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가상방 개망나니 45화
뭐가 이득인지는 굳이 계산할 필요도 없었다.
이대로 눈만 감으면 청해상방이 적가상방을 상대로 날을 세울 일은 없을 것이다. 모든 일이 잘 풀리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풍백이 나선다면 적가상방은 청해상방이라는 부담스러운 적이 생길 가능성이 대폭 높아진다.
다시는 부끄럽지 않게 살겠다고 했었지만, 너무나 달콤한 유혹이었다. 눈을 한 번 감는 것만으로 치명적일 수 있는 적을 피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문약란의 슬퍼 보이는 눈동자가 풍백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망할…… 어쩔 수 없지.”
혀를 찬 풍백은 빠른 걸음으로 거처로 들어가 무언가를 챙기고, 다시 발걸음을 돌렸다.
문약란을 구하기로 했다.
과거로 돌아오기 전의 풍백이었다면 별다른 고민도 하지 않고 문약란을 구하지 않는 방향의 선택을 했을 것이다.
당연했다.
그게 이득이 되는 방향이니까.
하지만 지금은 그때와 달랐다. 그때는 선택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고, 지금은 스스로 생각하여 선택할 수 있었다.
그리고 풍백은 문약란을 구하는 방향으로 선택했고 말이다.
이후에 청해상방과 벌어질 일이나 관계는 잊기로 했다. 다행이라면 청해상방이 적어도 절강성에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는 곳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든 일을 풀어 갈 여지는 있을 것이다.
말을 타고 가기 위해 마구간으로 가다 보니 호위무사가 무언가 고민하는 것처럼 말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아마도 풍백이 이번에 준 은자를 가지고 말을 살 고민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어? 도련님?”
호위무사가 풍백을 보고 마구간에는 무슨 일이냐는 시선을 던졌다. 호위무사를 본 풍백은 마침 잘됐다는 듯이 말했다.
“바쁘시오?”
“아닙니다. 이제 들어가서 쉬려고 했습니다.”
“그러면 나를 좀 도와줄 수 있겠소?”
“그럼요. 그런데 무슨 일이신지…….”
“소란이에게 문제가 생겼다는 것 같소. 그래서 지금 찾으러 가려고 하는데,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같이 갔으면 해서. 일당은 섭섭지 않게 챙겨 드리겠소.”
“도련님이 가자고 하시면 당연히 가야지요!”
상산현 인근은 적가상방의 텃밭이었다. 그러니 문제가 생겨 봐야 얼마나 큰 문제겠는가 싶었는지 호위무사는 흔쾌히 승낙했다.
말을 가지고 나온 두 사람은 서둘러 적가상방을 나왔다.
수월이는 문약란을 태운 마차가 서쪽으로 갔다고 했다. 그렇다면 아마 강서성을 지나 광동성으로 가는 관도를 따라갔을 것이다.
늦은 시간에 밤낮으로 달리지는 않았을 것이니, 관도 주변으로 자리 잡고 있는 객잔을 유심히 살피면 될 것이다. 객잔에 마차가 있으면 확인하면 될 것이고 말이다.
두 사람이 탄 말이 관도를 빠르게 달렸다.
호위무사는 풍백의 뒤를 따라 말을 달리며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희한하네. 말 타는 법은 또 언제 배운 거야? 저 정도면 나보다 더 잘 타는 것 같은데?’
그가 알기로 풍백은 단 한 번도 말을 타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말을 타야 될 정도로 멀리 가야 한다면 마차를 탔던 것이 풍백이었으니까.
그런데 지금 뒤에서 보기에 풍백은 어지간한 사람은 비교도 하지 못할 만큼 익숙하게 말을 타고 있었다.
풍백은 호위무사가 자신을 보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관심도 없었다. 그저 관도를 달리며 보이는 객잔에 마차가 있는지만 확인하며 빠르게 달리고 있었다.
상산현을 제법 멀리 떠나왔지만 마차는 보이지 않았다.
‘이상하네. 설마 복건성 쪽으로 방향을 바꾼 건가?’
청해상방 사람이 노숙을 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 강서성으로 향하는 관도에는 한동안 객잔이 나오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말머리를 돌려야 하나 고민하던 풍백의 눈에 장원 하나가 들어왔다. 작은 장원이었고, 간혹 사람들이 단기간 돈을 주고 빌려서 쓰는 그런 곳이었다.
작은 장원은 담장마저 그리 높지 않았는데, 그래서 그런지 마차의 윗부분이 슬쩍 보이고 있었다.
‘저기구나!’
풍백은 고삐를 당겨 말이 장원으로 향하게 방향을 바꿨다.
장원에 도착한 풍백이 말에서 내리자 호위무사가 급히 그를 따라 말에서 내리며 물었다.
“이곳에 있습니까?”
“확인을 해 봐야겠소.”
장원의 대문으로 다가간 풍백은 기세 좋게 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
탕! 탕! 탕! 탕!
“여기 내 시비가 있다고 하던데, 맞으면 문이나 열어 주시구려!”
* * *
작은 장원이었기에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풍백의 목소리는 당연히 문영후와 문약란에게도 똑똑히 들렸다.
