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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가상방 개망나니-53화 (53/313)

적가상방 개망나니 53화

대답도 하지 않고 사라지는 진덕양의 뒷모습을 보던 풍백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버지나 숙부님은 왜 저렇게 서문세가를 높게 보시는 건지…….’

풍백은 잠시 쓴웃음을 흘리더니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이 가볍게 손뼉을 쳤다.

‘아! 그러고 보니 이제 슬슬 물소 뿔을 팔아야 하는데……. 이거 잘하면 쉽게 풀릴지도 모르겠는데?’

지금 창고에 쌓이고 있는 물소의 뿔을 판매한 대상은 이미 지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문제 하나가 있었다.

물건을 구매할 사람과 연락할 방법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지금까지 고민한 끝에 나온 방법은 암향거를 통해서 은밀히 찾아가는 방법을 사용하거나, 아니면 은밀히 밤중에 찾아가는 것이었다.

당연하겠지만, 지금까지 생각한 두 가지 방법 모두 절대로 좋은 방법은 아니었다. 오히려 상대방을 자극할 여지가 충분했었다.

이런 상황이라 적당한 방법을 찾는 중이었는데, 서문세가주를 통해서 소개를 받을 수 있다면 아주 쉽게 풀릴 수 있었다. 마침 물소의 뿔을 구매할 사람들 역시 항주에 있지 않던가.

‘지금까지 생각했던 방법들 중에서는 가장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을 것 같으니 긍정적으로 고민해 봐야겠어.’

풍백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다시 그의 거처로 누군가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숙부님이 더 말씀하실 게 있는 건가?’

당연히 진덕양일 거라고 생각하고 기다리고 있었더니, 그의 거처로 들어온 사람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사람이었다.

이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사내는 아주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그저 그가 지금 입고 있는 옷이 비단으로 만든 고급진 옷이라는 점이 더 특징적일 뿐이었다.

하지만 풍백은 그를 보는 순간 눈썹을 꿈틀하고 움직였다.

‘윤…… 마철?’

윤마철은 풍백을 보며 환하게 웃으며 매우 반갑게 두 팔을 벌리고 다가왔다.

“아이고, 우리 적 공자! 살아 있었네! 이거 너무 오랜만이라 어색할 정도라고!”

한껏 과장되게 다가오는 윤마철의 모습에 풍백 역시 환하게 웃어 주며 똑같이 두 팔을 벌리고 그를 반겼다.

“아니, 여기까지 어쩐 일이야? 상방으로 오는 건 우리 숙부님 때문에 무섭다고 문 너머로 발가락 하나도 집어넣지 않던 사람이.”

“지금도 진 총관님은 무서워. 혹시라도 내가 너하고 같이 노는 것 때문에 우리 포목점하고 거래를 끊을까 봐 걱정되기도 하고.”

“그렇게 무섭다면서 여기까지는 어떻게 왔어?”

“이제 술 안 먹은 지 오래됐다며? 그러니 이제는 와 봐도 너희 진 총관님이 뭐라고 하지 않을 것 아니야.”

“그건 네 오산이야. 숙부님은 그냥 네가 싫은 거거든.”

“으하하하! 하긴 나를 좋아하실 리가 없지.”

낄낄거리며 웃는 윤마철은 상산현에서 가장 큰 포목점의 장자였다. 당연히 적가상방과 거래를 하고 있기도 했지만, 그 이전에 윤마철은 풍백과 같이 상산현 밤거리에서 술을 마시던 친구 중 하나였다.

윤마철은 풍백을 살피며 말했다.

“이야아! 집에 갇혀서 피골이 상접해 있을 줄 알았는데, 이건 뭐야? 무슨 운동을 했길래 이렇게 몸이 좋아졌어?”

“집에 있으면서 뭐 하고 있겠어? 운동이라도 하면서 건강 관리 좀 했지.”

“나중에 술을 더 먹으려고 몸 관리 좀 했구나?”

“언젠가는 먹겠지만 아직은 아니야. 적어도 일 년은 술을 참겠다고 약속을 했거든.”

“헐…… 네가 술을 끊었다고? 그러면 술 대신 뭐를 마시는데?”

“어쩔 수 있나? 차라도 마셔야지.”

풍백의 말에 윤마철은 기가 막힌다는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천하의 적풍백이 술 대신 차를 마셔? 이걸 다른 사람이 들으면 나보고 미쳤다고 할걸.”

“너는 아직도 술 먹고 다니고?”

“혼자 무슨 술이야? 나도 이제 슬슬 포목점 일을 배우고 있어서 전처럼 매일 마시지는 못해. 오늘도 겨우 시간 내서 얼굴이나 보려고 온 거야.”

한동안 서로의 안부를 묻고 담소를 나눴다.

하지만 윤마철을 바라보는 풍백의 마음속에서는 웃고 있는 얼굴과 전혀 다른 소리가 나오고 있었다.

‘이 더러운 놈이 왜 오늘 나를 보러 왔을까?’

