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가상방 개망나니 37화
풍백이 이런 생각을 하며 차를 마시는 사이, 다루에 한 사내가 들어오더니 풍백 지척에 두 사내가 앉은 곳으로 가더니 흥분된 말투로 말했다.
“야! 서, 성황각에 그 사람이 왔대!”
“그 사람이 누군데?”
“그 사람 있잖아, 그 사람!”
“최소한 실마리라도 던지면서 말해 주지 않을래?”
“제기랄! 절강제일미(浙江第一美)! 절강제일미가 나타났다고!”
“헉! 진짜? 서문세령이 왔다고?”
“가, 가 보자! 나 아직 한 번도 서문세령 본 적이 없어!”
그러더니 세 명이 후다닥 다루를 뛰쳐나갔다.
풍백은 그러든지 말든지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고 마시던 차를 계속 홀짝일 뿐이었다.
애당초 여자의 미모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풍백이었고, 어차피 상대방이 자신과 무슨 관계가 이뤄질 것도 아닌데 굳이 보러 가서 뭐하겠냐는 생각도 있었다.
‘아…… 그러고 보니 서문세령이 남궁세가(南宮世家)에 시집갔다고 했었나?’
풍백이 겪었던 과거에서 서문세가는 적웅이 만든 사파에 밀려 항주를 떠나게 된다. 그렇게 떠돌게 된 서문세가를 받아 준 곳이 바로 안휘성(安徽省)에 있는 남궁세가였다.
사람들은 남궁세가에서 굳이 서문세가를 받아 준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당시 남궁세가의 위세는 모든 세가들 중에서 최고 중 하나였다. 그에 비하면 서문세가는 이제 몰락해 가는 문파라고 할 수 있었다.
아무리 정파가 서로 어려운 상황에 돕는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다 망해 가는 문파를 아무런 대가도 없이 도와주는 경우는 없다.
이런 사람들의 의문을 불식시킨 것이 바로 서문세령의 혼인 소식이었다. 그제야 사람들은 사돈 될 문파를 돕는다는 걸 알아차린 것이다.
사실 세가의 가족이 하는 혼인은 정략적인 의미가 많이 부여되는데, 남궁세가와 서문세가는 서로 비교할 위치가 아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혼인을 하는 남궁세가의 자식이 서문세령의 미색에 홀렸기 때문이라는 말도 많았었다.
‘어차피 나하고는 상관없는 얘기지만.’
서문세령이 남궁세가로 시집을 가든지, 어디서 굴러먹었던 건지 모를 놈팡이하고 혼인을 하든지 무슨 상관이겠는가?
이런 풍백의 귀에 왕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슬슬 점심 식사를 하러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반짝이는 왕삼의 부담스러운 눈동자를 보니, 그가 다음에 무슨 소리를 할지 빤히 보였다.
“그래서? 기왕이면 성황각으로 가자고?”
“그렇죠! 항주에 왔으면 성황각에서 밥 한번 먹어야 어디 가서 항주 다녀왔다는 얘기를 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틀린 말은 아니다.
항주에서 최고의 음식과 차를 만드는 곳은 성황각 하나만이 아니지만, 역사적 의의와 화려함, 풍광 등 모든 것을 고려하면 성황각이 항주 제일이었으니까.
“하긴 성황각에서 밥 한번 먹는 건 나쁘지 않은 선택이지.”
“맞습니다! 그럼 지금 바로…….”
“근데 성황각은 원래 밤에 가야 하는 건데?”
“……네?”
“넌 해가 진 이후에 성황각에서 서호와 항주의 야경을 바라보는 것이 일절(一絶)이라는 말도 못 들어 봤냐?”
성황각에서 서쪽을 보면 서호를 한눈에 볼 수 있고, 오른쪽을 보면 항주를 한 눈에 담을 수 있었다.
