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가상방 개망나니 49화
“우에엥! 소란아!”
수월이가 방으로 들어오는 문약란을 와락 끌어안으며 눈물을 흘렸다.
혹시나 문약란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은 아닌가 싶어서 자신의 방으로 가지도 못하고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던 수월이었다.
문약란은 풍백이 자신에게 해 줬던 것처럼 머리를 쓰다듬고 등을 두드려 줬다.
“괜찮아, 괜찮아.”
한바탕 눈물을 쏟아 낸 수월이가 문약란을 살피며 물었다.
“어디 다친 곳은 없어?”
“안 다쳤어.”
“거짓말! 손목 좀 봐! 이거 왜 이래?”
수월이는 문약란의 손목을 붙잡고 물었다. 그녀의 손목에는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었다. 문영후가 그녀의 손목을 붙잡고 있으면서 생긴 상처였다.
하지만 이제 문영후가 그녀를 아프게 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여기만 좀 그래. 다른 곳은 진짜 하나도 다친 곳이 없어.”
“정말?”
“진짜라니까.”
“다행이다……. 무슨 일이었던 거야? 정말 네 오빠가 맞았어? 나는 무슨 문제가 생긴 것 같아서 도련님한테 너 좀 구해 달라고 했었는데…….”
수월이가 사정하며 자신을 구해 달라고 했던 얘기는 이미 풍백에게 들었다.
문약란에게 수월이는 처음으로 생긴 친구였다. 그렇기에 그녀에게 수월이는 특히 각별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수월이 덕분에 나쁜 일도 당하지 않고, 다시 적가상방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니 수월이에게 너무 고마운 마음이 컸다.
“너 덕분에 살았어.”
“진짜? 다행이다. 오빠가 아니었던 거야?”
그 말에 문약란은 순간적으로 고민하다가 저도 모르게 툭 말이 튀어나왔다.
“응…… 아니었어.”
대외적인 시선 등을 생각해 그 끔찍한 인간을 오라비라 말했어야 했던 문약란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아까는 왜 오라버니라고 했던 거야?”
“……사정이 좀 있었어. 나중에…… 정말 나중에 모두 말해 줄게…….”
지금은 말해 줄 수 없었다. 적어도 청해상방이 없어지거나, 앞으로 청해상방을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날이 오면 편히 말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수월이는 더 이상 이것에 대해 묻지는 않았다. 하지만 아직 그녀의 질문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도련님은? 정말 도련님이 구해 주신 거야?”
그 말에 문약란은 저도 모르게 다급했던 그때가 떠올랐다.
이제 정말 끝이라고 생각했던 바로 그 순간, 풍백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와 함께 온몸에 흐르던 전율은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두근거리며 뛰게 만들었다.
“응…… 도련님이 구해 주셨어.”
“와아! 이제 도련님 완전 다시 봐야겠어! 너를 구하려고 찾아오셨던 거잖아! 완전 멋있다!”
수월이는 모르겠지만, 이것이 벌써 두 번째였다.
납치를 당해 절망에 빠진 그녀를 하늘의 천장(天將)처럼 나타나 구해 줬었고, 이번에는 평생의 악몽과 같은 사람에게서 최악의 절망을 맛보는 와중에 나타나 구해 줬다.
“결심했어.”
문약란은 나지막이 작은 목소리로 말을 흘렸다.
그 말을 들은 수월이 의아한 눈으로 물었다.
“응? 뭐를 결심해?”
“그냥…… 그런 게 있어.”
차마 지금 결심한 것이 무엇인지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아직은 누구한테 말하기 부끄러웠으니까.
* * *
이른 아침.
풍백은 자신의 거처 앞에 있는 공터에 서서 생각에 잠겼다. 그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것은 바로 어제 있었던 유장위와의 싸움이었다.
‘이제 확실히 일류고수라고 할 수 있겠군.’
지금까지는 막연히 자신이 일류고수에 들어섰다고 생각해 왔었다. 하지만 오늘 일류고수인 유장위 직접 손을 섞은 이후에 확신을 할 수 있었다.