풍백에게 윤마철은 더러운 놈이었다.

아니, 더러운 놈이라는 말은 너무 순화해서 말한 것 같았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더러운 벌레 같은 놈이라는 말이 더 어울릴 것이다.

적가상방이 멸문하던 날, 풍백은 자신의 가족과 식솔들이 죽는 것은 자신의 두 눈으로 지켜본 이후에도 두려움에 떨며 비밀 공간에서 이틀 동안 나오지 않았다.

밖으로 나가면 당장이라도 적가상방을 멸문시킨 흑의인들이 나타나 자신을 죽이려고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국 굶주림과 목마름에 지친 풍백이 비밀 공간에서 나온 다음 가장 처음으로 찾아갔던 것이 바로 윤마철이었다.

‘아직도 기억이 나네. 그때 이 벌레만도 못한 놈이 나를 바라보던 눈빛이…….’

언제나 자신과 의기투합(意氣投合)하여 상산현의 밤거리를 돌아다녔던 윤마철은 없었다.

지쳐서 쓰러진 자신을 내려다보던 윤마철의 싸늘한 눈빛은 마치 당장이라도 밟아서 죽일 수 있는 벌레는 내려다보는 것처럼 느껴졌었다.

그리고 딱 한 마디를 했었다.

‘아마 그게…… 꺼져였었지?’

이전에는 몰랐었다. 그 한 마디가 그 정도 힘을 가졌을지는.

물론 당시의 풍백은 그 한 마디에 물러서지 않았다. 하룻밤 사이에 가문 자체가 완전히 멸문당한 상황에서 그가 도움을 청할 사람은 오직 윤마철뿐이었으니까.

그래서 윤마철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졌었다. 과거 그와 함께 보냈던 새털처럼 많은 날을 주워섬기고, 한 번만 도와 달라고 절규했었다.

그 결과는 윤마철이 데리고 있던 호위무사에게 짓밟히는 것이었다.

윤마철은 호위무사에게 짓밟히는 풍백을 보며 비웃음을 한 번 보여 준 이후로 그냥 떠났다. 풍백은 윤마철이 떠난 이후로도 두들겨 맞았고 말이다.

‘아아…… 과거를 떠올리니 그때 받았던 감동이 물밀듯이 밀려오네.’

피식 웃고 있는 풍백에게 윤마철이 물었다.

“오늘 저녁에는 뭐할 거야?”

“항상 그랬듯이 그냥 집에 있겠지. 왜 물어보는데?”

“오랜만이니까 저녁이라도 같이 먹자는 거지.”

“나 당분간 술 안 먹는다니까.”

“누가 술 먹자고 했어? 저녁이나 먹자니까. 그러지 말고 저녁 식사라도 같이하자.”

풍백은 상대의 거짓말을 파악할 수 있도록 훈련을 받았다. 그 훈련에 따르면 윤마철이 말하는 것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 이면에 무언가 음습한 것이 있다는 것을 윤마철의 눈빛을 보며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때는 어떻게 이걸 몰랐을까?’

너무 노골적이라서 몰랐다는 것이 더 어이가 없었다.

하긴 과거의 자신이 등신 같았던 부분이 어디 한두 가지겠는가?

풍백이 뭐라 입을 열라고 하는데, 마침 풍백의 거처로 한 사람이 들어왔다.

두 잔의 차가 올려진 작은 쟁반을 들고 들어온 시비 차림에 면사를 하고 있는 여인.

문약란이었다.

한창 중요한 얘기를 하는데 방해를 받았다고 생각한 윤마철이 인상을 쓰고 고개를 돌렸다.

망나니였던 풍백과 같이 다니던 윤마철이었다. 그의 성격 역시 망나니와 다를 것은 없었다.

하지만 욕이라도 한 사발 쏟아 내려던 윤마철은 문약란의 초록빛 눈동자를 보는 순간 넋이라도 나간 것처럼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면사를 쓰면 상대의 얼굴을 제대로 확인할 수 없다. 그렇기에 면사를 벗으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외모에 놀라거나 실망하는 경우가 제법 많다.

그러나 정말 외모가 미칠 듯이 뛰어나다면?

면사 위로 드러난 것만으로도 상대가 얼마나 대단한 미모를 가지고 있는지 충분히 파악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풍백 역시 면사를 사 주면서 이게 얼마나 의미가 있을까 고민했던 것 아니겠는가.

윤마철은 마치 현혹이라도 된 것처럼 문약란의 초록빛 눈동자에서 눈을 떼질 못했다.

가뜩이나 대단한 미녀라는 걸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정도였는데, 문약란의 초록빛 눈동자는 형언할 수 없는 신비감을 조성하며 천상의 선녀가 내려온 것은 아닌지 의심하게 만들었다.

문약란은 탁자에 찻잔을 올려놓으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손님이 오신 걸 모르고 차 준비가 늦었습니다.”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뭐.”

문약란이 차를 내려놓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윤마철이 침을 꿀꺽 삼켰다. 그의 눈에 떠오르는 탐욕이 무엇을 뜻하는지 너무나 명확했다.