특히 밤의 서호는 온갖 풍류객들이 띄운 배에 매달린 등불이 비추며 신비로운 광경을 과시한다고 한다.
“미리 말하지만 밤에 서호에서 남자끼리 뱃놀이를 즐길 생각은 발톱의 때만큼도 없으니까 쓸데없는 말은 하지 말고.”
“아…….”
항주 일절이라는 야경을 볼 것인가, 아니면 절강제일미의 옥안(玉顔)을 볼 것인가.
격하게 흔들리는 왕삼의 눈동자만 보더라도 왕삼이 얼마나 심각하게 고민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결국 마음을 정한 왕삼이 힘들게 입을 열었다.
“일단 밥도 먹어야 되고…… 그러니까 지금 가시죠.”
“쯧쯧…… 좋아하는 사람도 있는 놈이 무슨 여자 얼굴 한번 보겠다고 굳이 이렇게까지 하는지.”
“제가 꼭 절강제일미 얼굴 보겠다고 그러는 건 아니고요……. 그냥 도련님이 기왕이면 맛있는 것을 드셨으면 하는 충심에…….”
어색하게 웃으며 말하는 왕삼을 보며 혀를 차는 풍백이었다.
성황각으로 가기로 했으니 굳이 시간을 지체할 필요는 없었다. 이제 곧 점심을 먹으려고 사람들이 몰려들 것이다. 그러니 빨리 움직이는 것이 좋았다.
자리에서 일어난 풍백과 왕삼, 호위무사는 서둘러 성황각으로 향했다.
* * *
성황각이 있는 오산은 사실 그 높이가 완만하고 그리 높지 않다. 성황각이 있는 정상까지 올라가는데 일각도 채 안 걸릴 정도였다.
“우와아…….”
왕삼은 성황각을 올려다보며 입을 쩍 벌렸다.
무려 칠 층으로 된 성황각은 절대로 흔히 볼 수 있는 규모가 아니었다. 오죽하면 강남 사대 누각 중 하나로 손꼽히겠는가.
전체적으로 붉은색인 성황각의 화려함에 입을 벌리고 있는 왕삼과 달리 풍백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다.
“계속 여기 이러고 있을 거냐? 안 들어갈 거야?”
“가야죠, 가야죠!”
성황각으로 들어가자 이미 일층에는 자리도 없을 정도로 사람이 가득했다.
“어서 오십시오. 세 분이십니까?”
깔끔하게 차려입은 점소이가 다가와 정중히 물었다. 아직 사방을 둘러보느라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왕삼의 모습에 풍백이 나섰다.
“세 명이오.”
“지금 몇 층으로 올라가실 생각이십니까?”
성황각은 당연하게도 한 층을 올라갈 때마다 가격이 비싸진다.
“여기 서문세가 사람들이 왔다고 하던데, 그들은 몇 층에 있소?”
“오 층에 있습니다만…… 일행이십니까?”
“그저 인사라도 할 생각이라 물어봤소. 오 층에 자리는 있소?”
“있습니다. 준비해 드릴까요?”
“그렇게 해 주시오.”
“그럼 저를 따라오시기 바랍니다.”
점소이는 앞장서서 풍백 일행을 안내했다.
왕삼은 오 층까지 올라가는 동안 여전히 주변을 둘러보기 바빴다.
그런데 성황각의 화려함에 정신이 없는 건 왕삼만이 아니었다. 호위무사 역시 주변을 둘러보며 차마 입 밖으로 감탄은 하지 못하고 입만 벙긋거리고 있었다.
오 층으로 올라오자 점소이가 물었다.
“방으로 안내를 해 드릴까요? 아니면 여기에 있는 자리로 안내해 드릴까요?”
주변을 둘러보니 자리를 잡고 있는 사람들은 다들 제법 재력이 보통이 아닌 사람들로 보였는데, 이들 중에는 아까 다루에서 풍백의 옆자리에 있었던 사내들도 보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서문세가 사람으로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서문세가 사람들은 따로 방을 잡은 것이오?”
