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가상방 개망나니 27화
지금 수레에서 펄럭이고 있는 저 깃발은 감히 아무나 달고 다닐 수 없는 깃발이다. 심지어 무당파 속가제자라고 하더라도 달고 다닐 수 없었다.
어떤 문파라고 하더라도 돈이 필요하다. 그것은 도가 문파라고 하더라도 마찬가지였다.
아주 오래전에는 문파에서 수학한 속가제자나 하산한 기명제자가 사업을 하며 매해 거액의 기부금을 보내 주면 그 기부금을 가지고 문파를 운영했었다.
하지만 점점 문파가 커지면서 이렇게 기부금만 가지고 문파를 운영하는 것이 어려워지게 되었다.
이것은 몇몇 문파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거의 모든 문파들에 해당하는 일이다.
그렇기에 무당파 역시 직접 문파 운영비를 벌기 위해 각종 사업을 벌이고 있었다.
물론 그것이 거창하게 상방을 운영하는 것을 말하는 건 아니다. 단지 문파 인근에 있는 객잔이나 다루 등을 대리인이 운영하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무당파가 직접 운영하는 가게 등에는 깃발이 달리게 되는데, 그 깃발이 바로 지금 눈앞에 있는 깃발이었다.
참고로 이 깃발이 달린 가게에서 문제를 일으킨다는 것은, 곧 무당파에 선전 포고를 하는 것과 같은 효과를 가지게 된다.
“저거 진짜야?”
“진짜 같은데요…….”
“직접 본 적이 있어?”
“제가 호북성(湖北省) 출신이라 많이 봤었죠…….”
산적들이 속닥거리는 와중에 무사들 사이에서 한 사람이 앞으로 걸어 나왔다. 고아한 인상을 가지고 있어 무사가 아니라 문사처럼 느껴지는 중년 사내, 우검학이었다.
앞으로 나온 우검학이 호피 옷을 입은 사내를 보며 입을 열었다.
“나는 구주현 청송무관의 우검학이라고 하네. 자네 이름이 뭔가?”
그 말에 호피 옷을 입은 사내가 고개를 갸웃했다. 당연히 무당파의 누구라고 말할 줄 알았는데, 듣도 보도 못한 청송무관이라는 이름이 나왔다.
“……그걸 왜 묻는 거요?”
“상행을 약탈하려는 산적들인 모양인데, 그래도 서로 칼부림하기 전에 통성명 정도는 해야 하지 않겠나?”
“킁! 내 이름은 알 것 없소!”
“그런가? 그러면 할 수 없지. 그래도 내 이름은 기억하고 있도록 하게. 적어도 자신이 누구한테 죽었는지는 알아야 할 것 아닌가.”
마치 시라도 한 수 읊을 것 같은 목소리로 살벌한 소리를 하고 있는 우검학이었다.
“자, 잠깐! 뭐 하나만 물어봅시다!”
“뭐를 말인가?”
“무당파와 어떤 관계인 거요?”
“그걸 왜 묻는 거지?”
“만약 무당파라면 우리가 물러가겠소. 무당파의 행사에 끼어들 마음이 없다는 말이오.”
이렇게 말하는 것은 꽤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다. 하지만 모든 산적이 그렇듯이 자존심보다는 목숨이 더 중요했다.
상대가 무당파라면 녹림십팔채(綠林十八寨)라 하더라도 전면전을 벌일 것이 아닌 이상 함부로 검을 겨누지 않았다. 그러니 우검학의 입에서 무당파라는 말이 나오면 슬그머니 뒤로 물러설 생각이었다.
그 말을 들은 우검학이 슬쩍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사부님이 꼭 지키라고 했던 말이 있었네. 그것이 무엇이냐면…….”
스르릉!
우검학이 자신의 검을 뽑았다. 그의 검집은 평범해 보였는데, 검집에서 뽑힌 검은 범상치 않았다. 특히 검배(劍背, 칼등마루)에는 독특하게 소나무 무늬가 새겨져 매우 인상적이었다.
그것을 확인한 호피 옷을 입은 사내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소…… 소…… 소, 송문검(松紋劍)!”
