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가상방 개망나니 34화
항주는 부(府), 주(洲), 현(縣) 중에서 가장 큰 부로 구분된다. 그래서 항주를 부를 때는 항주부라고 부르는 것이 맞다.
이렇게 큰 항주이기에 항주 내부를 또 몇 개의 구역으로 구분해서 부르게 된다.
순안현(淳安县)은 항주의 가장 서쪽에 있는 구역으로 항주부에 있는 구역 중 가장 큰 구역이다. 그리고 구역이 큰 만큼 사람들도 많이 살고 있으며, 시장 또한 가장 거대했다.
이런 순안현 시장에는 당연히 수없이 많은 점포들이 있었는데, 그중에 외딴 곳에 있는 작은 점포에는 한 사람이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계산대에 앉아 다리를 달달달 떨고 있었다.
이 점포는 뭔가 이상했다.
보통 점포라고 하면 손님에게 팔 물건을 진열해 놔야 정상인데, 이 점포는 그런 물건이 단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계산대에 앉아 있는 사내, 심오경은 누굴 기다리고 있는지 한 번씩 자리에서 일어나 연신 누가 오는가 확인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심오경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드디어 기다리고 있던 사람이 보였으니까.
“행주님!”
심오경이 반색하며 자리에서 일어나게 만든 사람은 중년 정도로 보이는 사내였다.
그는 항주부가 아닌, 인근에 있는 소흥(紹興)에 있는 상방에서 상행 하나를 책임지는 위치에 있었다.
그런데 반색하는 심오경을 본 사내의 얼굴이 그리 밝지 않았다.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뭔가 곤혹스러워 하는 얼굴이었다.
“연락이 너무 늦어서 걱정하고 있던 차입니다. 어떻게 된 겁니까? 물건을 받아 주시는 겁니까?”
심오경의 다급한 물음에 중년 사내는 쉽게 대답을 하지 못하고 시선을 피했다. 그것을 본 심오경의 표정도 급격하게 굳어 갔다.
“설마…… 거절하시는 겁니까?”
“미안하네.”
세상이 무너지는 것처럼 절망에 빠진 얼굴이 된 심오경이 다시 물었다.
“아니, 왜 물건을 받질 못하시는 겁니까? 분명히 물건에 하자가 없다는 건 이미 다 확인을 하셨지 않습니까!”
“……미안하게 됐네.”
“이유라도 알려 주십시오! 적어도 그 정도는 해 줄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그 말에 곤란한 표정을 짓고 있던 중년 사내가 조심스럽게 주변을 한 번 확인하고 결심했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영파상방(英波商幇)이네.”
대답을 들은 심오경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영파상방은 항주에서 가장 거대한 규모를 가지고 있는 상방이다.
사실 과거에는 항주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것이 서문세가였지만, 근래에 야심차게 시도했던 여러 가지 사업에서 실패를 맛보고 그 위세가 꺾였다.
그리고 그렇게 꺾인 위세를 비집고 들어와 공격적인 상행위를 하며 항주 최고의 상방이 된 것이 바로 영파상방이었다.
잔뜩 일그러진 심오경을 보면서 한숨을 내쉰 중년 사내가 말을 이었다.
“……할 말이 없구만. 나도 이렇게 될 줄은 몰랐어. 자네가 가지고 있는 물건이라면 당연히 받을 거라고 생각했건만…… 대체 영파상방과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긍정적인 반응이었는데 하루아침에 바로 말이 바뀌더군.”
“…….”
“내가 최대한 손을 써 보려고 했지만…… 윗선에서 이미 얘기가 끝나서 내가 할 수 있는 일도 없었네.”
“……아닙니다. 행주님께서도 많이 애쓰신 걸 잘 알고 있습니다.”
“미안하네.”
중년 사내는 이렇게 말하고 뒤돌아서 점포를 나갔다. 거래가 틀어진 이상, 이곳에 더 있을 면목도 없으니 빨리 사라져 주는 것이 나을 것이다.
혼자 남은 심오경은 의자에 털썩 앉았다. 온몸에 힘이 다 빠졌는지 고개마저 축 늘어뜨리고 있는 그의 모습은 누가 봐도 절망에 빠진 모습과 다를 바가 없었다.
‘무섭구나, 무서워……. 아무리 항주를 손에 쥐고 있다는 영파상방이라고 하더라도, 내 손에 호초가 있는 이상 막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 내가 세상을 몰랐던 것인가?’
분명 호초는 대단한 상품이었다.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리면 누구나 쫓아와 머리를 조아리며 조금이라도 물량을 받으려고 하는 그런 귀물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그런 호초를 손에 쥐고 있으면서도 영파상방의 말 한 마디에 항주에 있는 모든 상방과 상인들이 모두 등을 돌렸다.
심지어 인근 현에 있는 상방에게 접촉을 했는데도 결국 모두 손을 털고 물러났다.
심오경이 이를 악물고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왜 일이 이렇게 됐는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화가 치밀어 올라서 참기가 힘들었다.
너무 억울했다.
