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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가상방 개망나니-47화 (47/313)

적가상방 개망나니 47화

“감히 네놈이…….”

풍백의 말에 딱딱하게 굳어 있던 문영후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더 화가 나는 건, 여섯이나 되는 호위무사가 눈앞에서 죽어 나가는 걸 봤기에 지금 풍백이 한 말이 대단한 위협처럼 들린다는 것이었다.

분노하고 있는 문영후와 달리, 유장위는 냉정하게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감당할 수 없는 고수는 아니다.’

쉽게 풍백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풍백과 싸워서 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도 않았다.

자신은 이미 완숙한 일류고수였다. 지금 풍백이 보인 수준의 무위는 그 역시 충분히 보일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지금 자신이 나서서 풍백과 싸운다는 선택지를 선택할 생각은 없었다.

지금 자신은 단순히 강호를 주유하는 무인이 아니었다. 그가 생각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지는 무조건 문영후의 안전이었다.

풍백이 검을 늘어뜨리고 천천히 다가오는 것을 본 유장위가 한 걸음 나서 문영후의 앞을 가로막으며 말했다.

“이 정도만 하시지요.”

유장위의 말에 풍백은 피식 웃었다.

“이제 와서 그만하자고? 왜? 이제 슬슬 재미있어지는 중인데.”

“이미 청해상방의 무사 여섯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습니까?”

“그게 내 잘못은 아니지. 나는 싸움을 피하려고 충분히 노력했었어.”

그 말대로 풍백은 최대한 싸움을 피하려고 노력했었다. 그러나 결국 싸우게 된 원인은 풍백이 아니었다.

“그럼 끝까지 해보겠다는 것입니까?”

“끝을 볼 생각이 아니었다면 시작도 하지 말았어야지.”

풍백이 직접 나선 순간, 이미 선택할 수 있는 여지는 사라졌다는 걸 이들은 모르고 있었다.

일 년 후에 있을 적가상방의 멸문을 막기 위해서 풍백이 무공을 익히고 있다는 건 최대한 숨겨야 할 사항이었다.

그런데 지금 풍백은 자신의 무공을 드러냈다. 이 비밀을 최대한 오래 가져가려면 저들의 입을 막는 것이 가장 좋았다. 그리고 상대의 입을 막는 가장 쉬운 방법은 하나였다.

이런 상황에 문영후가 나서며 상황을 더 악화시켰다.

“그냥 죽여! 죽여 버리라고!”

문영후는 유장위를 믿었다.

유장위는 청해상방에 있는 모든 무사들 중에 가장 강한 사람이었고, 청해상방이 일을 하면서 무력에 관한 문제가 있으면 매번 해결을 해 왔던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이번에도 유장위는 풍백을 충분히 이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풍백은 입에 거품을 문 것처럼 소리치는 문영후를 바라보며 히죽 웃었다.

“넌 거기 가만히 있어. 조금 이따가 우리 대화 좀 하자고. 근데 그 대화가 그리 즐겁지는 않을 거야.”

그 모습에 섬뜩함을 느낀 문영후가 뒤로 한 걸음 더 물러섰다.

유장위는 어쩔 수 없다는 것처럼 고개를 흔들며 앞으로 나서 검을 멋들어지게 뽑았다.

스르릉!

“최대한 싸움을 피하고 싶었건만…… 물러설 수 없다면 직접 가르침을 내려 줘야겠군.”

“아까부터 삶은 호박에 이빨도 안 들어갈 소리를 하고 있네. 이미 싸움은 벌어졌어. 막으려고 했으면 너희 무사들이 죽기 전에 막았어야지. 그리고 가르침이라고?”

풍백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실소를 흘렸다.

그런 풍백의 모습에 유장위 역시 살기를 담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너무 고마워할 필요는 없다. 대가는 톡톡히 받아 갈 테니까.”

“내가 맞춰 보지. 대가는 내 목숨이다, 뭐 이런 거지?”

“잘 알고 있구나.”

“하여튼 왜 이런 놈들은 뻔하고 흔해 빠진 말을 해서 사람을 졸리게 만드는 건지. 다들 어디서 똑같은 교육이라도 받고 온 건가? 참신함이 없어, 참신함이.”

“졸리게 만들었다니 미안하군그래.”

“그만해. 그냥 넌 아가리 싸물어. 아까부터 입에서 나오는 말이 하나같이 식상하고 재미가 없으니까. 이거나 받아 봐.”

풍백이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곧장 난화보를 펼쳤다.

난화보라는 이름을 보면 대단히 화려한 보법처럼 보이겠지만, 사실 난화보는 화려함보다는 단거리를 빠르게 좁히는 데 더 중점을 둔 보법이었다.

과거에 풍백이 익힌 무공은 대부분 최대한 빠르게, 효율적으로 상대를 죽이는 것을 목적으로 두고 만들어진 무공이었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풍백이 용천보검을 움직여 유장위의 가슴을 찔러 갔다.