오늘 싸움은 모든 것이 풍백이 그린 그림대로 흘러갔다.
여섯 명의 이류무인과 싸울 때는 본신의 능력을 감추기 위해 일부러 고우길의 용천보검을 빼앗아 난파칠식을 사용했었다.
새로 무공을 익히면서 난파칠식을 수련하기는 했다. 그러나 말 그대로 형과 식만 익혔을 뿐, 이전처럼 파고 들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정도만으로도 이류무인을 상대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비록 난파칠식에 맞는 독문 내공심법을 익히지 않았다고 하지만, 과거 자신의 성명절기(成名絶技)였던 난파칠식이었던 만큼 이해도가 남달랐기에 가능한 얘기였다.
또한 아무리 어울리지 않는 내공심법이라고 하나, 난파칠식의 초식 자체는 상승의 무공이었다. 그러니 이류무인이 감히 일류고수가 펼치는 난파칠식을 막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유장위와의 싸움 역시 모두 의도했던 대로다.
풍백은 처음부터 난파칠검으로 상대를 하다가 감당할 수 없다는 듯이 검을 놓치고, 승기를 의심하지 않는 유장위를 상대로 보리패엽수를 이용해 쉽게 승리를 가져올 계획이었다.
유장위가 사용하는 무공이 중검을 기반으로 했다는 것은 예상하지 못했었지만, 오히려 유장위가 중검을 사용했기에 검을 놓치는 것이 더욱 자연스럽게 보였다.
결과는 유장위의 죽음으로 귀결되었고 말이다.
하지만 이것으로 만족할 수 없었다.
풍백은 언제나 싸움 이후에 그랬던 것처럼 복기(復棋)에 들어갔다.
바둑에서만 복기를 하는 것은 아니다. 지금 풍백이 싸움에 대한 복기를 하듯, 세상 모든 일이 복기를 하는 것이 좋았다.
그러면 자신을 돌아볼 수 있고, 어떤 실수를 범했다면 다음에는 그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수 있으니까.
‘음…… 그때 검을 놓치고 나서 바로 장법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몇 걸음 뒤로 물러서며 유장위를 끌어들였다면 어땠을까?’
복기를 하는 풍백은 눈을 감고 어제의 싸움을 다시 떠올리며 직접 몸을 움직였다.
당황하는 것처럼 몇 걸음 뒤로 물러서고, 그런 풍백을 쫓아 끝장을 내려는 것처럼 들어오는 유장위.
거리가 충분히 좁혀졌다고 느끼고 보리패엽수를 사용하여 한 손으로는 유장위의 검을 밀어내고, 다른 한 손으로 유장위의 노출된 가슴을 노린다면…….
‘어쩌면 한 수에 끝날 수도 있겠지만, 조금이라도 변수가 있다면 내가 낭패를 볼 여지가 늘어나겠군.’
절대 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단지 싸움이 조금 지저분해지거나, 좀 더 길어질 여지는 있을지 몰라도 말이다.
말했듯이 풍백은 자신이 일류고수에 올랐다고 평가를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완숙한 일류고수인 유장위를 어제처럼 쉽게 잡을 수 있을 정도로 큰 격차가 날 만큼 고수는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풍백은 유장위보다 무공이 낮았다. 아마 일류고수 초입에 해당할 것이다.
그럼에도 어제 유장위를 쉽게 이길 수 있었던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미리 머릿속에 그렸던 그대로 싸움이 진행되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보리패엽수였다.
보리패엽수는 절정의 무공이다. 오죽하면 불문 무공의 정수 중 하나라고 부르겠는가?
그에 비하여 유장위는 풍백보다 고수일지는 몰라도, 그가 익힌 무공은 보리패엽수에 비하기도 민망한 무공이다. 그러니 심지어 당황한 유장위가 보리패엽수를 상대로 이길 수 있는 가능성은 한없이 떨어지게 된다.
그리고 유장위는 모르겠지만, 풍백은 유장위와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경험이 많았다.
