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가상방 개망나니 56화
“더 할 말이 있어?”
풍백은 피식 웃으며 자리에 다시 앉았다. 그러자 곽종도가 다시 양하대곡을 한 잔 마시고 입을 열었다.
“네 말대로 자세히 몰랐다는 점은 인정하지. 하지만 나 정도 위치에 있는 사람이 물건 가격 하나하나를 따지면서 일하지는 않는 것도 사실이야.”
“푸후!”
풍백이 다시 한번 터지려는 웃음을 막았다. 망나니에 불과한 곽종도가 스스로 얼굴에 금칠하는 꼴이 아주 가관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상황이 바뀌는 건 아니란 말씀이야. 우리라고 내가 한 제안이 조금 무리한 제안이라는 걸 과연 몰랐을까?”
“그렇지요! 저희도 알건 다 알고 있지 않겠습니까?”
옆에서 윤마철이 거들고 나섰다.
‘아주 충신 납셨네.’
곽종도는 그런 윤마철의 맞장구가 마음에 들었는지 이제 얼굴에 미소까지 띠고 있었다.
“그러면 다 알고 있으면서 그런 제안을 했다? 이유는?”
“이유가 필요한가? 우리 백건상방은 호초가 필요해. 그 호초를 네가 가지고 있고. 그러니 그냥 우리에게 넘겨.”
“호오?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러면 너한테는 아주 괴로운 시간이 되겠지.”
풍백이 박수를 쳤다.
짝! 짝! 짝!
“이야! 대단하네. 우리 곽 공자님께서 아주 멋진 제안을 하고 있어. 지금 자기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말이야.”
“왜 모르겠어? 그저 개망나니 하나가 분수에 맞지도 않은 과한 물건을 들고 있어서 양도받으려는 것뿐이데.”
“하하…… 이 정도 되면 이런 등신들을 아들이라고 불러야 하는 너희 아비들이 불쌍할 지경이야.”
“주둥이 조심해!”
풍백의 말에 왈짜들 중 하나가 풍백의 뒷목을 강하게 잡으며 소리쳤다.
하지만 풍백은 자신의 뒷목을 우악스럽게 잡는 손길이 느껴지지도 않는지, 여전히 편안한 얼굴로 차를 마셨다.
찻잔을 내려놓은 풍백이 한심하다는 눈으로 곽종도와 윤마철을 바라봤다.
“상인과 흑도패의 차이가 뭐라고 생각해?”
풍백의 물음에 윤마철이 실소를 흘리며 말했다.
“지금 강제로 호초를 뺏으려 한다고 말하려는 거야?”
“맞아, 바로 그거야. 지금 너희들은 절대 상인이 넘으면 안 되는 선을 엄청나게 넘는 중이거든.”
“흥! 상인의 미덕은 돈을 버는 거야. 수단과 방법을 가릴 것이 아니란 말이야.”
“축하해, 근래에 들어 본 가장 무식한 소리였다.”
“뭐라고?”
“상인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건 맞지. 하지만 그렇다고 힘으로 빼앗지는 않아. 힘으로 빼앗으려고 했다면 아마 벌써 적가상방은 백건상방에 무너졌을 거야. 네 아비가 왜 힘으로 뻬앗지 않았다고 생각해? 겁이 많아서? 아니면 너무 비겁한 방법이라서?”
곽종도는 풍백의 말에 대답을 하지 않고 풍백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런 곽종도를 풍백은 비웃었다.
“그 선을 넘으면 더 이상 상인이 아니기 때문이야. 세상에 힘으로 남의 것을 빼앗은 부류는 대부분은 두 부류지. 하나는 흑도패, 다른 하나는 사파.”
“음…….”
“지금 너희는 백건상방이 아니라 백건파로 이름을 바꾸도록 만드는 중이라는 거야. 그리고 상인이 아닌 너희와 거래를 할 곳은 상산현에 단 하나도 없을 거다. 앞으로 돈을 벌기 위해 또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까.”
“…….”
“그리고 이런 짓을 벌이려면 적어도 사람들 눈은 피했어야지. 지금 여기서 나를 두들겨 패면서 호초를 빼앗겠다고? 그럼 나를 보는 저 사람들은 어쩌려고?”
풍백의 말처럼 화양루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은연중에 이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상산현에서 망나니로 이름 난 세 사람이 모여 있으니 시선을 끌 수밖에 없었다.
다행이라면 지금 이들이 나누는 대화의 대부분은 그리 큰 목소리가 아니라서 저들이 알아듣지 못하고 있을 거라는 사실이다.
곽종도는 가만히 풍백의 말을 듣고 있다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내가 언제 여기서 너를 조진다고 했었나?”
“그러면?”
풍백의 물음에 곽종도가 슬쩍 고개를 움직이자 왈짜들 중 하나가 단검을 뽑아 들고 날카로운 검첨(劍尖, 검 끝)으로 풍백의 등을 슬쩍 찔렀다.