그걸 본 유장위는 이미 준비하고 있었다는 것처럼 자신의 검으로 풍백의 용천보검을 쳐 냈다.

카강!

허공에서 불똥이 한 번 튀기며 풍백의 검이 크게 튕겼다.

하지만 풍백 역시 막아 낼 줄 알고 있었다는 듯이 검이 튕기는 힘에 맞춰 몸을 회전하더니 다시 유장위의 상체를 노려 갔다.

한쪽 입술을 끌어올린 유장위가 다시 한번 풍백의 용천보검을 쳐 내려고 했다. 이번에 다시 풍백의 검을 튕겨 내면 그대로 노출될 풍백의 요혈을 노릴 생각이었다.

그런데 유장위의 검이 다가오자 풍백의 용천보검이 가볍게 떨리더니 순간적으로 세 개로 늘어났다. 방금 전 이류무인을 단순에 죽였던 그 한 수였다.

“어림없지.”

가볍게 말한 유장위가 검을 흔들자 그의 검이 조금 일그러진 호선을 그리며 세 개로 늘어난 풍백의 용천보검을 모두 튕겨 냈다.

이류무인의 목숨을 단 한 수에 거둘 수 있을 정도로 위력적인 초식이었으나, 상대는 일류고수인 유장위였다. 풍백이 펼치는 수법은 일류고수를 놀라게 만들 수준은 아니었다.

카가가강!

두 사람의 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하게 장원을 울렸다. 문약란이나 문영후는 두 사람이 움직이는 모습이 너무 빨라 누가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지 알아차리기 힘들었다.

그러나 호위무사는 두 사람의 움직임을 비교적 명확하게 보고 있었다.

‘아…… 도련님이 불리해!’

전체적으로 풍백이 더욱 많은 초식을 펼치며 공세를 이어 나가고 있었고, 유장위는 그 공격을 막아 내며 간간이 약간의 반격으로 풍백을 밀어내는 중이었다.

단순히 두 사람을 보면 풍백이 압도하는 것으로 착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실상은 정반대였다.

풍백의 공세를 막아 내는 유장위는 입가에 미소를 매달고 있을 정도로 여유가 있었다. 그에 비하여 풍백은 유장위가 간간이 반격을 할 때마다 크게 놀란 것처럼 뒤로 훌쩍 떨어졌다가 다시 공세를 펼치고 있었다.

아무래도 유장위와 검이 부딪칠 때마다 풍백의 검이 크게 튕기는 것을 보면, 유장위의 검에 담긴 내공을 풍백이 감당하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또한 풍백의 검법은 굳이 분류하자면 쾌검(快劍)에 가까웠다. 그에 비하여 유장위의 검법은 중검(重劍)이었다.

그러니 풍백은 유장위를 검과 검끼리 부딪치지 않고 속도로 압박하는 것이 유리했다. 하지만 유장위는 작은 움직임만으로도 풍백이 자신의 검로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절묘하게 조절하고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 너무 큰 간극이 보여…….’

같은 일류고수라고 하더라도 동일한 수준일 수는 없었다.

호위무사의 눈에는 유장위가 풍백보다 적어도 한 단계 이상의 고수로 보였다.

이것은 유장위 역시 느끼고 있었다.

‘역시 내 생각대로 한계가 명확하군.’

풍백은 자신의 상대가 아니라는 걸 확인했다. 지금까지 풍백과 싸우면서 모든 것은 자신의 의도하고 안배한 대로 움직이는 중이었다.

더 이상 길게 시간을 끌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유장위가 슬슬 싸움을 끝낼 생각을 했다.

파바박!

잰걸음으로 바쁘게 움직이는 풍백이 굳은 얼굴로 용천보검을 움직였다. 그 역시 지금 상황이 불리하다는 걸 너무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지금 유장위의 목을 노려 오는 풍백의 한 수는 유난히 날카로웠다. 분위기를 바꾸려는 의도로 내공을 잔뜩 집어넣은 것 같았다.

중검을 사용하는 자신에게 내공으로 덤비는 듯한 풍백의 모습에, 유장위는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려 비웃음을 짓고는 검을 움직였다. 그의 검에도 지금까지 펼쳤던 것보다 더욱 강한 내공이 심어져 있었다.

그리고 변수는 없었다.

까강!

귀를 울리는 쇳소리와 함께 풍백이 들고 있던 용천보검이 손에서 벗어나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 정확히 유장위가 노렸던 그대로였다.

유장위는 싸움을 끝내기 위해 막대한 내공을 담은 검으로 풍백의 몸을 향해 베어 갔다.

별다른 변초(變招)도 없었지만, 워낙 절묘한 순간을 노리고 있었고, 무엇보다 검에 실린 경력은 지금까지 펼친 어떤 초식보다 강력했다.

