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가상방 개망나니 39화
항주의 밤거리를 마차 한 대가 느긋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마차 창문에 차양이 달려 안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은 조금 특이하지만, 그것 이외에는 특이한 점이 없는 평범한 마차였기에 딱히 사람들의 시선을 끌지 않았다.
마차 안에는 풍백이 홀로 앉아 있었다.
‘오늘 하루는 무지 길게 느껴지네.’
성황루에서 그 난리를 겪었지만, 그 정도 가지고는 왕삼의 항주 관광 의지를 꺾을 수 없었다.
결국 해가 질 때까지 항주 관광을 다닌 이후에야 객잔에 돌아온 풍백 일행은 조금 늦은 저녁 식사를 할 수밖에 없었다.
종일 관광을 다녔지만, 사실 항주에 있는 관광지 중 절반도 둘러보지 못한 상태였다. 항주는 그만큼 관광 명소가 많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또 관광을 다닐 일은 없을 것이다. 오늘 하루 왕삼에게 할애한 것으로 충분했으니까.
저녁 식사를 마치고 왕삼과 호위무사는 각자의 방으로 쉬러 갔고, 풍백은 별채 주위를 서성이다가 서문세가 사람이 오자 그를 따라 조용히 빠져나왔다.
굳이 호위무사를 대동할 필요는 없었다.
상대는 서문세가였다.
이류무인 한 명이 있다고 해서 딱히 달라질 것이 없다는 말이다. 또한 서문세가는 명문정파이기도 했고 말이다.
‘흐음…… 일단 친목을 도모하는 것이 좋겠지?’
현재 항주에서 서문세가의 위치가 조금 흔들리기는 했어도 역사가 유구한 세가였다. 그러다 보니 쌓인 인맥이나 영향력을 절대 무시할 수 없었다.
서문세가와 좋은 관계를 맺어 놓는다면 나쁠 것이 없었다.
‘그렇다고 너무 매달릴 필요도 없기도 하지. 앞으로 몇 년 후에 적웅에게 밀려 항주를 떠났다는 사실을 보면 현재 내부적으로 문제가 만만치 않을 테니까.’
적웅이 만든 사파의 기세가 심상치 않았던 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일개 신생 사파에 밀려 대대로 살아왔던 항주에서 도망치듯이 떠났다는 건, 서문세가 자체에 대단한 문제가 있었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안타깝군. 당시에는 서문세가에 대해 관심이 별로 없어서 정확한 사정을 잘 모르니…….’
서문세가가 항주를 떠나게 된 일에 대해 자세한 사정을 알았다면, 그 정보를 가지고 적가상방이 유리한 방향으로 손을 써 볼 수 있을 텐데 말이다.
풍백이 이런 생각을 하는 사이, 마차 속도를 줄어들며 마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착했습니다. 이제 차양을 걷으셔도 됩니다.”
그 말을 듣고 풍백이 차양을 살짝 걷어 봤다.
마차가 도착한 곳은 작은 장원처럼 보였다. 규모로 봐서는 절대 서문세가가 아니었다.
‘그러면 어디로 데리고 온 거지?’
당연히 서문세가로 갈 줄 알았던 풍백은 의문을 가졌다. 그러자 그런 풍백의 마음을 알았는지 마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본래라면 세가로 직접 모셔야 하겠으나, 현재 살수를 고용한 자가 지켜보고 있을지 모르기에 세가가 소유하고 있던 안가(安家)로 모셨습니다.”
이 정도 이유라면 이해할 수 있었다.
처음 봤던 서문표의 모습을 생각하면 이런 판단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꽤 인상적이었다.
‘대장 성격이 그냥 만들어진 것은 아니겠지. 원래부터 꼼꼼한 면이 있었던 거야.’
살수에게 속았던 것은 경험의 문제였을 뿐이다.
마차가 멈추고 풍백이 내리자 건장한 사내 하나가 정중히 포권을 하며 말했다.
“소가주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사내가 먼저 움직이고 풍백은 그의 뒤를 따라 장원 안쪽으로 이동했다.
걸어가는 풍백의 눈에 장원 요소요소를 지키고 있는 무사들이 보였다. 아무래도 낮에 서문표를 습격한 사건이 있어서 호위에 꽤 신경을 쓰는 것 같았다.
