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가상방 개망나니 32화
산적이라는 문제를 해결한 적가상방의 일상은 이전과 완전히 달라졌다.
들어오는 물품도 없고, 나가는 상행도 없어서 적막할 정도였던 적가상방이었는데, 지금은 매일 새벽부터 해가 진 이후까지 보통 소란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이렇게 소란스러운 적가상방에서 풍백이 항주로 가기 위해 준비하는 것은 그다지 사람들의 시선을 끌지도 못했다.
아무래도 자기 일이 너무 바쁘니 마차 한 대가 떠날 준비를 하는 것에 대해 흥미를 가질 여유도 없는 것이다.
말했듯이 상산현에서 항주까지 가는 길은 꽤 멀었다. 말을 타고 달리는 거라면 모르겠지만, 마차를 타고 천천히 이동하면 왕복하는 데 한 달이 조금 못 걸린다.
하지만 여기서 항주에 도착한 이후 조금만 시간을 보내면 적어도 한 달이라는 시간은 잡아야 할 것이다.
이러다 보니 항주까지 오가면서 행여나 노숙을 할 가능성도 생각해 준비해야 할 물건들이 꽤 많았다.
물론 이걸 풍백이 준비할 필요는 없었다. 대신 왕삼이 꽁지에 불이 붙은 것처럼 이리저리 뛰어다닐 뿐이다.
그래도 사시(巳時, 오전 9시~11시)가 되기 전에 준비를 마칠 수 있었다.
“도련님, 출발 준비가 끝났습니다!”
왕삼의 말에 풍백이 거처에서 느긋하게 걸어 나왔다.
“챙길 전 모두 챙겼고?”
“넵! 혹시 노숙할까 봐 얇은 이불까지 챙겼습니다요.”
“호위무사는?”
“이미 나와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번에도 마부와 호위무사, 그리고 왕삼만 데리고 움직일 생각이었다. 혼자 남게 될 거라는 걸 알고 있던 문약란은 침울한 모습으로 왕삼의 뒤에 서 있었다.
문약란이 적가상방에 들어온 이후로 풍백이 딱히 그녀를 챙겨 준 적은 없었다. 정말 전속 시비를 대하는 딱 그 정도만 신경 써 줬을 뿐이다.
그럼에도 그녀가 위험할 때 구해 줬기 때문인지, 문약란은 풍백에게 많은 의지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의지하던 풍백이 자신을 이곳에 두고 항주에 다녀온다고 하자 그녀는 불안함이 엄습하는 중이었다.
풍백은 그냥 모르는 척 지나칠까 생각하다가 이내 문약란의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그러곤 주변에 누가 없는지 확인을 한 번 하고 입을 열었다.
“수월이하고 친하게 지내고 있다고 들었소.”
“아, 네…….”
“혼자가 아니란 걸 알아서 다행이었소. 힘든 길에 오르는 것보다는 이곳에 있는 편이 더 좋을 것이오.”
“……제가 따라가면 안 되나요?”
문약란이 조심스럽게 말하며 풍백을 올려다봤다.
그녀의 애절해 보이는 초록빛 눈동자를 보고 풍백은 슬그머니 눈을 돌렸다. 아무리 그가 훈련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문약란의 눈동자는 너무 위험했다.
“이곳에 온 것도 이제 겨우 한 달이지 않소. 조금 더 이곳에 익숙해지는 시간을 갖는 것이 좋을 것 같소.”
“이미 충분히 익숙해졌어요. 다른 시비들이나 아주머니들과도 친하게 지내고 있고…… 그러니까 같이 가면…….”
간절한 문약란의 말에 풍백은 뒷머리를 긁적였다.
“상방에 있는 것이 더 좋을 텐데……. 마차를 타고 다니는 일이 그리 편하지만은 않아서 말이오.”
“괜찮아요! 얼마든지 견딜 수 있어요!”
적극적인 문약란의 모습에 풍백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왜 굳이 고생을 하려고 하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이번 항주행은 상방에 있도록 하시오. 이미 아버지에게 같이 움직일 사람에 대해 보고를 끝낸 다음이라 갑자기 인원을 추가하기는 조금 곤란할 것 같소. 다음에 지금처럼 장거리를 떠나게 된다면 고려를 해 보는 것으로 합시다.”
결국 상방에 남아야 한다는 사실에 문약란이 다시 침울해졌지만, 그래도 다음에는 데리고 갈 수 있다니 위안을 삼을 수밖에 없었다.
짧은 대화를 마친 풍백은 바로 준비된 마차를 향했다.
마차에 있는 마부석에는 이미 마부와 이전에 함께했던 호위무사가 탑승해 있었다. 호위무사의 허리춤에는 당연한 것처럼 용천보검이 매달려 있었다.