무당파 일대제자 이상만 받을 수 있다는 무당파의 상징과 같은 검.
검을 뽑은 우검학이 나지막하게 뒷말을 이었다.
“악즉참(惡卽斬)이라는 말이네.”
“튀어라!”
심상치 않은 기류를 느끼고 있던 산적들이 사내의 외침에 메뚜기 떼처럼 사방팔방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들 역시 무당파라는 얘기를 모두 듣고 있었던 터라 움직임이 매우 신속했다.
감히 싸울 생각도 하지 못했다. 무당파 일대제자라는 말은 곧 절정고수라는 말이었으니까.
하지만 호피 옷을 입은 사내는 불과 두 걸음도 걷지 못했다. 마치 호랑이가 먹이를 노리는 듯한 보법을 펼친 우검학이 그의 앞을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제법 견문이 넓은 사내는 단번에 우검학의 보법이 무당파의 상승보법 중 하나인 호종보(虎縱步)라는 걸 알아봤다.
우검학이 검을 늘어뜨리고 말했다.
“갈 때 가더라도 어깨 위에 있는 건 두고 가도록 하게.”
“뒈져!”
사내는 지면을 쿵하고 구르며 도약하더니 우검학을 향해 쏘아지듯 날아갔다. 그의 손에 들린 대감도에는 그의 모든 내공과 체중, 힘이 모두 담겨 우검학에게 일도양단(一刀兩斷)의 기세로 떨어졌다.
‘어차피 정면으로 붙으면 승산은 없다!’
일류고수인 자신이 절정고수인 우검학을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래서 사내는 우검학이 자신의 대감도를 받으면 바로 도망갈 생각이었다. 힘으로 받아치면 그 힘을 이용하여 도주하고, 한 걸음 물러서면 열린 길을 따라 혼신의 힘을 다해 경공을 펼칠 생각이었다.
대감도가 무시무시한 기세로 닥쳐오는 것을 본 우검학이 검을 움직였다.
‘받아치려는 것이구나!’
사내는 은연중에 대감도에 담았던 힘의 삼 할을 회수했다. 우검학과 검이 부딪치는 순간, 회수한 삼 할의 내공을 이용해 도주할 것이다.
그런데 우검학의 검이 움직이는 궤적은 그의 생각과 달랐다.
스르릉!
우검학의 검이 대감도에 부딪치는 순간, 마치 핥듯이 도신을 타고 움직이며 가벼운 쇳소리를 냈다.
그러곤 도파를 따라 내려가던 우검학의 검이 가볍게 흔들자 오히려 대감도가 튕겨져 나갔다. 그 힘이 얼마나 강했는지 대감도가 손에서 튕겨져 나가는 힘에 사내의 손아귀가 찢겨질 정도였다.
‘크윽…… 사량발천근(四兩發千斤)!’
넉 냥의 힘으로 천근의 힘을 발휘한다는 이 문구는 무당파 무공을 상징하는 것이다.
사실 거의 모든 절정의 무공에는 상대의 힘을 흘리는 화경(化勁)의 묘리가 담겨 있다.
그러나 무당파는 다른 무공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화경의 묘리를 담고 있다. 그래서 무당파를 논하면 사량발천근이라는 말이 필수적으로 나오는 것이다.
사내는 손에서 빠져나가려는 대감도를 놓치지 않기 위해 도파를 잡은 손에 힘을 줬다.
그는 대감도를 그냥 놓았어야만 했다.
대감도에 신경이 빼앗긴 그는 자신의 목을 향해 바람을 가르며 다가오는 우검학의 검을 의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서걱!
뭔가 목덜미에 섬뜩한 느낌이 전해진 순간, 사내는 곧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감각을 느꼈다.
‘……어라?’
푸학!
사내의 머리통이 하늘로 날아올랐고, 잘린 목에서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검을 한 번 휘둘러 검에 묻어 있던 피를 뿌린 우검학이 납검을 하며 나지막이 말했다.
“살아 있어 봤자 사람들에게 피해만 줄 놈들이다. 추살(追殺)해라.”
