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가상방 개망나니 42화
항주에서 상산현으로 돌아가는 길은, 이전 상산현에서 항주로 갔을 때처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달라진 점을 찾자면 항주로 갈 때는 신나서 꿈에 젖어 있던 왕삼이, 돌아가는 길에는 축 늘어져서 멍하니 무료한 눈으로 창밖을 바라보고 있기만 하다는 것 정도?
왕삼은 항주에 있으면서 풍백의 허락 아래 항주에 있는 온갖 명소를 관광하고 다녔다.
처음에는 눈치가 보인다고 안 나간다고 했다가, 정말 이러다가 항주까지 와서 겨우 하루밖에 구경을 못할 것 같다고 생각했는지, 풍백의 허락을 받은 다음 정말 바쁘게 구경을 다닌 것이다.
덕분에 풍백은 왕삼이 나가고 조용해진 별채에서 무공 수련에 집중할 수 있었다.
호위무사는 안타깝게도 풍백의 호위를 위해 별채에서 대기하고 있었어야 했다는 점인데, 이 부분은 적당히 은자를 챙겨 주는 것으로 기분 상하지 않도록 만들어 줄 수 있었다.
아무튼, 이렇게 축 늘어져 있던 왕삼은 곧 멀리 상산현이 보일 때부터 점점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아무리 항주가 좋았다고 하더라도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가는 거라 흥분하는 것 같았다.
한 달이 넘는 항주행이 끝나 가고 있었다.
“집이다!”
왕삼이 기쁨의 환호성을 내지르며 마차에서 뛰어내렸다.
그 모습에 피식 웃은 풍백은 왕삼에 이어 마차에서 내리며 호위무사에게 말했다.
“수고하셨소.”
“아닙니다. 언제든지 호위가 필요하시면 불러만 주십시오.”
비록 하루뿐이기는 하나 항주를 구경하기도 했고, 수고했다고 풍백에게 나름 짭짤한 부수입을 받은 호위무사는 만면에 미소가 가득했다.
짐을 받으러 낯이 익은 시비 하나가 다가왔다. 그걸 본 풍백이 고개를 갸웃하고는 물었다.
“소란이는 어디 가고 네가 온 거지?”
“소란이는 오늘 일을 마치고 수월이와 함께 장터에 나갔습니다. 그래서 제가 대신…….”
평소 문약란이 수월이와 친하게 지내고 있다는 걸 알고 있던 풍백이었다.
그가 있는 동안에는 적가상방 밖으로 나가는 일이 없었는데, 이렇게 수월이와 장터에 나갔다는 얘기를 들으니 제법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방주님하고 총관님은 어디에 계시고?”
조금 늦은 시간이기는 하지만 당연히 진덕양이라도 나올 줄 알았는데, 아무도 나와 보질 않아 물었다.
“총관님은 방주님의 거처에서 회의를 하고 계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
가볍게 대답한 풍백은 적호경의 거처로 천천히 걸어갔다. 빨리 이번 항주에서의 성과를 보고하고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 * *
“만복루는 뭐라고 해?”
“그쪽도 많이 곤란한 것 같습니다. 주로 술을 파는 주점이라고 하지만, 그렇다고 고급을 표방하는 만복루에서 용정차를 취급하지 못한다는 것은…….”
“끄응…… 그렇겠지. 망할 백건상방 놈들…….”
적호경은 머리를 쓸어 올리며 욕을 내뱉었다. 그가 욕설을 입에 담는 일은 그리 많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문제는 언제나 그랬듯이 백건상방이었다.
한동안 잠잠하다 싶었는데, 얼마 전부터 다시 적가상방에 칼날을 들이밀고 있었다.
백건상방은 상산현에 들어오는 용정차를 독점해서 공급하고 있었다. 여기서 말하는 용정차는 하급부터 최상급까지 전부를 말한다.
절강성에서 용정차를 팔지 않는 곳은 없다. 그렇기에 용정차는 백건상방에게 대단히 날카로운 칼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얼마 전부터 백건상방은 상산현에 있는 모든 다루, 반점, 객잔, 주점, 기루에 선포를 했다. 지금부터 적가상방과 거래를 하는 곳은 용정차를 한 잎도 구매할 수 없을 거라고 말이다.
이 선포는 모든 곳에서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누군가는 용정차를 독점하는 것을 빌미로 정당한 경쟁을 하지 않고, 비겁한 방법으로 상대를 고사시키려고 한다며 목소리를 높였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목소리를 소수에 불과했다.
당장 용정차를 판매할 수 없다면 어떤 가게든지 매출이 극단적으로 떨어질 수 있었다.
특히 모든 다루는 백건상방의 선포가 떨어지기가 무섭게 적가상방에게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거래를 중단했다. 다른 곳도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백건상방에게서 등을 돌리는 중이었다.
중원 사람들은 음식을 먹은 다음, 거의 대부분은 따뜻한 차를 마신다. 차를 마시는 대신 술을 마시는 사람들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그렇다는 말이다.
