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가상방 개망나니 57화
윤마철은 풍백에게 왈짜들 중 하나가 손가락이 부러지고, 다섯 명의 왈짜들이 다가서는 것을 보며 곧 풍백이 피떡이 되는 꼴을 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일단 곽종도가 적풍백에게 계약서 수결을 받아 내고 떠나면…… 그 시비를 나한테 넘기라고 해야겠어.’
엄밀히 시비는 노예가 아니다. 그러니 풍백이 마음대로 넘기고 말고 할 것도 없다.
하지만 윤마철이 봤을 때, 아직 이름도 제대로 모르는 그 시비 문약란은 풍백에게 마음을 두고 있었다.
그러니 풍백이 나서서 윤마철에게 가라고 하면, 아마 정이 떨어져서라도 자신에게 오지 않을까라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문약란이 자신을 마음에 담아 두지 않았다는 것은 매우 아쉬운 일이다. 그러나 달리 생각해 보면 애초에 그게 무슨 상관인가 싶었다. 어차피 자신이 바라는 건 문약란의 몸뚱이였으니까 말이다.
오히려 나중에 사랑한다고 매달리는 꼴을 보느니, 차라리 적당히 돈을 찔러 주며 품에 안는 것이 훨씬 깔끔하고 좋았다.
‘아무리 예쁘다고 하더라도 혼인은 나한테 도움이 될 여자하고 해야지.’
혹시 아는가?
지금은 단지 포목점의 장자일 뿐이지만, 아버지가 어떻게 제법 돈이 많은 집안의 여자를 데리고 온다면 나중에는 어떤 모습이 되어 있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어쩌면 적가상방이나 백건상방과 같은 커다란 상방을 운영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윤마철은 자신이 충분히 능력이 있지만, 사업 자금이 없어서 그런 능력을 선보이지 못하는 중이라고 생각했다.
풍백만 하더라도 자신보다 더 개판인 망나니였지 않은가.
그런데 지금은 몇 가지 일을 훌륭하게 성공해서 상산현에 제법 이름이 알려지는 중이었다.
풍백이 할 수 있었다면, 자신은 그보다 훨씬 잘할 수 있다는 자신이 있었다.
‘흐흐흐! 아무튼 그 시비 얼굴이 궁금해 죽겠네.’
분명 이마와 눈썹, 눈매 등을 봤을 때는 살 떨리는 미녀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눈동자…….
생각만 하더라도 소름이 끼칠 정도로 신비감을 주는 초록빛 눈동자가 정말 예술이었다.
빨리 문약란을 자신의 품에 안고 싶어 미칠 것 같았다.
그런데…… 상황이 조금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어?”
풍백이 한 사람을 땅에 메다꽂고, 주먹 한 번, 멋들어진 발차기 한 번 할 때마다 왈짜들이 기절하며 쓰러지고 있었다.
평소 풍백이 유약한 모습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저렇게 끝내주고 싸움을 잘하는 놈은 분명히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풍백의 모습에 윤마철이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마침 곽종도와 자신의 호위무사가 나누는 대화가 들려왔다.
“얼레? 저건 박투술인데?”
“대협(大俠)도 아시는 무공입니까?”
“본 적이 있소. 그리고 무공까지는 아니고, 군부에서 일부 병사들만 배우는 실전적인 무술이오.”
“군부요? 아니, 상방의 후계자가 무슨 군부에서 배우는 무술을 알고 있는 겁니까?”
“그러게 말이오. 그것도…… 대단히 능숙해 보이니 더 신기할 따름이오.”
두 사람이 이렇게 얘기하고 있는 사이, 풍백은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왈짜까지 쓰러뜨리고 있었다.
잠깐 이쪽을 바라봤던 풍백이 쓰러진 왈짜 중에서 처음에 손가락이 부러졌던 놈에게 다가가더니 턱을 걷어차서 기절시키는 것이 보였다.
“깔끔하게 기절을 시켜 버리는군요.”
“어차피 저런 것도 흑도패까지만 먹히는 기술인데, 뭐 저렇게 잘난 체를 하는지.”
영 못마땅하다는 듯이 곽종도의 호위무사가 혀를 찼다.
