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가상방 개망나니 36화
그런데 심오경의 말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조건으로 계약할 수는 없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는 겁니까?”
“그 조건으로 계약하면 공정하지 못하니까요.”
심오경의 말을 들은 풍백이 눈을 살짝 빛냈다.
“그러면…… 어떤 조건이면 계약을 해 주실 수 있는 겁니까? 저희가 받아들일 수 있는 조건이라면 최대한 고려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일단 호초의 가격을 정가의 칠 할로 하시지요.”
“칠 할…… 이요?”
장기 계약을 하면서 가격이 하락하는 경우는 흔히 있는 경우지만, 그렇다고 가격이 칠 할까지 떨어지는 경우는 거의 볼 수 없는 경우였다. 아무리 떨어진다고 하더라도 칠 할 오 푼이 최저가였다.
하물며 이런 조건을 내건 사람이 판매자인 심오경이라니, 풍백은 놀란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러면 점주께서 너무 손해를 보시는 것입니다. 저희 적가상방은 공정한 거래를…….”
“공정한 거래를 하기 위해서 칠 할로 정하는 겁니다. 아마 저와 같은 상황이라면 그 어떤 상인이라고 하더라도 육 할 이상을 부르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정말 공정하게, 첫 단추를 잘 꿰려면 상식적인 가격으로 계약을 하는 것이 맞습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 정도면 손해가 너무 클 겁니다.”
“괜찮습니다. 제가 공급받는 호초의 가격이 다른 상인에 비하여 저렴하기 때문에 정가의 팔 할 계약을 한 것 정도의 수입은 충분히 얻을 수 있습니다.”
사실이었다.
손자를 구해 준 사람에게 제값을 다 받고 팔 수 없었기에 꽤 저렴한 가격을 제시했었고, 심호경은 싸게 호초를 구입할 수 있었다.
심오경은 말을 이어서 했다.
“그리고 계약 기간은 오 년으로 하되, 적가상방에서 동일 조건으로 계약을 연장할 의사가 있으면 자동으로 연장한다는 문구를 넣었으면 좋겠습니다.”
“점주님, 그건 너무…….”
호초의 가격은 점점 올라가는 추세였다. 그러니 현재의 가격을 그대로 동결한다는 것은 심오경이 더 많은 수입을 올릴 기회를 포기한다는 것과 같았다.
심오경은 곤혹스러워하는 풍백을 보며 환하게 웃었다.
“이건 제 상황을 알면서도 상도의(商道義)를 지켜 주신 부분에 대한 저의 호의입니다.”
“너무 과합니다.”
“전혀 과하지 않습니다. 이미 다 알고 계시겠지만, 저는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노예와 같은 삶을 선택할 처지였죠.”
“…….”
“공자와 적가상방은 그런 저를 구원해 주신 겁니다. 그러니 이 정도 손해를 보는 것이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심오경이 영파상방으로 들어갔다면 그의 손에 단 한 푼도 쥐어지지 않았을 돈이다. 그러니 이 정도는 충분히 웃으면서 할 수 있었다.
풍백은 심오경의 웃음을 보며 깊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저희 상방에 유리한 계약 조건이니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겠군요.”
“하지만 이 모든 계약을 하기 전에 시간을 좀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심오경이 왜 시간이 달라고 했는지 알아챈 풍백이 미소를 지었다.
“알고 있습니다. 저와 적가상방에 대해 알아보실 생각이시겠지요. 그러면 확실히 알아보고 연락을 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있는 객잔은 알려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호구 하나 구워삶기 간단하네.’
풍백은 심오경이 있는 점포를 등지고 걸으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모든 것은 풍백이 원했던 대로 이뤄졌다. 아니, 오히려 자신이 원했던 것 이상으로 받아 냈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심오경과 직접 마주 앉은 순간, 풍백은 그가 백척간두의 상황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여기서 말하는 백척간두의 상황이란, 단순히 그가 막다른 골목길에 섰다는 말이 아니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심오경의 심리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과거 풍백이 배운 것들 중 하나가 상대의 심리를 읽는 법이었다.