풍백이 마차로 다가오자 호위무사가 마부석에서 내리며 정중히 인사를 올렸다. 아무래도 풍백 때문에 이것저것 얻은 것이 많으니 허리가 절로 숙여지는 호위무사였다.
호위무사의 인사를 받은 풍백이 왕삼과 함께 마차에 탑승하자 적가상방의 문이 열렸고, 열린 문으로 마차가 천천히 빠져나왔다.
문약란은 풍백을 따라가지 못한다는 아쉬움 때문인지 마차를 따라 문 앞까지 걸어 나와 하염없이 떠나는 마차의 뒤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침내 마차가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문약란은 깊은 한숨과 함께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문약란은 전혀 몰랐다.
맞은편에 있는 다루 삼 층에서 누군가가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고, 그녀가 적가상방으로 들어가자 급히 어딘가로 달려갔다는 사실을 말이다.
* * *
광동성의 성도인 광주(廣州)는 땅이 기름지고 일 년 내내 따뜻한 날씨를 가지고 있기에 농산물과 해산물이 풍성하여 예부터 번성했었다.
하지만 이런 광주에도 뒷골목은 존재했다. 아니, 오히려 다른 곳보다 더욱 큰 규모의 뒷골목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광주 뒷골목에 있는 허름한 객잔 안에는 말상의 중년인이 초조한 얼굴로 같은 경로를 걸어 다니고 있었다.
이 중년인이 하오문 광주 지부의 지부장이라는 사실은 뒷골목의 어지간한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광주의 뒷골목에서는 왕이나 다름없는 지부장이 이렇게 초조한 얼굴을 하고 있다는 건 흔히 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아직도 전서구가 안 왔어?”
초조하게 걸어 다니던 지부장이 소리치자 하오문도 하나가 후다닥 달려와 대답했다.
“아직 안 왔습니다!”
“왜 이렇게 연락이 늦는 거야! 서둘러 달라고 요청했어?”
“요청은 했는데 표적이 밖으로 나오지를 않아서…….”
“나오지 않으면 안으로 들어가서 확인을 해야지!”
“계속 독촉하고 있는 중입니다! 곧 연락이 올 겁니다!”
“제기랄!”
사실 욕을 하고 있으면서도 왜 연락이 늦는지 이미 알고 있는 지부장이었다.
약 한 달 전에 정확하지 않은 정보 하나가 하오문에 들어왔다. 이 정보가 들어온 곳에서는 그리 중요한 정보라고 생각하지 않았었던 것 같지만, 지부장이 이 정보를 받았을 때는 벼락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
그 이후로 이 정보가 정말 맞는지, 그리고 정보 대상이 어디로 이동했는지 확인하기 위해 무려 한 달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물론 당장 팔아도 괜찮았지만, 만약 이것이 확실하게 사실이라는 것만 밝혀낸다면 정보의 가치는 어마어마하게 오를 수 있었다.
그래서 지부장은 이 정보의 신뢰성 조사가 끝나고 확인했다는 결과를 받는 걸 기다리고 있었는데, 문제는 이 확인이 너무 오래 걸리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러다가 무영각 놈들이 중간에 수작을 부리면 안 되는데…….’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하오문의 정보력에 비할 수 있는 건 개방밖에 없었다. 그리고 개방은 수집한 정보를 아무에게나 돈을 받고 팔지 않았다. 그렇기에 하오문은 정보를 얻으면 여유롭게 구매자를 찾아서 판매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언젠가 갑자기 무영각이라는 놈들이 나타나면서 일이 틀어졌다.
대체 어떤 방식으로 정보를 구하는지 몰라도, 이놈들은 암중에 숨어 있다가 정보가 생기면 구매할 대상에게 은밀히 접근하여 정보를 판매하기 시작했다.
경쟁자가 생기면 수입이 줄어드는 것은 당연한 일.
그 탓에 하오문은 이전보다 수입이 떨어지고, 무엇보다 정보료마저 무영각과 경쟁을 하는 바람에 깎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무영각이 있다는 걸 알고 있으니, 자신들이 알고 있는 정보를 입수해 먼저 팔아먹는 것은 아닌가 싶어서 속이 타들어 가는 중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한참을 초조하게 기다리던 지부장은 객잔으로 전서구가 들어오는 소리에 황급히 달려가 전서구에 달려 있는 전통을 빼앗아 직접 읽었다.
“그렇지!”
환호성을 내뱉은 지부장은 밝아진 얼굴로 외쳤다.
“정보가 사실로 확인이 되었다! 빨리 청해상방에 정보를 살 의향이 있는지 타진해 보도록 해!”
* * *
청해상방에서는 사흘에 한 번씩 전체적으로 모든 상행에 관련하여 보고를 올리는 자리가 열린다.
그리고 오늘이 바로 그날이기에 상행을 책임지는 각각의 행주(行主)들이 모여 있었다.
