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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가상방 개망나니-28화 (28/313)

적가상방 개망나니 28화

“슬슬 상산현이 보입니다!”

왕삼의 말에 풍백이 시선을 돌려보니 그의 말처럼 멀리 언덕 너머로 상산현의 모습이 보였다.

“저기가 상산현이군요.”

“맞습니다, 아가씨! 저기가 저희 고향인 상산현입니다. 참 좋은 곳이지요.”

문약란의 말에 왕삼이 얼른 대답을 했다. 하지만 그의 대답을 들은 문약란은 살포시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아가씨가 아니라 소란이라고 부르기로 했잖아요.”

“아! 그랬었죠? 제가 기억력이 나쁜 사람은 아닙니다. 제가 아직 입에 이름이 붙지 않아서…….”

문약란은 풍백의 전속 시비가 되기로 하면서 신분을 숨기기 위해 소란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것만이 아니다. 최대한 문약란의 외모를 숨기기 위해 눈 아래로 얼굴을 가릴 수 있는 면사까지 쓰고 있었다. 당연히 이것은 풍백이 구해 준 것이다.

사실 크게 의미가 있지는 않았다. 문약란의 아름다움은 그녀의 눈만 보더라도 충분히 알 수 있었으니까.

오히려 가려진 얼굴 때문에 초록색 눈동자가 더욱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애초에 눈까지 다 가릴 수 있는 면사를 썼어야 하는데…….’

만약 그런 면사를 구했다면 아마 문약란은 거의 아무것도 보지 못했을 것이다.

강호에는 얼굴을 면사로 가리고 다니는 여인이 종종 있다. 그러나 그런 여인들은 고강한 내공을 바탕으로 안력이 대단하여 면사를 뚫고 밖을 볼 수 있는 사람들이다.

문약란은 그런 내공이나 안력이 없으니 지금이 최선이라고 할 수 있었다. 적어도 노력은 하지 않았나.

풍백은 왕삼을 한심하다는 눈으로 바라봤다.

“너 즐거워 보인다? 수월이한테 너의 즐거워하는 모습을 꼭 알려 줘야겠어.”

“어헉! 도…… 도련님, 대체 왜 그러시는 겁니까? 저는 단지 아가씨가 심심할까 봐…….”

“또 아가씨라고 했어요!”

문약란이 끼어들며 말했다. 그러자 왕삼이 자신의 입술을 찰싹찰싹 때렸다.

“아이고, 이 주둥아리! 정말 죄송합니다! 아가씨라고 부르면 안 되는데…….”

“한 번 실수한 것은 이해할 수 있어. 하지만 계속 이런 식이면 많이 곤란해. 너는 소란이가 위험해지는 꼴을 보고 싶은 거냐? 하다못해 아가씨가 아니라 소저라고 부르던가.”

“죄송…… 합니다…….”

진지하게 나무라는 모습에 왕삼은 금세 기가 죽어, 기어드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명심하도록 해. 소란이가 위험해지는 꼴을 보기 싫으면 절대로 아가씨라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걸. 또한 소란이에 대해서 너와 무사님이 철저히 입을 닫고 있어야 한다는 것도. 그러려면 지금부터라도 말하는 걸 조심해야 할 것이고.”

호위무사는 용천보검과 더불어 은자를 넉넉히 챙겨 주자, 마치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태도를 취했다.

하지만 왕삼은 좀처럼 입에 잘 붙지 않는 건지 몰라도 종종 아가씨라 부르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이제 제대로 부르도록 하겠습니다.”

잔뜩 굳은 얼굴의 왕삼이 대답했다.

마차 안의 분위기는 싸늘해졌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까지는 그냥 웃으며 넘어갔을지 몰라도, 이제 곧 적가상방으로 돌아가게 될 테니 한 번쯤은 짚고 넘어갈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왕삼은 장점이라면 장점일 수 있는 것을 가지고 있었다.

가만히 있던 왕삼이 문득 풍백에게 질문을 던진 것이다.

“그런데 너무 늦게 왔다고 방주님이랑 총관님께 혼나시는 것 아닙니까?”

다른 사람이라면 자신의 잘못을 생각하며 분위기를 살필 텐데, 왕삼은 어딘가 고장난 부분이 있는 건지 오히려 말을 걸었다.

아마 과거의 풍백이었으면 이런 왕삼에게 욕이라도 퍼부었겠지만, 지금의 풍백은 이런 왕삼의 모습에 그저 피식 웃을 뿐이었다.

“청송무관에 대한 일이 잘 풀렸다. 그러니 며칠 늦은 것 가지고는 욕먹을 일도 없어.”

“청송무관과는 상방에 도착해서 또다시 협의를 해야 한다고 했잖습니까. 협의가 잘 안 됐을 가능성도 있는 것 아닌가요?”

“그럴 일은 없어.”

우검학은 그런 표리부동한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자신이 은혜를 입었다고 생각하여 이전보다 적가상방에 유리한 조건으로 바꾸려 한다면 몰라도 말이다.

“일이 잘 풀렸으면 방주님과 총관님께서 엄청 좋아하시겠네요.”