평범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사실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심리 및 감정 상태를 은연중에 밖으로 드러내게 된다.
풍백은 상대의 신체적인 반응이나 얼굴 표정, 행동 등을 읽어서 그의 의중을 읽을 수 있는 훈련을 받았다.
하지만 이런 훈련을 받았다고 해서 무조건 상대가 진실을 말하는지, 아니면 거짓을 말하는지 알아낼 수 있다는 건 아니다.
평균 칠 할 정도의 적중률을 가질 수 있다면 거의 점쟁이 수준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상대가 자신의 신체를 통제할 수 있는 무인이거나, 자신의 감정이나 진실의 유무를 숨길 수 있도록 훈련을 받았다고 하면 그 적중률은 기하급수적으로 떨어진다.
하지만 심오경은 어떤 부분에서도 이런 것을 기대할 수 없었다.
무공을 배운 적도 없었고, 전문적으로 감정을 숨기는 훈련을 해 본 적도 없으며, 심지어 지금은 실제로 정신이 나락에 떨어질 만큼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이런 상대가 눈앞에 있다는 건 풍백의 입장에서는 호구나 다름없었다.
처음에는 두루뭉술하게 몇 마디를 먼지며 상대를 파악했고, 그 이후 파격적인 제안을 던져 상대를 흔들었다.
원래 계획이었다면 여기서 흔들린 상대를 살피며 자신의 뜻에 동조하도록 조금씩 조종하려 했을 것이다.
만에 하나 심오경이 파격적인 제안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가격적인 부분이 아닌 다른 안건을 내밀며 상대가 알아서 가격을 깎도록 유도하려고 했을 것이고 말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스스로 가격을 낮추도록 만드는 것이다.
풍백이 압박해서 가격을 낮추는 것은 쉬운 일이다. 어차피 심오경은 당장 그것을 거부할 수 없는 상태였으니까.
그러나 그런 식으로 계약을 한다면 추후 재계약 시점이 되어서 문제가 발생할 것이 뻔했다.
그러니 심오경이 스스로 계약 조건을 풍백에게 유리하게 만들도록 유도해야 했다. 그래야 오랜 기간 계약을 지속할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심오경은 풍백의 의도보다 더욱 감화되어 있었기에 이런 수 싸움을 할 필요조차 없었다. 심지어는 종국에 전혀 기대하지도 않았던 자동 연장 계약 조항까지 집어넣겠다고 해 줬을 정도로 말이다.
이 정도면 완전 대성공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나저나 이 당시에 염라상(閻羅商) 심오경은 내가 듣던 모습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찾아볼 수 없네. 혹시나 계약이 힘들까 걱정했었는데.’
염라상 심오경.
풍백이 경험했던 과거에서 심오경이 얻었던 별호였다.
물론 심오경은 지금도, 이후로도 무공을 배운 적이 없다. 그럼에도 별호가 붙었다는 건, 그가 그만큼 특출했다는 말과 같았다.
과거의 심오경은 결국 영파상방에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삼 년에 걸쳐 강제로 행수를 맡아 천축에서 호초를 비롯한 온갖 향신료를 들여오게 된다.
삼 년이라는 시간 동안 가슴속에 비수를 갈던 심오경은 결국 영파상방에서 도망을 치게 되고, 몸을 숨기기 위해 뒷골목으로 들어간다.
뒷골목으로 들어온 심오경은 암시장에서 자신의 상재를 마음껏 발휘하며 종횡무진하게 되었고, 나중에는 염라상이라는 별호와 함께 절강성 뒷골목에서만큼은 하오문이 아니라 염라상이라는 이름이 먼저 손꼽을 정도가 되고 만다.
이런 심오경이었던 만큼 풍백은 많은 준비를 했다. 심지어 미리 가상의 상황을 그려 보며 대본을 준비했을 정도였다.
그런데 의외로 심오경은 쉽게 넘어왔다.
‘그만큼 힘든 상황이었다는 것도 맞겠지만, 그보다는 이후 영파상방에서 보낸 삼 년과 뒷골목에서 보낸 시간이 염라상을 만들었다고 봐야겠지. 지금은…… 사람이 너무 물러.’
