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가상방 개망나니 46화
‘좆됐다!’
풍백의 뒤에 있던 호위무사가 문영후가 내리는 명령을 듣자마자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이었다.
두 번째로 든 생각은…….
‘도망칠까?’
였다.
하지만 지금 도망친다면 살 수 있을까?
바로 문 앞에 자신이 타고 온 말이 있기는 했다. 그러니 밖으로 나갈 수만 있다면 살 수 있는 확률이 대폭 높아졌다.
그러나 문제는 유장위였다.
만약 유장위가 일류고수라면 이제 이류무인 수준인 자신은 대문을 넘어가기 전에 목이 떨어질 것이다.
그렇다면…… 어차피 죽는다면…… 적어도 발버둥이라도 쳐 보는 것이 낫지 않을까?
거기다가 풍백은 망나니였던 과거와 달리 지금은 아주 놀라운 능력을 보여 주고 있었다. 또한 자신을 꽤 존중해 주고, 심지어 부수입도 손 크게 챙겨 줬었다.
그러니 어차피 죽을 거라면 풍백을 보호하다 죽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챙!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면 용천보검을 뽑은 호위무사가 크게 소리쳤다.
“제가 막겠습니다! 어서 도망치십시오!”
‘실패했네.’
문영후가 명령을 내리는 순간 풍백이 가장 먼저 떠올린 생각이었다.
그래도 혹시 이 정도면 극단적인 상황에 처하기 전에 서로 한 발 물러설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다.
이전에 암향거에서 문약란의 호패까지 제작했던 것도 이런 상황에 처할 것을 염두에 두고 만약을 대비해 준비했던 것이고 말이다.
하지만 문약란에 대한 집착이 얼마나 강했는지, 문영후는 안전한 길보다는 약간의 위험을 감수하는 길을 선택하기도 한 것이다.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는 것 같았다.
그런데 갑자기 호위무사가 크게 소리치며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것이 아닌가.
“제가 막겠습니다! 어서 도망치십시오!”
평소에 호위무사에 대해 크게 신경 쓰지 않았던 풍백이었다. 오죽하면 아직까지도 호위무사의 이름이 뭔지도 몰랐다. 그저 부를 일이 있으면 무사님이라고 불렀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도망을 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시간을 벌어 주려고 하다니.
이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이 정도면 왕삼 정도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조금은 더 믿어도 될 것 같네.’
풍백은 호위무사의 뒤에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문영후를 바라보며 소리쳤다.
“정말 시간이 되겠습니까? 내가 누구에게 일을 맡겼는지 모를 텐데요. 그러다가 잘못하면 청해상방에도 큰 문제가 생길 텐데, 그런 위험을 감수할 생각입니까?”
그 말에 대답한 것은 유장위였다.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어차피 포도아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되니까요. 아침이 됐을 때는 현상 수배가 붙는다고 했으니, 오늘 저녁 하루만 지키고 있으면 지시를 받은 놈이 알아서 올 겁니다.”
“과연 그럴까요? 포도아문으로 직접 가지 않아도 신고할 수 있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답니다.”
“그러겠지요. 하지만 아가씨를 찾기에도 바빴을 텐데, 과연 그런 방법까지 고려해서 일을 맡겼을 시간이 있었을까요?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만.”
말을 마친 유장위가 슬쩍 미소를 지었다.
유장위는 단순한 호위무사가 아니다. 문영후의 심복이기도 했다.
그런 유장위의 말 때문인지 문영후는 방금 전보다 더 편해진 얼굴로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내 생각도 같아. 어쩌면 포도아문에 신고를 하라고 사람을 준비했다는 말도 거짓말일지 모르는 일이지.”
‘눈치가 빠르네.’
실제로 풍백은 사람을 구해 놓지 않았다. 문약란을 찾기도 바쁜데, 언제 그런 수를 준비해 놓는다는 말인가?
하지만 풍백은 뻔뻔하게도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 이 정도 수는 숨 쉬듯이 할 수 있는 풍백이었다.
유장위는 더는 시간을 끌고 싶지 않은지, 곧장 풍백 앞을 가로막고 있는 호위무사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러자 무사 둘이 나서며 병장기를 뽑았다.
두 사내는 땅을 박차고 호위무사를 향해 달려들었다.
“흐아압!”
호위무사는 호기롭게 기합과 함께 두 사내를 향해 용천보검을 휘두르며 두 사내를 맞이했다.
하지만 호위무사는 불과 몇 초식도 나누기 전에 점점 손이 어지러워지고 있었다.
정면의 사내가 내지른 검을 힘겹게 막아 냈다고 생각한 순간, 뒤에서 날아오는 또 다른 검에 기겁을 하며 몸을 날렸다.
“으헉!”
이미 피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는 듯이 빠르게 쫓아와 연이어 펼쳐 내는 사내의 공세에 호위무사는 반격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피하거나 막기에 급급했다.