심오경의 꿈은 상인이었다.
고아였던 심오경의 눈에 비친 상인의 모습은 언제나 돈이 많고, 먹고 싶은 것은 마음대로 먹으며, 궁전처럼 으리으리한 집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다른 고아들이 살기 위해 거지가 되거나 뒷골목으로 흘러 들어가는 것을 보면서도 심오경은 그들과 함께 하지 않았다.
당장은 더 편할지 몰라도 나중에는 자신이 상인이 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힘들었던 어린 시절을 간신히 살아남은 심오경은 나이가 적당히 차자 곧장 상방의 일꾼으로 일을 시작했다.
그렇게 힘들게 일하면서 벌게 된 돈은 먹을 것도 아껴 가며 모았다. 자신의 장사 밑천이 될 것이라는 꿈을 꾸면서.
상방의 일꾼으로 살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 장사를 하는 것부터 사람을 대하는 방법은 물론이고, 상인으로서 필요한 것이라면 뭐든지 하나라도 더 배우려고 열심히 일했다.
십 년을 그렇게 일꾼으로 보냈다.
그리고 마침내 상방의 일꾼을 그만두면서 심오경이 가장 먼저 시작한 일은 보부상(褓負商)이었다.
등에 봇짐이나 등짐을 지고 온갖 곳을 돌아다니며 물건을 사고파는 보부상.
사실 보부상은 큰돈을 벌기 힘들었다. 한 사람이 등짐으로 지고 다닐 수 있을 정도의 수량만 가지고 상행위를 해야 하기에 이문을 남기기가 쉬운 일이 아닌 것이다.
그럼에도 심오경이 보부상으로 상인의 길을 시작한 것은 계획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심오경이 상방의 일꾼으로 일하면서 항상 상방에 있는 것은 당연히 아니었다. 상방의 일꾼이라는 것이 상행이 있으면 따라가서 일을 해야 하는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상방의 일꾼들이 가기 싫어하는 곳이 있었으니, 바로 장거리 상행과 천축으로 가는 상행이다. 일도 힘들고, 산적이나 마적을 만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으니 누가 좋아하겠는가?
물론 상방에서는 산적이나 마적에 대비하기 위해 표국이나 상방 소속 호위무사를 대동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꽤 많은 일꾼들이 상행을 가는 길에 죽는다.
그런데 심오경은 이런 천축행 상행이 있으면 언제나 가장 먼저 자원했다. 그리고 천축을 자주 다니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천축어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상방을 나온 심오경은 천축으로 상행을 나가는 상방이 있으면 보부상으로 그 상행에 껴들었다.
천축으로 가는 상행에 표국이나 호위무사를 고용하는 것은 당연히 많은 돈이 필요했다.
그렇기에 상방에서는 심오경과 같은 보부상이 끼어들면 보호비를 받고 함께 움직였다. 조금이라도 이문을 남기려는 상방의 잔머리였다.
덕분에 심오경은 천축으로 상행을 나가며 값이 나가는 향신료를 사 왔고, 값이 비싼 향신료는 한 사람의 등짐 정도의 양으로도 충분히 재미를 볼 수 있도록 만들어 줬다.
그렇게 몇 년을 보부상으로 보낸 심오경은 드디어 항주 시장에 점포를 차려 장사를 할 수 있을 만한 돈을 거의 모을 수 있었다. 아마 몇 번만 더 상행을 나가면 제법 규모가 있는 점포를 구매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런 심오경이 일생일대의 기회를 만난 것이 이때였다.
천축으로 상행을 간 심오경은 길을 잃고 헤매는 아이를 구해 주게 되는데, 몇 가지 사건을 겪고 난 이후 자신이 구해 준 아이가 호초를 재배하는 사람의 손자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것을 계기로 호초 판매업자가 심오경에게 자신이 판매하는 호초의 일부를 넘겨주기로 약속을 해 줬다.
중원에서 극소수의 대상방에서나 취급한다는 호초였다. 그런 호초가 자신의 손에 넘어온다니, 심오경은 이것이 꿈이 아닐까 생각했을 정도였다.
‘지금 생각하면 차라리 꿈이었으면 좋았을지도 모르겠구나…….’
인생의 전환점이 될 것 같았던 호초는 확실히 자신의 역할대로 심오경 인생의 전환점이 되어 줬다. 단지 그 전환점이 좋은 방향이 아니었을 뿐.
호초는 귀물이다.
하지만 문제는 귀물이라고 어디에서나 쉽게 팔 수 있다는 말은 아니었다.
같은 무게의 황금보다 비쌀 수 있는 호초를 사 줄 수 있는 곳은 그리 많지 않았다. 실제로 꽤 많은 사람들이 죽을 때까지 호초의 냄새도 맡지 못하고 죽는다.
이렇게 비싼 호초를 그저 매대에 올려놓는다고 팔 수 있을까?
문제는 이것만이 아니다.
