 문약란, 고우길을 바라봤다.
“뭐해? 너희들도 앉아.”
“예? 저희도요?”
왕삼이 눈이 커다랗게 뜨며 되물었다.
항주까지 오는 와중에 객잔에서는 같이 겸상을 하기도 했지만, 원래 시종과 시비가 같이 겸상을 하는 경우는 없었다.
특히 지금 이곳은 연회가 펼쳐지는 곳이다. 그러니 다른 사람의 시선과 체면 때문에라도 시종이나 시비가 같이 겸상을 할 수는 없었다.
“어차피 자리도 많잖아. 같이 앉을 사람도 없고. 이따가 음식은 열 명이 먹어도 남을 정도로 나올 텐데, 그걸 다 어쩌려고?”
“그, 그렇지만…….”
“싫어? 싫으면 넌 그냥 서 있던가. 소란이랑 고 무사만 앉도록 해.”
“아닙니다! 누가 싫다고 했습니까? 헤헤헤!”
왕삼이 실없는 웃음을 흘리며 냉큼 자리에 앉았다. 이런 자리에 앉는 것이 싫을 리가 없었다. 원래 이런 연회에서는 비싼 산해진미(山海珍味)만 나오지 않던가.
“어차피 앉을 거면서 뭘 어울리지 않게 빼고 그래?”
“제가 저 때문에 그랬겠습니까? 다 우리 도련님이 다른 사람의 따가운 시선을 받지 않을까 걱정이 돼서 그랬던 거죠.”
“그래? 그러면 그냥 서서 구경하던가.”
“어차피 소란이랑 고 무사는 앉았잖습니까. 그러니 이젠 그런 것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아니, 내가 안 괜찮을 것 같아서 그래. 그냥 서서 구경해.”
“에이…… 또 왜 그러십니까? 제가 바로 시키는 대로 앉지 않아서 삐치신 겁니까?”
“삐친 게 아니라 네가 먹는 걸 보고 있으면 소화가 안 될 것 같아서 그래.”
“제가 뭘 어쨌는데 먹는 걸 보고 소화가 안 된다고 합니까?”
“너 밥 먹을 때 너무 게걸스럽게 먹잖아. 그거 보고 있으면 엄청 신경 쓰이거든.”
“하! 지금까지 그런 말은 한 번도 한 적 없으면서!”
“그거야 너 기분 나쁠까 봐 조용히 있었던 거고.”
“헉! 진짭니까? 저 진짜 밥 먹을 때 게걸스럽게 먹어요?”
“왜? 게걸스럽게 먹으면 여자한테 인기 없을까 봐?”
“아니, 또 그걸 그런 쪽으로 생각…… 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당한수는 풍백과 왕삼이 만담을 하는 것처럼 얘기를 나누는 걸 들으며 참 특이하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나쁜 의미는 아니었다. 그렇기에 지금 당한수의 입가에는 저도 모르게 살짝 미소가 지어지고 있지 않은가.
이런 당한수와 달리, 당세기의 시선은 온통 문약란에게 집중되고 있었다. 너무 노골적으로 바라보면 실례가 될까 봐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도 했지만, 결국 그의 모든 신체 감각은 문약란에게 향해 있었다.
어쩔 수 없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문약란처럼 기이한 분위기를 풍기는 초록빛 눈동자는 본 적도 없었고, 면사로 가렸기에 잘 보이지는 않아도 엄청난 미모를 가지고 있을 거라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러고 있는 사이, 연회가 시작됐는지 곧 시비와 시종들이 일제히 음식을 들고 들어와 식탁에 올려놓기 시작했다.
역시나 왕삼은 태어나도 본 적도 없는 엄청난 산해진미였다. 오죽하면 풍백과 문약란을 제외하고 심지어 당한수까지 시선을 빼앗길 정도였다.
이렇게 음식이 나오고 곧 사람들의 박수 소리와 함께 연무장 위로 서문세가주 서문자건이 올라왔다. 사방을 향해 웃는 얼굴로 포권을 하며 인사를 한 서문자건이 허리를 펴고 입을 열었다.
“먼저 이 필부(匹夫)를 축하해 주기 위해 먼 길을 오신 여러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자신을 낮추고 서문세가를 찾아온 사람들에게 올리는 감사의 인사로 이야기의 포문을 연 서문자건은 그리 길게 얘기를 하지 않았다. 대충 그가 한 말의 요지를 보면, 찾아와 줘서 고맙고 앞으로도 잘해 보자는 말이었다.
당한수와 당세기는 서문자건이 연무장에 모습을 드러낸 이후부터 온통 그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엉덩이까지 들썩이는 모습을 보니 당장이라도 달려가고 싶은 모양이었다.