“네, 저쪽에서 따로 식사를 하고 계십니다.”
점소이가 가리킨 방향에는 주렴이 가리고 앉아서 안쪽이 보이지 않는 방이 자리 잡고 있었다.
뒤에서 신음성이 들려왔는데,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실망감에 휩싸인 왕삼의 목소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굳이 방까지 잡을 필요는 없으니, 기왕이면 창가 쪽으로 자리를 주시오.”
“그러면 이쪽으로 앉으시지요.”
자리에 앉은 풍백의 앞에 왕삼이 죽어 가는 얼굴로 앉았다. 얼마나 충격이었는지 창백하게 변한 왕삼은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으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래…… 벌 받은 거야……. 내가 수월이를 놔두고 다른 여자를 보려고 해서 하늘이 노한 거지……. 차라리 밤에 올걸……. 그러면 야경을 볼 수 있었을 텐데……. 아…… 난 등신이 맞아…….”
‘자기 잘못을 스스로 깨달고 있는 걸 보니 내가 굳이 한마디 하지 않아도 되겠네.’
풍백은 처음 이야기를 들었을 때, 절강제일미가 나왔다는 소리 하나만으로 성황각으로 달려가는 남정네를 보고 이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세상에 어떤 여자가 모든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밥을 먹고 싶겠는가?
그러니 어쩌면 꽤 높은 확률로 방을 잡았을 거라 생각했던 것이다.
이런 생각을 굳이 왕삼에게 알려 줄 필요는 없었다. 뭔가 좀 괘씸하기도 했고, 이렇게 자책하는 왕삼을 보는 것도 기분을 상쾌하게 만들어 줬으니까.
재미있는 건 왕삼의 옆에 앉은 호위무사의 얼굴도 꽤 실망한 것 같다는 것이었다.
‘이 양반도 기대했나보네.’
아무튼 점소이는 주문을 받기 위해 물었다.
“식사는 어떤 걸로 하시겠습니까?”
“사하분(沙河粉) 세 개하고, 포자는…… 뭐가 맛있소?”
“저희 숙수가 양주(揚州) 출신이시라 오정포자(五丁包子)를 아주 잘하십니다.”
“그러면 그거하고…….”
풍백은 여전히 자책하고 있는 왕삼을 힐끔 보고는 점소이에게 물었다.
“서시설은 지금 되는 거요?”
“얼마 전부터 주문을 받고 있습니다. 서시설도 드릴까요?”
“그것도 주시오.”
“그러면 술은…….”
“술은 됐고, 식사 후에 용정차로 주시오.”
“알겠습니다.”
점소이가 돌아가자 풍백이 식탁에 머리를 처박고 있는 왕삼의 뒤통수를 두드렸다.
“네가 그렇게 먹고 싶어 했던 서시설을 시켰으니까, 이거라도 먹고 힘내도록 해.”
“……감사합니다.”
여전히 풀이 죽어 있는 왕삼의 대답에 피식 웃으며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야경이 일품이라고 하지만, 낮에 보는 항주의 모습도 대단히 인상적이었다. 오밀조밀하게 밀집되어 있는 건물들 사이로 깨알같이 작은 사람들이 바삐 움직이는 모습이었다.
‘……가끔 이렇게 쉬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네.’
이제부터 쉬는 시간을 종종 갖겠다는 말은 아니었다.
적가상방의 멸문으로 이어졌던 사건이 벌어지기까지 일 년도 남지 않았다. 적어도 쉬는 시간을 가지려면 멸문을 막은 이후가 될 것이다.
풍백이 멍하니 창밖을 보고 있는 사이, 벌써 음식이 준비됐는지 점소이가 음식을 들고 왔다.
“사하분 세 그릇, 오정포자, 서시설 나왔습니다.”
