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가상방 개망나니 54화
상산현에는 고급 반점이나 주점, 기루가 제법 많았다. 그중에서 특별히 가격도 비싸고 고급스러운 곳이 있었는데, 화양루 역시 그런 범주 안에 들어가는 주점이었다.
술시(戌時, 19~21시)경에 도착한 풍백은 으리으리하게 지어진 화양루를 잠시 바라보다가 이내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서옵…… 어! 적 공자님!”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다가오던 점소이는 풍백을 보더니 반가운 얼굴이 되어 후다닥 달려왔다.
평소 술 먹고 망나니짓을 많이 했던 풍백이지만, 상산현에서 그를 싫어하는 주점이나 기루는 거의 없었다.
어지간한 단체 손님을 받을 때보다 더 많이 먹고, 점소이들에게도 후한 인심을 베풀기로 유명했던 풍백이었으니 주점이나 기루 입장에서 그를 싫어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간혹 망나니짓을 벌이다가 물건을 부수는 경우도 있기는 했지만, 부서진 물건에 대해서는 적가상방에서 가격을 톡톡히 받아 챙기기도 했으니 불만은 없었다.
이런 풍백이 요 몇 달 동안 발도 들이지 않다가 나타났으니 점소이 입장에서는 너무 반가울 수밖에 없었다.
“나 없는 동안 잘 지냈어?”
“어휴! 공자님이 없으니 매상이 안 나와서 고생이 아주 심했습니다!”
“점소이가 무슨 매상을 신경 써? 용돈 챙겨 줄 사람이 없어서 고생한 건 아니고?”
“에이…… 아무리 제가 점소이라고 하지만 그래도 가게 매상이 떨어지면 눈치 보인다고요.”
반가운 것처럼 대화를 나누는 풍백이었으나, 사실 풍백은 눈앞에 있는 점소이가 기억도 잘 나지 않았다.
점소이에게는 겨우 몇 달 만에 보는 것이겠지만, 풍백은 십 년도 더 지난 과거에 봤던 사람이다. 특히 이때는 언제나 술에 취해 있어서 단골 주점이라고 하더라도 점소이 하나하나의 얼굴을 다 기억하지도 못했었다.
풍백은 점소이에게 물었다.
“마철이는 왔어?”
“윤 공자님이요? 아직 안 오셨는데…… 윤 공자님도 오시는 건가요?”
점소이는 화색을 띠며 물었다.
평소 풍백과 윤마철이 함께 오면 얼마나 매상을 올려 줬었는지 똑똑히 알고 있기에 절로 얼굴이 밝아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 점소이를 보고 풍백이 피식 웃었다.
“야, 너무 좋아하지 마. 오늘은 술 마시러 온 게 아니라 밥 먹으러 온 거야.”
“아니, 뭐…… 밥도 먹다가 반주로 한 잔씩 드실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
“꿈 깨. 그보다 숙수가 새로 왔다며?”
“흐흐흐! 소문 들으셨군요. 이번에 북경에 있는 고급 기루에서 숙수를 하시던 분을 아주 어렵게 모셨습니다. 특히 안주를 기가 막히게…….”
“술 안 먹는다니까.”
“예, 예! 아무튼 자리로 안내를 해 드리겠습니다.”
“굳이 별실로 안내할 필요 없어. 진짜 밥 먹으러 온 거니까, 그냥 일 층에 자리 있으면 줘.”
“알겠습니다.”
점소이는 풍백을 데리고 일 층에 있는 빈자리로 안내했다.
그런데 점소이가 안내한 자리는 거의 여섯 명은 앉을 수 있는 넓은 자리였다. 아무래도 풍백이 술을 마실 거라 예상하고 아예 처음부터 넓은 자리를 배정해 주는 것 같았다.
풍백은 그런 점소이의 행동에 그저 피식 웃고 말았다. 어차피 자리가 넓으면 편하고 좋으니까 말이다.
“주문은 윤 공자님이 오시면 하시겠습니까?”
“굳이? 그냥 새로 온 숙수가 가장 자신 있는 걸로 대여섯 개 가져와.”
“대여섯 개나요? 두 분이서 드신다고…… 아닙니다! 그렇게 가져오겠습니다!”
너무 많이 시키는 음식에 저도 모르게 반문을 하던 점소이가 얼른 말을 바꾸고 이어서 물었다.
“그러면 술은 어떻게…….”
“내가 이렇게 신뢰가 없는 사람이었나? 안 마신다고 했잖아.”
“헐…… 진짜요? 반주도 하지 않으신다고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말하는 점소이에게 풍백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안 마셔. 그보다 차나 한 주전자 가져와.”
“네…… 알겠습니다. 그럼 차는 어떤 걸로 할까요?”
“벽라춘(碧螺春) 있나?”
벽라춘은 강소성에서 나오는 차로 용정차와 함께 중원에서 손꼽히는 명차 중 하나였다. 아무래도 백건상방과 사이가 좋지 않으니, 굳이 백건상방이 판매하는 용정차를 피하려는 것이다.