아마도 이번 계약이 체결되고 난 이후, 심오경은 영파상방의 적극적인 공세를 맞닥뜨리게 될 것이다. 호초를 판매하고 손에 쥔 돈으로 그가 어디까지 성장할 것인지 지켜봐야 했다.
만약 심오경이 정말 뛰어난 상재를 가진 것이 맞다면, 영파상방의 압박을 받으면서도 충분히 과거 위상에 걸맞은 모습이 될 것이고…….
‘아니면 패잔병이 돼서 적가상방으로 들어와 가진 재능을 써야 할지도 모르고.’
어떤 방향으로 진행이 된다고 하더라도 적가상방의 입장에서는 나쁜 것이 없을 것 같았다.
영파상방은 적가상방을 압박하기는 힘들었다. 말했듯이 영파상방의 영향력은 절강성 북부에서만 먹히는 무기일 뿐이니까.
‘이제 기다리기만 하면 되겠군.’
확인이 끝나면 심오경에게 연락이 올 것이다. 그러면 계약을 하고 당장 구입 가능한 호초를 전리품처럼 들고 상산현으로 돌아가기만 하면 끝이었다.
* * *
“우와아아아!”
“최고다!”
“여자도 엄청 날렵해!”
사람들이 길거리에서 펼쳐지는 공연을 보며 환호성을 질렀다. 그들의 앞에서는 한 남자가 입에서 불을 뿜고 있었고, 다른 남자 하나는 날카로운 창끝을 자신의 목으로 휘고 있었으며, 여자 하나는 현란하게 재주를 넘고 있었다.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환호성을 지르는 사람 중 하나는 왕삼이었다.
“항주에서 자주 보인다는 길거리 공연을 직접 볼 수 있을 줄이야…….”
얼마나 감격을 했는지 눈물을 글썽일 것처럼 눈망울이 울렁거렸다.
풍백은 옆에 있는 다루에 앉아 환호성을 지르고 있는 왕삼을 보며 혀를 찼다.
‘아주 좋아 죽는구만. 저러다가 졸도라도 하겠어.’
항주까지 오는 와중에 왕삼이 자주 얘기하던 것이 바로 이 길거리 공연이었다.
길거리 공연은 꼭 항주에서만 벌어지는 것은 아니었는데, 안타깝게도 상산현에서는 이런 길거리 공연을 볼 수 없었다.
그래서인지 왕삼이 꼭 해 보고 싶다던 것 중 하나가 지금처럼 길거리 공연을 보는 것이었다.
‘이것만 보고 객잔으로 돌아갈까?’
원래 풍백은 객잔에서 나올 생각이 전혀 없었다. 딱히 항주 관광을 할 생각도 없었기에 그저 별채에서 무공이나 수련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객잔을 나가지 않고 무공을 수련하며 별채에서만 보낸 지 사흘 만에 결국 항주 관광을 하기 위해 나설 수밖에 없었다.
초췌한 얼굴로 담장 밖을 바라보며 시름시름 앓는 소리를 내고 있는 왕삼 때문이었다.
풍백 수발을 들면서 한 번씩 담장 밖을 보며 어설픈 연기를 하는 왕삼을 계속 보고 있느니 차라리 하루 시간을 내주는 것을 선택하기로 한 것이다.
그러자 언제 앓는 소리를 냈냐는 듯이 생생해진 왕삼을 보고, 하마터면 명치에 주먹을 꽂아 넣을 뻔했다. 다행히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참아 낸 풍백이었지만.
그 덕분에 풍백과 왕삼은 호위무사와 함께 항주 관광을 다니는 중이다.
‘하아…… 그래, 그나마 나를 진심으로 생각해 주는 몇 안 되는 놈인데 이 정도는 해 주지.’
그래도 어느 정도 이해는 됐다.
중원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 중에 항주에 와서 객잔에만 머물다가 돌아가고 싶은 사람이 얼마나 되겠나?