호초의 가치는 아는 사람들이라면 모두 눈이 돌아간다. 그 말은 그에게 호초가 있다는 걸 많은 사람이 알게 된다면 당연히 도둑과 같은 놈들도 미친 듯이 달려들 거라는 말이다.
그래도 심오경은 자신이 있었다.
어떤 상방이라도 거절할 수 없는 귀물, 그리고 자신이 지금까지 다져 놨던 인맥이라면 충분히 팔고도 남는다고 의기양양했었다.
실제로 지금까지 상인이 되기 위해 온갖 고생을 해 왔던 심오경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을지도 몰랐다.
단지…… 제일 처음 영파상방을 찾아간 것이 아니었다면 말이다.
말했듯이 영파상방은 항주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상방이었다. 그러니 자신이 가지고 있는 호초는 물론이고, 앞으로 가져올 호초까지 충분히 구매할 수 있는 능력이 차고 넘치도록 있다는 것이다.
당연하게도 영파상방에서는 심오경의 제안에 반색했다.
‘아직도 기억나네. 나한테 호초가 있다는 말을 듣고 입을 벌리던 모습이…….’
영파상방에서는 심오경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모든 호초를 구입하기로 약속했다.
심오경은 이렇게 호의적으로 나오는 영파상방을 배려하기 위해 시세보다 살짝 싸게 가격을 내리기도 했다. 향후 항주에서 계속 장사를 할 예정인데, 이렇게 호의를 베풀면 상대로 호의를 베풀 것으로 생각하면서.
하지만 이건 모두 심오경의 착각이었다.
어차피 당분간은 호초만 판매할 것이라 큰 점포가 필요 없어진 심오경은 시장에 작은 점포를 구매했다. 그리고 그런 심오경에게 영파상방에서는 곧 모든 약속을 취소하고 새로운 제안을 들이밀었다.
바로 영파상방으로 들어오라는 말이었다. 그렇게 한다면 영파상방의 상행 하나를 책임지는, 천축에서 호초를 가져오는 행주로 임명하겠다면서 말이다.
이 제안을 받아들이고, 그가 행주가 되어 천축에서 가져온 호초는?
당연히 영파상방의 수입이라는 말이다.
심오경이 가져갈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영파상방의 행주가 받아가는 월봉(月俸)이 전부였다.
세상에 어떤 사람이 이 제안을 받아들일까?
심지어 그들은 지금 당장 가지고 있는 호초를 시세의 이 할밖에 되지 않는 금액에 가져가겠다고 했다.
분노한 심오경은 이 말도 안 되는 제안을 거절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누구도 심오경과 계약을 하지 않았다. 대체 어떤 제안을 들었던 것인지, 어떤 협박을 받았던 것인지 몰라도 심오경과 알고 지내던 사람들조차 그를 기피하기 시작했다.
항주에서 호초를 파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걸 알게 된 심오경은 영파상방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은 다른 현의 상방과 접촉을 했다.
하지만 방금 봤다시피 그들조차 심오경과 계약을 거절하고 말았다.
‘차라리 도망이라도 갈 수 있었으면…….’
영파상방의 영향력 아래에서는 아무것도 못하겠다는 걸 깨달았던 심오경이 항주에서 도망을 치려고 했던 적도 있었다.
가지고 있던 돈은 천축에서 호초 구입과 시장의 점포 구매 비용으로 대부분 써 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그에게는 아직 호초가 있었다. 이것만 제대로 팔 수 있다면 어디에서든지 점포를 구입하고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런데 항주에서 도망쳐 나와 불과 반나절 만에 복면을 쓴 무인들에게 붙잡혔다. 그들은 다시 항주로 돌아가지 않으면 끔찍한 꼴을 볼 것이라며 협박까지 했다.
다시 항주로 돌아온 심오경은 그제야 영파상방이 평범한 상방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확인되지 않은 소문은 간혹 있었다.
영파상방이 사실 사파에서 만든 상방이라는 그런 소문 말이다.
하지만 확실한 증거도 없었고, 사파가 운영한다고 하기에 영파상방은 지나치게 깔끔하게 장사를 했었기에 사람들은 그저 악의적인 헛소문이라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심호경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실제로 직접 당해 보니 이 정도면 충분히 영파상방이 사파거나 적어도 그들의 배후에 사파가 있는 건 확실한 것 같았다.
심오경은 자신이 거미줄에 걸린 나비처럼 느껴졌다.
어떤 방법을 써도 벗어날 수 없었고, 점점 자신의 몸이 거미줄에 묶여 가고 있다는 걸 느끼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비.
‘이제 아무런 방법도 없어. 간악한 영파상방에 인질처럼 들어가는 수밖에…….’
모든 의욕이 꺾인 심오경이 고개를 푹 숙였다. 그의 눈동자는 점점 죽어 가는 것처럼 초점이 흐려지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심오경의 귀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주인 되십니까?”
“……네?”
고개를 들어 보니 값비싼 비단옷을 입은 젊은 사내가 호위무사 한 명을 대동하고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젊은 사내는 훈훈하게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했다.
“인사부터 드리겠습니다. 저는 적풍백이라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