“백아! 너 이 녀석!”

도착하자 어떻게 알았는지 가장 먼저 달려온 사람은 적가상방의 모든 대소사를 관장하는 총관 진덕양이었다.

멀리서 풍백을 확인하는 순간 큰 걸음으로 성큼성큼 다가온 진덕양이 풍백을 와락 끌어안았다.

“장하다! 아주 장해! 으허허허!”

그러면서 풍백의 등을 팡팡 소리가 나도록 두드렸다.

풍백은 진덕양의 태도만 보고도 청송무관과 협의가 예상했던 것처럼 성공적으로 끝났다는 걸 알았다. 왕삼의 말대로 엄청 좋아하고 있기도 했고.

“다행히 일이 잘 풀린 모양입니다.”

“잘 풀리다마다! 네 덕분에 우검학 관주와 표국을 설립하는 걸 수월하게 협의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할 수 있는 녀석이 왜 지금까지 그렇게 술만 먹고 속을 썩인 거야?”

술 먹고 속을 썩였다는 말에 풍백은 어쩔 수 없이 쑥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미 그의 기억 속에서는 거의 흔적만 남은 기억들이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불과 한 달도 지나지 않은 이야기였기에 낯 뜨거워졌기 때문이다.

그렇게 풍백을 안아 주던 진덕양은 문득 그의 뒤에 서 있는 사람에게 시선이 닿았다. 왕삼과 호위무사 말고 한 사람이 더 있는 걸 보고 조금 눈이 커졌다.

면사를 쓰고 있는 여인.

젊어서부터 장사를 한다고 제법 여러 곳을 돌아다녔던 진덕양이었다. 그러나 지금 보고 있는 여인과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사람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초록색 눈동자?’

거기에 특이한 초록색 눈동자는 그 분위기를 더욱 극대화시키고 있었다.

풍백을 끌어안았던 팔을 푼 진덕양이 문약란을 보며 물었다.

“손님을 데리고 온 모양이구나. 어디서 온 분이신지 알려 주겠느냐.”

“그런 건 아니고, 우연히 연이 닿아 제가 채용한 사람입니다.”

“채용했다고? 네가 상방에 채용을 시켜 줄 수는…….”

“상방이 아니라 제 전속 시비로 채용했습니다.”

전속 시비라는 말에 진덕양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풍백은 지금까지 주정뱅이 망나니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하물을 함부로 휘두르고 다니는 색정광(色情狂) 망나니는 아니었다.

하지만 워낙 사고를 치고 다녔던 풍백이었던 만큼 의심부터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리라.

“너 설마…….”

“숙부님, 제가 지금까지 그런 놈은 아니었지 않습니까?”

“허험! 그건 그랬지. 그렇다면 활동비는 그대로 가지고 있는 거겠지?”

풍백이 구주현으로 가면서 활동비로 무려 은자 일백 냥을 받았었다.

이렇게 엄청나게 많은 돈을 받은 이유는 혹시 모를 사건, 예를 들자면 접대라거나 뇌물을 건넬 일이 생길 수 있기에 미리 챙겨 준 것이었다.

하지만 풍백은 이 돈으로 뇌물을 건네거나 접대를 하진 않았다. 용유현에서 적웅에게 장물을 살 때 쓴 게 전부였다.

“여기에 있습니다.”

품에서 전낭을 꺼낸 풍백이 진덕양에게 건네줬다. 그러자 전낭을 들어 본 진덕양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조금 가벼운데?”

“비싼 음식 좀 챙겨 먹었습니다. 대략…… 구십 냥 정도는 될 겁니다.”

원래 적웅에게 장물을 사고 남은 돈은 은자 열다섯 냥이었다.

그러나 이후 풍백은 그 장물을 구주현에서 되팔며 상당한 차익을 남겼다.

풍백이 후려쳤을 뿐 충분한 가치를 물건이기도 했지만, 마치 절정고수와 같던 풍백의 혓바닥은 구주현에서도 그 위력을 충분히 실감할 수 있도록 현란하게 움직였다.

아마 이렇게 시세 차익을 풍백이 남겼다는 걸 알게 된다면 적웅은 배가 아파 밤에 잠을 자지 못할지도 몰랐다.

진덕양은 고개를 주억였다.

‘보아하니 저 처자를 돈 주고 사 온 건 아닌 것 같군.’

면사로 얼굴을 가리고 있긴 했지만, 매혹적인 초록색 눈동자와 아름다운 눈매만 보더라도 그녀가 은자 몇 냥 정도로 구입할 수 있는 노예는 아니라는 걸 쉬이 짐작할 수 있었다.

다만 그렇다고 해도 의문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정말 아무것도 없는 거겠지?”

“단지 서로 인연이 닿았을 뿐입니다. 소란이는 여기서 돈을 벌어 나중에 가고 싶은 곳이 있다고 합니다. 저는 당장 시중을 들어 줄 시비가 필요하고요. 그래서 고용했을 뿐입니다.”

과거에는 풍백에게도 시비가 시중을 들어 주던 때가 있었다. 단지 슬슬 개망나니로 진화하면서 모든 시비가 학을 떼며 도망갔을 뿐이다.

