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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가상방 개망나니-31화 (31/313)

적가상방 개망나니 31화

“돈이 좀 필요합니다.”

식사를 하던 적호경은 풍백의 생뚱맞은 말에 눈만 끔뻑이며 바라봤다.

“설마 또 술 먹으려는…….”

“그럴 리가요. 그리고 술을 먹으려면 굳이 돈이 필요한 것도 아니죠.”

음주는 풍백의 망나니짓 중 가장 기본적인 내용이었다.

애초에 술 먹고 망나니짓만 하고 다니는 풍백이니 적호경은 당연히 한 푼도 주지 않았다.

그러자 풍백은 돈이 없는 상태로 일단 주점에 가서 술을 마시고, 나중에 적가상방으로 돈을 받으러 오라고 했었다.

덕분에 풍백이 술에 취해 돌아온 다음 날은 외상값을 받으러 온 주점 주인들로 소란스러워졌고 말이다.

재미있는 점은 풍백이 당장 돈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쫓아낸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는 점이다. 아무래도 풍백이 하루에 팔아 주는 매상이 어마어마하니 약간의 귀찮음을 감수하기로 했던 모양이다.

아무튼 적호경은 풍백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네가 술을 먹으려 했다면 이렇게 돈이 필요하다고 말하지는 않았겠지.”

적호경은 잠시 풍백을 바라봤다.

얼마 전까지는 어디 내놔도 부끄러웠던 아들이었는데, 이제는 제법 정신을 차린 듯한 모습이라 꽤 듬직해 보였다.

특히 이번 산적으로 인한 문제가 발생했을 때도 청송표국을 만들 수 있도록 제안을 하고 협의까지 이끌어 낸 것은 충분히 공을 세웠다고 할 수 있었다.

이 정도 공을 세운 풍백에게 상여금이라 생각하고 제법 큰돈을 줄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표정을 푼 적호경이 다시 젓가락을 움직이며 물었다.

“알겠다. 얼마나 필요하냐?”

“음…… 일단 금원보(金元宝) 열 개 정도 주시면 급한 것은 처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풍백의 말에 음식을 집어 집으로 가져가던 적호경의 젓가락이 우뚝 멈췄다.

“내가 잘못들은 것 같은데 얼마라고?”

“금원보 열 개라고 했습니다. 여유가 되면 더 주셔도 좋고요.”

탁!

적호경이 젓가락을 내려놓고 두 손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정신 차렸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구나…….’

철전 삼백 개는 은자 한 냥이었고, 은자 오십 냥은 금자 한 냥이었으며, 금자 열 냥이 금원보 한 개와 같은 가치를 가지고 있었다.

적호경이 마른세수를 하던 손을 내리고 풍백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네가 드디어 미쳤구나.”

“…….”

“이제 정신을 차렸거니 생각을 했더니 뭐라고? 금원보 열 개? 네가 지금 제정신이야!”

부드럽게 말하던 적호경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더니 종국에는 방을 쩌렁쩌렁 울릴 정도가 되었다.

“청송무관이 표국을 개국하면서 우리가 지원해 준 돈이 얼마인지는 알고 있느냐? 금원보 삼십 개다, 삼십 개!”

“적가상방 인근 부지 가격이 낮던데, 청송표국 부지를 근처로 해서 그나마 돈이 적게 들어갔군요.”

“저, 적어? 금원보 삼십 개가?”

풍백은 당장이라고 터질 것처럼 붉게 달아오른 적호경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투자한 금액은 이 년 안에 회수할 것이고, 그 이후로는 무조건 흑자라는 걸 생각하면 적게 들어간 것이 맞은 것 같은데요.”

“……그건 네 말이 맞다만, 그래도 금원보 삼십 개가 절대 적은 돈이 아니다! 그 돈으로 상방에서 다른 투자를 진행하면 얼마나 이득을 볼 수 있는…….”

“청송표국을 세우지 못했다면 적가상방이 없어졌을 겁니다. 그런 기회비용에 대한 얘기는 이 부분에서 끼어들 명분은 없는 것 같습니다.”

“끄응…… 그렇다고 해도…….”

“또한 청송무관을 도와주면서 적가상방이 구주현에 쉽게 진출하고 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빼먹으신 것 같은데요.”

미소를 지으며 조곤조곤 말하는 풍백에게 점점 할 말이 없어지는 적호경이었다.

‘이 녀석은 언제부터 이렇게 말을 잘하게 된 거야?’

분명 얼마 전까지는 자신이 목소리를 높이면 납작 엎드려서 발발 떨기만 하던 것이 풍백이었는데, 이제는 자신이 언제 그랬었냔 듯이 논리적으로 얘기를 하고 있었다.

기분이 묘했다.

금원보를 열 개나 달라고 하는 모습에 세상 물정을 모르는 것 같기도 하면서도, 반대로 이렇게 똑 부러지게 얘기하는 것을 보면 나름 대견하기도 했다.

“음…… 좋다! 그러면 왜 그런 거금이 필요한 것인지 얘기라도 들어 보자.”

“납득이 되는 얘기라면 돈을 주실 겁니까?”