풍백은 그런 두 사람을 보며 그저 자신의 찻잔에 담긴 용정차를 먹을 뿐이었다.
이미 두 사람을 소연무장에 들어올 수 있도록 도와줬다. 보아하니 서문자건에게 용무가 있는 것 같은데, 이 부분은 풍백이 도와줄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다.
당장 풍백만 하더라도 며칠 전 서문자건과 독대를 하기 위해 서문표의 도움을 받았고, 무엇보다 이미 서문자건에게 도움을 요청한 상태였다. 그런 풍백이 또 다른 부탁을 하려는 사람을 데리고 소개를 해 줄 수는 없는 일이었다.
‘뭐, 알아서 하겠지.’
두 사람에게 관심을 끄고 찻잔을 내려놓는 순간, 서문자건이 이야기를 마치고 연무장을 내려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아름다운 무희(舞姬)와 음을 타는 예인(藝人)이 올라가 연회의 시작을 알렸다.
연회가 본격적으로 시작하자 사람들이 음식을 먹으며 같은 식탁에 앉은 사람들끼리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성질이 급한 몇몇 사람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다른 식탁에 안면이 있는 사람을 찾아가 인사를 나누기도 했다.
이런 분위기와 달리 풍백이 앉은 식탁에는 누구도 찾아오지 않았다. 아무래도 아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기도 했고, 당한수와 안면이 있는 사람이 있었기는 해도 굳이 인사를 할 이유가 없었는지 찾아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덕분에 풍백은 오랜만에 음식을 먹으며 서로 담소나 나누기 좋았다.
서문자건에게 시선을 빼앗겼던 당세기는 그가 연무대에서 내려가고, 문약란이 식사를 하기 위해 면사를 살짝 들추며 드러난 그녀의 미모에 넋이 나가 있었다.
‘세상에…… 선녀가 따로 없구나…….’
면사에 가려진 문약란의 미모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그런 미모였다.
이제 이십대 중반의 혈기왕성한 당세기는 문약란의 비현실적인 미모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오죽하면 당한수가 은근히 그에게 눈치를 줄 정도였다.
다행이라면 당세기가 문약란에게 시선을 집중하고 있는 걸 식탁에 있는 누구도 신경을 쓰지 않고 있다는 점이었다.
사실 문약란이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일이 한 두 번이 아니니 이제는 이런 시선을 너무 익숙하게 받아넘기고 있다는 것이 더 맞는 말일 것이다.
이렇게 식사를 하고 있는 와중에 문득 두 사람이 다가왔다. 서문세가의 소가주인 서문표와 절강제일미라 불리는 서문세령이었다.
“하하! 왜 이렇게 구석에 있는 겁니까?”
서문표가 웃으며 풍백에게 묻자, 풍백 역시 웃으며 대답했다.
“딱히 아는 사람도 없으니 굳이 주목을 받을 이유가 없어서 조용한 곳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이곳에는 강호의 유명한 고수와 명문정파에서 나온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풍백이 그들을 보고 누군지는 알 수 없었다.
과거 풍백이 강호의 유명 고수에 대해 제법 이야기를 많이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그들을 만난 적이 없었기에 알아볼 수 없었다.
그가 얼굴만 봐도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은 정말 어마어마하게 유명한 고수라거나 대부분 절강성에 한정하여 용모파기를 확인한 사람에 한정되었다.
“그렇군요. 그러면 제가 직접 소개를 해 드릴까요? 아마 인사를 해 두면 나중에 도움이 될 사람이 많을 텐데요.”
“아닙니다. 굳이 그러실 필요는 없습니다.”
풍백은 그 제안을 거절했다.
지금은 이런 인맥을 굳이 만들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아직 중소 상방에 불과한 적가상방의 소방주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만약 서문자건이 직접 소개를 한다면 모르겠지만, 서문표를 통해 인사를 한 사람들은 아마 내일이면 풍백에 대해 까맣게 잊어버릴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죠.”
서문표는 더 이상 권하지 않았다. 대신 뒤에 서 있던 서문세령을 손짓으로 부르더니 풍백에게 소개를 해 주었다.
“내 동생입니다. 저번에 한 번 봤었을 텐데, 그때는 경황이 없어서 인사도 못했다고 해서 데리고 왔습니다.”
“서문세령입니다. 그때는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했습니다.”
서문세령이 나서서 인사를 하자 식탁은 잠시 침묵에 빠졌다.
눈처럼 흰 피부에 붉은 입술은 남자라면 심금을 울리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오죽하면 왕삼은 입으로 가져가던 고기를 툭 떨어뜨렸을 정도였다.