절강성을 대표하는 차는 용정차였기에 대부분은 용정차를 마신다. 그러니 반점이든, 객잔이든 용정차를 팔지 못하면 손해가 막심했다.
그나마 영향을 덜 받는 곳이 주점이나 기루였지만, 이곳들도 시간문제일 뿐이었다. 방금 진덕양이 언급한 만복루는 적가상방과 친분이 깊은 곳이었는데도 곤란함을 토로할 정도였으니까.
문제는 이것을 타개할 방법이 없다는 점이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상산현에 적가상방의 점포는 그리 많지 않다는 것과 매출의 많은 부분은 상산현 밖으로 나가는 상행에서 나온다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어서 말하는 진덕양의 얘기에 그의 얼굴은 더욱 딱딱하게 굳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아직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백건상방에서 외부로 상행을 나가려고 준비하는 것이 포착되었다고 합니다.”
“외부 상행? 어디로?”
“준비하는 것을 기준으로 추측하자면…… 개화현과 강산현입니다. 예상하기로는 저희 상행로를 따라 맞불을 놓을 것 같다는 의심이 듭니다.”
“……구유현은 빼놔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는 건가?”
구유현까지 손을 뻗칠 생각은 못할 것이다. 그곳은 적가상방과 굳게 맺어진 청송무관의 앞마당이었으니까.
“저들이 예상한 것처럼 맞불을 놓는다면 우리에게 피해는 얼마나 되는 건가?”
“적어도 삼 할 이상 매출이 떨어질 겁니다. 만약 가격으로 경쟁을 하려고 한다면…… 그 이하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죽일 놈들!”
적호경의 욕설이 더 거칠어졌다.
이제 청송표국과 연계하여 더 높이 날아 보려고 하는데, 백건상방이 그런 적가상방의 날개를 꺾어 버리려고 하고 있으니 욕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입술을 깨물고 고민하던 적호경이 물었다.
“금호상방은? 설마 금호상방도 이전처럼 우리에게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 건 없나?”
“잠잠합니다. 딱히 어떤 움직임이 없는 걸 보면, 아마도 우리가 백건상방과 싸우다가 흘러나오는 전리품이나 챙기려고 들지 않을까 예상하는 중입니다.”
“하아…….”
답답한 마음에 깊은 한숨만 흘러나올 뿐이었다.
두 사람이 답도 없는 문제를 가지고 머리를 쥐어뜯고 있을 때, 밖에서 일꾼 하나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도련님이 돌아오셨습니다!”
“백아가?”
“돌아올 때가 되기는 했지.”
두 사람이 나가 보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그들이 일어나자 문이 열리며 풍백이 먼저 들어왔다.
방으로 들어온 풍백은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다녀왔습니다.”
“어, 그래…….”
“다녀왔구나.”
적호경과 진덕양은 은밀히 서로 시선을 교환하며 신호를 나눴다.
‘백건상방 얘기는 일단 입을 다물도록 하지요.’
‘어차피 일꾼들도 다 아는 얘기일 텐데…….’
‘그래도 먼 길을 오느라 피곤할 텐데, 오늘은 다른 생각을 하지 말고 편히 쉬도록…….’
하지만 그들이 신호를 교환하는 와중에 풍백의 목소리가 먼저 들려왔다.
“백건상방에서 또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면서요?”
“……어떻게 알았느냐?”
“얘기는 여기 오면서 들었습니다.”
하긴 일꾼들에게 상방에 문제가 없는지 물어보면 당장 대답을 해 줄 수 있는 일이었다.
“자세한 얘기를 들려주십시오.”
“일단 오늘은 쉬고 내일 일찍…….”
“그냥 지금 듣겠습니다. 이대로 거처로 가더라도 궁금해서 제대로 쉴 수 없을 테니 말입니다.”
“후우…….”
적호경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진덕양에게 눈짓을 하자 진덕양이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현재 적풍상방이 백건상방에게 받고 있는 압박에 대해 자세히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제법 긴 이야기를 듣고 난 풍백은 미간을 찌푸렸다.
‘조용히 있기에 다행이다 싶었건만…….’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어떻게든 부숴 버리고 싶은 백건상방이다. 이전 과거에 적가상방을 괴롭히고 무너뜨린 장본인이 백건상방이었으니까.
하지만 현재 적가상방이 당장 백건상방을 상대할 무기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한 가지 분야의 상품을 독점하고 있는 상방을 무너뜨리려면, 적어도 치명적인 상처를 입힐 무기 정도는 챙기고 나서야 가능한 일이다.
적가상방은 아직 무기가 부족했다. 다행이라면 지금 당장 백건상방이 부리는 수작에 대응할 수단은 있을 것 같다는 것이다.
“아무래도 가만히 있으면 안 될 상황 같군요.”
“좋은 상황은 아니지. 우리가 상산현에서 벌이는 사업이 큰 규모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상산현을 거점으로 삼으면서 제대로 된 점포 하나 유지하지 못한다는 건…….”