“네 말대로 납득만 된다면 얼마든지.”

“호초(胡椒)를 구입하려고 합니다.”

적호경의 눈이 찢어질 것처럼 커다랗게 변했다.

“호…… 호초? 지금 호초라고 했느냐? 내가 아는 그 호초가 맞냐는 말이다!”

호초는 천축(天竺) 남부에서 자라는 호초나무에서 얻을 수 있는 향신료다.

호초나무 열매를 따서 말린 다음 가루로 만들어 음식에 뿌리게 되는데, 열매가 성숙하기 전에 말리면 흑호초, 열매가 성숙한 이후에 껍질을 벗겨 말리면 백호초가 된다.

중원의 상인들은 천축에서 많은 향신료를 구입하지만, 그 모든 향신료 중에서 가장 귀하고 가장 비싼 것이 바로 이 호초였다.

사람들은 호초를 두고 같은 무게의 황금만큼 값지다고 말하지만, 오히려 황금보다 더 비싸지기도 하는 것이 바로 호초였다.

그러나 이렇게 귀한 호초를 천축에서 가져오는 상인은 소수에 불과했다. 이것은 천축까지 가는 여정이 힘들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천축에서 생산하는 호초의 양이 한정되어 있다는 점이 가장 컸다.

또한 한정적으로 생산되는 호초는 중원의 상인만 원하는 것이 아니다. 가장 큰 경쟁자로 아랍(阿拉)의 상인들도 있었다.

아랍의 상인들은 호초를 서역(西域)에 있는 색목인(色目人)에게 엄청난 거액에 판매하는 중개무역(仲介貿易)으로 어마어마한 이득을 얻고 있었다.

이런 상황을 잘 파악하고 있는 천축의 호초 생산자들은 자신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상인에게만 호초를 판매하는 실정이었다.

그래서 중원의 상인들은 엄청나게 돈이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호초를 구하지 못해 손가락만 빨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지금 풍백이 이런 호초를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네. 아버지가 알고 계신 바로 그 호초입니다.”

“허어…….”

“이제 우리 적가상방도 독점 품목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독점 품목이라는 말에 적호경은 눈을 번쩍였다.

적가상방은 다른 곳이나 다른 사람이 생산한 물건을 대량으로 공급받으며 가격을 낮추고, 거기에 약간의 이윤을 붙여 다른 곳에 파는 방식으로 이익을 얻는다.

이건 일반적으로 거의 모든 상방이 취하는 방식이기는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상방이 모든 물품을 공급받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흔히 가장 돈이 되는 핵심 상품으로 분류되는 것들은 직접 생산하는 상방이 대부분이다.

실제로 금호상방은 상산현 인근에 있는 거대한 약초밭에서 약초를 수확하여 상산현에 공급하고 있었고, 백건상방은 직접 생산하는 것은 아니지만 절강성의 명차로 알려진 용정차(龍井茶)를 독점으로 상산현에 공급하는 중이다.

하지만 적가상방은 이런 것이 없었다. 그저 상산현과 인근에 있는 현에서 좋은 물건을 싸게 사 와 필요한 곳에 각각 분배하듯이 판매할 뿐이었다.

상방은 자신들이 독점으로 공급하는 물건이 곧 힘이라고 할 수 있었다. 백건상방의 노골적인 수작에 대응하지 못한 것은 적가상방에 이렇게 독점 공급하는 품목이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적가상방이 호초라는, 전 중원에서도 몇몇 대상방이 독점하고 있는 물건을 공급받는다면 단번에 그 위치가 바뀔 수 있었다. 말했듯이 호초의 가치는 약초나 용정차와 비교도 할 수 없었으니까.

‘호초만 있다면…… 굳이 관리를 쫓아가서 아양을 떨 필요도 없겠지. 아마 저들이 알아서 달라붙으며 호초 몇 알만이라도 달라고 할지도…….’

실제로 호초를 취급하는 대상방들이 관리들에게 호초를 뇌물로 주는 일은 흔히 일어나는 일이었다. 언제든지 돈으로 바꿀 수 있고, 불안하다 싶으면 음식에 뿌려 먹어서 없애면 되는 일이니까 말이다.

“어떻습니까?”

멍하니 호초를 취급하는 적가상방의 모습을 그려 보던 적호경은 풍백의 물음에 정신을 차리고 무안함에 헛기침을 했다.

“어허험! 좋긴 하구나. 그런데 호초를 정말 받아 올 수 있다는 말이더냐?”

“일단 호초를 가져오는 건 무조건 가능할 겁니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계속 공급받을 수 있을지는 확인을 해 봐야 합니다. 상대방 상황을 파악도 해야 하고요.”

지속적으로 호초를 공급받는다는 말에 적호경은 하마터면 함박웃음을 지을 뻔했다. 상상만 해도 흥분되는 상황에 얼굴 근육이 자기 마음대로 움직이려는 것 같았다.

“지속적으로 공급을 받으면 좋겠지만, 소량이라고 하더라도 당장 호초가 들어온다면 적가상방이 다른 지역에 진출하기는 수월해지겠지.”

