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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가상방 개망나니-65화 (65/313)

적가상방 개망나니 65화

항주로 가는 길은 이번에도 특별한 문제가 없었다.

풍백은 어쩌면 청해상방이 무사를 고용해서 습격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도 했었지만, 예상외로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항주는 이전처럼 사람이 바글거리고 시끄러웠다. 이전과 달라진 점이라면 단지 풍백 일행에 문약란이 함께하고 있다는 정도였다.

“항주는 여전히 똑같네요.”

왕삼은 창밖으로 항주의 거리를 바라보며 맥이 풀린 목소리로 말했다.

한 번 와 봤었기에 기대감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단지…… 지금 적가상방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걸 왕삼 역시 알기에 이전처럼 웃고 떠들기에는 눈치가 보일 뿐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조금씩 지나도 계속 이렇게 행동할 것인지는 두고 봐야 할 것이다.

“어디로 갈까요?”

“서문세가로 바로 가도록 하지요.”

마부의 물음에 풍백이 대답했다.

원래라면 심오경을 만나서 잘 지내고 있는지 인사라도 해야겠지만, 지금 심오경은 천축으로 호초를 사러 간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객잔을 찾을 필요도 없었다. 서문세가의 초청을 받아서 가는 것이니, 서문세가에 가면 그들이 쉴 수 있도록 거처를 준비해 줄 것이다.

“알겠습니다!”

마부는 힘차게 대답을 하고 서문세가로 향했다.

서문세가는 당연하게도 항저우의 중심가에 자리 잡고 있었다.

며칠 후에는 서문세가를 이끄는 수장의 생일잔치를 하기에 서문세가는 매우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것이 밖에서도 느껴졌다.

풍백이 탄 마차가 서문세가로 다가가자 입구에 서 있던 무사들이 손을 들어 멈춰 세웠다.

마차의 문이 열리고 먼저 문약란이 내렸다.

“헙!”

무사 중 하나가 면사 위로 드러난 문약란의 초록빛 눈동자에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서문세가의 무사들은 자주는 아니지만, 그래도 제법 많이 절강제일미라 불리는 서문세령을 볼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인지 서문세가의 무사들은 제법 눈이 높은 편이었다. 무려 절강제일미를 보며 단련해 온 안목이었다.

그런데 면사로 가렸기에 제대로 확인도 할 수 없는 문약란을 보면서도 한순간 넋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면사 위로 보이는 문약란의 초록빛 눈동자가 주는 신비함은 그만큼 충격적이었다.

특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 신비한 초록빛 눈동자에 감도는 수심(愁心)은 바라보는 무사들의 가슴을 애절하게 만들 정도였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서문세령을 통해 단련이 되어 있던 덕분인지, 풍백이 마차에서 내렸을 때에는 무사들도 어느새 정신을 차리고 있었다.

풍백은 정중히 품에서 초대장을 꺼내 건넸다. 초대장을 확인한 무사가 다시 접어 돌려주며 정중히 포권을 했다.

“적가상방에서 오신 적풍백 공자님이시군요. 서문세가에 방문하신 것을 환영합니다.”

“저희가 너무 빨리 온 것은 아닌지 모르겠군요.”

“아닙니다. 공자님보다 빨리 오신 분들도 있습니다. 일단 이쪽으로 오시지요. 항주까지 오시느라 힘드셨을 텐데, 편히 쉴 수 있도록 거처로 안내를 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무사들 중 하나가 앞장을 서며 말했다.

서문세가는 절강성 최고의 명문정파 중 하나였고, 오랜 역사를 가진 곳이기도 했다. 그런 만큼 서문세가의 규모는 적가상방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간단하게 비교를 하자면, 서문세가의 외원만 하더라도 적가상방을 통째로 집어넣고도 남았다.

이렇게 거대한 서문세가를 무사를 따라 이동하면서 왕삼과 고우길은 연신 사방을 둘러보기 바빴다. 정작 풍백과 문약란은 아무렇지 않았는데 말이다.

풍백이야 과거의 삶을 살면서 온갖 경험을 워낙 많이 가지고 있었기에 놀랄 일도 없었다. 그에 비하여 문약란은 청해상방 자체가 거대했기에 서문세가의 규모에 놀라지 않았고.

“쪽팔린다. 적당히 둘러봐.”

“저만 그런 것도 아닌데 왜…….”

억울하다는 듯이 중얼거린 왕삼이 고우길을 바라봤다. 고우길은 그런 왕삼의 시선을 슬그머니 다른 곳을 바라보는 것으로 피했다.

고우길은 제법 강호 경험이 있었다고 하지만, 지금처럼 서문세가와 같은 거대 문파의 내부를 구경해 본 적은 없었다.

‘거참…… 적가상방에 몸을 담으면서 강호와 완전히 떨어진 삶을 살 줄 알았는데……. 오히려 요즘이 낭인무사로 있을 때보다 더 강호와 밀접하게 사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구만.’