“문제는 이겁니다. 지금 우리가 점포 하나 유지를 하냐 마냐가 아니라, 이대로 물러서게 된다면 저들은 지금 준비하고 있다는 상행 준비를 더욱 가속화할 거라는 겁니다.”
“상행을 더 빨리 준비한다고?”
“상산현에서 최소한의 반항조차 못하고 밀려난다면, 우리에게 대응할 아무런 수단도 없다는 것을 알려 주는 것이나 다름없으니까요.”
“아…….”
이런 식으로 생각은 하지 않았던 것인지 가볍게 탄식을 내뱉은 두 사람의 얼굴이 심각하게 변했다.
풍백의 말을 듣고 보니, 저들이 외부 상행을 준비하는 것은 아마도 상산현에서 아무런 대응을 못하는 걸 봤기 때문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야 눈치챌 수 있었다.
지금 백건상방이 벌이고 있는 수작은 단순히 적가상방을 흠집 내려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목숨을 노리고 찌르기 전에 간을 보고 있던 것이라는 걸.
“백아의 말이 일리가 있어.”
“맞습니다. 손해가 늘어난다고 하더라도 적극적인 대책을 마련해야 할 것 같습니다.”
“흠…… 우리가 판매하는 물품의 가격을 내리는 건 어떤가? 최소한의 이윤만 붙여서 판다면…… 아마 백건상방도 서로 출혈 경쟁을 하고 싶어 하지는 않을 테니 물러설 것 같기도 한데.”
“나쁘지 않은 방법이기는 한데, 잘못하다가 정말 백건상방이 손해를 보면서 경쟁하는 것을 선택한다면…….”
“좋은 방법이 아닙니다.”
적호경과 진덕양의 대화에 풍백이 끼어들었다.
몇 달 전까지만 하더라도 풍백이 이렇게 끼어들었다면 곰방대로 머리부터 후려치고 혼을 냈겠지만, 방금 전 풍백이 제법 쓸 만한 얘기를 했던 걸 기억한 두 사람은 궁금한 얼굴로 물었다.
“왜 좋은 방법이 아니라는 것이지?”
“너무 극단적이라 위험하다는 말이더냐?”
두 사람의 물음에 풍백은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무작정 출혈 경쟁이 될 수 있는 가격 싸움으로 가면 적가상방의 피해가 막심합니다.”
“어차피 저들은 외부 상행도 준비하면서 우리와 정면으로 붙으려고 하고 있다. 출혈 경쟁을 하려면 차라리 상산현에서 경쟁하는 것이 유리해.”
진덕양도 적호경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그렇지. 최악의 경우에 출혈 경쟁을 하게 된다면 상산현에서 해야지. 우리는 상산현에 점포가 많지 않지만, 백건상방의 점포는 몇 배로 많거든.”
“우리가 이윤을 최소한으로 줄이는 한이 있더라도 쉽게 물러설 생각이 없다는 걸 보여 줘야지.”
“저도 동감입니다.”
적호경과 진덕양은 주거니 받거니 하며 서로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풍백은 고개를 저었다.
“그게 아닙니다. 어쩌면 백건상방이 원하는 것이 지금처럼 출혈 경쟁을 일으키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는 않으십니까?”
“백건상방이 그걸 원한다고? 아니, 왜?”
“상산현에서 서로 경쟁을 하게 된다면 그들의 피해가 더 클 것이 분명한데.”
두 사람의 말에 풍백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제가 말했던 적가상방의 피해가 막심하다는 말은 출혈 경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면?”
“뭐 하나를 잊고 계신 것 아닙니까?”
풍백의 물음에 두 사람이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갑자기 동시에 무언가를 떠올렸는지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금호상방…….”
“이런 망할…….”
당연히 떠올렸어야 했는데, 아무래도 갑자기 풍백의 새로운 관점을 듣고는 정신이 좀 나갔던 것 같았다.
“가격 경쟁이라는 것은 적가상방과 백건상방 둘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가 가격을 내려서 고객을 끌어오게 된다면, 금호상방과 거래를 하던 곳 역시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겁니다.”
“끄응…….”
“어쩌면 백건상방은 우리가 가격을 내리면 금호상방에게 사람을 보내 연대해서 행동하자고 건의할지도 모르는 일이지요. 우리 적가상방은 상산현에서 물건 가격을 가지고 장난질을 치는 놈들이 될 테니, 명분에서도 밀릴 수밖에 없을 겁니다.”
백건상방이 어디까지 보고 적가상방을 압박하는 건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 풍백의 생각이 그들이 노리고 있던 것과 일치한다면 대단히 음흉한 수작이라고 할 수 있었다.
“답답하군…….”
적호경이 신음을 흘리듯이 뇌까렸다.
손도 발도 모두 묶인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러다가는 정말 백건상방의 수작에 큰 피해를 볼 것 같았다.
결국 이 모든 일은 적가상방에게 자신만의 무기가 없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문제는 간단했다.
“아무튼 다행입니다. 큰 문제가 아니라서요.”
풍백의 입꼬리가 자연스레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