과장 조금 보태면 호초 앞에서는 텃세고 뭐고 아무것도 존재할 수 없었다.

“그래서 호초를 취급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다는 거지?”

“제가 알기로는 항주(杭州)에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항주?”

상산현은 절강성 남서쪽 끝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리고 절강성의 성도(省都)인 항주는 북쪽에 있었다. 그 말은 상산현에서 항주까지 마차를 타고 움직이면 왕복으로 거의 한 달이 걸린다는 말이다.

적호경은 항주라는 말에 가장 먼저 드는 의문점을 물었다.

“그런데 항주에 있다는 호초를 취급하는 사람을 네가 어떻게 알고 있는 것이냐? 애당초 호초 같은 귀물(貴物)을 가지고 있으면 도둑이 무서워서라도 철저히 입단속을 했을 텐데…….”

“어디서 들었습니다.”

“대체 어디서? 내가 알기로 너는 상방에서 나간 적도 없는 걸로 알고 있는데?”

당당히 얘기를 하던 풍백이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그걸 본 적호경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너 설마! 또 밤에 담벼락을 넘었던 것이냐!”

“……술 먹으러 담 넘었던 건 아닙니다.”

“그러면 왜 야밤에 담을 넘어서 나가?”

“말했듯이 쓸 만한 일거리가 없을까 싶어서 정보를 모아 보려고 나갔던 겁니다. 덕분에 제가 얻어 온 청송무관에 관한 정보가 많은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까.”

그건 사실이었다. 풍백이 알아 온 정보를 토대로 청송무관과 표국을 만들었던 것이고, 그 결과 현재 적가상방이 빠르게 발전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술자리 정보라는 것은 신뢰성에 문제가 있기는 했다. 그 덕분에 호초에 대한 기대심도 폭락했고.

대신 술 먹고 사고만 치던 풍백이 이제는 상방을 생각해서 야밤에 술집을 돌아다녔다는 것은 제법 기특했다.

‘아마도 술을 먹지 않았다는 말도 사실이겠지. 평소 하던 행동을 생각하면 술을 먹었으면 끝장을 보는 놈이었으니까.’

망나니로 살았던 것이 이상한 구석에서 신뢰감을 주고 있었다.

이렇게 생각하니 한 번 기회를 주는 것은 어떤가 고민하게 되었다.

‘의욕적으로 무언가를 하려고 하는데, 이럴 때는 의욕이 꺾이지 않도록 뒤에서 밀어주는 것도 나쁘지 않은데…….’

호초를 정말 가지고 올지는 알 수 없으나, 한 번쯤 실패를 해 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될 것이다. 물론 그러기에는 금원보 열 개라는 거금이 눈에 밟혔지만.

거래를 실패하거나 정보 자체가 틀린 거라면 상관없다. 하나 사기를 당하거나 도둑과 같은 이유로 금원보 열 개가 없어진다면…….

‘적은 돈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적가상방이 흔들릴 정도의 금액은 아니야. 이걸 믿어? 말아?’

이렇게 고민은 하면서도 이미 마음을 정한 상태였다. 그저 너무 큰돈이라 입 밖으로 쉽게 말이 나오질 않을 뿐이지.

결국 적호경의 입이 열렸다.

“좋다, 어디 한 번 더 너를 믿어 보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거래에 실패해도 좋아. 사람이 어떻게 성공만 하고 살 수 있나? 실패도 해 보고, 왜 실패했는지 깨닫기만 하면 되는 거니까.”

“꼭 성공시키도록 하겠습니다.”

“실패하더라도…… 부디 사기는 당하지 않도록 하거라. 사기를 당하면서 얻을 수 있는 건 없어. 그런 것은 경험이 아니니까.”

풍백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다행히 넘어갔군.’

당연한 얘기겠지만 풍백은 야밤에 담을 넘은 적이 없었다. 무공을 수련하기도 바쁜데 언제 야밤에 나가서 정보를 수집하겠는가?

하지만 적당한 변명은 있어야 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야밤에 담을 넘어 정보를 찾아다녔다는 조악한 변명을 한 것이다.

만약 풍백이 외부를 돌아다녔으면 이런 조악한 변명을 할 일도 없었겠지만, 지금까지 상방에서 한 걸음도 나간 적이 없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상방에 한 명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호위무사도 데리고 가야 하는 건 알고 있겠지?”

“아…… 그러면 저번에 구주현에 같이 갔었던 그 호위무사와 함께 가도록 하겠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청송무관이나 표국에서 사람을 데리고 갔으면 싶은데, 상방 일이 너무 바빠서 그럴 사람이 없을 것 같구나.”

“아닙니다. 그 사람이면 충분합니다.”

정말 충분했다.

청송무관이나 표국의 무인들은 사부를 닮아서 그런지 고지식한 면이 있었다.

그에 비하면 호위무사는 어떤 문제가 생기거나 문약란처럼 돌발 변수가 생긴다고 하더라도, 적당히 챙겨 주면 입을 잘 다물어 줄 사람이었다.

풍백에게는 가장 편한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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