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가상방 개망나니 43화
뜬금없는 풍백의 말에 적호경과 진덕양이 갑자기 무슨 헛소리냐는 얼굴로 풍백을 바라봤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방금 전까지 백건상방의 수작이 얼마나 음흉하고 치명적인지 심각하게 고민하며 논의를 했는데, 갑자기 튀어나온 말이 큰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었으니까.
“그게 대체 무슨 말이냐? 네 말대로 지금 백건상방의 수작을 제대로 막아 내지 않으면 그 피해는 계산하기 어려울 정도로 늘어날 텐데.”
풍백은 씨익 웃으며 허리춤에 매달고 있던 어른 머리통 크기의 가죽 보퉁이를 탁자에 올려놨다.
“이거면 백건상방의 용정차를 이용한 압박에 효과적인 대응책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뭐라고? 이게 뭔…….”
적호경은 하던 말을 멈추더니 거세게 흔들리는 눈동자로 풍백을 바라봤다.
“서, 설마…….”
“맞습니다, 호초를 가져왔습니다.”
풍백의 말에 진덕양이 기겁을 하며 소리쳤다.
“호초? 호초라고? 어디 보자!”
진덕양이 황급히 내민 손이 보퉁이에 닿으려고 할 때, 적호경이 그의 손을 찰싹 때렸다.
“아얏! 왜 그러십니까?”
“내가 확인하겠다!”
떨리는 손으로 보퉁이를 열었다. 그러자 가장 먼저 호초 특유의 알싸한 향이 코를 자극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손을 집어넣어 호초를 반 움큼쯤 꺼낸 적호경과 진덕양은 기절할 것 같은 얼굴이 되었다.
“호, 호초…… 호초…….”
“호초가 맞습니다! 세, 세상에…… 세상에 이런…… 으아아아아아! 백아야!”
벌떡 일어난 진덕양이 풍백을 와락 끌어안고 괴성을 질렀다.
“수, 숙부님?”
진덕양이 이러는 모습을 처음 본 풍백이 당황한 목소리를 냈지만, 진덕양은 그런 풍백을 끌어안고 마구 등을 두드렸다.
“네가! 네가 드디어 미쳤구나! 어떻게! 어떻게 네가 호초를! 으아아아!”
대체 무슨 소리인지 두서없이 말을 흘리는 진덕양의 뒤로 적호경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이 보였다. 그러곤 조용히 다가와 풍백을 끌어안았다.
“장하다! 정말 장해! 네가…… 네가 정말 해냈구나!”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는 적호경의 말에 풍백은 잠시 얼떨떨하게 있다가 미소를 지으며 두 사람을 끌어안았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두 사람이 이렇게 좋아하는 걸 보니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렇게 끌어안고 그들이 다시 자리에 앉은 것은 거의 한 식경이 지나고 나서였다.
“어떻게 된 것이냐?”
“형님! 일단 중요한 것부터 물어봅시다! 그래서? 이것만 구매해서 가져온 것이냐, 아니면 장기적으로 공급 계약을 맺은 것이냐? 양은 얼마나 되는 것이고?”
얼마나 흥분했는지, 요즘은 도통 쓰지 않던 형님이라는 호칭까지 쓰는 진덕양이었다.
그런 진덕양의 모습에 적호경 역시 젊을 적에 그랬던 것처럼 그의 등짝을 짝 소리가 나도록 때렸다.
“악! 아픕니다!”
“자발없이 뭐 하는 짓이냐? 어련히 우리 백아가 말을 할까.”
“헐…… 우리 백아? 언제부터 그렇게 부르셨다고…….”
“뭐라고?”
다시 한번 손을 치켜드는 적호경의 모습에 진덕양이 서둘러 말했다.
“자초지종은 나중에 천천히 듣고, 일단 대책을 세우려면 핵심을 알아야 할 것 아닙니까.”
“음…… 그건 그렇지만…….”
풍백은 웃으며 말했다.
