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가상방 개망나니 41화
“어때? 어때?”
수월이가 잔뜩 기대하는 눈으로 문약란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 모습에 문약란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기다려 봐. 아직 입에 넣지도 못했어.”
“그러니까 빨리 먹어 봐.”
문약란은 한 손으로 면사를 살짝 들추고 꼬치에 꿰인 과일 중 하나를 입에 넣었다. 과일에 묻어 있던 달달한 꿀이 가장 먼저 느껴지고 과일을 씹으며 나오는 과육이 버무려지며 한 단계 높은 단 맛의 세계로 인도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맛있어서 문약란이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우와! 엄청 맛있다!”
“그지? 그지? 좋아할 줄 알았어. 근데 좀 아깝다. 날씨가 조금 더 추워졌으면 제대로 된 빙당호로(冰糖葫芦)를 먹어 볼 수 있었을 텐데.”
빙당호로는 원래 과일을 꼬치에 꿰어 녹인 설탕물을 바르고 굳혀서 먹는 것인데, 지금은 날씨가 선선해지기는 했어도 아직 설탕물이 얼 정도는 아니었다. 그래서 설탕물 대신 꿀을 발라 팔고 있는 것이다.
물론 꿀을 바른 빙당호로도 맛있지만, 얼린 설탕물을 깨물면 바삭 깨지는 식감이 주는 재미도 무시할 수 없는 일이다.
“아니야, 이것도 엄청 맛있어. 나 이런 거 처음 먹어 봐.”
“진짜? 원래 중원 북쪽 지역에서 많이 먹는 거라서 그런가? 광동성은 많이 더우니까.”
수월이의 말에 문약란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지만 면사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그럴지도 모르지.”
전혀 아니었다.
문약란은 청해상방 내원에서 단 한 걸음도 나가지 못했다. 그것은 문약란이 청해상방에서 도망치기 전까지 그랬고, 일반 사람들도 쉽게 즐길 수 있는 빙당호로와 같은 것들은 한 번도 먹어 보지 못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지금이 너무 즐겁고 행복했다.
언제나 꿈에서만 그리던, 평범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틈에 있는 나의 모습.
절로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이번에는 뭘 먹으러 가 볼까? 당과(糖果) 먹으러 가 볼까? 아니면 방금 과일을 먹었으니 월병(月餠)을 먹으러 가 볼까?”
당과는 설탕과 꿀을 넣고 끓인 물에 과일을 더하여 당도를 극한까지 끌어올린 것이고, 월병은 주로 추석에 먹는 것으로 둥글고 바삭한 과자 안에 팥이나 말린 과일이 들어가 있는 음식이다.
“가면서 생각해 보자! 빨리!”
수월이는 문약란의 팔을 잡고 끌었다. 문약란의 그 손길에 끌려가면서도 입가에 미소는 사라지지 않았다.
오늘은 문약란이 처음으로 적가상방을 나온 날이었다.
풍백이 항주로 떠난 이후 의기소침해진 문약란을 본 수월이는 그녀의 기분을 풀어 주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었다. 그 덕분에 그나마 풍백이 곁에 없다는 걸 버텨 온 문약란이었다.
이런 수월이의 노력은 여러 가지였는데, 오늘은 며칠에 걸쳐 문약란을 조르고 졸라 함께 번화가에서 놀러 나온 것이다.
처음에는 시큰둥했던 문약란이지만, 번화가를 돌아다니며 신기한 것도 보고, 맛있는 것도 먹으면서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환히 웃고 있었다.
지금처럼 친구와 함께 장터를 돌아다니며 즐기는 것은 그녀가 꿈에서도 바라던 일이었으니까.
“그런데 도련님은 언제쯤 돌아오시는 걸까?”
“아마 곧 오실 거야. 벌써 한 달도 넘었는걸.”
“빨리 오셔야 할 텐데…… 우리 소란이가 도련님을 못 봐서 이렇게 피골이 상접하고 있다는 걸 도련님이 아시는지 모르겠어.”
“아, 아니야! 내가 무슨…… 그리고 나 피골이 상접하지도 않았어!”
본능적으로 자신의 뺨을 만지며 소리치는 문약란의 모습에 수월이는 씨익 웃었다.
“이제 슬슬 인정하는 건 어때?”
“인정하기는 뭘 인정해?”
“너 도련님 좋아하잖아.”
그 말은 들은 문약란이 화들짝 놀라며 강하게 말했다.
“아니라니까! 그냥…… 도련님은 내가 시중을 들어야 하는데, 자리에 없으니까 그냥…….”
“내가 눈치 빠르다는 소리를 듣기도 하지만, 너는 그런 것도 필요 없어. 그냥 다 보이거든. 다른 사람들도 다 알고 있을걸?”
“아앗! 저…… 정말?”
“오죽하면 주방에서 일하시는 아주머니들이 나한테 물어보더라. 너 도련님 좋아하는 것 아니냐고.”
그 말에 문약란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며 두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어떡해…….”