과거의 풍백은 이미 자신보다 고수를 상대로 충분히 많은 싸움을 해 봤고, 실제로 목숨을 빼앗은 경우도 많았다.
‘암살을 하라고 했으면 더 쉽게 죽일 수도 있었겠지.’
풍백은 작전을 수행할 때, 상대와 서로 얼굴을 마주 보고 대결을 하듯 싸우는 것보다 암살을 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그가 온갖 작전들을 수행하면서 대결 구도의 싸움을 즐겨 했다면…… 아마 지금은 어딘가에서 비참하게 죽어 버렸을 것이다.
아무튼 풍백은 유장위와 싸움을 여러 가지 방향으로 복기하며 무공을 수련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한참 무공 수련을 하던 풍백이 우뚝 멈췄다. 누군가 거처로 다가오는 기척을 느꼈기 때문이다.
잠시 후 한 사람이 풍백의 거처로 들어왔다.
대략 삼십대 중반은 넘었을 듯한 사내는 이름은 몰라도 얼굴은 풍백 역시 아는 사람이었다. 적가상방에서 행수를 보좌하는 부행수로 일하는 사람이었다.
풍백에게 다가온 사내가 공손히 허리를 숙이며 인사를 올렸다.
그 모습을 본 풍백은 눈에서 이채를 발했다.
풍백은 적가상방에서 망나니로 통했다.
비록 근래에 들어서는 더 이상 망나니짓을 벌이지 않았고, 청송무관과 협의를 성공하며 아주 조금씩 호의적인 이야기가 나오는 상황이기는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부행수 정도 되는 사람이 풍백에게 공손한 인사를 할 일은 없었다. 대놓고 고개를 홱 돌리지 않은 것만으로 다행이라고 할 정도였다.
그런데 이렇게 다가와 공손히 허리를 숙이다니, 풍백도 조금 놀랄 정도였다.
인사를 마친 사내는 무뚝뚝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마평이라고 합니다. 얼마 전까지 장행수님 밑에서 부행수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네, 오가며 봤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저를 찾아오신 건지…….”
“어제 총관님께서 저를 도련님께 보냈습니다. 이번에 새로 시작할 정육 사업을 제가 담당하고, 총괄은 도련님이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아…….”
바로 어제 얘기를 했었는데 바로 다음 날 아침에 담당자가 정해져서 찾아오다니, 아무리 빠르다고 하더라도 이건 좀 의외였다. 적어도 진덕양이 직접 중간에서 조율하는 기간이 있을 줄 알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불만은 없었다. 오히려 이렇게 되면 준비를 하기가 더 쉬워질 수 있었다.
반면에 공손히 인사를 하기는 했어도 마평은 지금 꽤 불만이 컸다.
평소 평가가 좋았던 마평은 적가상방이 계속 발전해 나간다면 언젠가는 분명 차기 행수가 될 것으로 판단되는 아주 유력한 인재였다. 비록 부행수들 중에서 연차가 낮아서 행수가 되려면 한참 남았지만 말이다.
그런 마평을 부른 진덕양은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던졌다. 새로이 정육을 직접 맡아 취급해 보는 것을 제안한 것이다.
상단의 꽃은 당연히 상행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 가지 품목을 직접 관리 및 생산하는 자리가 낮은 것도 아니다. 실질적으로 상행을 책임지는 행수와 같은 항렬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또한 앞으로 행수 이상의 무언가가 되려면 반드시 품목 관리직을 거쳐야 하기도 했다.
쉬운 일이 아니다. 기존에 있던 품목도 아니고, 새로 신설해야 하는 품목이기에 더 어려울지도 몰랐다.
대신 정육 부분은 성공적으로 품목에 추가할 수 있으면 그에 대한 평가는 더 높아질 것이다.
그런데 진덕양의 얘기를 들어 보니, 이 정육 부분에 대한 제안은 풍백이 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리고 풍백이 직접 일을 처리하지 않을 테지만, 관리 감독에 관한 총괄을 맡게 된다고 했고 말이다.
