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가상방 개망나니 52화
사람들은 자다가 간혹 지금 자신이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을 깨닫기도 한다.
지금 풍백의 상황이 그랬다.
주변을 둘러본 풍백은 너무나 익숙한 광경에 고개를 끄덕였다.
‘꿈이구나.’
지하에 만들어진 비밀스런 이 공간은 새외에서 활동하던 풍백이 소속된 부대가 회의를 위해 모이던 곳이었다.
작은 화톳불을 사이에 두고 네 명의 사람이 앉아 있었다. 그중에 하나는 당연히 풍백이었고 말이다.
‘그때다.’
그냥 꿈이 아니었다. 이건 정확히 말하자면 꿈이 아니라 풍백의 과거였다.
안대를 하고 있는 대장 서문표가 손에 들고 있던 명령서를 화톳불에 넣자 순식간에 불이 붙어서 재로 변했다.
그걸 가만히 지켜보던 사람들 중 검붉은 피부를 가지고 있는 사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래서 누가 하라는 거요?”
‘망량(魍魎)…….’
사내의 이름이었다.
망량은 물귀신의 일종으로, 검붉은 피부를 가진 어린아이처럼 생기고 말하는 것을 배워 사람을 홀리는 것을 좋아한다.
사내의 이름이 망량인 이유는 검붉은 피부를 가지고 있다는 것과 그가 말로 상대를 현혹하는 능력이 아주 뛰어났기 때문이다.
사실 망량은 자신의 이름이 망량이라는 걸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하다못해 신화에 나오는 신령도 아니고, 일개 귀신의 이름으로 부르니 좋아할 리가 없기는 했다.
때문에 망량은 자신의 이름을 바꾸려고 부단한 노력을 했지만, 오히려 그런 망량의 모습에 대원들은 낄낄거리며 더욱 망량이라 부르기 시작했고, 결국 그의 이름은 망량이라고 굳어지게 되었다.
서문표는 손에 들고 있던 부지깽이를 가지고 화톳불을 들추며 무심히 말했다.
“전부.”
“전부? 여기 있는 우리 대원 전부를 말하는 거요?”
“맞다.”
서문표의 대답에 팔 하나가 없는 사내가 물었다.
“지원은 나오는 겁니까?”
“지원은 없다.”
“이런 임무에 지원이 없다는 말입니까?”
“우리가 전부다.”
“……자살이라도 하라는 겁니까?”
그 말에 망량이 낄낄거리며 웃었다.
“신괴(神怪)가 좋은 말 했네. 딱 맞는 말이야. 그냥 나가서 뒈지라는 말이지.”
신괴는 사람의 얼굴에 동물의 몸을 가지고, 손과 발이 하나씩만 있는 요괴를 말한다. 팔 하나가 없는 사내의 이름이 신괴가 되는 것은 그리 오래 고민할 일도 아니었다.
망량은 대답이 없는 서문표를 보다가 시선을 풍백에게 돌렸다.
“연유(延維), 너는 이번 임무 어떻게 생각해?”
‘연유…… 오랜만에 듣는 것 같네.’
실제로 그리 오래되지 않았지만, 이렇게 꿈에서 이전 이름을 들으니 뭔가 대단히 오래된 기억 같았다.
연유는 머리가 두 개 달린 뱀으로, 이 뱀을 본 사람은 모두 죽었다는 전설이 있다. 후에 초국(楚國)의 어린아이였던 손숙오(孫叔敖)에게 죽임을 당하게 됐다고 한다.
풍백이 이런 이름을 가지게 된 이유는 아무래도 많은 암살 임무와 함께 배신자나 기밀을 누설한 대원까지 처치하는 임무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풍백은 망량의 말에 감정이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지금까지 우리가 수행했던 임무 중 쉬운 일은 없었다.”
“그걸 누가 몰라? 하지만 이번 임무는 이전과 다르잖아.”
“…….”
“지원도 없고, 주둥이로 일하는 놈에 팔 병신 하나, 살귀(殺鬼) 하나로 이번 임무가 가능할 것 같아? 이건 거의 자살 임무라고.”
이미 지난 과거를 바라보는 풍백은 회한이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망량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자살 임무였지.’
이제 누가 말할지 알고 있는 풍백이 먼저 서문표를 바라봤다. 그러자 곧 서문표가 고개를 들며 나지막이 말했다.
“나도 참여한다.”
“……대장이? 그러면 만약의 사태가 벌어지면 정말 아무도 지원이 없다는 말이네.”
“하기 싫으면 안 해도 된다.”
모두가 알고 있듯이 임무를 거부하면 부대에서 제외된다. 그 말은 이 부대에 들어오면서 황궁과 약속된 대가를 받지 못한다는 말과 같았고 말이다.