“뭐가?”
“창…… 피해서…….”
“창피할 일이 뭐가 있어? 여자가 남자를 먼저 좋아할 수 있는 거지. 그게 잘못된 것은 아니잖아. 단지 잘못된 거라고 하자면…… 그 대상이 도련님이라는 정도?”
“아…… 너무 신분 차이가 나서?”
“풋! 그게 무슨 소리야? 아마도 상방주님은 도련님이 좋다는 여자가 나타나면 누군지 물어보지도 않고 얼씨구나 하면서 혼인부터 시키려고 할걸?”
“정말? 아니, 왜?”
수월이의 말을 정말 진심으로 이해할 수 없었다.
일반적으로 적가상방보다 작은 상방도 혼인을 하면 정략혼인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혼인을 해서 혈연으로 묶이는 것만큼 상방이 빠른 속도로 커나갈 수 있는 방법이 얼마나 있겠나?
실제로 청해상방주인 문태성도 자신을 정략혼으로 써먹으려고 알아보는 걸 수도 없이 많이 봤었다. 아마 어머니가 아니었다면 벌써 정략혼으로 팔려 갔을지도 몰랐다.
그런데 적호경이 그런 것도 고려하고 있지 않다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수월이는 그런 문약란을 보며 혀를 찼다.
“쯧쯧쯧…… 네가 도련님한테 콩깍지가 씌어도 단단히 씌었구나. 내가 말해 줬잖아. 도련님의 별명이 뭐라고?”
“망…… 나니…….”
“앞에 한 글자가 빠진 것 같은데?”
“……개망나니.”
“그런 위대한 별명을 얻기 위해 도련님이 벌였던 화려한 전적을 내가 열심히 설명해 줬던 것 같은데? 기억하지?”
“응…….”
“참 이상하단 말이야. 보통은 도련님의 일화 두세 개만 들어도 생기던 호감이 시궁창으로 빠지던데, 너는 왜 이 모든 얘기를 들어도 마음이 안 바뀌냐는 말이야.”
바뀔 수가 없었다. 그만큼 풍백이 절망에 싸인 자신을 구해 주던 모습은 뇌리에 단단히 각인되어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녀 자신이 직접 본 풍백은 수월이가 해 주는 온갖 얘기가 이해되지 않을 정도였다.
술을 좋아한다던 풍백이 술 한 잔 마시는 걸 못 봤고, 사고를 치기는커녕 매일 운동(?)하고 책을 읽으며 조용한 시간을 보내는 풍백이었다.
이러니 문약란이 수월이의 얘기를 온전히 받아들이기 힘들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워낙 화려한 전적을 가진 도련님인 탓에 혼인 얘기가 전혀! 단 하나도 없어. 이러다가 혼인을 할 수 있겠나 싶을 정도로.”
“그렇구나.”
“아마 네가 혼인하고 싶다고 하면 상방주님은 좋아서 펄쩍 뛰실걸? 얼굴도 예뻐, 마음씨도 착해, 망나니 같은 도련님을 진심을 좋아하고 있고. 어디 하나 부족한 부분이 없잖아.”
“그만해…….”
문약란은 화끈거리는 뺨을 부여잡았다.
옆에서 이렇게 부추기는 얘기를 듣고 있자니, 괜히 풍백 옆에 서 있는 자신의 모습이 그려져 대단히 창피해졌다.
그 모습을 본 수월이가 음흉한 얼굴을 들이밀며 물었다.
“어머나! 우리 소란이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기에 얼굴이 빨개진 걸까?”
“빠, 빨개지기는 뭐가 빨개져? 아무렇지도 않거든!”
“정말? 그러면 면사 좀 걷어서 보여 줘 봐.”
“싫어!”
“왜? 빨리 보여 줘.”
“이럴 시간 있어? 월병 먹으러 가자며. 빨리 월병 사러 가자.”
황급히 말하며 종종걸음으로 걸어가는 문약란의 모습에 수월이는 깔깔 웃으며 얼른 그녀를 따라갔다
“같이 가!”
“빨리 와.”
뒤를 돌아보며 재촉하고 고개를 돌리던 문약란이 갑자기 걸음을 우뚝 멈췄다. 그러자 뒤에서 따라오던 수월이가 그녀에게 살짝 부딪치고 말았다.
“아코! 왜 갑자기 멈추고 그래?”
수월이의 물음에도 문약란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고개를 갸웃거린 수월이 앞으로 돌아가 문약란을 살폈다. 그러자 방금 전까지 빨갛게 달아올랐던 문약란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으며, 눈동자가 거세게 흔들리고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소란아? 왜 그래? 어디 아픈 거야?”
거듭된 수월이의 물음에도 문약란은 아무런 대답도 못하고 한곳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에 수월이는 문약란이 바라보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많은 사람이 오가고 있는 밤거리.
그곳에 일곱 명의 사내가 서 있었다.
가운데 비싼 비단옷을 입고 고고하게 서 있는 사내와 그를 지키는 호위무사처럼 보이는 여섯 명의 사람들이었다.