아마 개망나니 시절의 풍백이었다면 온갖 사고를 치며 항주 전체를 헤집고 다녔을지 모르는 일이다. 그나마 왕삼은 관광을 다니고 싶은 것이라 자신에 비하면 양호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그 같잖은 연기는 꼴도 보기 싫어. 대체 어디서, 누가 이런 쓰레기 같은 연기를 가르치는 거야?’
앓는 연기를 하던 왕삼의 모습이 다시 떠오르자 다시 혈압이 치솟는 것 같았다.
풍백은 마음의 안정을 찾기 위해 찻잔에 담긴 용정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윽한 용정차가 풍백의 마음을 달래 주었다.
공연이 끝났는지 사람들이 공연을 하는 사람들에게 동전을 던지고 흩어지는 것이 보였다. 당연히 왕삼은 입이 귀에 걸려서 폴짝거리는 경망스러운 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고 말이다.
‘……술 땡기네.’
다루로 들어온 왕삼이 풍백의 맞은편에 앉으며 잔뜩 흥분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같이 공연 보시지, 왜 차만 드시고 계신 겁니까? 엄청 재미있었는데.”
“재미없어.”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진짜 재미가 없다.
공연을 보여 줬던 사람들은 모두 무공을 익힌 사람이다. 두 남자는 외문무공(外門武功)을, 여자는 날렵한 경신법을 배웠다.
그들이 익힌 무공은 그리 수준이 높은 무공은 아니었으나,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방법은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전 과거에 오만 가지를 봤던 풍백에게는 아무런 감흥도 없는 공연일 수밖에 없었다.
“아주 즐거운 시간을 가진 것 같군.”
“넵! 정말 즐거웠습니다!”
“그럼 이제 슬슬 객잔으로 돌아가도 괜찮겠구나.”
“헉…… 벌써요?”
새파랗게 질린 왕삼의 얼굴을 보자 풍백은 뭔가 위안이 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네가 꼭 보고 싶다던 길거리 공연을 봤으니 이제 충분하잖아.”
“그, 그렇지만…… 도련님은 악왕묘(岳王廟)라든지, 육화탑(六和塔)이라든지, 아니면 서호에 배를 띄우고 풍류를…….”
“남의 묘를 왜 가려고? 술도 안 먹을 건데 서호에 배를 왜 띄워? 거기다가 시커먼 남자 세 명이 배를 띄울까? 우리가 무슨 문장가(文章家)야? 셋이서 시조라도 읊으려고?”
“정말 너무하십니다…….”
풀이 죽은 왕삼의 모습을 보니 속이 좀 풀렸다.
“왜? 그렇게 아쉽냐?”
“당연히 아쉽지 말입니다……. 이제 겨우 해가 중천에 떴을 뿐인데 벌써 객잔으로 돌아가다니요…….”
눈물이라도 뚝뚝 흘릴 것처럼 자신을 올려다보는 왕삼의 모습에 주먹이 저절로 불끈 쥐어졌다.
하지만 어차피 돌아갈 생각은 없었던 풍백이었기에 인심을 베푸는 것처럼 말했다.
“그러면 한 군데만 더 가 볼까?”
“그렇죠! 기왕 나왔는데 이대로 들어가면 되겠습니까? 맛있는 것도 먹고! 재미있는 것도 보고! 사람들 구경도 좀 하고! 응? 그러면 얼마나 좋습니까?”
신이 나서 벙긋벙긋 웃고 있는 왕삼의 모습에 풍백은 피식 웃고 말았다.
‘왜 과거에는 이런 소소한 것에서 행복을 찾지 못했을까?’
과거의 풍백은 그저 매일 술을 마시고, 술에 취해 희미한 의식 속에서만 살아갔었다. 그때는 그것이 너무 즐겁고 재미있었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버지가 기뻐하는 모습, 진덕양이 자신을 대견해하며 등을 두드려 주는 것, 유일하게 진짜 친구라 할 수 있는 왕삼이 좋아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그때보다 더 즐거웠다.
다시 술을 먹게 되더라도 이전처럼 술에 휘둘리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술이 주는 즐거움보다 더 좋은 것을 알게 되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