등에서 느껴지는 감촉에 풍백은 짐짓 놀란 표정을 짓더니, 곧 눈을 가늘게 떴다.
“나를 협박해서 데리고 나가려고?”
“맞아. 어디 지금까지 열심히 나불거리던 혓바닥을 다시 놀려서 빠져나가 봐. 조금 기다려 줄게. 혹시 살려 달라고 외치는 건 반칙이라는 걸 알고 있겠지? 그러면 뒤에 있는 친구가 놀라서 확 찔러 버릴지도 몰라.”
“흐흐흐! 역시 소방주님은 말씀도 참 재미있게 하십니다. 뭐하고 있어? 소방주님께서 혓바닥을 놀려서 도망쳐 보라고 시간도 주시잖아.”
기가 살아서 희희낙락하고 있는 두 놈을 보며 풍백이 쓴웃음을 지었다.
“이것 참…… 이렇게 극단적으로 나올 줄은 몰랐네. 감당할 수 있겠어?”
“충분히 감당할 수 있지. 어차피 계약서에 네 수결(手決)만 받을 수 있으면 얘기는 끝난 것과 다름없으니까.”
곽종도는 백건상방의 힘을 믿었다. 그리고 상산현에서 백건상방이 적가상방보다 관부에 미치는 힘이 더 크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니 어떻게든 계약서에 수결만 받을 수 있으면 나머지는 아버지인 곽자억이 해결해 줄 거라 생각했다.
풍백이 이런 곽종도의 생각을 알았다면 또 입을 놀리며 조롱을 해 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럼 자세한 이야기는 나가서 해 볼까?”
곽종도가 일어나자 풍백 역시 그를 따라서 일어났다.
“식사는 다 끝나셨습니까?”
점소이가 후다닥 달려와 웃는 낯으로 반갑게 말했다.
“그래. 음식이 맛있더라.”
“하하하! 오랜만에 적 공자님께서 오셔서 특별히 신경을 썼습니다.”
“가격은 얼마나 나왔어?”
“자투리는 알아서 제하고, 은자 네 냥이 나왔습니다.”
은자 네 냥이면 어지간한 일반인 월봉의 삼분지 일 정도는 되는 거금이었다.
풍백은 윤마철을 바라봤다. 그러자 윤마철이 키득거리며 말했다.
“왜 나를 봐?”
“네가 계산한다고 하지 않았나?”
“나는 모르겠는데? 예전에 워낙 술을 많이 먹어서 없던 기억도 막 생기나 보다.”
피식 웃은 풍백이 전낭에서 은자 다섯 냥을 꺼내 점소이에게 건네줬다.
“은자 한 냥은 네가 쓰도록 하고.”
“감사합니다! 또 오십시오!”
그 말에 입이 함박만 해진 점소이가 연신 허리를 깊숙이 숙여 가며 혼신의 힘을 다해 인사를 했다.
화양루를 나오면서 윤마철이 풍백의 전낭을 빼앗았다.
“아주 돈이 많나 봐. 나는 요즘 돈이 좀 부족한데. 친구 사이니까 이건 내가 좀 쓸게.”
“왜? 집에서 이제 망나니한테 용돈도 못 주겠다고 하디?”
윤마철이 풍백의 뺨을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대체 너는 뭘 믿고 이렇게 뻗대고 있을까? 계약서 수결만 받으면 무슨 꼴을 당할지 무섭지 않아?”
“아.이.고.무.서.워.라. 됐어?”
“어디, 언제까지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있을지 두고 보자고. 이따가 울면서 봐 달라고 해서 소용없다는 건 미리 말해 두지.”
먹이를 노리는 짐승처럼 으르렁거리는 윤마철이지만, 풍백은 그런 윤마철을 보고 피식 웃을 뿐이었다.
윤마철은 풍백이 우습지도 않은 허세를 부린다고 생각했다.
앞에서는 곽종도와 윤마철이 걷고, 풍백의 뒤로는 왈짜들이 쫓아오는 중이었다.
그런데 풍백의 눈이 슬쩍 번뜩였다.
화양루를 나오자 곧 두 사람이 그들을 따라붙었기 때문이었다.
‘호위무사인가?’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았다. 일정한 거리를 두고 쫓아오면서도 굳이 자신들이 쫓아오고 있다는 걸 숨기지 않는 것을 보면 서로 아는 사이일 수밖에 없을 테니까.
곽종도와 윤마철이 향한 곳은 당연하게도 인적이 드문 한 장원이었다. 아마도 이곳은 백건상방이나 윤마철의 포목점이 소유한 장원일 것 같았다.
“이제 편히 대화를 나눌 수 있겠어. 그렇지?”
곽종도의 말에 풍백이 장원을 둘러보다가 말했다.