청해상방의 소방주인 문영후와 호위무사들이었다.
문영후는 문약란을 보고 환하게 웃고 있었다.
“왜 그래? 아는 사람들이야?”
수월이의 물음에도 문약란은 입술만 달싹거릴 뿐이지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다리마저 후들거리고 눈앞이 어질어질해서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적가상방에서 지내면서 가끔, 아주 가끔 꾸던 악몽이 지금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문영후는 느긋한 걸음으로 문약란에게 다가왔다. 그의 얼굴에 미소는 두 사람의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더욱 진해지고 있었다.
문약란의 앞에 도착하자 문영후가 입을 열었다.
“여기에 있었네. 참 멀리까지 왔구나. 설마 절강성까지 왔을 줄은 몰랐다.”
여전히 아무런 대답도 못하고 있는 문약란을 대신하여 수월이 나섰다.
“누구세요? 소란이랑 아시는 분이신가요?”
수월이의 물음에 문영후는 대답을 하는 대신 문약란에게 말했다.
“여기서는 소란이라고 이름을 지은 것 같구나. 내가 누구냐고 묻는데, 네가 대답을 해 줄 거냐? 아니면 내가 대답을 할까?”
그 말에 문약란이 마른침을 삼키며 갑자기 바짝 마른 입술을 움직였다.
“오라…… 버니…….”
“잘 안 들리는 것 같은데?”
“……오랜만에 뵙습니다, 오라버니.”
“이제 들었소?”
문영후의 물음에 수월이 당황하며 문약란의 팔을 잡았다.
“오라버니라고? 정말이야?”
문약란은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왜 이렇게 사색이 돼서 그래? 무슨 문제야?”
“하하하! 동생이 가출을 했다가 오라비에게 잡혔으니 당연히 사색이 되어야 할 일이지.”
“가출? 가출한 거였어?”
가출이 아니라 도망이었다.
그러나 이런 말을 할 수 없었다. 당장 문영후의 뒤에 서 있는 무사들 중 하나가 은밀히 그녀만 볼 수 있도록 검을 매만지고 있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문영후가 그나마 그녀를 아끼고 보살펴 주는 사람이라고 알고 있다. 실제로 그녀의 정략혼을 적극적으로 말린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가 바로 문영후였으니까.
하지만 문약란은 문영후가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수발을 드는 여섯 무사는 명령만 떨어지면 지금 이 자리에서도 피바람을 불러일으킬 사람들이었다.
‘수월이가 말려들게 할 수 없어…….’
유일한 친구였다. 그리고 어쩌면…… 마지막 친구가 될지도 몰랐다. 그런 수월이를 위험하게 만들면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을 것이다.
문약란은 떨리는 손을 들어 수월이의 어깨를 짚었다.
“난 괜찮아. 놀라서 그런 거였어. 설마 가출해서 절대 못 찾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오라버니가 떡 나타나서 그래.”
“진짜 가출한 거야? 아니, 왜?”
“그런 얘기는 가족끼리 할 얘기인 것 같은데, 소저는 이만 돌아가 보시는 게 어떻소? 우리가 갈 길이 멀어서 말이오.”
제법 정중한 말이었지만, 수월이는 뭔가 불길함을 느꼈다. 이대로 문약란을 보내면 안 될 것 같은 그런 느낌말이다.
“잠깐만요! 소란이는 지금 적가상방에서 일하고 있어요! 갈 때 가더라도 상방에 가서 일을 그만둔다고 말해야 한다고요!”
그 말에 문영후가 피식 웃으며 문약란에게 물었다.
“그렇다는데 어떻게 할래?”
문약란은 이를 악물었다가 애써 표정을 풀며 수월이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그럴 수 없을 것 같아. 네가 가서 갑자기 내가 일을 그만둘 수밖에 없게 됐다고 말해 줄래?”
“소란아, 정말 괜찮은 거 맞아?”
수월이는 말만 하라는 듯이 눈동자를 굴리며 주변을 둘러봤다. 여차하면 비명을 질러 사람들의 시선을 모으려는 그런 모습이었다.
그러자 뒤에 서 있던 무사들 중 하나가 슬그머니 허리띠에 찔러 넣어져 있던 단도를 잡았다. 만약 비명을 지르려는 행동을 조금만 하더라도 단도를 뽑아 수월이를 죽이려는 모양새였다.
황급히 수월이의 양 어깨를 잡은 문약란이 단호하게 말했다.
“돌아가. 가서 나는 그만둔다고 말해 줘. 집에 돌아가게 되었다고, 내가 가출해서 가족이 찾으러 왔다고 말이야.”
“소란아…….”
“이만 가요.”
수월이의 어깨에서 손을 뗀 문약란이 먼저 등을 돌려 걸어갔다. 그러자 문정후는 웃으며 그녀의 뒤를 따랐다.
혼자 남은 수월이는 망연하게 문약란의 뒷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