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가상방 개망나니 66화
서문세가에서 연락이 온 시간은 저녁 식사가 끝나고 해시(亥時, 21~23시)가 시작될 무렵이었다.
아무리 소가주인 서문표가 주선을 해서 만나는 것이지만, 상대는 서문세가주였다. 그러니 적어도 며칠 정도는 지나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그런데 의외로 제법 늦은 시간이기는 하지만, 바로 당일 만남이 성사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었다.
풍백은 소식을 가져온 무사를 따라 서문세가를 가로지르며 제법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이내 도착한 곳은 서문세가주의 집무실이었다.
여기서 그는 다시 한번 내심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내원까지 들어갈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않은 탓이었다. 내원은 말 그대로 가족이나 친지가 거주하는 곳이고, 서문세가에서도 중요한 위치에 있는 소수의 사람만 들어갈 수 있는 곳이었으니까.
“적가상방의 소방주인 적풍백 공자를 모시고 왔습니다.”
무사가 안쪽에 알리자 집무실 안에서 묵직한 저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시라 해라.”
명이 떨어지자 무사가 한쪽 팔로 예를 취하며 집무실로 들어가라는 행동을 취했다. 움직임 하나하나가 명문세가 무사에 어울리도록 예의가 발랐다.
가볍게 숨을 몰아쉰 풍백이 옷을 단정하게 만지고는 집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집무실 안에는 대략 오십대로 보이는 중년의 사내가 고고한 태도로 탁자 앞에 앉아 있었다.
‘이 사람이…… 서문세가의 가주 광풍패도(狂風覇刀) 서문자건?’
풍백은 서문자건을 살펴보다가 이내 크게 눈동자가 흔들렸다.
다른 사람은 모르겠지만, 풍백은 서문자건의 온몸에서 은은히 풍겨 나오는 기세와 그것이 은연중에 가리키고 있는 무공 수위를 읽을 수 있었다.
그리고 한 가지를 깨달았다.
‘서문세가는…… 절대로 적웅 따위가 무너뜨릴 수 있는 곳이 아니야.’
이전에 듣기로 절정고수인 적웅이 서문세가를 무너뜨렸다고 들었지만, 그 모든 정보는 이 순간을 기점으로 잊어버려야 했다.
‘이 사람…… 절정을 뛰어넘었어. 초절정고수야!’
초절정고수.
무공을 극에 달하도록 익힌 무인을 절정고수라고 한다.
하지만 극에 달했던 경지조차 초월해야 도달할 수 있는 것이, 바라볼 수 있는 것이 초절정고수라는 위치다.
이런 어마어마한 경지에 도달하는 무인은 당연히 많을 수가 없다. 적어도 명문정파의 핵심이 되는 위치에 있는 사람만이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초절정고수에 도달하게 되면, 그 무력은 어지간한 문파 하나는 홀로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고 말하고는 한다.
그렇다면 서문자건을 보자.
지금 당장 풍백이 서문자건을 초절정고수라고 판단했지만, 사실 지금 풍백의 눈과 경험에 비춰 보면 서문자건은 무공을 전혀 익히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이건 말이 되지 않았다.
당장 서문자건의 몸에서 풍겨 나오는 기세를 보면 그가 무공을 익힌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으니까.
사실 과거까지 통틀어 풍백은 절정고수는 직접 본 적이 제법 있지만, 초절정고수를 직접 보는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기세를 온전히 숨기지 못하는 것을 보면, 절대의 경지의 척도가 되는 반박귀진(返撲歸眞)의 경지에 들어섰다고 말하기에는 어려울 것이다.
그렇기에 확신을 할 수는 없어도, 분석과 느낌을 종합해 보면 서문자건은 초절정고수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왜 그러고 서 있나? 자리에 앉게.”
서문자건의 말에 공손히 고개를 숙여 보인 풍백이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서문자건은 그런 풍백을 흥미롭다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얘기는 많이 들었네.”
“제 얘기를 말입니까?”
“그렇지. 표아가 자네를 대단히 높이 평가하고 있더군. 덕분에 우리 서문세가에서도 저렴하게 호초를 취급할 수 있었고 말이네.”
서문표가 정말 평소에 풍백의 얘기를 한 것인지, 아니면 그저 듣기 좋은 말을 한 것인지 잘 구분이 되지 않았다.
얘기를 하는 사람들의 여러 가지 반응과 변화를 살피며 상대가 진실을 말하고 있는지 파악하는 것에 능한 풍백이었다. 그러나 서문자건 정도의 고수면 이런 것도 감출 수 있는지 속내를 파악하기가 힘들었다.
서문자건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런데 얘기를 들었던 것보다 훨씬 뛰어난 인물인 것 같군.”
“과찬이십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제가 사는 상산현에서는 망나니로 유명했는걸요.”
“그러니까 더욱 놀라운 일이지.”