“그만 좀 봐라. 뚫어지겠다.”

그 말을 듣고서야 윤마철이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돌렸다.

“허험! 네 시비야?”

“정확히 말하자면 전속 시비라고 해야겠네.”

“설마…… 그런 쪽?”

제법 돈이 많은 가문이나 세가에서 전속 시비를 마치 애첩처럼 대하는 경우는 은근히 흔했다. 그렇기에 윤마철 역시 문약란의 도가 지나친 미모를 보고 물어본 것이다.

풍백은 슬쩍 인상을 썼다.

“내가 언제 여자한테 수작 부리는 것 봤어?”

“……하긴 네가 그런 적은 없었지.”

신기한 일이기는 했다.

그냥 망나니도 아니고 개망나니로 소문난 풍백이 의외로 여자에 대해서는 아주 담백했다.

기루를 간다고 해도 청루에서 기녀가 따라 주는 술을 마시는 정도일 뿐이지, 굳이 옆에 끼고 앉아서 손장난을 치는 수작을 부리지는 않았으니까 말이다.

“그러면 진짜 시비라는 말이야?”

“그렇지.”

“그래? 그러면 내가 네 시비를 데리고 가는 건 어떻게 생각해?”

“……뭐라고?”

어이가 없는 물음에 풍백이 헛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윤마철은 풍백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욕망이 번들거리는 눈으로 문약란에게 물었다.

“네 생각은 어떤가? 내 전속 시비가 되겠다면, 네가 지금 이곳에서 받고 있는 월봉에 두 배…… 아니 세 배라도 주겠다.”

“사양하겠습니다.”

고민할 필요도 없다는 것처럼 바로 대답하는 문약란의 말에 윤마철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너무 당연한 대답이었다.

문약란이 적가상방에 있는 이유는 절대로 돈 때문이 아니었다. 그리고 지금은 단순히 청해상방의 눈을 피하는 것만이 아니라 다른 이유도 생겼다.

그러니 아무리 억만금을 가지고 온다고 하더라도 그녀의 마음이 바뀔 일은 절대 없었다.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인 문약란이 뒤돌아 가려고 했다. 그러자 퍼뜩 정신을 차린 윤마철이 다급히 그녀에게 말했다.

“돈이 적어서 그런 것이냐? 그러면 월봉 다섯 배도 줄 수 있다!”

“저는 돈 때문에 적가상방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니, 그러면 왜 이곳에서 시비로 일하고 있는 거란 말이더냐?”

“그건…….”

문약란은 저도 모르게 슬쩍 풍백을 바라봤다. 그런데 정작 풍백은 문약란이 아니라 윤마철을 살피고 있어서 그녀가 자신을 바라봤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그냥 적가상방이 편해서요.”

말을 마친 문약란은 총총거리는 걸음으로 풍백의 거처를 빠져나갔다.

풍백은 보지 못했지만, 윤마철은 분명히 문약란이 풍백을 바라보는 걸 봤다.

‘저년…… 이 망나니 새끼를 좋아하는구나!’

싸늘한 눈으로 윤마철을 바라보던 풍백이 그런 기색을 지우고 웃음을 터뜨리며 물었다.

“하하하!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제안을 한 거야? 그렇게 마음에 들어?”

“너는 마음에 없어?”

“시비는 시비일 뿐이야. 애초에 적가상방을 이어 갈 나와 어울리는 여자는 아니라는 말이지.”

풍백은 과거 자신이 망나니였을 때를 떠올리며 막말을 던졌다.

윤마철은 그런 풍백을 보며 마음을 다잡았다. 지금은 문약란에 시선을 돌릴 때가 아니었다. 문약란을 데리고 오는 일은 나중에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니까.

“시비는 그렇다고 치고, 오늘 저녁에 식사 할 거야 말거야?”

“귀찮게 하네. 알았어. 그럼 오랜만에 저녁이라도 먹지 뭐.”

풍백의 대답에 윤마철이 눈을 번뜩였다.

“진짜지?”

“알았다니까.”

“그러면 화양루에서 보자. 술은 못 먹더라도 배 속에 기름칠은 제대로 해 주자고.”

“화양루? 거기는 너무 멀잖아.”

윤마철이 말한 화양루는 적가상방에서 한참을 떨어져 있었다. 과장을 조금 보태면 상산현 끝에서 끝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였다.

“대신 거기에 새로운 숙수가 있는데, 요리 솜씨가 아주 그냥 끝장이라고 하더라고. 술도 못 먹는데 맛있는 거라도 먹어야 할 것 아냐.”

“그래? 그러면 어쩔 수 없지. 대신 음식이 형편없으면 계산은 네가 다 하는 거다.”

“귀하신 분 모시는데 음식은 당연히 내가 사려고 했거든.”

윤마철은 친근하게 얘기하며 히죽 웃었다. 하지만 그의 눈빛에서는 무언가 불길한 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리고 풍백은 그런 윤마철을 묘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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