솔직히 풍백에 대한 얘기를 들은 마평은 그냥 다 집어치울까 고민했었다.
다행히 근래에는 조금 괜찮아지기는 했어도,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하더라도 상산현에서 알아주던 개망나니가 풍백이지 않던가.
하지만 결국 야망이 제법 큰 마평은 진덕양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물론 아직도 불안하기는 했다.
‘하필이면 망나니가 관리 감독을 한다니……. 뭐라도 하는 것처럼 생색낸다고 중간에서 쓸데없는 짓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이런 마평의 마음을 아는지 풍백은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제가 총괄을 한다고 하니 걱정이 많으실 건 알고 있습니다.”
“……아닙니다.”
“솔직히 직접 일선에서 일을 하시던 부행수께서 어련히 잘 알아서 하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정육 부분을 준비하는 일은 매일 한 번씩 보고만 해 주시고 전권을 직접 행사하셔도 됩니다.”
의외의 얘기에 마평의 눈이 살짝 커졌다.
“정말…… 그래도 괜찮습니까?”
“당연하지요. 제가 정육에 대해 알아봤자 얼마나 알겠습니까? 당연히 부행수님이 더 잘 아시겠지요.”
너무 시원시원하게 나오는 풍백의 태도가 불안하면서도 안도감이 들었다.
“믿어 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런데…… 정육 사업을 준비하면서 한 가지 더 준비해 주셨으면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풀려 가던 마평의 얼굴이 순식간에 다시 굳어 갔다.
‘역시나…….’
사람이 어느 정도 위치에 오르게 되면, 그 위치를 만끽하려는 경향이 있다. 모든 사람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망나니라 불렸던 풍백은 당연히 그럴 것 같았다.
마평은 적어도 정육 사업을 준비하기 위해 마련된 자금을 손대지만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풍백이 그런 마평에게 물었다.
“일단 한 가지 물어볼 것이 있습니다.”
“물어보십시오.”
“정육을 준비하면서 물소 고기도 당연히 취급하는 것이겠지요?”
“당연히 취급합니다. 중원 서쪽 지역에서는 다른 품종의 소도 쓰지만, 저희 지역에서는 대부분 황소와 물소를 취급하지요.”
“잘됐군요. 그럼 물소의 뿔은 어떻게 합니까?”
“네? 물소 뿔이요?”
정육 부분 사업을 만드니까 당연히 육질(肉質)에 대해 물어볼 줄 알았는데, 갑자기 뜬금없이 물소의 뿔을 물어보니 조금 이상했다.
“딱히 사용되는 곳은 없습니다. 장식품으로 사용하거나 조각을 해서 파는 사람들도 있고, 악기를 만드는 사람들도 있기는 합니다만…… 정육 쪽에서는 일일이 팔기가 마땅치 않아 대부분은 버리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버린다고요?”
“아! 간혹 중원 동쪽에 있는 조선에서 온 암상들이 물소의 뿔을 구입해서 간다는 얘기는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쪽에 팔기 위해 창고를 짓거나 대여하는 것은 별로 수익이 높지 않아서 대부분은 버린다고 하더군요.”
조선이라는 말에 풍백의 눈빛이 살짝 빛났다.
“그러면 물소 뿔을 싸게 살 수 있겠군요?”
“뭐…… 꼭 필요하시다면 공짜로 얻어 올 수도 있습니다. 애초에 그런 것 하나하나 버리는 것도 돈이고, 인력이라 가져오려고 한다면 얼마든지 구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왜 이런 걸 묻는 것인지…….”
풍백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제가 준비해 주기를 바라는 건 바로 그 물소의 뿔입니다. 큰 창고 하나를 구해서 물소의 뿔을 최대한 많이 구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네? 물소의 뿔을요?”
마평은 이게 대체 무슨 소린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풍백은 이유를 설명할 생각이 없었다. 이것에 대해서 마평이 알아야 될 필요는 전혀 없었으니까.
그저 풍백 혼자만 이렇게 생각할 뿐이었다.
‘다음 단계 준비는 생각보다 수월하겠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