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가상방 개망나니 40화
적가상방의 규모가 조그만 상방 수준은 아니었기 때문에 확인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단지 거리가 거리인 만큼 시간이 좀 걸렸을 뿐이다.
풍백에게 연락을 넣고 기다리자 얼마 지나지 않아 풍백이 심오경의 점포로 들어왔다.
“연락을 너무 늦게 드려서 죄송합니다. 거리가 멀어서 알아보는 데 시간이 좀 걸렸습니다.”
“그럴 거라고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잘 알아보셨습니까?”
“네, 모두 확인했습니다.”
풍백은 어색하게 웃고 있는 심오경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제 소문을 들었군요.”
“하하…… 그걸 제일 먼저 알려 주더군요.”
역시 풍백의 평판 문제였다. 하지만 문제가 될 부분은 없었다.
“그러면 제 평판을 듣고 나니 생각이 바뀐 겁니까?”
“아니요, 그럴 리가요!”
심오경이 펄쩍 뛸 듯이 놀라며 소리쳤다.
“이미 적가상방에서 계약을 맺기 위해 항주로 오셨다는 확인도 받았고, 근래에는 적가상방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치는 일을 처리했다는 얘기도 들었습니다.”
이 정도 확인을 했으면 풍백의 평판은 아무래도 좋을 것이다. 어차피 계약을 진행하는 것이 풍백이었을 뿐, 계약서를 작성하고 나면 계약의 주체는 적가상방일 테니까 말이다.
“그러면 계약은 그대로 진행되는 거겠죠?”
“그럼요! 바로 시작하시죠.”
풍백과 심오경은 계약을 진행하기 시작했다.
원래 계약을 진행하게 되면 먼저 가장 이견이 큰 부분은 합의하고, 그 이후 소소한 부분을 조정하며 피를 말리는 싸움을 하게 된다.
하지만 풍백과 심오경의 계약은 그런 분위기가 아니었다.
가장 이견이 클 수 있는 호초 구입에 관련된 금액은 이미 합의가 끝난 상황이었고, 소소한 부분은 서로를 배려해 주려고 해서 싸움이 일어날 일이 없었다.
서로 계약을 끝마친 이후 풍백은 들고 왔던 작은 나무 상자를 내밀었다.
“이건…….”
“열어 보시지요.”
심오경은 상자를 열어 봤다. 그러자 그 안에서 영롱하게 빛나는 열 개의 금원보가 눈에 들어왔다.
꿀꺽!
금원보 열 개는 대단히 큰돈이었다.
특히 심오경은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하더라도 이제 돈이 없어 더 이상 영파상방의 수작에서 버틸 수 없는 지경까지 왔었다. 그러니 지금 눈앞에 보이는 열 개의 금원보에 얼마나 심장이 떨리는지 몰랐다.
풍백은 뚫어져라 금원보를 보고 있는 심오경에게 말했다.
“이 금액만큼 당장 호초를 가지고 가고 싶어서 말입니다.”
“지금 바로 말입니까?”
“저도 상방에 돌아가서 실물을 보여 줘야 합니다. 그러니 호초를 가지고 돌아가야지요.”
이건 사실이었다.
어떤 상품을 계약하든지 품질 확인은 필수였다. 아직 풍백의 능력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믿음을 보여 주는 사람은 적호경과 진덕양뿐이었다. 그러니 실물을 가져가서 직접 보여 줘야 했다.
이미 계약서에는 호초 상태에 대한 항목이 있었다. 그러니 품질에 문제가 있다면 지금 당장 작성한 계약서도 휴지 조각이 될 것이다.
마음을 진정시킨 심오경이 슬쩍 눈치를 보더니 바닥에 깔려 있던 청석(靑石) 하나를 들춰냈다. 그러자 그 아래 작은 보퉁이 하나가 보였다.
“여기 있습니다. 혹시나 싶어서 미리 준비를 해 놨는데, 미리 준비하길 잘한 것 같습니다.”
지금 꺼낸 보퉁이가 심오경이 갖고 있는 호초의 전부는 아니었다. 단지 일부분을 지금처럼 준비해 놓은 것일 뿐이었다.
보퉁이를 받은 풍백이 내용물을 확인해 봤다.
잘 말려진 검붉은색의 손톱 절반보다 훨씬 작은 열매.
이것이 바로 금보다 비싸질 때도 있다는 향신료의 왕인 호초였다.
풍백은 호초를 집어 들고 냄새를 맡고 상태를 확인했다.
“상태가 아주 훌륭하군요.”
“제가 호초를 받아 오는 곳이 상등품의 호초를 재배하기로 유명하신 분입니다. 그래서 저 역시 호초에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신경을 많이 썼습니다.”
“그런데 지금 주신 호초는 제가 치른 값보다 너무 많습니다. 다른 주머니는 없습니까? 조금 덜어 내야 할 것 같은데요.”