곽종도의 호위무사는 일류고수을 목전에 두고 있는 이류무인이었다. 그에 비하여 윤마철의 호위무사는 이제 갓 이류무인에 한쪽 발을 살짝 들여 놓은 터라 두 사람의 간극은 제법 넓었다.
아마도 그걸 이들도 알기에 한 사람은 존대를, 다른 한 사람은 반존대를 하는 것 같았다.
무공을 알고 있는 그들이기에 풍백의 박투술을 보면서도 크게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그러나 다른 두 사람의 의견은 조금 달랐다.
‘저…… 저놈이 왜 저렇게 잘 싸우는 거야?’
순식간에 여섯 명의 사내를 기절 시킨 풍백의 모습에 곽종도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바라봤다.
“저, 저것 좀 위험한 것 아니오, 양 무사?”
곽종도의 물음에 성이 양씨인 곽종도의 호위무사가 고개를 저었다.
“일반인 중에서 저렇게 싸우는 것은 대단히 보기 힘든 건 맞습니다만, 술(術)을 배운 사람은 절대 공(功)을 배운 사람을 이길 수는 없는 법입니다.”
무슨 말인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곽종도였지만 대충 눈치를 보고 충분히 상대할 수 있다는 말이라는 걸 알아들었다. 그제야 다시 어깨를 펴고 설 수 있게 된 곽종도였다.
풍백은 기절한 왈짜들을 보며 생각했다.
‘너희는 조금 이따가 다시 보자.’
그냥 넘어갈 생각은 없다. 아무리 기절했다고 하더라도 겨우 한 대밖에 안 때렸다. 이 정도 가지고는 풍백이 오랜 시간 시달렸던 더러운 기억을 지우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런 풍백에게 곽종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야! 전혀 몰랐었는데, 너 싸움 좀 하는구나! 어쩐지 뭔가 믿는 구석이 있는 것 같아 보였어.”
수하들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닌 왈짜들이 모두 쓰러졌지만, 곽종도의 목소리에는 여유가 넘치고 있었다. 아무래도 방금 전 양 무사가 말해 준 것 때문에 충분히 안심한 것 같았다.
“내가 잘 싸우는 게 아니야. 네가 데리고 다니는 애들이 너하고 똑같이 한심한 수준이기 때문이라고. 봤다시피 나는 딱 한 대씩만 때렸거든.”
그 한 대가 너무 절묘하게 급소를 때렸기 때문이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풍백의 말이 틀리지는 않았다.
도발적인 풍백의 말에도 곽종도와 윤마철은 비웃는 웃음만 짓고 있었다.
어차피 풍백은 독 안에 든 쥐였다. 피할 수 없는 상황에 입이라도 놀리는 거라 생각한 두 사람은 풍백의 도발이 우스울 뿐이었다.
“적당히 하고 알아서 무릎 꿇어. 너도 얘기를 나누기도 전부터 얻어맞으면서 시작하고 싶은 생각은 없을 것 아냐.”
“내가 남들이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걸 엄청 싫어해서 말이야. 그러니까 망나니로 살았던 거잖아. 다른 사람 말을 잘 들었다면 지금쯤 전시(殿試)에 합격해서 관리가 됐겠지.”
“그러면 어쩔 수 없지. 양 무사?”
곽종도의 말에 양 무사가 앞으로 나섰다. 굳이 허리에 있는 검을 뽑지는 않았다.
아무리 풍백이 박투술을 배웠다고 하더라도, 이제 일류고수를 바라보고 있는 자신이 무공은커녕 무기도 없는 풍백을 상대로 검을 뽑는다는 건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니까.
양 무사가 다가오는 것을 웃으며 지켜보고 있던 풍백이 살짝 목소리를 높여서 외쳤다.
“이제 슬슬 나오지? 언제까지 보고만 있을 거야?”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한 사람이 장원의 담장을 넘으며 나타났다.
풍백의 전담 호위무사가 된 고우길이었다.
처음부터 풍백은 화양루에 혼자 오질 않았다. 설마 상산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겠나 싶었지만, 그래도 백건상방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걸 알고 있는 적호경과 진덕양이 그걸 지켜보고만 있지도 않았고 말이다.