호위무사와 싸우고 있는 두 사내는 모두 이류무인 수준은 충분히 되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전문적으로 합격진(合擊陣)을 배운 것 같지는 않지만, 서로 제법 손을 맞춰 본 사람들 같았다.
서로 초식을 펼치는 데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한 사람이 앞으로 나서면, 나머지 한 사람은 호위무사의 옆이나 뒤로 돌아가서 슬쩍 검을 찔러 넣었다.
이 정도만 하더라도 이류무인 수준인 호위무사가 당해 낼 방법이 없었다.
호위무사가 일방적으로 밀리고 있다는 건 굳이 무인이 아니라 문약란이 보더라도 알 수 있었다.
눈물로 얼룩진 얼굴의 문약란이 풍백에게 소리쳤다.
“빨리 도망가세요. 제발…….”
풍백은 그런 문약란을 잠시 바라보며 머리를 긁적이더니 문영후에게 말했다.
“정말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그건 내가 물어봐야 할 질문인 것 같은데? 아니지. 조금 있다가 너를 내 앞에 무릎을 꿇리고 물어보면 되겠군. 이젠 누가 감당을 해야 하지? 라고 말이야.”
말을 마친 문영후가 턱짓을 하자 무사 하나가 풍백을 향해 나서려고 했다. 그걸 본 풍백은 깊은 한숨을 내쉬더니 시선을 돌려 호위무사를 바라봤다.
호위무사는 두 사내의 공세에 완전히 밀린 상태였다. 아직 치명상은 입지는 않았으나, 몸 이곳저곳에 상처가 난 것을 보면 그것도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았다.
‘어쩔 수 없네.’
풍백이 가볍게 발을 굴렀다. 그러자 그의 신형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호위무사를 뒤에서 공격하는 사내를 향해 쇄도했다.
“피, 피해!”
깜짝 놀란 유장위가 소리쳤지만, 사내는 뒤를 돌아보기도 전에 풍백에게 뒷덜미를 붙잡히고 말았다.
우드득!
가볍다면 가벼운 소리가 들리고 풍백에게 뒷덜미가 잡힌 사내는 그대로 목뼈가 부러지며 절명하고 말았다.
풍백은 기묘한 보법으로 호위무사에게 다가가더니 가볍게 발을 날려 호위무사 손에 들린 용천보검의 검두를 툭 걷어찼다.
그러자 호위무사의 손에서 검이 빠져나와 빙글 돌더니 너무나 자연스럽게 풍백의 손으로 들어갔다.
이 모습이 얼마나 부드럽게 연계가 되었는지, 마치 호위무사가 풍백에게 자신의 손에 들린 용천보검을 알아서 건네주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절정의 공수탈백인(空手奪白刃)!’
강호나 전장에서는 모종의 사건으로 인하여 병장기가 없는 상태로 병장기를 들고 있는 적을 상대해야 하는 경우가 생길 수 있다. 이런 경우에 상대의 손에 있는 병장기를 빼앗는 방법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것이 공수탈백인이라는 수법이다.
그런데 강호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공수탈백인이지만, 의외로 이에 능통한 사람을 찾기는 어렵다.
공수탈백인은 굳이 따지자면 강호에서 잡기(雜技)에 들어가는 것이라, 이런 잡기에 시간을 소모하느니 자신의 본신무공에 신경을 쓰는 것이 훨씬 이득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풍백이 펼친 공수탈백인은 충분히 경지에 들었다고 할 정도로 대단했다.
호위무사를 향해 공세를 펼치던 사내는 갑자기 불쑥 튀어나온 풍백이 소름 끼치도록 깔끔한 공수탈백인으로 검을 빼앗으며 나타나자, 깜짝 놀라며 뒤로 물러서려고 했다.
풍백은 그런 사내를 향해 검을 일직선으로 찔러 갔다.
빠르기는 하나 너무 단순한 움직임에 사내는 일단 풍백의 검을 쳐 내고 다시 물러서려고 했다.
그런데 사내의 검이 움직이기가 무섭게 풍백의 검이 흔들리는가 싶더니 검이 세 개로 분열하는 것이 아닌가.
“허억!”
소스라치게 놀란 사내가 황급히 피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미 그때에는 풍백의 검이 사내의 가슴에 파고들고 있었다.
푸욱!
“끄어…….”
심장을 관통당한 사내는 곧 기묘한 신음성과 함께 그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장내에 싸늘한 정적이 흘렀다.
일초반식도 모를 거라 생각했던 풍백이 보여 준 한 수는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입도 벙긋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맙소사…… 도련님이 무공을 할 줄 안다고?’
호위무사는 멍하니 풍백을 바라봤다.
평소에 같이 다니며 풍백이 단련하는 것을 몇 번 지켜봤었다. 하지만 그가 봤었던 거의 대부분은 그저 일반인이 몸을 단련하는 것처럼 보였을 뿐이다.