“숙부님 말씀이 맞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 이거 보십시오!”
“알았다, 알았어. 그러면 중요한 것부터 얘기를 들어 보자. 호초는 이것이 전부였던 것이냐?”
적호경의 물음에 풍백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제가 가져온 것은 일부일 뿐이고, 지금 가져온 것보다 대략 대여섯 배는 더 가지고 있을 겁니다.”
심오경이 천축에서 할당 받은 양은 더 많았다.
하지만 처음 호초를 가져올 때는 따로 수레를 가져갔던 것이 아니기에 등짐에 실을 수 있을 정도만 구입해서 가져왔다고 했었다. 그러니 적어도 대여섯 배, 많으면 그 이상이 될 것이다.
머릿속으로 빨리 계산을 해 본 진덕양이 말했다.
“그러면 금원보 육십 개는 필요할 것 같군요.”
“지금 제가 가져온 것은 약간의 호의가 담겨서 저렴하게 받은 것입니다. 그러니 적어도 팔십 개 이상은 필요할 겁니다.”
“하긴 금원보 열 개로 구입하기에는 대단히 많은 양이기에 좀 놀랐었다. 그러면 얼마에 구입을 하기로 계약한 것이더냐?”
풍백은 대답을 하는 대신 심오경과 작성한 계약서를 꺼내서 보여 줬다. 그걸 읽어 본 두 사람의 눈이 점점 커졌다.
“허…… 정가의 칠 할이라고?”
“그것만이 아닙니다! 이거 오 년 동안 꾸준히 판매를 하겠다는 계약인데요?”
“세상에…… 심지어 계약도 우리 의사에 따라 자동 연장이 가능한 형태입니다!”
두 사람은 황당한 눈으로 풍백을 멍하니 바라봤다.
평생 상행을 하는 동안 수 없이 많은 계약을 해 왔던 두 사람이었다. 그 모든 계약을 하면서 유리한 계약을 체결하기도 했었고, 불리한 계약을 체결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 어떤 계약을 하면서도 일방적으로 유리한 계약을 체결하는 경우는 없었다. 누군가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한 계약이라는 말은 상대에게 일방적으로 불리한 계약이라는 말과 같았으니까.
계약을 하면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하나를 가져오면, 다른 부분에서 한 가지 불리한 조건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이 모든 부분에서 적가상방이 이득을 볼 수밖에 없는 계약이라니…….
더럭 겁이 났다.
‘혹시 상대를 압박해서 불리한 조건을 받아 낸 것은 아닌지…….’
이런 마음에 잠시 분위기를 살피던 적호경이 입을 떼려고 하자, 풍백이 이미 눈치를 채고 먼저 말했다.
“미리 얘기를 드리자면, 가격 부분과 계약 연장에 대한 내용은 제가 제시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이걸 상대가 먼저 말했다고?”
“이야기를 하자면 조금 길어질 텐데…….”
자초지종은 나중에 들으려고 했지만, 계약 조건을 보니 도저히 듣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풍백은 최대한 이야기를 간략하게 들려줬다.
심오경이 호초를 받아 올 수 있었던 배경, 영파상방의 계약 파기와 압박, 자신이 제시했던 조건까지.
“남은 호초를 받으러 항주를 가야 할 텐데, 거래 금액이 크니 아마도 숙부님께서 직접 가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심 점주를 만나면 계약에 대해서 직접 물어보시면 될 것입니다.”
“그렇지. 제가 직접 가서 알아보겠습니다.”
“너를 못 믿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만약 심 점주라는 그 사람에게 어떤 불만이 있다면, 진총관이 상대와 다시 협상을 진행해야 될 수 있다.”
풍백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심 점주가 불만이 있다면 당연히 그러셔야지요. 저 역시 우리 적가상방이 호초를 확실하게 공급 받을 수 있는 경로가 흔들리도록 만들 생각은 추호도 없으니까요.”
“알겠다.”
“그러면 이제 이 호초를 가지고 상산현에서 협상을 해야겠지요?”