그냥 하는 말이 아닌 것 같았다. 무언가 뜻을 담고 있는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서문자건의 입에서 흘러나온 다음 말에 풍백은 하마터면 얼굴에 감정을 드러낼 뻔했다.
“얼마 전까지 망나니라고 불렸던 사람이…… 지금은 일류고수 정도의 무공을 가지고 있으니 말일세.”
너무나 정확히 자신을 파악하는 서문자건의 말에 풍백은 입에서 심장이 튀어나올 것처럼 놀랐다.
하지만 과거 숙련되게 훈련을 받은 덕분인지, 이런 속내와 달리 태연하게 대답을 할 수 있었다.
“제가 무공을 익혔다고요? 무슨 말씀이신지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저는 그저 작은 상방의 장사꾼일 뿐입니다.”
“그런가?”
서문자건의 대답과 동시에 시비가 들어와 두 사람 앞에 찻잔을 준비하고 차를 따랐다. 그 바람에 잠시 두 사람 사이에 대화가 멈추고 말았다.
차 준비를 마친 시비가 나가고, 시비의 발걸음 소리가 사라지고 나서야 서문자건이 찻잔을 들어 입을 축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 얘기를 아는가? 경지(境地)에 들면 다른 사람 눈에 보이지 않는 것도 볼 수 있게 된다는 말을 말이네.”
당연히 들어 봤다.
풍백은 일류고수였었다. 하지만 일류고수가 될 때까지 단순히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상대의 무력을 측정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단순히 경지에 들면 보인다는 말이, 어떤 경험을 기준 이상으로 쌓으면 다른 사람 눈에 보이지 않는 것도 볼 수 있다는 말로 이해하게 되었다.
하지만 지금 서문자건의 말은 그가 경지에 들었기에 풍백이 무공을 익히고 있다는 것을 알아볼 수 있다는 말과 같았다.
풍백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이것이었다.
‘정말일까?’
지금 풍백은 자신이 상대의 무공을 파악하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자신의 무공을 숨기는 중이었다. 그랬기에 지금까지 자신이 무공을 익히고 있다는 걸 들킨 적이 없었고, 심지어 절정고수인 청송무관주 우검학에게도 무공을 들키지 않았었다.
그런데 정말 초절정고수에 오른다면 상대의 무공을 보기만 해도 알 수 있다는 것인지 의문이었다.
“아직도 무공을 모른다고 할 생각인가?”
서문자건은 이미 다 안다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어쩌지?’
풍백은 고민에 빠졌다. 과연 인정을 할 것인지, 아니면 끝까지 모르는 척해야 할 것인지 말이다.
그리고 마침내 풍백의 입이 열렸다.
“좋습니다. 인정하지요. 무공을 익혔습니다.”
“당연한 대답을 하는데 왜 그리 오래 고민을 하는 건지. 이미 다 알고 있는데 말이네.”
“대단한 이유는 없습니다. 일단 아버지에게도 숨기고 있던 사실을 밝히기 어렵다는 것도 있고, 무엇보다 제게 무공을 전수하신 분께서 무공을 숨기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강호에서 사문(師門)을 숨기는 일은 너무나 흔하게 일어나는 것이기에 풍백의 말에서 이상한 점을 찾기는 어려웠다.
“흐음…… 마공(魔功)을 익힌 것도 아닌 것 같은데, 왜 무공을 숨기라고 했지?”
“저도 모르겠습니다.”
“잠깐 확인을 해 봐도 되겠나?”
“확인이요? 어떻게 확인을…….”
“이렇게 말이네.”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서문자건의 손이 갈고리 모양이 되어 풍백의 견갑골을 잡아 왔다. 그걸 본 풍백의 손은 반사적으로 튀어 나가며 서문자건의 손을 막아 가고 있었다.
서문자건은 풍백이 자신의 조법에 마주쳐 오는 것을 보더니 갈고리 모양의 손을 화하여 금나수(擒拿手)를 펼치기 시작했다.
기본적으로 금나수는 상대를 붙잡는 법을 뜻한다. 물론 아무 곳이나 붙잡는 건 아니다.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상대를 단번에 제압할 수 있는 요혈이나 완맥을 잡는다.
그렇기에 금나수를 상대하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금나수를 사용하는 상대에게 붙잡히지 않는 것이다.
심상치 않은 기운을 풍기는 서문자건의 손아귀가 자신의 손목을 잡아 오는 것을 본 풍백은 그에 대응하여 손을 뒤집어 피했다.
그러자 서문자건은 이미 그럴 것을 알았다는 듯이 다시 방향을 틀며 풍백의 손목을 노려 갔다.
두 사람의 손이 허공에서 번개같이 움직였다.
서문자건의 손아귀는 우직하게 금나수를 펼치며 풍백의 손목을 낚아채기 위해 움직였고, 풍백은 그런 서문자건의 손아귀를 피해 현란하게 움직이며 피했다.