그런데 지금 풍백이 펼친 검법은 호위무사는 꿈에서나 그렸을 법한 고급 검법이었다.
정작 풍백은 이런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펼치는 난파칠식(蘭破七式)인데 생각보다 훨씬 보리항마선공하고 잘 어울리네.’
난파칠식은 풍백이 군부에서 배운 검법이었다. 절정의 무공이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꾸준히 수련하면 적어도 일류고수 수준은 될 수 있는 검법인 것이다.
원래 어떤 무공이든지 독문심법을 배워야 검법이나 권법 등이 제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
지금 풍백이 펼친 난파칠식도 마찬가지였다. 과거의 풍백이 난파칠식을 펼쳤을 때는 방금처럼 세 개의 잔상이 아니라 네 개의 잔상까지 만들어 낼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정도도 나쁘지 않았다. 무엇보다 보리항마선공의 웅혼한 내력이 깃들어 검에 실리는 경력 자체는 더욱 강해졌다.
검을 늘어뜨린 풍백이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는 얼굴로 물었다.
“계속 해볼 생각입니까?”
그 모습에 문영후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죽여! 저놈을 죽이라고!”
문영후의 명령이 떨어지자 유장위가 남은 네 명의 무사들에게 눈짓했다. 그러자 네 명의 무사들이 잔뜩 굳은 얼굴로 풍백을 포위하듯이 포진하기 시작했다.
무사들 역시 풍백이 펼친 난파칠식을 직접 봤다. 그들 중에 누구 하나 풍백을 혼자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네 명의 합공을 한다면 얘기는 조금 다를 수 있었다. 특히 강호의 문파도 아니고, 상방의 후계자인 풍백이 절대 경험이 많지 않을 거라는 판단도 있었다.
풍백은 자신을 네 방위를 점하고 서는 무사들을 보며 혀를 찼다.
“쯧쯧…… 옳은 선택이 아닌데.”
무사들은 풍백을 향해 검을 뽑거나 장법, 권법을 펼칠 준비를 하려고 했다.
그러나 풍백은 이들의 준비가 끝날 때까지 기다릴 마음을 추호도 없었다. 과거 배웠던 훈련에 따르면 선수(先手)를 점한다는 건 승기(勝機)를 잡을 가장 결정적인 방법 중 하나였으니까.
몸을 활처럼 휘었던 풍백이 땅을 박차고 후방을 점한 무사를 향해 쏘아졌다.
“헉!”
뒤에 서 있던 무사는 풍백이 순식간에 근접하며 팔꿈치로 자신의 얼굴을 노리자, 황급히 옆으로 피하려고 했다.
하지만 풍백이 쇄도하는 속도에 비해 그가 피하려고 움직이는 속도는 너무 느렸다.
퍼걱!
머리통이 박살 난 무사가 절명하며 그대로 널브러졌다. 풍백은 시간을 지체하지 않고 바로 난화보(亂花步)를 펼쳤다. 난화보 역시 과거에 난파칠검과 함께 배웠던 보법이었다.
순식간에 동료 하나가 죽는 것을 무사들이 당황하고 있을 때, 좌측에 있던 무사에게 난화보를 펼쳐 빠르게 다가간 풍백이 난파칠검을 펼쳤다.
“어림없다!”
무사가 자신의 도를 뽑아 자신의 상체 요혈을 노리는 풍백의 검을 쳐 내려고 했다.
하지만 그건 무사의 실수였다.
까강!
시퍼런 불꽃과 함께 무사의 도가 튕겨나갔다. 풍백의 검에 실린 웅혼한 내공은 무사가 감당할 수준이 아니었던 것이다.
도가 튕겨져 나가는 바람에 상체가 훤히 드러난 무사의 목을 풍백이 검이 베고 지나갔다.
서걱!
“멈춰라!”
남은 두 무사가 동시에 달려들며 풍백의 상체와 하체를 동시에 노려 갔다.
풍백은 비웃는 것처럼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리더니, 바닥에 깔려 있던 청석을 발 앞꿈치로 연신 찼다.
두 무사는 무시무시한 속도로 암기처럼 날아오는 청석 조각을 감히 경시하지 못했다. 귀에 들리는 소리만 들어 봐도 청석 조각에 실린 힘이 대단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파바바박!
미친 듯이 검과 주먹을 휘두르며 청석을 막아 낸 두 사람이 일그러진 얼굴로 풍백을 바라봤다. 그런데 그들이 바라본 곳에는 이미 풍백이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의 귀에 섬뜩한 소리가 들렸다.
서거걱!
그것을 끝으로 기울어지는 세상 속에서 자신의 뒤에 서 있는 풍백과 목이 잘린 자신들의 몸을 본 두 무사는 그대로 숨을 거뒀다.
검을 털어 묻어 있던 피를 뿌린 풍백이 물었다.
“두 번째로 묻겠는데, 정말 감당할 수 있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