그럼에도 고우길이 함께 있지 않았던 이유는 단지 풍백이 그렇게 시켰기 때문이었다.
풍백은 무슨 일이 벌어질 것 같다는 생각을 했었고, 만약 고우길이 옆을 지키고 있으면 일어나야 할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 고우길에게 암중에 따라오라고 시킨 것이다.
아마 풍백의 무공을 몰랐다면, 스스로 미끼가 되려는 풍백의 의견을 따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풍백이 자신보다 훨씬 대단한 고수라는 걸 알고 있던 고우길이기에 풍백의 명령을 거부하지 않고 몰래 따라오기만 했었다.
“……!”
고우길이 나타나자 상황이 조금 달라졌다.
곽종도와 윤마철이 크게 당황한 얼굴이 되었고, 양 무사와 윤마철의 호위무사는 혹시 또 다른 누가 나타나는 것은 아닌지 사방을 둘러봤다.
하지만 나타난 것은 고우길이 전부였다.
그제야 얼굴이 풀린 양 무사가 미소를 지으며 고우길에게 물었다.
“혼자인가?”
“안타깝게도 혼자야.”
고우길과 양 무사, 그리고 윤마철의 호위무사는 안면이 있었다. 서로 다른 상방과 포목점에 속해 있기는 하더라도 간혹 마주치면 인사 정도는 하는 사이였다.
그렇기 때문인지 양 무사의 얼굴은 한결 편해졌다. 그건 고우길과 친분이 있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저 고우길의 수준을 충분히 알고 있기에 편한 얼굴이 된 것이다.
그가 알기로는 고우길의 수준은 윤마철의 호위무사보다는 높았지만, 그래봐야 이류무인 초입 수준이었다.
같은 이류무인이지만, 자신과 비교하면 그 격차는 까마득할 정도라고 해야 과언은 아니었다.
“이런 상황에서 만나서 안타깝네, 그려.”
이미 싸움이 벌어지기도 전에 이긴 것처럼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양 무사가 말했다.
“칼밥을 먹고 살면서 원하는 상황만 만날 수는 없는 일이지.”
“그렇기는 하지. 그래도 기회를 한 번 주겠네. 그냥 돌아가시게나.”
충분히 이길 자신이 있지만, 가장 좋은 건 싸우지 않는 것이다. 강호에서 무인끼리 싸움이 꼭 무공으로만 지어지는 것은 아니니까.
고우길은 양 무사의 말에 잠시 풍백을 바라봤다. 그러자 양 무사가 말을 이었다.
“어차피 다 돈 받으면서 일하는 것 아닌가? 돈이 중요하다고 하더라도 목숨보다 중요한 건 아닐 텐데.”
“그렇지만 위험하다고 도망갈 거라면 처음부터 강호에서 칼밥을 먹겠다고 나오질 말았어야겠지.”
“그래서? 해보겠다는 말인가?”
“내게 선택권이 있는 상황이 아니라서.”
양 무사가 조소를 지었다.
“자네는 나 하나도 감당하지 못할 텐데, 여기에는 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모르는 건가?”
노골적으로 윤마철의 호위무사와 합공을 할 수 있다는 의사를 비치는 양 무사였다.
합공의 무서움은 이미 청해상방의 무사들과 싸우면서 충분히 느꼈던 고우길이었다. 그러나 그때와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달랐다.
고우길은 아무것도 모르는 저들을 속으로 비웃었다.
‘지금 이곳이 자기들 묫자리가 될 수 있다는 걸 전혀 모르고 있군.’
풍백이 자신을 부른 이유를 짐작하고 있었다.
저들에게는 참 다행이게도 풍백은 저들을 죽일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그렇기에 직접 무공을 드러내기 곤란한 상황이었고, 자신을 불러 상대를 하도록 만든 것이다.
하지만 만약 자신이 이들을 감당할 수 없을 것 같다면?
아마 이곳은 얼마 전 청해상방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피바다가 될 가능성이 높았다.
전혀 겁을 낼 상황이 아니기에 어깨가 가벼운 고우길이 입을 열었다.
“계속 이렇게 얘기만 하고 있을 생각인가? 자네 뒤에 있는 사람들은 빨리 상황을 정리하고 싶어 하는 것 같은데.”