풍백이 그랬듯이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돌아갈 곳도, 의지할 곳도 없었다. 대신 이곳에서 약속된 기간 동안 임무를 수행한다면 다시 돌아갈 곳이 생길 수도 있었다.
“제기랄…….”
결국 망량은 작게 욕을 내뱉으며 고개를 떨어뜨릴 수밖에 없었다.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조용히 눈을 뜬 풍백은 한참을 가만히 있다가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아직 해가 뜨지 않아 어스름한 하늘을 바라보던 풍백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기분이…… 더럽군.’
풍백에게 기분 좋은 과거는 거의 없었다. 그저 항상 후회와 분노만이 점철된 생활이었다. 그렇기에 이렇게 과거의 꿈을 꾸게 되면 기분이 나빠질 수밖에 없었다.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던 풍백이 문득 그런 생각을 해 봤다.
‘만약…… 그때 내가 임무를 거부했다면…… 지금은 어떻게 됐을까?’
그랬다면 아마 풍백이 목숨을 잃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군부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쫓겨나서 낭인무사로 살아갔을지도 몰랐다.
당연히 지금처럼 과거로 돌아올 수도 없었을 테고…….
머리를 벅벅 긁은 풍백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런 기분으로 다시 잠을 자느니, 차라리 빨리 일어나서 무공 수련을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과거는 과거일 뿐이다. 이제 당면한 현실에 집중해야 할 때였다.
다시 한번 미련이 가득한 삶을 살고 싶은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 * *
내공을 단전으로 갈무리한 풍백이 탁기를 토해 내며 눈을 떴다. 그의 눈에서 흘러나오는 정광이 예사롭지 않게 번뜩이다가 사라졌다.
풍백은 자신의 손에 들린 황금 불상을 바라봤다.
‘정말 신기하네. 어떻게 벌써 오룡봉성(五龍奉聖)의 단계에 오를 수가 있지?’
내공심법을 익히면 한 단계씩 오를 때마다 각각 명칭이 있다.
예를 들면, 처음 내공심법을 배우고 기(氣)를 느끼는 단계는 망아지경(忘我之境)이라 부르게 되고, 이렇게 느낀 기를 하단전에 모으는 것은 응신입기혈(凝神入氣穴)이라 부르게 된다.
이런 것처럼 오룡봉성은 간단히 말하자면 이제 슬슬 중단전(中丹田)을 열리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중단전을 여는 것는 일류고수가 절정고수로 넘어가는 단계 중 하나라고 생각할 수 있다. 물론 중단전을 열었다고 무조건 절정고수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그 기반을 닦았다고는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풍백은 이제 무공을 익힌 지 반년 남짓 지났을 뿐이다. 그렇다면 원래 이렇게 중단전을 여는 것이 쉬운 일일까?
절대 아니다.
평생 무공을 익힌다고 하더라도 절정고수는커녕 중단전도 개방하지 못한 무인이 태반이다.
그런데 겨우 반년 만에 중단전을 개방하려고 한다는 것은 단순히 재능의 영역이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풍백이 이런 성취를 올릴 수 있었던 이유는 오직 하나였다.
‘황금 불상이 이 정도 효과를 가지고 있다니…….’
과거 적웅이 황금 불상은 손에 넣고 황룡사의 무공을 익히며 절정고수로 명성을 쌓는 것을 보고 그의 재능이 대단했을 것이라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아무리 기물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불과 몇 년 만에 절정고수가 된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범주였으니까.
하지만 지금 직접 황금 불상을 이용하는 입장이 된 풍백은 전혀 다른 평가를 내리고 있었다.
‘적웅의 무재는 아주 형편없었던 모양이구나.’
지금 속도라면 풍백은 아마 일 년 후 절정고수가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적웅이 절정고수가 된 것보다 훨씬 빠른 속도였다.
어쩌면 적웅 역시 이것을 알아차리고 있었는지 몰랐다. 그렇기에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이 기물을 사용하는 걸 절대 용납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결국 황금 불상은 바다에 버려 버린 것이고 말이다.
또한 황금 불상은 영원히 사용자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 같지 않았다.
풍백이 실제 사용해 보니, 처음 황금 불상을 가지고 운기를 했을 때보다 절반가량 효율이 떨어져 있었다.
이 정도 속도라면 아마 절정의 경지에 오르는 순간, 황금 불상을 가지고 내공 수련을 하더라도 아무런 이득을 보지 못할 것 같았다.
‘절정고수라고 해도 그게 어디야?’
이미 지금 풍백은 과거 자신의 경지에 도달해 있었다. 거기에 익힌 무공 자체가 비교도 할 수 없는 절학이라는 걸 감안한다면, 이미 과거의 경지를 뛰어넘었다고 하더라도 과언이 아니었다.