“이것 참…… 흥미롭다고 해야 되나? 스스로 죽을 자리를 찾아오는 것도 아니고.”
“적 공자님께 손을 대면 나도 죽겠어!”
“그게 아니지. 네가 스스로 몸에 생채기라도 내면 적풍백이라는 놈의 눈알을 네 앞에서 뽑아 주지. 죽는다고? 그러면 적풍백이라는 놈은 차라리 죽여 달라고 할 때까지 고문을 할 거야.”
섬뜩한 문영후의 말에 문약란의 턱이 덜덜 떨렸다. 그 모습을 본 문영후는 웃었다.
“그래도 여기까지 왜 찾아왔는지 궁금하니, 무슨 얘기를 하나 들어 보러 나가 볼까?”
“…….”
“너도 따라 나와. 같이 들어 보자고.”
문영후는 문약란의 손목을 거칠게 쥐고 끌어당기며 방에서 나왔다.
심복인 유장위를 비롯한 여섯 명의 무사들이 조용히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을 향해 문영후가 가볍게 턱짓을 하자 무사들 중 하나가 문을 열었다.
풍백이 장원으로 들어왔다. 그의 뒤를 따라 들어오던 호위무사는 여섯 명의 무사와 유장위를 보고 흠칫 놀랐다.
‘고수다!’
유장위가 얼마나 고수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에게서 느껴지는 강렬한 기세만 보더라도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다른 여섯 무사들 역시 하나하나가 자신과 비교해도 크게 떨어지지 않는 수준이라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
짭짤한 보수를 생각하며 가벼운 마음으로 나왔는데, 어쩌면 제 발로 죽을 자리를 찾아온 것은 아닌가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안으로 들어온 풍백의 시선은 가장 먼저 문영후에게 닿았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문영후의 눈이었다. 그리고 풍백은 과거에 훈련을 받았던 것처럼 그의 눈동자를 읽었다. 그리고 의외의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정욕(情慾)?’
문영후에게서 느껴지는 정욕이 누구를 향한 것인지, 굳이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심지어 문영후가 무슨 짓을 하려고 했었는지, 그의 옷고름이 살짝 풀어져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풍백은 문영후를 지나쳐 문약란에게 시선이 닿는 순간 환하게 미소를 보였다.
“역시 소란이가 여기에 있었구나. 이쪽으로 와라.”
풍백의 말에도 문약란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참담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제발 그냥 도망쳐요!’
마음속으로는 이렇게 외치고 있었다. 감히 입 밖으로는 외칠 수 없었다. 혹시라도 자신의 외침이 신호가 되어 문영후의 무사들이 그를 죽일지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왜 그러고 있어? 빨리 이쪽으로 와.”
“누군데 내 동생을 소란이라고 부르는 건가?”
풍백의 시선이 다시 문영후를 향했다. 문영후는 여유로운 미소를 짓고 서 있었다.
“그쪽은 누구신지?”
“먼저 자기소개를 하는 것이 예의인 것 같지만…… 뭐, 아무래도 좋으니 내 소개를 먼저 하지. 나는 광동성 청해상방의 소방주인 문영후라고 한다.”
문영후의 소개를 들은 풍백은 눈에서 이채를 발했다.
‘심지어 정욕을 보인 놈이 남매라고?’
풍백은 이런 자신의 생각을 숨기고 자연스럽게 자기소개를 했다.
“적가상방의 적풍백입니다.”
“아! 내 동생이 잠시 시비로 일하면서 시중을 들었다는 그 사람이군.”
문영후는 뒷짐을 지고 오만한 모습으로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비웃듯이 말했다.
“가출한 아이를 돌려보내지는 못할망정 고용하고 있었다는 것은 가족의 입장에서 쉽게 용서하기 힘든 일이야.”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몰랐다고 할 생각인가? 간이 배 밖으로 나왔군. 절강성에 있는 쥐꼬리만 한 상방이라서 청해상방이 어떤 곳인지 모르는 모양이야?”
“청해상방. 광동성에서 다섯 손가락에 꼽히는 상방으로 주로 대양무역을 하고 있음. 천축에서 대량으로 가지고 들어오는 향신료는 광동성에서 가장 많은 양을 취급 중. 여기 계신 문영후 공자께서는 제법 평판이 좋더군요. 능력도 있고, 사람에게 인자하다는 말까지 있으니까 말입니다.”
길게 말을 했던 풍백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청해상방이 얼마나 대단한 곳인지는 잘 알고 있습니다. 여기에 싸우자고 온 것도 아니고요. 무언가 착오가 있는 것 같아서 왔을 뿐입니다.”
“착오? 무슨 착오를 말하는 것이지?”
“모르시겠습니까? 소란이는 문 공자님의 동생이 아닙니다.”
잠시 이게 무슨 말인가 싶은 얼굴로 바라보던 문영후가 이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푸하하하! 이게 무슨 소리지? 그러면 내가 지금 눈앞에 동생을 두고도 알아보지 못한다는 말인가?”
“하하하! 참 이상하죠? 그런데 세상에는 참 이상한 일이 자주 일어나는 것 같더군요.”