그 말에 청송무관의 다섯 제자가 빠르게 산적들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이쪽으로 습격이 왔으니 개화현으로 가는 상방은 안전하겠군.’
자신이 없는 곳으로 산적들이 습격을 했다고 하더라도 큰 문제는 없었을 것이다. 우검학과 같이 적가상방으로 온 제자들은 청송무관에서 가장 뛰어난 무공 실력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순식간에 산적들이 도망가 버리자 수레 아래에 숨었던 상인과 일꾼들이 슬그머니 기어 나왔다. 그러곤 상황을 파악하고 환호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우와아아!”
“청송무관 만세!”
“산적들이 다 겁먹고 도망갔어!”
“청송무관이라니! 청송표국이야, 청송표국!”
“멋있다, 청송표국!”
사람들의 환호성을 듣고 있으니 우검학은 슬쩍 얼굴이 화끈거리기는 했다.
하지만 그리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좋았다.
‘청송표국의 시작을 알리는 것으로 나쁘지 않았어.’
우검학은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환호하는 사람들에게 손을 들어 보였다.
* * *
“방주님!”
부서질 것처럼 문을 열고 들어온 총관의 모습에 백건상방주 곽자억은 분노를 하기보다 서둘러 질문부터 던졌다.
“어떻게 됐지? 연락이 왔나?”
“연락이…… 왔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됐다고 하나?”
“강산현과 개화현에 적가상방이 모두 도착했다고 합니다.”
“피해는? 얼마나 피해를 입었다고…….”
“피해는 전무해 보인다고 합니다.”
“……아무런 피해도 없다고?”
“네…….”
곽자억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총관은 앞으로 무슨 일이 벌이질 것인지 파악하고 움찔했다.
외부에서는 곽자억이 호방한 대인으로 알려져 있지만, 진짜 곽자억의 본모습을 아는 몇 안 되는 사람 중에 하나가 총관이었다. 그렇기에 이제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지 눈앞에 그려지듯 짐작할 수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곽자억이 책상 위에 있던 고급 벼루를 집어 던졌다.
와장창!
평소라면 행여나 그의 본래 모습이 알려질까 두려워 이렇게까지 하지 않았던 곽자억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절제심이 어디로 갔는지 온몸으로 분노를 표현하고 있었다.
벼루를 집어 던진 곽자억이 책상마저 뒤집어 버리고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분명히 두 상행 중 하나는 박살을 낼 수 있다고 하지 않았어?”
“보, 보내 준 전서구에는 그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두 상행 모두 피해도 없이 도착한 건데! 그 빌어먹을 산적 놈은 뭐하고 있는 거야! 설마 수고비를 더 받으려고 놔준 것 아니야?”
“그게…… 연락이 안 됩니다…….”
“연락이 안 된다니? 그게 대체 무슨 말이야? 다 죽기라도 했다는 말이야?”
곽자억의 말에 총관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본 곽자억이 의자를 발로 차서 쓰러뜨리며 소리쳤다.
“그게 무슨 개소리야! 그 산적 놈이 안휘성에서 일류고수 수준이라고 했다면서! 그 정도 고수를 적가상방의 어설픈 무사들이 어떻게 감당한다는 말이야!”
“확인을 해 본 결과, 이번 상행에는 구주현에 있는 청송무관이라는 곳이 동행했다고 합니다.”
“청송무관? 거기는 또 뭔데?”
“아직 확인…… 중입니다.”
청송무관주 우검학이 절정고수이자, 무당파의 일대제자라는 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렇기에 아직 백건상방은 해당 내용에 대해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면 파악한 내용이라도 설명을 해 봐!”
“넵! 저희가 파악한 내용에 따르면 얼마 전에 적가상방의 총관이 구주현으로 가서 청송무관에 협상을 진행했지만 결렬되었다고 합니다. 그 이후 이유는 모르겠지만 적가상방의 적풍백이 다시 한번 구주현을 방문하였고, 그 결과 청송무관주가 직접 제자를 데리고 적가상방으로 왔다고 합니다.”