이 모든 보고를 받는 자리에는 당연하게도 청해상방주 문태성이 자리하고 있었다.
지천명(知天命, 50세) 정도로 보이는 문태성은 흔히 사람들이 생각하는 상인의 외양이 아니었다.
피부가 햇빛에 탄 것인지, 아니면 원래 그런 것인지 진한 갈색이었고, 몸은 깡말라 잘못 보면 환자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날카로운 인상의 문태성은 몸이 아픈 환자처럼 보이는 모습과 달리, 두 눈동자가 예리하기 그지없었다.
각 상행을 책임지고 있는 행주들은 이런 문태성에게 보고하면서 조금이라도 흠 잡히지 않으려 열심이었다.
“그래서 이번에 들어온 비단이 총 얼마나 되는 거지?”
“들어온 것은 모두 칠십 필입니다.”
“그럼 총 얼마나 더 들어오는 것이고?”
“양산(陽山)에서 사십 필, 영덕(英德)에서 육십 필이 더 들어올 겁니다. 비단이 모두 들어오면 물량 확인이 끝나자마나 바로 출하할 예정이기도 합니다.”
“비단은 그 정도면 되겠군. 호남성(湖南省)에서 들여온다던 군산은침(君山銀針)은 예정대로 들어오는 거겠지?”
문태성의 질문이 떨어질 때마다 사람들이 바짝 긴장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문태성이 평소에 얼마나 깐깐하게 대했는지 쉽게 짐작이 될 정도였다.
보고가 모두 끝나자 사람들이 대전에서 물러났다. 대전에 남은 사람은 오직 세 명뿐이었다.
문태성이 총관을 노려보며 물었다.
“그 녀석에 대해서는 아직 아무런 소식도 없나?”
“아직 없습니다.”
“관부는 그렇다고 하더라도, 개방이나 하오문 같은 곳에서도 연락이 없다고?”
“……조금 더 기다려야 할 것 같습니다.”
탕!
총관의 말에 문태성이 팔걸이를 내리쳤다.
“벌써 두 달이 가까워지고 있어! 대체 찾지 못하는 것인가, 아니면 찾지 않는 것인가?”
“저…… 저희가 할 수 있는 방도는 모두 취하고 있습니다. 관부부터 개방, 하오문은 물론이고, 상인들에게까지 의뢰를 넣어 놨습니다.”
“그런데 왜 찾지를 못하는 것인가! 겨우 도망친 계집아이 하나를 두 달이 다 되도록 찾지 못하다니,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야?”
“더, 더 노력하겠습니다.”
문태성이 팔걸이를 잡은 손을 부르르 떨며 이를 갈았다.
“망할 년……. 그동안 먹여 주고, 입혀 주고, 재워 줬더니 감히 도망을 가? 네가 어디까지 도망칠 수 있는지 한번 두고 보자.”
“아버지, 너무 심려하지 마세요. 그렇지 않아도 의원이 너무 큰 감정의 변화는 몸에 독이 된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이립(而立, 30세) 정도로 보이는 사내가 부드럽게 말했다. 제법 미남형으로 생긴 이 사내는 청해상방의 소방주인 문영후였다.
문태성은 문영후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내가 화를 내지 않으려면 그 망할 년을 빨리 찾아야지.”
그 말에 문영후가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정말…… 란아를 꼭 찾아야 하는 겁니까?”
“그게 무슨 소리야?”
“도망친 아이입니다. 이렇게 억지로 데리고 온다면 청해상방은 그 아이에게는 감옥처럼 느껴질 겁니다.”
“흥! 감옥처럼 느끼라고 해.”
“아버지.”
문영후의 간절한 말에도 문태성은 얼굴을 펴지 못했다.
“그 쓸모도 없는 년이 크면서 제법 얼굴이 반반해져 이제는 제법 비싸게 넘길 수 있어. 그년을 잡아 올 수만 있다면, 다른 상방에 혼인을 시키든지 아니면 포정사(布政使)나 안찰사 집안과 돈독한 관계를 만들 수도 있다는 말이다.”
“란아가 그런 걸 바라지 않을 겁니다.”
“그년이 바라든지 말든지 무슨 상관이야! 그래서 너는 우리 청해상방이 광동성 제일의 상방으로 쉽게 올라설 수 있는 수단을 버리겠다는 말이냐?”
“동생의 안위를 희생해서 얻어 낸 위치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문영후의 간곡한 말을 듣는 문태성의 얼굴이 잔뜩 못마땅하게 변해 갔다.
“못난 놈. 제법 상재(商才)가 있는 놈이 아비가 하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이해도 못하고 있다니. 네놈이 하는 꼴을 보니 내가 죽기 전까지 청해상방이 광동성 제일이 되는 꼴은 보지 못할 듯싶구나.”
“아버지!”
“꼴도 보기 싫다! 썩 꺼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