심오경이 내민 호초는 대략 금원보 열세 개는 받을 수 있는 양이었다. 아마 상등품이라는 걸 감안하면 열다섯 개까지 받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심오경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네? 하지만…….”
“그건 앞으로 잘 부탁드린다는 계약금이라고 합시다.”
심오경의 말에 풍백이 손가락으로 이마를 살짝 긁적였다.
“아…… 정말 이렇게 받아도 되는 겁니까?”
“당연히 그래도 됩니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호의를 그냥 받는 것도 조금 죄송하군요. 그래서 제가 물어볼 것이 있는데…….”
“뭐든지 물어보시지요.”
“저와 계약한 다음부터 어떻게 하실 예정이십니까? 아무래도 영파상방에서 점주님에 대한 압박의 강도가 더 높아질 것 같은데요.”
그 말에 심오경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일단…… 지금 적 공자님이 지불하신 금원보를 가지고 제 신변 보호를 할 사람을 구해야겠지요.”
“낭인무사로 말입니까?”
“아마도 그렇겠지요.”
“그러면 앞으로 천축에 상행은 어떻게 가시려고요? 수레부터 호위무사에 일꾼까지 구하려면 거의 조그만 상방 하나를 만드는 수준일 텐데…… 영파상방의 압박을 받으면서 가능하시겠습니까?”
심오경은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렇지 않아도 고민하고 있던 부분이었다.
원래 풍백은 이 부분에 대해 청송무관의 협조를 받으려고 했다. 몇몇 무사들을 지원받아 심오경의 점포를 지키고, 그가 천축으로 상행을 나가면 호위까지 할 수 있는 그런 무사들을 말이다.
하지만 이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직 기반도 다 잡히지 못한 신생 표국에서 천축까지 상행을 호위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다. 만약 청송무관이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내키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런데 바로 얼마 전에 대안이 될 수 있는 방법이 생겼다.
“그러면 제가 좋은 방법을 알려 드리고 싶은데…… 어떻습니까?”
“해결 방법이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네, 방법이 있습니다.”
“그러면 저야 아주 감사하지요!”
심오경의 대답을 들은 풍백은 점포 바깥을 향해 조금 큰 소리로 누군가를 불렀다.
“소가주님!”
“이제 들어가도 되는 것이오?”
그리고 심오경의 점포로 들어온 사람은 다름 아닌 서문세가의 소가주인 서문표였다.
심오경은 항주에서 오래 살았다. 그렇기에 당연하게도 서문표의 얼굴을 알고 있었다.
점포로 들어오는 서문표를 본 심오경은 자신이 잘못 본 것은 아닌가 싶어 눈까지 비비고 다시 봤다가 헛바람을 들이켰다.
“헉! 소…… 소가주님?”
“하하! 처음 뵙겠습니다. 서문세가의 표라고 합니다.”
멍한 얼굴로 서문표를 따라 포권을 한 심오경은 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풍백과 서문표를 번갈아 가며 바라봤다.
‘아니, 두어 달 전까지만 하더라도 상산현의 망나니라고 불렸다고 했는데…… 대체 서문세가의 소가주를 어떻게 알고 있다는 거야!’
하지만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바로 눈앞에 서문표가 자리하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풍백은 이런 심오경을 보며 빙글빙글 웃으며 물었다.
“많이 놀라셨습니까?”
“조…… 조금 놀랐습니다.”
“너무 놀라지 마시고 들어 주십시오.”
자신이 크게 놀란 상태라는 걸 느낀 심오경이 크게 심호흡을 하며 진정하고 말했다.
“네, 말씀하시지요.”
“일단 서문세가에서는 이곳에 점주님을 호위할 무사님을 보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렇지요, 소가주님?”
“맞습니다. 설마 항주 내부에서 무공도 모르는 점주님을 해하려고 할까 싶지만, 저 역시 며칠 전에 좋지 않은 일은 겪은 터라 낙관적으로 생각할 수 없더군요. 그래서 호위무사로 무사 두 명을 보내 드릴 생각입니다. 낭인무사를 고용하는 것보다는 훨씬 안심하실 수 있을 겁니다.”
당연했다. 낭인무사와 명문정파의 무사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차이가 있었다.
“또한 점주님이 천축으로 상행을 나가는 것도 서문세가에서 호위무사를 지원해 주겠다고 했습니다. 수레와 일꾼은 저희 적가상방에서 지원할 겁니다. 점주님은 인솔만 하시면 됩니다.”
풍백의 얘기를 들은 심오경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더럭 겁먹은 표정이 되며 물었다.
“……값을 얼마나 치러야 하는 겁니까?”
아무래도 서문세가의 무사를, 적가상방에서 수레와 일꾼을 지원받는 것이다 보니 혹시 무지막지한 금액을 책정해서 자신에게 착취하려는 것은 아닌가 겁이 난 것이다.