풍백의 말에 적호경과 진덕양의 얼굴에는 진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거 참…… 이걸 협상이라고 해야 하는 건가?”
“그냥 통보라고 해도 될 것 같습니다.”
호초가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곳은 아주 다양했다.
물론 다루는 차를 주로 파는 곳이기에 백건상방의 입김을 절대 피할 수 없을 것이고, 객잔은 음식이 주가 아니기에 호초가 큰 영향력을 발휘하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제외하고 반점, 주루, 기루와 같은 곳은 호초를 절대 거부할 수 없었다. 이것은 특히 고급 음식점일수록 그 영향력이 극대화될 수 있었다.
지금도 상산현에 호초가 들어오기는 하지만 아주 소량에 불과했다. 그나마도 정기적으로 들여오는 곳이 없어서 부르는 게 값일 정도로 비싼 것이 호초였다.
이런 호초를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다는 것은 대단히 큰 힘이 될 수밖에 없었다.
“호초를 공급할 테니, 오히려 백건상방과 거래하지 말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허허! 그러지는 말도록 하게. 우리까지 그렇게 나오면 백건상방과 뭐가 다르겠나?”
“그냥 말이 그렇다는 것이지요.”
말했듯이 지금은 아직 백건상방과 전면적으로 붙을 상황이 아니었다. 그건 아무리 호초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마찬가지였다.
그저 백건상방의 수작에 일반적으로 끌려가지 않아도 될 무기 하나가 생겼다고 생각하면 될 정도였다.
그런데 풍백의 보고는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것도 확인을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응? 이건 또 뭐더냐?”
풍백이 탁자에 하나의 계약서를 더 올려놓자 적호경과 진덕양이 의문이 담긴 시선으로 계약서를 펼쳤다.
그리고 그것을 읽어 본 두 사람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진덕양이 계약서를 다시 한번 읽어 보고 멍하니 풍백을 바라보며 허탈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니…… 너는 대체 항주에서 무슨 일을 벌이고 다녔던 것이냐?”
풍백이 내민 또 다른 계약서는 서문세가와 계약한 것이었다.
서문세가의 영향력은 대단했다.
지금은 조금 위축된 경향이 있지만, 절강성에 사는 사람들 중에서 서문세가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절강성을 대표하는 문파라고 할 수 있는 곳이 서문세가였기 때문이다.
그런 서문세가와 계약을 했다는 것은 대단히 큰 의미를 가질 수 있었다.
또한 서문세가에서 운영하는 상방의 규모는 대단히 컸다. 그러니 지금 계약한 것을 인연으로 하여 향후 어떤 관계로 발전하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어쩌다 보니 서문세가 소가주를 도와줄 수 있었습니다. 그것을 계기로 계약을 추진할 수 있었고요.”
풍백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하지만 계약 내용을 보면 그리 가볍지 않았다.
이 계약 내용에 따르면 심오경을 지원하는 거의 모든 일은 서문세가에서 해 준다는 것이었고, 그 대가로 심오경에게 구입하는 호초의 삼 할을 정가의 구 할 가격에 판매한다는 것이었다.
‘중요한 것이 여기에 있는 이 항목이지.’
심오경의 상행에 수레와 일꾼을 적가상방에서 지원한다는 것은 서문세가의 비호 아래 안전한 상행을 하며 경험을 쌓을 수 있다는 것이다.
적호경과 진덕양은 잔뼈가 굵은 상인이었다. 그렇기에 이 항목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명확히 알 수 있었다.
“천축으로 상행을 나갈 행수와 일꾼을 뽑아야 할 겁니다. 새로운 사람을 뽑지 마시고, 지금은 충성도가 높은 경험 많은 행수 위주로 진행하는 것이 좋을 겁니다.”
“그렇…… 겠지.”
얼떨떨한 얼굴로 대답하는 적호경과 만세라도 부르는 것처럼 벌떡 일어나 두 손을 번쩍 들고 있는 진덕양이었다.