그런데 걸어가며 무사들을 보면 볼수록 의문이 들었다.
‘……서문세가가 적웅에게 밀렸다고? 이런 무사들을 데리고 있으면서?’
보이는 무사들의 수준이 보통이 아니었다. 하나같이 비범해 보이는 모습이, 그저 적당히 무공만 익힌 무사처럼 보이지 않았다. 철저하게 정신 무장까지 마친 정예가 분명했다.
이런 풍백의 의문은 곧 서문표가 있는 내원을 앞에 두고 더욱 커졌다. 내원 입구 앞에는 총 네 명의 무인이 서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일류고수가 분명했다.
‘하하하…… 일류고수가 호위를 보고 있는 문파가 신생 사파에게 밀려 항주에서 쫓겨난다고?’
분명히 무언가 잘못된 것이 있었다. 아니, 알려지지 않은 무언가가 있는 것은 확실했다.
과거에 풍백이 봤던 자료에서는 분명히 서문세가가 무너지고 남은 사람이 안휘성으로 넘어가 남궁세가에 의탁했다고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원인은 적웅이 만든 신생 사파였고 말이다.
하지만 이 정도 문파가 신생 사파에게 무너지는 일은 있을 수 없었다. 아무리 적웅이 강하다고 하더라도 인적 자원이 밀리는 상황에서 어떻게 서문세가 자체를 무너뜨리고 쫓아낼 수 있겠는가?
‘분명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어.’
너무 안타까웠다.
자신이 조금만 더 관심을 뒀다면 서문세가가 무너진 이유에 대해서 더 자세히 알고 있었을 텐데 말이다.
풍백의 생각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소가주님께서 기다리십니다.”
재촉하는 말에 고개를 끄덕인 풍백이 안으로 들어갔다.
내원은 그리 크지 않았다. 꽤 아기자기하게 잘 꾸며진 정원에 작은 전각 하나와 연못 앞에 정자(亭子) 하나가 있을 뿐이었다.
정자에 서 있던 서문표는 풍백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환하게 웃더니 정중히 포권을 취하며 허리를 숙였다.
“어서 오시지요, 은공.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풍백 역시 웃으며 포권을 했다.
“대단치 않은 일이었는데, 너무 반겨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대단치 않다니요. 덕분에 목숨을 건졌는데 그렇게 말씀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목숨은 잃지 않고, 눈만 하나 잃었을 것이다.
하지만 서문표는 그걸 알 수가 없었다. 실제로 암기에는 잘못 맞으면 충분히 목숨을 잃을 수 있을 정도의 위력이 담겨 있기도 했었고 말이다.
“일단 이쪽으로 와서 앉으시지요.”
풍백은 서문표가 권하는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미리 대기하고 있었던 것인지, 한 사람이 술병과 잔, 그리고 간단한 안주를 가지고 다가왔다.
그걸 본 풍백은 얼른 얘기했다.
“술은 제가 사정이 있어서 지금 마시지 못합니다.”
“아…… 그러시군요. 그러면 차는 어떠신지요?”
“주시면 감사히 먹겠습니다.”
서문표가 가볍게 손짓을 하자 술을 가져오던 사람은 나가고, 잠시 후 다른 사람이 다기(茶器)를 가지고 왔다.
먼저 찻잔 두 개에 찻잎을 넣은 서문표는 뜨거운 물이 들어 있는 주전자를 들어 찻잔에 삼분지일 정도 물을 따랐다.
그리고 잠시 기다리며 찻잎이 뜨거운 물에 우러나기를 기다린 이후 세 번에 걸쳐 다시 물을 따라 찻잔을 채웠다.
풍백은 서문표가 찻잔을 자신의 앞에 밀어 놓자 검지와 장지로 탁자를 세 번 두드렸다. 감사하다는 표시였다.
그 모습을 본 서문표가 웃으며 찻잔을 들었다.
‘오…… 이거 끝내주는 고급 용정차다!’
비취색 이 된 차에서 나는 짙은 향기가 코를 먼저 자극했다. 찻잔에 담긴 찻잎은 흔히 최상급 용정차를 논하는 작설(雀舌)이었을 때부터 혹시나 싶었는데, 향기를 맡아 보니 맛을 보지 않아도 그 가치를 짐작할 수 있었다.