사실 따지고 보면 강호와 연관된 일은 그리 많지 않았다. 단지 평소라면 전혀 얼굴을 보기 힘든 사람들을 가까이서 볼 수 있다는 것이 달랐을 뿐이다.

“여기가 적가상방에 배정된 거처입니다.”

무사가 안내한 곳은 객잔의 별채처럼 독립된 작은 전각이었다. 화려하고 거대하지는 않아도 세 개의 방이 있는 이곳은 적가상방의 사람들이 모두 함께 머물기에 충분했다.

풍백은 서문표가 제법 신경을 써 줬다는 걸 알았다.

일반적으로는 많은 방이 모여 있는 커다란 전각으로 배정된다. 그리고 그중에서 하나의 방을 사용하게 되고 말이다.

그런데 적가상방에는 지금처럼 독채를 배정해 줬고, 심지어 방도 세 개나 있어서 함께 온 일행도 같이 있을 수 있게 해 줬다.

보통 이런 거처는 중요한 손님들에게만 배정되는 곳이다.

적가상방이 서문세가에 판매하고 있는 호초가 귀한 귀물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독채를 배정받을 정도로 중요한 거래 대상은 아니다. 아마도 이건 이전에 풍백이 서문표가 크게 다칠 수 있는 상황에 도와줬던 일이 크게 작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왕삼은 풍백처럼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 상황만 봤다.

“으아아! 보통 이런 곳에 가면 조그만 방 하나만 주는 경우가 많다고 해서 기대도 안 했었는데…… 서문세가에서 우리 적가상방을 엄청 높이 평가해 주는 거 아닙니까?”

적가상방에 있는 사람들 중 몇몇 소수의 사람들은 강호의 문파나 거대 상방에 가 본 경험이 있었다. 그런 사람들이 분명 왕삼에게 거처에 대한 얘기를 해 줬으리라.

풍백은 그저 싱글벙글 웃고 있는 왕삼에게 혀를 찼다.

“쯧쯧…… 참 부럽다. 나도 너처럼 아무 생각 없이 살면 참 좋을 텐데.”

“아니, 제가 뭘 어쨌다고 또 시비십니까?”

“아니야, 정말 부러워서 그래. 넌 앞으로도 꼭 변하지 말고 이대로만 살아라.”

“진짜요? 에이, 뭘 또 부러워할 것까지야.”

히죽거리는 왕삼의 표정을 보니 풍백의 말에 무슨 의미가 담겨 있는지도 파악하지 못한 것 같았다.

방 배정은 쉽게 끝났다.

풍백이 가장 큰 방을 혼자 쓰고, 두 번째로 큰 방은 왕삼과 고우길이 사용하기로 했으며, 가장 작은 방은 문약란이 사용하게 되었다.

누가 어떤 방을 사용하느냐에 대해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그렇다고 문약란이 풍백과 같은 방을 사용할 수는 없는 일이니까 말이다.

그렇게 방을 정하고 한숨 돌리고 있는데, 때마침 풍백의 거처로 한 사람이 들어왔다. 그를 본 풍백은 자리에 벌떡 일어나 환한 얼굴로 환대했다.

“정말 오랜만에 뵙습니다, 소가주님!”

“반갑습니다.”

서문표는 풍백의 환대에 웃는 얼굴로 포권을 취했다.

“어떻게, 거처는 마음에 드십니까?”

“그렇지 않아도 놀라고 있는 중입니다. 손님도 많이 오실 텐데, 이렇게 좋은 거처를 저희에게 배정해 주셔도 되는 건가 싶어서 말입니다.”

“하하하! 사실 조금 무리하기는 했습니다.”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하는 서문표의 태도는 자신이 힘을 썼다는 것을 자랑하기 위함이 아니라 반쯤은 농담식으로 말한 것이었다.

“하지만 생각을 해 보면 적 공자님께 좋은 거처를 드리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기도 했습니다. 저희는 향후 적가상방이 훨씬 크게 될 거라고 예상하고 있으니까요.”

“하하! 정말 소가주님의 말씀대로 된다면 좋겠군요.”

“진짭니다. 오히려 더 좋은 거처를 드리지 못해 죄송할 정도입니다. 이렇게 아버님 생신 잔치로 많은 분들이 오시는 게 아니었다면 이보다 더 좋은 거처를 드렸을 겁니다.”

실제로 서문표는 풍백을 대단히 높이 평가하는 중이었다.

그건 단순히 풍백이 서문표가 크게 다칠 상황에 경고를 해 줬기 때문이 아니었다.

풍백을 따로 만났을 때, 그가 심오경과 서문세가 사이에서 절묘하게 서로 이득이 되는 관계를 만들어 내는 모습이 너무 인상적이었다.

계획을 세우고 결과를 얻어 내는 풍백의 모습은 자신보다 어리고 이제 막 스무 살이 넘은 젊은 사람이라는 걸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너무 얼굴에 금칠을 해 주셔서 민망합니다, 소가주님.”

“하하하! 이 정도 가지고 금칠이라니요.”