“있습니다!”
“그러면 그걸로 가져와.”
“넵!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점소이는 나는 듯이 주방으로 달려갔다. 아마도 단골이 왔으니 특별히 신경 써서 만들라는 이야기를 전하고 있을 것이다.
풍백은 자리에 앉은 상태로 주점 내부를 살피며 과거를 추억했다.
그리 좋은 추억은 아니다. 언제나 여기서 술을 마시고 행패를 부리고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았던 기억뿐이니까. 오히려 기억이 나면 날수록 얼굴이 뜨뜻해지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자신과 연관되었던 곳을 보고 있으니 나름 정취는 있었다.
‘그나저나 이 새끼는 언제쯤 오려나?’
궁금했다.
오랜만에 연락을 하더니 굳이 저녁을 먹자고 꼬시던 걸 보면 무슨 계획이 있다는 건 모를 수 없었다.
‘어떻게든 술을 먹여서 내가 망나니라는 것을 상산현 사람들에게 다시 한번 재인식시켜 주려고 그러는 건가?’
현재 풍백의 평판은 적가상방 내부에서는 이미 충분히 호의적이었고, 상산현에서도 점점 호의적으로 바뀌는 중이었다.
적가상방 내부에서는 풍백이 청송표국 설립 건과 호초를 계약한 것으로 능력을 충분히 보여 줬다는 평가였다.
또한 정육 사업을 하면서 실무를 온전히 마평에게 맡기며 안정적으로 시작하는 것으로 사람을 잘 다룬다는 얘기도 들려오는 판국이었다.
특히 적가상방 시비들 사이에서 풍백의 평판은 불과 몇 달 전과 완전히 달라진 상태였다. 풍백이 문약란을 구해 온 이후, 수월이가 시비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풍백이 얼마나 달라졌는지 열심히 홍보하고 다닌 덕분이었다.
이렇게 적가상방에서 좋은 얘기들만 흘러나오니 상산현에서도 풍백이 이제는 정신을 차리고 아무도 모르고 있던 상재를 외부에 보여 주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말이 돌아다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내 평판을 무너뜨려서 그놈이 얻는 것이 뭔데?’
대체 왜 윤마철이 굳이 이 시기에 찾아와서 저녁을 먹자고 한 것인지 매우 궁금한 풍백이었다.
이렇게 풍백이 상념에 잠겨 있는 사이, 점소이가 첫 번째 음식을 가지고 나왔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저희 숙수께서 특별히 제일 먼저 드시길 바라며 만든 음식입니다.”
동그란 나무 바구니 안에는 만두처럼 생겼는데, 윗부분이 마치 꽃처럼 만들어져 만두 속에 있는 내용이 모두 보이도록 만들어져 있었다.
“소맥(燒麥)?”
소맥은 간단히 말하자면 북경에서 만든 만두를 말한다.
“어? 이걸 아세요?”
절강성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음식인 만큼 점소이가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풍백은 피식 웃으며 그런 점소이에게 말했다.
“근데 왜 이걸 특별히 제일 먼저 가져왔다는 거야?”
“한번 드셔 보시지요.”
점소이의 권유에 풍백이 젓가락으로 소맥 하나를 입에 넣었다. 그러자 바로 풍백은 왜 소맥을 가장 먼저 가지고 나왔는지 알 수 있었다.
‘호초가 들어갔구나.’
입에 들어가자마자 느껴지는 호초의 향과 맛은 과거 풍백이 먹어 봤던 소맥과 비교도 할 수 없는 감칠맛을 안겨 주고 있었다.
“어떠십니까?”
“왜 이걸 가장 먼저 줬는지 알겠다.”
분명 이 음식에 들어간 호초는 당연히 적가상방의 점포에서 샀을 것이다. 그러니 굳이 호초가 들어가는 음식으로 제일 먼저 가져온 것일 테고 말이다.
“그렇죠? 바로 다음 음식도 계속 가져오겠습니다!”
이미 준비가 되어 있었다는 것처럼 점소이는 삼황계(三黃鷄)를 시작으로 음식들을 가져와서 식탁에 올려놨다.
풍백은 아직 윤마철이 오지도 않았는데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바쁘게 젓가락을 놀렸다. 집에서 먹는 음식도 맛있지만, 오랜만에 밖에서 비싼 음식을 먹고 있으니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점소이가 가져온 음식을 거의 절반 정도 먹어 치웠을 무렵, 화양루의 문이 열리며 일단의 사람들이 들어왔다. 그 사람들 중에는 윤마철 역시 같이 있었다.
윤마철은 풍백을 발견하고 먼저 다가와 웃는 얼굴로 맞은편에 앉았다.
“뭐야? 아직 내가 오지도 않았는데 먼저 먹고 있었던 거야?”
“네가 오라고 했던 거니까 먼저 와 있었어야지. 약속 시간에 늦은 건 내가 아니라고.”
“그래도 먼저 먹고 있던 건 너무했다.”