차를 마시자 부드럽고 순한 감칠맛과 단맛이 어우러지며 입안을 풍부하게 감싸 주었다. 그와 함께 일어나는 향기는 일품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아주 좋은 용정차입니다.”
“호포천(虎跑泉)에서 떠온 물로 우려 낸 용정차입니다. 용정차의 진미를 느끼려면 호포천의 물을 끓여서 먹어야지요.”
용정차는 특이하게도 차를 마신다고 하지 않고 먹는다고 말한다. 차를 우려 낸 찻잎을 따로 떠 내지 않고 그냥 씹어서 먹어야 하기에 이렇게 부르는 것이다.
“항주분은 아니신 것 같습니다만…….”
“절강성 남서부에 있는 상산현에서 왔습니다.”
“멀리서 오셨군요. 관광을 하러 오신 겁니까?”
“아닙니다. 일이 있어서 왔을 뿐인데, 시간이 남아서 오늘만 관광을 했을 뿐입니다.”
“저런…… 오늘만 관광을 하시는 건데 그런 일이 생겨서 만약 당황하셨겠습니다.”
“괜찮았습니다. 그 이후에도 저녁 식사 시간이 될 때까지 항주 관광을 다녔으니까요.”
“하하하! 대단히 담대하신 분이셨군요.”
정확하게 말하자면 왕삼의 관광 의지가 강했을 뿐이지만, 굳이 그런 말을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두 사람은 용정차를 먹으며 가볍게 담소를 이어 나갔다.
대부분의 질문은 당연히 서문표가 하고 있었다. 풍백에 대해 여러 가지를 물어보고 있었는데, 딱히 조사를 하려는 의도로 보이지는 않았다. 그저 친분을 쌓기 위해 서로를 알아가려는 것처럼 느껴졌다.
풍백은 이렇게 서문표와 담소를 나누며 묘한 기분이 들었다.
과거 풍백은 대장이었던 서문표와 지금처럼 차를 마시면서 꽤 많은 얘기를 나눴었다. 물론 그들이 나눈 얘기는 자신들의 과거에 대한 얘기는 아니었다.
그리고 지금 이렇게 서문표와 나누는 대화는 이전과는 느낌이 많이 달랐다.
‘아쉽군. 왜 그때는 서로에 대해 더 자세히 알려고 하지 않았을까?’
이유는 알고 있었다. 그곳에 있던 그 누구도 자신의 과거로부터 숨고 싶었던 사람들이지, 그 기억을 누군가와 공유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기 때문이다.
씁쓸한 마음이 들었으나 곧 털어 버렸다. 과거에 너무 얽매일 필요는 없었으니까.
마침 담소도 거의 끝나 가고 있었다.
서문표는 마지막 남은 용정차를 모두 먹고 입을 열었다.
“적 공자가 제가 해 주었던 것은 아주 감사했습니다.”
“별말씀을…….”
“항주에 일을 하려고 왔다고 하셨는데, 그 일이라는 것이 적가상방의 일이시겠지요?”
“그렇습니다.”
“그러면 제가 도와 드릴 수 있는 부분이 있을까 모르겠습니다. 혹시 제 도움이, 서문세가의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으십니까?”
풍백은 쉽게 대답을 하지 못했다.
사실 지금 상황으로는 서문세가의 도움이 필요한 부분이 없었다. 당장 심오경과 호초 공급에 대해 계약하기로 한 것은 굳이 서문세가의 도움이 없더라도 곧 이뤄질 것이다.
그렇다고 서문세가와 적가상방이 정식으로 거래를 하자고 하는 것도 애매했다.
원래 서문세가는 점차 쇠락하다가 결국 무너지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제 적웅이 신생 사파를 만드는 일은 없어질 것이니, 서문세가가 무너지는 것도 없던 일이 될 것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오늘 본 서문세가의 단편은 절대 적웅이 무너뜨릴 수 있는 그런 곳이 아니었다.
어떻게, 왜 서문세가가 무너졌는지 짐작도 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에서 이들과 계약을 하는 것은 조금 불안했다.
그렇다고 이 불안한 마음을 모두 극복할 만큼 수익률이 큰, 예를 들면 서문세가에서 재배 및 관리하는 최상급 용정차를 공급해 준다면 모르겠지만 말이다.