그런 심오경을 보며 서문표가 미소를 지었다.
“뭔가 오해를 하시는 것 같은데, 점주님께서는 아무런 대가도 치를 필요가 없습니다.”
“……네? 호위무사와 일꾼을 지원해 주신다고 하셨는데…… 대가가 필요 없다고요?”
“그렇습니다. 저는 대가를 이쪽에 있는 적 공자에게 받기로 했으니까 말입니다.”
“적 공자님…… 에게요?”
풍백은 박수를 한 번 치고 말했다.
“많이 혼란스러운 것 같은데, 설명을 해 드리겠습니다. 저희가 지원하는 수레와 일꾼은 당연히 저희 물건이니까 지원을 하는 겁니다. 겸사겸사 물건 검수도 같이 진행하고요. 그러니 굳이 지원비를 받을 생각이 없습니다.”
“저희 세가에서 무사를 지원하는 것은 적 공자와 계약을 했기 때문입니다.”
심오경이 서문표에게 물었다.
“어떤 계약을 하셨기에 무사를…….”
“간단합니다. 적가상방에서는 이번에 점주님과 향신료 매입 계약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렇죠?”
“맞습니다만…….”
“저희는 적가상방에서 구입한 향신료 중 삼 할을 매입할 생각입니다. 아주 적절한 가격을 제시받았거든요. 단지…… 이곳에 올 때까지 그 향신료가 호초라는 건 몰랐었지만 말입니다.”
“어?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었나요?”
풍백이 너스레를 떨자 서문표는 피식 웃었다.
“괜찮습니다. 무려 호초를 구입하면서 당일 만난 사람에게 솔직하게 말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차피 진행 중인 계약을, 심지어 은공의 계약을 망치면서 가로챌 생각은 없었을 겁니다.”
서문표의 말에 풍백은 빙그레 웃기만 하고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사람 속은 모르는 일이지.’
만약 상대가 자신이 알던 대장이었다면 모든 것을 사실대로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가 서문표라면 아무리 과거의 연이 있다고 하더라도 무작정 믿을 수는 없었다.
어쩔 수 없었다. 풍백은 이렇게 행동하도록 훈련을 받았으니까.
실제로 서문세가는 이미 다른 곳에서 호초를 구매하고 있기는 했다. 하지만 항상 부족한 호초였기에 어떤 유혹에 빠질지 모르는 일이다.
“아시겠지만 저희 서문세가와 영파상방은 별로 사이가 좋지 않습니다. 그래서 적 공자가 점주님에 대해 얘기를 했을 때, 영파상방의 압박을 받는 점주님을 돕는 것에 자연히 관심이 생겼습니다.”
향신료 얘기는 심오경을 돕기 위해 구체적인 얘기를 하다가 나왔다.
서문세가는 다른 모든 문파가 그렇듯이 직속 상방 하나가 있었다. 그 상방에서는 천축으로 향신료를 구입하러 가기도 했는데, 심오경이 천축으로 상행을 갈 때 함께 움직이면 되는 일이었다.
풍백은 공짜로 이렇게 도움을 받기는 미안하다며 자신이 구입하는 향신료의 삼 할을 정가의 구 할을 받고 팔겠다고 했다. 어차피 돈을 벌자고 돕는 것은 아니지만, 꼭 계약서를 쓰자는 풍백의 말에 계약서까지 작성한 서문표였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호초를 다른 사람들보다는 싸게 구입이 가능하겠군.’
풍백에게 진 신세도 갚을 겸, 영파상방 일을 방해하는 겸 끼어든 일이었는데, 생각보다 높은 수익을 올리게 됐다. 무려 호초를 판매가가 아닌 공급가의 구 할이라니 짭짤한 수익이 예상되었다.
단지 일의 전말을 알고 나니 풍백에게 빚을 갚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빚이 더 늘어난 느낌이었다.
이제 이해가 끝난 심오경은 대단히 감동한 눈으로 풍백을 바라보고 있었다. 얼마 전까지 막다른 골목에 몰린 느낌이었는데, 이 모든 것이 풍백을 만나면서 사라졌다. 그러니 얼마나 풍백이 고마운지 몰랐다.
“정말……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그저 좋은 물건만 준비해 주면 됩니다.”
풍백은 속으로 생각했다.
‘너무 그렇게 고마워할 필요는 없소. 어차피 덕분에 우리도 쉽게 경험을 쌓게 되었으니까.’
적가상방에서 지원하는 행수나 상인, 일꾼들은 당연히 천축을 가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서문세가의 보호를 받고, 천축에 대해 정통한 심오경이 인솔하는 상행이었으니 위험도 낮고 경험을 쌓기에 완전히 최상이라 할 수 있었다.
이렇게 쌓기 시작한 경험은 차후 적가상방이 직접 천축으로 향신료 구입을 위해 상행을 할 수 있는 초석(礎石)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