당세기도 마찬가지였다. 문약란도 엄청난 미모였지만, 서문세령이 보여 주는 매력은 그녀와 또 다른 느낌이었다.
풍백은 그런 사람들과 달리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포권을 하며 웃는 얼굴로 인사를 했다.
“다시 뵙게 됐군요. 적풍백이라고 합니다.”
서문세령의 엄청난 미모에도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담담히 인사를 하는 풍백의 모습은 유독 그를 돋보이게 만들었다. 그렇기 때문인지 서문표와 서문세령은 살짝 눈을 빛내기도 했다.
풍백은 이어 당한수와 당세기를 그들에게 소개해 줬다.
“이쪽은 당가타에서 오신 분들이십니다.”
그 말에 정신을 차린 당한수와 당세기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며 포권을 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당한수입니다.”
“다, 당세기입니다.”
“서문표라고 합니다.”
웃는 얼굴로 인사를 나눈 서문표는 무언가 생각하는 것처럼 눈을 살짝 올렸다. 그걸 본 풍백은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눈치채고 먼저 말했다.
“사실 두 분은 초대장이 없었는데, 제가 이쪽에 있는 당세기 소협과 개인적인 친분이 있어서 함께 들어가자고 떼를 썼습니다.”
“아…… 그렇군요.”
“무사분이 절대 안 된다고 하셔서 하마터면 소가주님께 직접 부탁을 드릴 뻔했지 뭡니까. 하하하!”
대충 어떤 일이 있었을지 짐작한 서문표는 풍백과 함께 웃었다.
“바쁘지 않으시면 자리에 앉아서 잠시 담소를 나누는 건 어떠신지?”
서문표와 서문세령은 손님을 맞이해서 인사도 나눠야 하기에 바빴다. 하지만 그렇다고 잠시 시간을 낼 수조차 없는 건 아니었다.
“그러면 조금만 폐를 끼치겠습니다.”
“폐라니요? 이 연회를 주최하신 분들이 오신 건데, 오히려 저희가 감사하지요.”
당한수는 은근히 풍백에게 눈으로 감사의 인사를 했다. 아마 자신들이 서문자건을 만나러 왔다는 말을 듣고 이런 기회를 마련해 준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사실 풍백은 아무런 생각도 없었다.
기회가 되기에 당가타를 생각해서 서문표에게 앉는 것을 권한 건 부정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더 이상 도와줄 생각은 없었다. 지금도 서문표가 직접 다가오지 않았다면 생기지 않았을 일이었다.
서문표는 자리에 앉으며 잠시 시선을 문약란에게 뒀다. 이미 풍백과 몇 번 만나며 안면이 있었지만, 볼 때마다 참 경이로운 미모란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이전까지 그랬던 것처럼 문약란에게 더 이상 관심을 두지 않았다.
당한수는 이 기회를 놓칠 수 없다는 듯이 적극적으로 서문표와 담소를 나누기 시작했다. 서문표 역시 웃는 얼굴로 당한수와 담소를 이어 나갔다.
두 사람이 대화를 하는 사이, 서문세령은 풍백을 힐끔거리며 보고 있었다.
‘이 사람은 뭘까?’
처음 봤을 때는 아주 운이 좋아서 서문표를 도와준 것으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끝날 것 같은 풍백과 서문세가의 인연은 계속 이어져 고가의 상품인 호초를 취급할 수 있게 되었고, 얼마 전에는 아버지와 독대를 했었다고 한다.
그리고 지금 풍백은 살면서 단 한 번도 경험을 해 보지 못했던 반응을 보여 주고 있었다.
전혀 관심도 없는 사람이었는데, 이렇게 여러 가지로 엮이게 되며 신선한 반응을 보여 주자 조금씩 관심이 생겨났다.
‘얼굴은…… 이 정도면 잘생기기는 했네. 성격도 좋아 보이고…….’
이런 서문세령의 맞은편에 앉아 있는 문약란은 본능적으로 위기감이 생기고 있었다. 힐끔거리며 풍백을 훔쳐보는 서문세령의 모습에서 이상하게도 자신의 모습이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 상황에 또 다른 예상치 못한 상황이 발생하고 있었다.
“재미있는 얘기를 하고 계신 것 같은데, 저도 같이 이야기에 끼어도 괜찮겠습니까?”
대략 이십대 후반으로 보이는 말쑥하게 생긴 사내가 정중히 포권을 하며 웃는 얼굴로 끼어들었다.
풍백은 그를 보는 순간, 과거에 자신이 봤던 용모파기와 일치하는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다.
‘남궁진?’
과거 서문세령과 혼인을 했었던 남궁세가 가주의 둘째 아들인 남궁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