결국 진덕양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하지만 진짜 허튼짓은 하면 안 된다. 내가 아주 주의 깊게 지켜볼 테니 말이다.”

“그러십시오.”

대충 이런 의심을 받을 것을 예상했던 풍백이었다.

어쩔 수 없었다. 아무런 사심이 없다고 아무리 얘기를 한다고 해도 아무도 믿지 않을 만큼 문약란의 미모는 사기적이었으니까.

“방주님도 목이 빠져라 너를 기다리고 계시니 가서 보고를 하도록 하자.”

“아버지가요?”

“뭐가 어떻게 된 일이지 궁금해하시니 얼른 가서 보고를 하자꾸나. 아주 너 때문에 입이 귀에 걸려서 그냥…….”

“내가 뭐 어쨌다고?”

진덕양은 뒤에서 들려온 적호경의 목소리에 입에서 튀어나오려던 뒷말을 꿀꺽 삼켰다. 뒤를 돌아보니 적호경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아니, 방주님이 여기까지 왜…….”

“아들이 돌아왔으니 한번 나와 봤다. 그러는 너는 내가 입이 귀에 걸려서 뭘 어쨌다고 말하려던 거냐?”

“어허험! 어쩌기는 뭘 어쩐다는 겁니까? 제가 무슨 말을 했다고.”

진덕양은 슬그머니 뒤로 빠졌다. 적호경은 그런 진덕양에게 마치 나중에 보자는 듯이 눈을 가늘게 뜨고 잠시 노려봤다.

곤란에 빠진 진덕양을 구해 준 것은 풍백이었다.

“돌아왔습니다.”

앞으로 나서며 풍백이 말하자 진덕양이 시선을 돌려 그를 바라봤다.

“고생이 많았다. 크게 기대를 하지 않았었는데 어떻게 잘 처리했던 모양이더구나.”

“별것 없었습니다. 우검학 관주가 진총관의 제안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었기에 협의가 쉽게 진행될 수 있었습니다.”

풍백의 말이 과한 겸양이라는 건 적어도 진덕양과 적호경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공을 진덕양과 나누려는 모습은 나쁘게 보려고 해도 볼 수가 없었다.

천천히 다가온 적호경이 그런 풍백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수고했다.”

“아닙니다.”

“자세한 얘기를 듣고 싶으니 여장(旅裝)을 풀고 집무실로 오도록 하거라.”

“알겠습니다.”

적호경은 그대로 뒤를 돌아 걸어가다가 진덕양 앞에서 잠시 멈췄다.

“총관은 백아가 오기 전까지 나하고 얘기 좀 하지.”

“……꼭 해야 하는 얘깁니까? 제가 지금 바빠서…….”

“바빠도 나하고 얘기를 먼저 하는 것이 좋을 것이네. 그게 아니면 내가 도구를 준비할 시간이 생기지 않겠나?”

“헉! 혀, 형님?”

“어서 따라오게. 백아가 오기 전에 얘기를 끝마쳐야 할 테니.”

결국 진덕양은 적호경의 뒤를 미적거리며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풍백은 잠시 그대로 서서 적호경과 진덕양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기분이 묘했다.

이전 상방회의 때에도 제법 칭찬을 받기는 했지만, 지금 적호경의 칭찬은 그때와 또 달랐다. 마치 어린아이로 돌아간 것처럼 적호경의 칭찬은 풍백의 가슴이 벅차게 만들었다.

‘왜 그때는 이렇게 못했을까?’

과거를 떠올릴 때마다 자신을 비판하게 된다. 정말 과거의 자신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쓰레기였다는 것을 느끼면서 말이다.

그때 슬그머니 다가온 왕삼이 풍백에게 말했다.

“방주님이 너무하시네요.”

“뭐가?”

“방금 총관 어르신이 그랬던 것처럼 막 끌어안고, 등도 막 두드려 주고, 머리도 쓰담쓰담…….”

“머리는 쓰다듬지 않았었다.”

“아무튼요. 이번에 도련님이 정말 큰일을 하신 거잖습니까. 그러니까 더 칭찬도 해 주고 기뻐해 주시면 더 좋았을 텐데요.”

그 말에 풍백이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버지 입꼬리 봤냐?”

“입꼬리요? 웃지도 않고 계신 건 봤는데…….”

“입꼬리가 떨리고 계시더라.”

“어…… 그랬던 것 같기도 하네요. 근데 그게 왜요?”

“아버지는 말이야, 정말 최고로 기쁘면 더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려고 하시거든. 그래서 입꼬리가 그렇게 떨리는 거야.”

자신이 아주 어렸을 적에 적호경은 자신을 보며 저런 표정을 자주 보여 줬었다.

하지만 점점 나이가 들고 자신이 망나니가 되어 사고를 치면서 기뻐하는 표정 대신, 한심하고 안타까워하는 표정을 더 많이 보게 되었다.

그래서 풍백은 적호경이 과거에 보였던 표정을 보였다는 점에서 더욱 기뻐졌다. 진심으로 적호경이 기뻐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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