생각을 정리한 풍백은 황금 불상은 모종의 장소에 숨기고 거처 밖으로 나갔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무공을 수련하던 풍백은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의 거처로 다가오는 누군가의 인기척을 느끼고 수련하던 것을 멈췄다.
아직 적가상방에서 풍백이 무공을 익히고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은 오직 문약란과 호위무사인 고우길밖에 없었다. 심지어 왕삼조차 모르는 이야기였다.
잠시 기다리고 있자 곧 반가운 사람이 풍백의 거처로 들어왔다.
“여기에 있었구나.”
거처로 들어온 사람은 항주로 호초를 구입하기 위해 떠난 지 한 달도 지난 진덕양이었다.
보아하니 진덕양은 이제 막 적가상방으로 돌아온 것 같았기에 풍백이 조금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여기까지 왜…… 아니, 아버지를 먼저 만나 뵈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원래는 그래야지. 하지만 너한테 먼저 볼일이 있어서 말이야.”
“저에게요?”
따지고 보면 진덕양이 호초를 구입해 온 것도 모두 상행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리고 상행을 마치면 가장 먼저 상방주에게 보고를 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런데 풍백을 먼저 찾아오다니, 대체 얼마나 중요한 일이기에 상방주인 적호경에게 보고도 하기 전에 풍백을 찾아온 것인지 의문이었다.
진덕양은 서둘러 품을 뒤지더니 이내 곧 고급스럽게 매듭이 지어져 있는 서신 하나를 꺼내 들었다.
“이게 뭡니까?”
“나도 모른다. 심오경 점주하고 있는데, 느닷없이 서문세가 소가주가 오더구나. 그러더니 이걸 너에게 전해 달라고 부탁하더라.”
“확인해 보지 않으셨습니까?”
“너에게 주라고 했던 서신을 내가 먼저 읽어 보면 안 되지. 궁금한 것 참느라 힘들었으니, 얼른 서신부터 확인을 해 보거라.”
얼마나 궁금했는지 조바심마저 보이는 진덕양의 모습에 풍백은 미소를 지었다.
어차피 서신 내용에 대해서는 당연히 진덕양과 적호경에게 공유할 텐데, 굳이 끝까지 확인을 하지 않은 것이 진덕양의 평소 행실을 보여 주었다.
서신을 펼친 풍백이 빠르게 내용을 눈으로 읽었다. 거창한 외관에 비해 내용은 그리 많지도 않았다.
“무슨 내용이냐?”
“이거…… 생일 초대를 한 건데요.”
“생일? 누구 생일?”
“서문세가주의 생신이라고 합니다. 날짜를 보니…… 두 달 넘게 남았네요.”
“서문세가주 생신이라고?”
담담하게 말하는 풍백과 달리 진덕양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소리쳤다.
절강성에서 서문세가의 위상은 대단했다. 절강성의 대표하는 정파 중 하나였기에 사람들 사이에서 대단히 큰 명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절강성 남서부 구석에 위치한 상산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서문세가 소가주가 직접 초청장을 보내며 잔치에 와 주길 바란다고 한 것은 과장을 조금 더하면 가문의 영광 수준인 것이다.
“가야겠지요?”
“당연히 가야지! 그러면 안 가려고 했어?”
“흠…… 이런 곳에 가면 적어도 적가상방 체면을 생각해서 선물을 꽤 좋은 걸로 해야 할 텐데…….”
“그건 걱정하지 마라! 내가 형님 멱살을 잡는 한이 있더라도 아주 좋은 물건을 준비할 테니까.”
대체 얼마나 대단한 선물을 준비하려는 건지 진덕양인 잔뜩 전의에 불태우며 말했다.
“저희에게 그런 돈이 어디 있습니까? 지금 상방이 공격적으로 확장 중이라 들어가는 돈도 많은데요.”
“빚을 지는 한이 있더라도 그럴듯한 선물을…….”
“숙부님? 슬슬 정신 차리시죠? 이미 저희는 서문세가에 충분히 베풀고 있는 중입니다. 그런데 무슨 접대라도 하려는 것처럼 선물을 준비합니까?”
서문세가에 넘기는 호초만 하더라도 그들이 얻고 있는 수익은 막대할 것이다. 그런데 굳이 더 잘 보여서 뭘 얻어 오겠다고 고가의 선물을 안겨 주겠는가?
“그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일단 너는 꼭 서문세가를 방문해서 축하해 주도록 하는 거다. 알겠지?”
“향후를 생각하면 당연히 그래야겠지만…….”
“그럼 나는 일단 형님…… 아니, 상방주님께 보고를 하러 가 보겠다!”
“숙부님? 숙부님!”
진덕양은 나는 듯한 걸음으로 풍백의 거처를 빠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