광동성 음식인 사하분은 쌀로 만든 국수였고, 오정포자는 양주에서 유명한 만두였다. 서시설은 당연히 서시설이라는 조개로 만든 음식이었고 말이다.
“오오! 이것이 바로 그 서시설…….”
식탁에 머리를 박고 있던 왕삼은 음식이 나오자 언제 그랬냐는 것처럼 흥분된 얼굴로 음식을 바라보고 있었다.
특히 이전에 눈앞에 두고도 먹지 못했던 서시설을 보는 왕삼의 눈빛은 절강제일미를 얘기할 때보다 더욱 반짝이는 것 같았다.
“난 신경 쓰지 말고 먹어.”
“잘 먹겠습니다!”
풍백의 말에 기다렸다는 듯이 왕삼이 젓가락으로 서시설부터 집어 갔다. 진득한 양념 국물이 잔뜩 묻어 있는 서시설을 입에 집어넣은 왕삼은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맛있냐?”
“너무 맛있어서 눈물이 날 것 같습니다…….”
“창피하니까 나중에 방에 가서 혼자 울어.”
이때부터 왕삼은 미친 듯이 음식을 입에 쑤셔 넣기 시작했다.
호위무사는 왕삼처럼 미친 듯이 움직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잘 살펴보면 호위무사의 젓가락도 엄청 분주하다는 걸 알아볼 수 있었다.
그렇게 음식을 먹기 시작하던 풍백은 문득 그들이 있는 오 층으로 다섯 사내가 올라오는 것을 목격했다.
평범한 외모에 그리 특출할 것 없는 마의를 입고 있는 다섯 사내.
그들 중 몇몇은 병장기를 들고 있었지만, 항주에 도검을 가지고 다니는 사람은 많았으니 특별할 것도 없었다.
그런데도 풍백은 그들에게 계속 시선이 끌렸다.
이유는 간단했다.
‘살기(殺氣)?’
사람이 누군가에게 살의(殺意)를 품게 되면 살기를 흘리게 된다.
일반 사람들은 이런 살기를 잘 의식하지 못하지만, 강호 경험이 많거나 전장에서 굴러 봤던 사람은 살기에 대단히 민감하다.
그래서 무인들은 고수가 되어 가면서 살기를 흘리지 않는 방법을 터득하게 된다.
다만, 고수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살기를 잘 통제하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살수(殺手)나 자객(刺客)이다.
풍백이 저들에게 느끼는 희미한 살기는 분명 고수가 아닌 살수나 자객의 느낌과 같았다.
다섯 사내는 오 층으로 올라오자마자 곧장 서문세가 사람들이 있는 방으로 향했다.
‘목표가 서문세가였나?’
아마도 다섯 사내가 살기를 흘렸던 걸 생각하면 곧 소란이 일어날 것 같았다.
하지만 조금 의문이었다.
방금 전 다섯 사내는 제법 훌륭하게 살기를 숨기던 것에 비하여 무공 수준이 그리 높지 않았다. 기껏해야 이류무사 수준이었다.
그런데 서문세가 사람, 심지어는 직계인 서문세령과 그 일행이라면 겨우 저 다섯 명이 어떻게 할 수 없을 것이 분명했다.
‘뭐, 어차피 나하고는 상관없는 얘기니까.’
그래도 왕삼이랑 호위무사에게는 얘기를 해 놔야 할 것 같았다.
“이제 곧 소란이 일어날 것 같으니 적당히 먹었으면 슬슬 일어나지.”
“네? 소란이요? 그게 갑자기 무슨…….”
왕삼이 되묻는데, 서문세가가 있는 방에서 고함 소리가 몇 번 일어나더니 가죽북이 터지는 소리와 함께 사내 하나가 포탄처럼 쏘아져 나와 바닥을 텅텅거리며 튕기다가 널브러졌다.
풍백은 담담한 얼굴로 기절했는지, 아니면 죽었는지 모를 사내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런 소란이 일어날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