“네가 복덩이구나, 복덩이! 서문세가와 연줄을 만들어 놓다니!”
“운이 좋았습니다.”
“세상에 운이 그냥 생긴다더냐? 다 그만한 사람에게나 다가오는 것이 바로 운이라는 녀석이다! 술이나 퍼마시고 사고나 치고 다니기에 이놈이 언제 사람이 될까 걱정했었건만, 이런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니!”
진덕양의 호들갑을 들으며 적호경은 미소 띤 얼굴로 작게 고개만 끄덕이고 있었다.
‘그래, 누구 아들인데! 충분히 이럴 수 있는 능력이 있는 놈이었어!’
정말 오랜만에 먼저 하늘로 간 부인이 떠오르는 적호경이었다.
다시 분위기가 진정되기까지 기다린 다음, 적호경이 풍백에게 물었다.
“그래, 이제는 무엇을 할 생각이더냐?”
“네?”
“지금까지 네가 하는 것을 보니 아무 생각도 없이 움직이는 건 아닌 것 같구나. 그렇지 않더냐?”
적호경은 어떤 말을 하더라도 들어줄 수 있다는 것처럼 흐뭇한 웃음을 띠고 있었다. 이런 적호경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격세지감(隔世之感)이 들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는 그저 망나니 그 자체로 취급받았다는 걸 알고 있던 풍백이었다.
이런 어색한 기분을 서둘러 털어 버렸다. 지금이 드디어 그것을 꺼내기 아주 적절한 순간이라는 걸 느꼈기 때문이다.
“어…… 일단 당장 시작했으면 하는 일이 있기는 합니다.”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얘기를 해 보거라. 내가 긍정적으로 생각을 해 볼 터이니.”
“긍정적은 무슨 긍정적입니까? 백아가 요 근래 해 준 것이 얼마인데요. 이 숙부는 적극적으로 밀어주겠다. 뭐든지 말을 해 보거라.”
“대단한 건 아닙니다. 저희 상방을 보니, 아직 취급하지 않는 상품이 있어서 그걸 시작해 봤으면 싶어서 말입니다.”
“그게 어떤 상품이지?”
“정육(精肉)입니다.”
“정육?”
“네, 기왕이면 소고기를 취급했으면 싶습니다.”
적호경과 진덕양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적가상방에서는 정육을 취급하거나 정육점을 만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에 대해 아주 관심이 없는 건 아니었다. 그저 우선순위에 밀려 잠시 시간이 걸리는 중이었을 뿐이다. 분명 언젠가는 시작할 상품이었다는 말이다.
“나쁘지 않구나. 그러면 그걸 네가 맡아서 해 보겠다는 것이고?”
“맡아서 하는 건 좀…… 아무래도 제가 실무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건 아니니까요. 그냥 일이 잘되고 있는지 관리 감독 정도만 할 수 있는 권한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풍백의 말에 적호경과 진덕양은 서로 시선을 나누며 흐뭇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물어본 말은 약간의 시험이었다.
풍백이 항주에서 일을 훌륭히 끝마치고 왔지만, 그렇다고 그가 실무를 직접 경험했던 것은 아니었다.
물론 풍백이 지금까지 모든 일을 정말 수월하고 깔끔하게 해결하고 다니는 중이었으니, 직접 맡겠다고 했으면 거절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저 혹시 실수하는 건 없는지 뒤에서 지켜보기는 했겠지만 말이다.
그래도 스스로 역량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다는 점에서 너무 흡족했다.
“좋다, 그러면 네 말대로 정육 부분을 바로 시작해 보자꾸나.”
“관리 감독이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니 열심히 해야 한다. 만약 모르는 것이 있으면 이 숙부에게 얼마든지 물어봐도 되고.”
“알겠습니다.”
풍백은 눈을 반짝 빛냈다.
‘좋았어! 그러면 이제 다음 단계를 시작할 준비가 끝난 것이 되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