“굳이 벌주를 마시겠다니, 그렇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스르릉!
말을 마친 양 무사가 검을 뽑았고, 고우길 역시 자신의 용천보검을 뽑았다.
양 무사는 고우길의 용천보검을 보고 눈을 반짝였다.
“그건 용천보검 아닌가?”
“맞네.”
“좋은 검을 들고 있군. 자네에게 과분하게 말이야.”
양 무사의 눈에 살심(殺心)이 서렸다. 아무래도 고우길을 죽이고 용천보검을 전리품처럼 챙길 생각인 것 같았다.
고우길 역시 양 무사가 살심을 가졌다는 걸 눈치챘는지 심각한 얼굴로 그를 주시했다.
먼저 움직인 건 물욕에 살심까지 일으킨 양 무사였다.
빠르게 보법을 밟으며 접근한 양 무사가 검을 휘둘러 고우길의 목을 베어 갔다. 그에 고우길이 다리는 그대로 땅에 닿아 있으면서 무릎을 뒤로 굽히며 상체를 눕혀 양 무사의 검을 피했다.
철판교(鐵板橋)의 수법이었다.
몸을 반쯤 눕힌 상태에서 보법을 밟아가며 옆으로 빠르게 몸을 회전한 고우길이 곧바로 양 무사에게 반격을 가했다. 그가 평생 익힌 숭양검법(崇陽劍法)이었다.
숭양검법은 저잣거리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그저 그런 삼류무공은 아니었다. 물론 그렇다고 일류고수들이 사용할 무공이라는 말도 아니기는 했다. 그저 딱 이류무인에게 어울리는 그런 검법이었다.
그렇기에 양 무사는 비릿한 비웃음과 함께 고우길이 펼친 숭양검법을 과감히 걷어 내며 다시 고우길을 압박해 갔다.
두 사람이 싸움을 이어 가는 동안 다른 사람들은 가만히 기다리고 있을 생각이 없었다.
“어서 저놈을 잡아 오시오.”
곽종도의 말에 윤마철의 호위무사가 움직이려고 하자, 정작 윤마철이 그런 호위무사를 붙잡았다.
“자, 잠깐! 굳이 그럴 필요가 있습니까? 어차피 양 무사님이 저 사람을 쓰러뜨릴 텐데 말입니다.”
순간 곽종도와 호위무사는 윤마철이 겁을 먹었다는 걸 바로 알아차렸다. 험악하게 인상을 쓴 곽종도가 윤마철에게 으르렁거렸다.
“지금 뭐하는 짓이야. 저놈을 잡으면 끝이라는 걸 몰라?”
“하, 하지만 풍백이 다른 무사를 준비해 놨다면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이딴 식으로 겁쟁이처럼 행동하려면 당장 네 호위무사를 데리고 꺼져!”
“그, 그게 아니라…….”
변명을 하려던 윤마철이 잔뜩 주눅이 들어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이제 돌이킬 수도 없는 상황이다. 그런 상황에서 곽종도에게 찍히는 것은 곤란했다.
윤마철의 허락이 떨어지자 호위무사가 풍백에게 다가서서 말했다.
“이걸 어쩌나? 결국 도련님의 친구분을 내가 상대하게 생겼네. 그동안 인연이 제법 있으니, 최대한 덜 아프도록 빨리 끝낼 수 있도록 노력은 해 보겠수다.”
이죽거리는 호위무사는 이미 자신의 손에 풍백의 목숨줄이 쥐어진 듯 의기양양했다.
그런 호위무사를 보며 풍백이 콧방귀를 뀌었다.
“흥! 그럴 시간이 있겠어?”
“그러니까 빨리 끝내 준다고 하지 않았수?”
“그런 말이 아니고, 나를 신경 쓸 때가 아니라 저쪽을 신경 써야 할 것 같지 않냐는 말이야.”
“그게 무슨…… 어?”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려는 풍백의 수작인 줄 알았던 호위무사는 풍백이 가리킨 고우길과 양 무사의 싸움에 슬쩍 눈길을 줬다가 그대로 멈추고 말았다.
분명 고우길에 비하여 압도적일 정도로 강할 거라 생각했던 양 무사가…… 밀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