“뭐야?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
“청송무관이 정말 일류고수마저 처리할 정도로 고수가 있다고 치자고. 그것 말고는 산적 놈이 적가상방의 상행을 막지 못할 이유가 없으니까.”
“네…….”
“하지만 적풍백 그 망나니가 성공적으로 협상을 진행했다는 말이야? 무려 일류고수를 잡을 수 있는 고수가 있는 무관을 상대로?”
“믿어지지 않지만 정황을 보면 그것밖에는…….”
“말이 되는 소리를 해! 지금 네가 하는 말은 내 아들이 우리 백건상방의 미래를 결정하는 협상 자리에 나가서 멋지게 해결하고 왔다는 말이랑 뭐가 달라?”
곽자억은 적어도 자신의 아들에 대해 과한 기대를 하진 않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아들인 곽종도 역시 망나니라는 것을 모르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아무리 곽종도가 망나니라고 하더라도 풍백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데 그런 풍백이 무려 절정고수인 우검학과 독대하여 이런 협의를 이끌어 내었다는 걸 믿을 수 없었다. 상산현의 개망나니가 그런 능력이 있었다면 왜 지금까지 온갖 악평을 받아 가며 살고 있었겠는가?
“조금만 시간을 주시면 더 자세한 내용을 알아내서 보고하도록 하겠습니다!”
“확실하게 조사를 하는 것이 좋을 거야. 이번처럼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늘어놓으면 너부터 작살을 내 줄 테니까!”
“네…… 넵!”
“그러면 지금 금호상방 쪽은 어떻게 하고 있지? 그쪽도 이번 내용에 대해서 알고 있을 거잖아.”
백건상방과 금호상방이 결탁을 하여 적가상방을 무너뜨리기 위해 합심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었다.
백건상방이 급속히 성장하는 적가상방을 내버려 두지 못하고 칼을 뽑았을 때, 동시에 금호상방도 움직이며 마치 두 상방이 손을 잡은 것처럼 보일 뿐이었다.
하지만 과정이야 어찌 됐든 금호상방도 적가상방을 탐탁치 여기지 않는다는 게 중요했다.
분명 그들도 지금쯤 현 상황을 주시하고 있을 터였다.
“별다른 움직임은 없었습니다.”
“확실해?”
“혹시나 싶어서 저희와 연이 닿는 동지 나리에게 확인을 해 보았지만, 지주대인이 금호상방의 사람을 만난다거나 다른 동지 나리와 만나는 모습을 보지는 못했다고 합니다.”
“망할 놈의 늙은이 같으니라고……. 상황이 조금 변할 것 같으니까 슬그머니 발을 빼겠다는 건가?”
금호상방에서는 이번 일에 크게 개입하지 않았다. 그저 관부가 힘을 쓰지 못하게 했을 뿐이다.
아니, 어쩌면 금호상방주인 조태명이나 총관인 모심천은 이번 기회에 백건상방이 적가상방과 제대로 한판 붙기를 바라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도 없었다.
백건상방은 이미 선제공격을 해 버렸다. 그것도 오해라고 변명할 수 없을 정도로 거창하게 말이다.
앞으로 적가상방이 적대적인 태도를 취할 것이란 건 확실했다.
그렇다면 차라리 연이어 공세를 펼치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지만, 아무리 적가상방이 급이 떨어진다 할지라도 정면으로 붙으면 백건상방 또한 피해가 만만치 않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적가상방과 백건상방의 싸움에서 흘러나온 부산물을 주워 먹기만 하더라도 금호상방은 손쉽게 이득을 취할 수 있다.
‘늙은이가 어부지리(漁父之利)를 노리는 거라면 모두 다 진흙탕에서 허우적거리도록 만들어 버리겠다!’
백건상방이 그 정도 힘은 있다. 물론 그렇게까지 하려면 백건상방이 감내해야 할 부담감은 기하급수적으로 높아지겠지만.
앞으로 벌어질 일을 생각하고 있자니 화가 치밀어 오른 곽자억이 눈치를 보고 있는 총관에게 고함을 질렀다.
“뭐하고 있어? 빨리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않고!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누가 와서 알려 준다고 하던가? 서둘러 움직여!”
“아,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