“터무니없는 말이라 굳이 물어보고 싶지도 않지만, 적어도 증거 정도는 있겠지? 만약 증거도 없이 그런 허튼소리를 한 것이라면 적가상방은 청해상방의 분노를 감당해야 할 거야.”
여전히 정욕이 가득한 눈으로 살기마저 담은 문정후가 풍백을 노려봤다.
“당연히 그런 것이 있어야죠. 이것을 확인해 보시죠.”
풍백은 문약란을 찾기 위해 출발하기 전, 거처에서 챙겼던 물건을 문영후에게 가볍게 던졌다.
그러자 유장위 중간에 그것을 낚아채서 이리저리 확인을 하기 시작했다.
풍백이 던진 것은 호패였다.
“적가상방에서 일하기로 하면 신분 확인은 필수입니다. 특히 소란이 같은 경우는 외지인이라 만약을 대비해 호패를 받아 놨었죠.”
“이름 소란, 십칠 세, 절강성 천태현(天台縣)?”
작게 호패에 적힌 글자를 읽은 유장위는 문영후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호패가 진짜라는 걸 알려 줬다.
당연히 진짜였다.
풍백이 처음 문약란을 데리고 상산현으로 돌아오다가 구주현에 멈췄을 때, 암향거에 가서 직접 받아 온 호패였다.
암향거에서 만들어진 호패는 절대 위조가 아니다. 어차피 암향거 자체가 황궁에서 만든 곳이니, 이렇게 호패를 만들게 되면 명부에도 당당히 기록되게 되어 있었다.
문정후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 되었다.
방금 전까지 문약란과 직접 대화까지 했다. 그런데 뻔뻔하게 문약란이 아니라며 말하는 풍백의 모습에 화가 날 정도였다.
“어디서 사기를 치려고!”
“이상하다 싶으면 관부에 가서 확인을 해 보시지요. 호패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뭐라고?”
“참고로 만약 이대로 소란이를 데리고 간다고 하면 나는 곧장 포도아문(捕盜衙門)으로 달려갈 것입니다. 그러면 관부에서는 범인이 특정이 된 상황이니, 광동성에 있는 관부와 연계하여 안타깝게도 청해상방을 조사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납치 사건이 이번이 처음인지, 다른 여죄(餘罪)는 없는지 말입니다.”
상방을 운영하면서 불법이 없는 경우는 찾기 힘들다. 상행을 하며 만들어진 온갖 관례(慣例)는 기본적으로 불법인 경우가 대부분이니까.
설마 이런 식으로 나올 거를 몰랐는지, 문영후의 얼굴이 굳었다.
풍백은 여전히 웃는 얼굴로 문약란에게 말했다.
“거기서 뭐하고 있어? 어서 이쪽으로 오지 않고. 계속 끌려가고 싶은 거야?”
“아, 아니요…….”
“그러면 빨리 이쪽으로 와.”
문약란은 여전히 굳어 있는 문영후를 잠시 살피다가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문약란이 두 번째 걸음을 내딛기도 전에 문영후가 그녀의 손목을 낚아챘다.
“어딜 그렇게 급하게 가시나?”
문영후는 언제 그랬냐는 것처럼 얼굴이 풀어진 상태였다. 그리고 문약란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서는 정욕과 분노, 질투가 뒤섞인 광망이 쏟아지고 있었다.
문영후가 풍백을 보며 싸늘하게 말했다.
“제법 능력이 좋구나.”
“딱히 그런 것은 아니지요. 그저 잘못 알고 있던 것을 바로잡았을 뿐입니다.”
“그런가? 그런데 만약에 내가 너를 조용히 여기서 처리해 버리면 포도아문에는 어떻게 신고를 할 생각인데?”
명백하게 죽이겠다는 말이었다. 이제 슬슬 노골적으로 살의를 드러내고 있는 문영후였다.
그런 문영후를 보며 풍백은 여전히 환히 웃으며 말했다.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상방에서 출발하며 제가 두 시진 안으로 돌아오지 않으면 포도아문으로 달려가라고 시켜 놓고 왔지요. 어이쿠! 여기까지 오느라 제법 시간 소모가 많았으니, 지금부터라도 부지런히 돌아가야 포도아문으로 신고가 들어가지 않을 것 같군요.”
“…….”
“저희가 쥐꼬리만 한 상방이긴 하지만, 적어도 이 지역에서는 제법 유지에 들어갑니다. 장담하건대 제가 돌아가지 않으면 늦어도 내일 아침이 되기 전에 문영후 공자님에 대한 현상 수배가 붙을 겁니다.”
문영후는 살기를 줄줄 흘리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 말은 지금부터 바삐 움직이면 된다는 말이겠군.”
그 말에 풍백이 미간을 찌푸리는데, 문영후는 곧 심복인 유장위에게 물었다.
“저기 저놈하고 호위하는 놈을 처리한 다음, 적가상방에서 포도아문으로 가려는 놈까지 처리할 수 있나?”
“충분히 가능합니다.”
살기 어린 미소를 지은 문영후가 풍백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면 일단 호위무사를 처리하고 저놈을 데려와 내 앞에 무릎 꿇리도록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