풍백은 덕담을 나누면서 묘한 느낌을 받았다.

과거 서문표는 지금처럼 말이 많지도 않았고, 잘 웃지도 않았다. 언제나 과묵한 모습으로 임무만 생각하며 치열하게 살았던 것이 풍백이 기억하는 서문표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지금 얼굴에 상처만 없을 뿐이지, 과거에 기억하는 그 모습 그대로인 서문표가 웃으며 대화하는 모습은 묘한 위화감을 느끼게 만들었다.

물론 지금 서문표가 어떤 가식적인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는 말은 아니었다. 오히려 지금 모습이 과거에 자신이 기억하던 서문표의 모습보다 더 자연스러웠다.

‘하긴 가문이 무너지고 남궁세가의 비호와 도움을 받으며 안휘성에 머물게 되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럴 만하기도 하지.’

서문표가 당시에 느꼈을 감정이 어땠을까?

‘만약…… 동생인 서문세령과 혼인한 남궁세가 사람이 정작 그녀의 마음에도 없는 사람이었다면…….’

가능성일 뿐이지만, 만약 이 가정이 맞다면 서문표가 느꼈을 감정이 얼마나 참담했을지 짐작하기도 힘들었다.

가문이 터전을 잃고, 여동생이 마음에도 없는 혼인을 하며 간신히 머물 곳을 마련한 상황에서 다시 원래 터전으로 돌아갈 가능성도 미미하다면…….

‘그랬다면 군부에 투신했을 가능성이 높지.’

아마 서문세령이 혼인을 담보로 얻어 낸 자리에 앉아 있기도 괴로웠을 거다. 그랬기에 군부에서 운영하는 비밀 부대에 투신했고, 내려진 임무를 모두 수행하면 어떻게든 가문을 일으켜 세울 수 있게 막대한 지원을 해 주겠다는 약속을 받아 냈을 것이고 말이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잠시 대화가 끊긴 사이, 풍백이 자신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 서문표가 어색하게 자신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내 얼굴에 뭐가 묻었습니까?”

“아닙니다. 갑자기 뭐가 떠올랐을 뿐입니다.”

“하하! 내 얼굴을 보고 뭐가 떠올랐다면…… 설마 내 동생을 떠올린 것 아니오?”

장난스러운 서문표의 말에 풍백은 서문세령을 떠올려 봤다.

“절대 그런 건 아닙니다.”

“내 동생이라서 그런 건 아니지만, 우리 세령이가 제법 예뻐서 기억에 남지 않을 얼굴이 아닌데……. 이렇게 적극적으로 부정하는 모습을 보니 더 의심스럽구려.”

얼굴에 잔뜩 장난기를 띠며 말하는 서문표의 모습에 풍백은 쓴웃음을 지었다.

‘의외로 팔불출의 모습도 있었군.’

그런데…… 미안하지만 기억도 잘 나지 않았다.

당시에는 뜬금없이 나타난 서문표 때문에 서문세령은 기억에 강렬히 남지도 않았었다.

‘아니, 제대로 보지도 않았던 것 같군.’

그만큼 당시에는 서문표에게 모든 시선을 빼앗기고 있었다.

더 이상 부정하는 것도 모습이 웃겨서 그냥 웃으며 넘긴 풍백은 슬그머니 본론을 꺼냈다.

“그런데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꼭 들어주셨으면 하는데…….”

“어떤 부탁입니까? 적 공자가 처음으로 부탁을 하시니, 제가 들어줄 수 있는 부탁이라면 꼭 들어주고 싶군요.”

이전에 호초와 관련된 계약은 부탁이 아니라 제안이었다. 순수하게 부탁이라고 말한 것은 지금이 처음이었다.

“이게 어려운 부탁인지 어떤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어서 말씀을 해 보시지요.”

“가주님을 한번 만나고 싶습니다.”

“아버님을? 어차피 며칠 후에 있을 생신 잔치에서 만나 볼 수 있을 텐데요.”

“제가 급하기도 하고, 그때는 아마도 가주님이 여러 손님과 응대하느라 많이 바쁘실 것 같아서요.”

생신 잔치의 주역인 서문세가주이니 그를 만나기 위해 온 손님들을 맞이하려면 많이 바쁠 것이 분명했다.

“알겠습니다. 어렵지 않은 부탁이군요. 조금 더 곤란한 부탁을 하실 줄 알았는데요.”

“곤란한 부탁은 아마도 가주님께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하하하! 그래요? 아버님이 곤란한 부탁을 들어주실지 의문인데……. 차라리 제게 말씀을 하시지요?”

“그러고 싶지만, 아무래도 이 부탁은 가주님께 해야 할 것 같아서 말입니다.”

달리 말하자면 서문표가 들어줄 수 없는 부탁이라는 말이 될 수 있었다. 편협한 사람이라면 꽤 기분 나빠 할 수 있기엔 충분했다.

하지만 서문표는 풍백의 말에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제가 아버지께 얘기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마 사람이 와서 적당한 시간을 알려 줄 겁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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