“이미 대화를 거의 끝난 것 같은데, 무슨 할 말이 더 있었나?”
“아…… 여기까지 와서도 생각이 달라지지 않았다는 말이지? 제법 배짱이 좋네.”
“고맙기는 하네. 굳이 이렇게 조용한 곳으로 와 줬으니까 말이야.”
“왜? 다른 사람에게 네가 비명 지르는 소리를 듣지 않게 해 줘서?”
풍백은 대답을 하는 대신 만면에 미소를 띠고 곽종도를 윤마철을 바라봤다. 어떻게 보자면 지금 이 순간 역시도 풍백이 정말 바라 왔던 그런 순간이었다.
곽종도가 왈짜들에게 말했다.
“일단 저놈 좀 잡아서 무릎 꿇려. 가볍게 인사부터 하자고.”
왈짜들이 어슬렁거리며 다가와 풍백의 어깨를 잡았다.
“들었지? 빨리 무릎 꿇…….”
으득!
“끼아아악!”
말을 하던 왈짜가 자지러지는 소리를 내며 풍백의 어깨에서 손을 뗐다. 사람들이 보니 그의 손가락 하나가 꺾이면 안 되는 방향으로 꺾인 것이 보였다.
풍백이 어깨를 털면서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아까부터 더러운 손으로 계속 만지고 있어. 옷 구겨지면 어쩌려고.”
“이 자식이!”
“밟아!”
왈짜들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그래도 죽이려는 것은 아니기에 단검이나 단도를 뽑아 들고 있는 놈은 없었다.
풍백은 제일 처음 달려드는 왈짜의 주먹을 고개를 옆으로 꺾는 것으로 간단하게 피하더니, 고개 옆으로 스쳐 지나가는 왈짜의 팔을 잡고 그대로 둘러메더니 땅에 내다꽂았다.
우드득!
그 과정에서 팔뚝 관절을 반대로 꺾이며 아작이 났다.
“끄아아아악!”
“시끄러워.”
풍백은 바닥에 누워 반대로 꺾인 자신의 팔을 보며 비명을 지르는 놈의 입을 뒤꿈치로 밟아 버리며 다음 왈짜를 향해 다가갔다.
이번에도 왈짜가 먼저 주먹을 뻗었다. 하지만 순식간에 두 명이 쓰러진 것을 봤기에 왈짜의 주먹은 풍백을 맞추려는 의도보다 뒤로 물러서게 만들려는 의도가 더 짙게 배어 있었다.
이런 주먹을 피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오히려 한 걸은 더 들어가며 상체를 비틀어 사내의 주먹을 피하면서, 그의 팔과 가로지르는 것처럼 주먹을 내질렀다.
덜컥!
턱에 주먹을 맞은 사내가 눈이 풀리며 그대로 쓰러졌다. 너무 정타로 맞아서 의식이 완전히 끊어진 것 같았다.
사내가 쓰러짐과 동시에 풍백이 상체를 숙이며 몸을 회전하더니 그 회전력을 이용해 발을 뿌렸다. 아주 간단한 퇴법이었다.
하지만 달려오던 왈짜는 정확하게 머리에 직격을 당했고, 그 위력은 절대 간단하지 않다는 것을 체감하게 되었다.
떵!
둔탁한 소리와 함께 사내가 잘린 짚단처럼 쓰러졌다. 잘못 보면 죽은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으아아아!”
덩치가 좋은 왈짜가 허리를 낮춘 상태로 두 팔을 벌리고 달려왔다. 풍백의 허리를 잡고 밀어서 바닥에 쓰러뜨리려는 의도가 훤히 보였다. 그렇게 쓰러지면 풍백의 위에 올라타고 주먹을 내리찍으려는 것이다.
피식 웃은 풍백이 사내가 지척에 도착하자 살짝 몸을 띄우며 두 손으로 사내의 어깨를 내리누르고, 하체는 뒤로 빼서 안정감을 가져갔다.
그러자 사내가 달려들던 속도 때문에 조금 뒤로 밀려났을 뿐이지, 풍백이 넘어질 일은 없었다.
“이…… 이놈!”
사내가 자신의 한 수를 너무 쉽게 막아 낸 풍백을 보며 뭐라 말하려고 했다.
하지만 풍백은 그걸 기다려 줄 마음이 전혀 없었다. 그 자세 그대로 오른쪽 다리를 들어 무릎으로 사내의 턱을 힘껏 올려쳤다.
즈컥!
단 한 방에 사내의 눈이 돌아가며 그대로 쓰러졌다.
풍백이 마지막으로 남은 왈짜를 바라봤다. 그러자 순식간에 동료가 모두 쓰러지는 것을 지켜보고 있던 사내가 헛바람을 들이켰다.
손가락을 까딱이며 풍백이 말했다.
“뭐하고 있어? 바쁘니까 빨리 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