상대가 초절정고수로 짐작되기는 하나, 그렇다고 쉽게 서문자건의 손아귀에 잡혀 줄 생각은 없었다.
서문자건은 자신의 금나수를 제법 쉽게 피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인지, 풍백을 기이한 눈으로 바라봤다.
그러나 곧 살짝 미소를 지은 서문자건의 손놀림이 이전과 완전히 다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파파파팍!
요란한 파공음을 풍기며 몇 개의 수영(手影)을 만들어 내는 서문자건의 금나수법은, 지금까지 펼치던 평범한 금나수와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상승무공처럼 보였다.
그 움직임에 맞춰 풍백의 손 역시 가만히 있지 않았다.
비록 서문자건처럼 몇 개의 수영을 만들어 내지는 않았지만, 풍백의 수법은 금나수에서 수법으로, 또 장법으로 다채롭게 변하며 서문자건에게 대응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을 뿐이다.
요란한 파공음을 동반하며 허공에 수영을 만들어 내던 두 사람의 움직임이 한순간에 멈췄다.
결국 서문자건의 손아귀에 풍백의 완맥이 잡혀 버린 것이다.
완맥이 잡힌 풍백이 살짝 인상을 썼다. 몸 절반이 시큰거려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다.
서문자건이 흡족하게 미소를 지으며 풍백의 완맥을 다시 놔줬다.
욱신거리는 손목을 만지는 풍백을 보던 서문자건이 물었다.
“자네에게 무공을 가르쳐 준 사람이 군부에 몸을 담았던 사람인가?”
서문자건의 말에 풍백이 움찔했다.
“그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자네가 펼친 수법을 보고 알았지. 모두 알아본 것은 아니지만, 처음 펼쳤던 무공이 교룡금나수(蛟龍擒拿手) 아닌가?”
“맞습니다.”
“교룡금나수는 군부에서 군호(軍戶, 백부장) 이상이 되어야만 배울 수 있는 무공이라고 들었네. 강호에서 교룡금나수를 쓰는 사람은 없지. 그리고 그 이후 펼친 수법과 장법도 황궁 무공 특유의 실전적 느낌이 강하더군.”
교룡금나수에 이어 펼쳤던 무공은 요심수(擾心手)와 쇄옥장(碎玉掌)이었다. 모두 군부에서 군호 이상이 되면 익힐 수 있는 무공들이었다.
모두 의도하고 펼친 무공이었다.
서문자건 정도 되는 고수라면 당연히 풍부한 경험과 놀라운 안목을 가지고 있으리라. 그러니 자신이 펼치는 무공이 군부의 무공이라는 것을 충분히 알아볼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황룡사의 무공을 보여 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강호에는 칠 할은 보여 주고, 삼 할을 숨기라는 말이 있다. 숨긴 삼 할의 무공이 언제 자신을 구해 줄지 모르기 때문이다.
실제로 강호에서는 구명절초(救命絶招)나 비전절초(秘傳絶招)를 보여 주게 되면 상대를 반드시 죽이는 일이 비일비재(非一非再)하다.
비록 서문자건이 눈치를 채서 무공을 익혔다는 걸 보여 주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모든 것을 보여 줄 생각은 없었다.
“자네에게 무공을 가르쳐 준 사람은 군부에서 백부장 이상 지낸 사람이었던 모양이군.”
의도했던 것처럼 서문자건이 말했다. 그에 풍백은 여전히 표정 관리를 하며 대답했다.
“……사실 제가 익힌 무공의 연원(淵源)에 대해 듣지를 못했었습니다. 과거에 대해 말씀하시는 걸 극히 싫어하셨거든요. 심지어 사부님이라 부르지도 못하게 하셨지요.”
“전방에서 고생이 많았던 사람들이 그렇게 된다고 하더군. 그리고 군부에서는 무공을 전수받았다고 사부라 부르지 않지. 아무튼 너무 추궁을 하듯이 물어본 것은 미안하네. 표아를 구해 주며 봤겠지만, 우리가 지금 암투를 벌이는 중이라서 말이네.”
풍백 역시 기분이 나쁜 것은 아니었다.
애당초 무공을 숨기고 있는 것은 자신이었다. 자신의 무공 연원을 알아보기 위해 손을 쓰기는 했어도, 그것이 풍백을 억누르며 강제로 알아낸 느낌은 아니었다.
그저 까마득한 고수의 입장에서 풍백의 무공을 점검하려던 것처럼 손속에 많은 사정을 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심지어 확인을 해 봐도 되는지 물어보기도 했었다. 아마도 정말 풍백을 의심하고 있었던 것이라면 의향을 물어보지도 않고 제압하고 강압적으로 확인했으리라.
“알고 있습니다. 영파상방을 말씀하시는 것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