“배고팠어. 너도 빨리 먹던가.”
“일단 젓가락 좀 내려놔 봐. 밥 먹기 전에 너하고 만나고 싶다는 분이 계셔서 모시고 왔거든.”
윤마철이 누군가를 데리고 나온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었다.
애초에 윤마철이 그리 넓은 인맥을 가진 놈이 아니기도 했고, 그나마 그와 연결된 놈들 중에서 제대로 된 놈은 하나도 없었으니까.
“소방주님, 이쪽으로 오시지요.”
아니나 다를까, 윤마철의 부름에 다가온 사람은 제대로 된 놈이 아니었다.
풍백에게 양해를 구하지도 않고 자리에 앉은 사람은 대략 이십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사내로, 그 역시 비싼 비단으로 만든 옷을 입고 있었다.
하관이 얄팍하고, 눈밑이 시커먼 것을 보면 그가 얼마나 황음한 삶을 살았는지 안 봐도 훤했다.
결정적으로 풍백은 앞에 있는 놈이 누군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상대 역시 풍백을 아주 잘 알고 있었고 말이다.
“풍백이, 오랜만이네.”
얇은 입술을 비틀며 미소를 짓고 있는 사내는 바로 백건상방의 소방주인 곽종도였다.
풍백과 곽종도 사이는 악연(惡緣)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것은 꼭 풍백이 적가상방 사람이고, 곽종도가 백건상방 사람이기 때문은 아니었다.
누차 말했듯이 풍백과 곽종도는 똑같은 망나니였다. 아마도 곽종도의 아버지인 곽자억이 그나마 돈을 써서 사람들 입을 막지 않았다면 풍백보다 더한 악명을 떨쳤을 사람이 곽종도였고 말이다.
그런 풍백과 곽종도는 마치 동족 혐오라도 하는 것처럼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
사이가 좋을 수가 없었다. 애초에 술을 먹고 정신줄을 놔 버리면 개가 되는 두 사람이 어떻게 서로 친해질 수 있었겠는가?
두 사람은 서로 스쳐 지나가면서도 뒤에서 악담이나 욕을 던졌고, 몇 번은 서로 멱살을 잡았던 일도 있었다.
다행히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말려 줘서 큰 문제가 발생하지는 않았지만, 언제든지 기회가 있으면 서로를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었다고 말할 수 있었다.
그런데 곽종도와 이런 사이라는 것을 빤히 알고 있는 윤마철이 곽종도를 데리고 온 것이다.
‘아…… 이런 거였나?’
윤마철이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 것인지 궁금했는데, 어떤 수작을 부리는 것이 아니라 곽종도를 데리고 오는 것이었다.
아마 윤마철이 곽종도를 먼저 찾아가 데리고 온 것은 아닐 것이다. 아마 곽종도가 윤마철에게 풍백을 데리고 나오라고 했었다는 말이 더 맞는 말일 것 같았다.
이런 생각을 하던 풍백이 퍼뜩 드는 생각이 있었다.
‘잠깐! 그러고 보니…… 이전에 곽종도에게 맞았을 때도 이 새끼가 중간에 수작을 부렸던 것 아니야?’
한창 적가상방이 백건상방의 수작에 말려 망해 갈 때, 더는 적가상방이 자력으로 기사회생(起死回生)이 불가능하다는 얘기가 나올 때에도 풍백은 여전히 망나니로 살고 있었다.
그러다가 주점에서 우연찮게 백건상방의 장자인 곽종도를 만나게 됐는데, 당시 곽종도는 마치 한편의 무용담을 늘어놓듯이 백건상방이 어떻게 적가상방을 무너뜨렸는지 조롱 섞인 어조로 늘어놨었다.
그에 화가 난 풍백이 곽종도에게 달려들었지만, 그 결과는 곽종도가 데리고 다니던 왈짜패에게 떡이 되도록 밟히고 말았다.
못난 풍백은 그러고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자신이 모욕을 받았다며 적가상방으로 돌아가 일꾼들을 상대로 온갖 패악질을 벌였었다.
떠올리면 얼굴만 화끈거리는 부끄러운 기억이었다.
‘생각해 보니 그때도 윤마철이 만나자고 했었던 자리였어. 그 자리에 나타나지도 않았었고.’
윤마철의 포목점은 상산현에서 가장 큰 포목점인 만큼 적가상방만이 아니라 백건상방과도 계약을 맺고 있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백건상방의 계약 규모는 적가상방이 감히 범접하지 못할 정도였다.
그러니 만약 곽종도가 윤마철에게 자신을 불러내라고 했다면 당연히 그대로 이행했을 것이다.
물론 정말 실제로 이렇게 행동했었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방금 떠올린 생각을 더욱 확신하게 만드는 일이 생긴 것이다. 그것도 과거에 있었던 바로 그때와 아주 흡사한 모습으로 말이다.
풍백은 한쪽 입술을 끌어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이거 참…… 상황이 너무 재미있게 돌아가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