당황한 풍백의 얼굴과 함께 유장위는 승리를 확신했다.

‘이겼다!’

풍백이 다급하게 장법을 펼치려는 것이 보였다.

크게 놀라지도 않았다. 오히려 강호의 경험 많은 무인처럼 병장기를 놓친 상황에서 장법으로라도 대응을 하려고 하는 풍백의 모습이 인상적이라고 느꼈을 뿐이다.

하지만 뭔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아챈 것은, 다급하게 펼쳤다고 생각한 풍백의 장법이 자신의 검과 부딪치는 순간이었다.

쩡!

“컥!”

육장(肉掌)과 철검이 부딪치면 당연히 육장이 베이든지 아니면 잘려 나가야 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 풍백의 육장과 부딪친 유장위의 철검은 마치 거대한 쇳덩이와 부딪친 것처럼 엄청난 반탄력과 함께 손아귀가 찢어질 것처럼 아파 왔다.

심지어 단전이 아릿해져 오는 느낌이 내상을 입을 것 같았다.

당황한 유장위가 상황을 정리하기 위해 뒤로 물러서려고 했다. 그러나 그가 물러서는 것보다 더욱 빨리 풍백이 그를 쫓아오며 두 손을 움직였다.

풍백의 손은 허공에서 분열하듯이 늘어나더니 마치 떨어지는 낙엽처럼 흔들리며 유장위에서 쏟아졌다.

그 현묘한 수법에 대경실색한 유장위가 미친 듯이 검을 휘두르며 떨어지는 장영(掌影)을 막아갔다.

까가가가강!

요란한 쇳소리가 콩 볶는 소리처럼 울려 퍼졌다.

유장위의 얼굴은 순식간에 핼쑥하게 변했다.

‘속았다! 이놈은 검법이 아니라 장법을 배운 놈이었어!’

처음부터 장법을 배웠다는 걸 알았다면, 이렇게 접근할 수 있도록 여지를 주지도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처음부터 검법을 보여 줬던 것이 자신을 함정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작업이었을지도 몰랐다.

풍백의 장영을 한 번 쳐 낼 때마다 검을 통해 전해지는 풍백의 무지막지한 내력에 단전이 꾸준히 울리더니, 결국 막대한 내상을 입고 말았다.

“쿨럭!”

장영을 모두 막아 낸 유장위가 기침과 함께 피를 토했다.

하지만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풍백의 쌍장이 기묘한 움직임을 보이더니 가슴 앞에서 꽃봉오리 형상을 만들었다가 펼쳐지며 다가왔다.

그의 쌍수가 만들어 낸 모양은 마치 옛날 불경을 적었다던 다라수(多羅樹)의 나뭇잎처럼 생겼었다.

그 기묘한 모습에 유장위는 문득 불문에서 전설처럼 내려오는 황룡사의 어떤 무공을 떠올렸다.

‘설마 저건…….’

막대한 내상으로 피할 능력도 없던 유장위는 풍백의 쌍장을 그대로 가슴에 얻어맞았다.

쩌억!

가슴에 직격을 당한 유장위가 휙 날아오르더니 오 장은 족히 날아가 벽에 부딪치며 나동그라졌다. 아마 벽이 없었다면 더 멀리 날아갔을 것 같았다.

“끄르륵…….”

칠공에서 피를 흘리는 유장위의 모습은 누가 보더라도 곧 숨을 거둘 것처럼 보였다.

그런 유장위가 다 죽어 가는 목소리로 힘겹게 물었다.

“끄륵…… 보리…… 패엽…… 수(菩提貝葉手)……?”

황룡사 삼대절공 중 하나인 보리패엽수는 불문 무공의 정수 중 하나라는 평가를 받는 전설과 같은 무공이었다.

특히 보리패엽수 특유의 다라수잎 모양을 만드는 쌍수의 움직임 등은 불문무공을 익히는 사람은 물론이고, 강호에 어느 정도 견문이 있다는 사람이라면 모를 수가 없을 정도로 유명했다. 단지 직접 본 사람이 없을 뿐.

풍백은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숨길 이유는 없었다. 어차피 이곳에 남아 있는 사람 중 풍백이 무공을 익힌 사실을 외부에 언급할 사람이 없었으니, 그가 무슨 무공을 익혔든지 무슨 상관이겠는가?

‘상대의 무공 수위조차 제대로 판단하지 못했다니, 너무 편하게 지냈던 거야. 그러니 이렇게 죽는 거고.’

유장위는 자조 섞인 웃음을 지으며 죽어 갔다.

하지만 그는 모르고 있었다. 그가 풍백의 무공 수위를 알아보지 못했던 것이 아니라, 풍백이 딱 의도했던 것만 보였기에 알아볼 수도 없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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