당연하게도 아무리 풍백에게 은공이라 부르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런 거대 계약을 그냥 넘겨줄 일은 없었다.
만약 정말 미리 계약된 곳에 위약금을 물어 주면서까지 적가상방에 넘겨줄 수 있을지 몰라도, 그렇게 된다면 앞으로 서문세가는 적가상방을 그리 고운 눈으로 바라보지는 않을 것이다.
‘어쩌면 핑계를 만들어서 짧은 시간 안에 계약을 파기할지도 모르지.’
결국 풍백은 마음을 정했다.
“없습니다.”
“없…… 다고요?”
“네, 없습니다. 이미 원래 하려고 했던 계약은 마무리 단계에 있고, 이번 계약이 체결되면 당분간 항주에 다른 계약을 할 예정은 없으니까요.”
“아…… 그러시군요.”
서문표는 곤혹스러운 얼굴이 되었다.
설마 아무런 도움이 필요 없다고 할 줄은 몰랐다. 항주에 일을 하려고 왔다고 했으니, 서문세가의 도움이 필요한 것이 있을 거라고 예상한 것이다.
풍백은 그런 서문표를 보며 슬쩍 웃었다.
“너무 고민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차피 어떤 대가를 받고자 도와 드렸던 것이 아니니까요.”
“그래도 뭐라도 합당한 무언가를 제공해야…….”
“사람의 관계라는 것이 하나를 받으면 똑같이 하나를 줘야 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지요.”
“저는 오늘 서문세가의 소가주이신 서문 소협이 직접 우려 낸 용정차를 마셨습니다. 이 정도면 어디를 가더라도 충분히 자랑할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 저는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말을 들은 서문표는 어색하게 웃었지만, 곧 풍백이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는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적 공자님은 참 대단한 사람이군요.”
“전혀 아닙니다. 아마 저를 아는 사람이 지금 소가주님이 하신 말씀을 들으면 기겁할 겁니다.”
“하하하! 그럴 리가요.”
“진짭니다. 상산현에서 망나니가 어디 있냐고 물으면 저희 적가상방을 가리킬 겁니다. 그런 제가 대단한 사람일 리는 없지요.”
마치 너스레를 떠는 것처럼 말하는 풍백의 모습에 서문표의 미소를 더욱 짙어졌다. 아무래도 그는 풍백이 대단히 인상적인 것 같았다.
그런데 풍백이 문득 물었다.
“아까 성황각에서 소가주님을 습격했던 살수들…… 혹시 영파상방에서 보낸 것 아닙니까?”
항주에서 서문세가와 영파상방이 다투고 있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당연히 이들의 싸움은 병장기를 휘두르는 싸움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서문세가가 운영하는 상방과 영파상방이 돈을 가지고 싸우는 중이라고 해야 맞는 말이다.
풍백의 물음에 서문표는 살짝 얼굴을 굳혔지만, 이내 다시 풀었다.
“그것도 가능성을 두고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증거가 없는 이상 무작정 그들을 압박할 수는 없는 일이지요.”
“영파상방과 서로 사이가 좋지 않다는 건 사실이 맞군요.”
“하하…… 그 이야기는 어차피 항주에서 모르는 사람도 없지요.”
“그러면 제가 재미있는 제안이 있는데 들어 보시겠습니까? 아마도 영파상방에 한 방 먹이는 것은 아니지만 꽤 화나게 만들 수 있는 일이 있는데 말입니다.”
그 말에 서문표의 눈이 유난히 반짝이기 시작했다.
서문표를 비롯하여 서문세가 사람들 역시 살수를 보낸 것은 영파상방이라 짐작하고 있었다. 상방의 싸움에 살수를 동원했다는 것은 이미 선을 넘은 일이었다.
특히 서문표는 요 몇 년 사이에 오늘 점심에 있었던 일만큼 기겁했던 일이 없었다. 그러니 영파상방을 화나게 만들 수 있다는 말에 급격히 관심이 쏠렸다.
“어떤 일이지 들어 볼 수 있습니까?”
흥미를 보이는 서문표의 반응에 풍백은 진하게 미소를 지었다.
‘잘하면 손 안 대고 코를 풀 수 있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