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가상방 개망나니 26화
적가상방과 청송무관을 비교하자면 그 위상은 당연히 적가상방이 더 높다.
적가상방이 현재 위태로운 상황이기는 하지만, 당장 자금 문제로 무너져 가는 일개 무관과 비교하는 것은 너무 가혹한 처사라고 말할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적가상방의 위상이 더 높다고 해서 청송무관주가 허리를 숙일 이유는 없다.
실상 두 상방과 무관 사이에서 열쇠가 되는 곳은 청송무관이다.
뿐만 아니라 청송무관주인 우검학은 절정고수였다. 강호에서 갖는 절정고수의 위치와 무인의 자존심을 생각해 보면 지금 우검학이 허리를 숙인 것은 엄청나게 이례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우검학이 허리를 숙이는 걸 본 적호경과 진덕양은 잠시 넋을 놓고 보고만 있었다. 그나마 적호경이 먼저 정신을 차리고 얼른 우검학에게 다가가 손수 그를 일으켰다.
“대체 왜 이러시는 겁니까? 이럴 필요가 없습니다, 이럴 필요가 없어요.”
“아닙니다. 방주님께 예를 차려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아니,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아무튼 너무 과한 예를 표하셔서 제가 불편합니다. 어서 이쪽으로 오시지요.”
적호경이 우검학의 한쪽 팔을 부여잡고 끌었다. 그 모습을 보고 정신을 차린 진덕양도 다가와 다른 쪽 팔을 붙잡고 끌었다.
“그렇습니다, 관주님! 이쪽으로 가시지요!”
두 사람에게 끌려 자리에 앉은 우검학이 슬쩍 눈치를 주자 열 명의 청송무관 무인들이 자리를 피해 줬다.
적호경은 무인들이 나가기가 무섭게 물었다. 도저히 안달이 나서 참을 수 없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백아…… 아니, 제 아들과 어떤 일이 있었던 겁니까?”
당연히 실패할 거라 생각했던 협의다. 진덕양도 실패한 협의를 지금까지 술 먹고 망나니짓만 하고 다니던 풍백이 성공적으로 이끌 거라 생각할 수 없었다. 그래서 경험이나 쌓아 보라고 보냈었던 일이다.
그런데 실패했던 협의의 당사자인 우검학이 직접 달려와 허리를 숙이고 있다니,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것인지 너무 궁금했다.
우검학은 씁쓸한 미소를 한 번 보였다. 물론 풍백을 만나고 협의하기로 한 걸 후회하는 건 아니었다. 단지 자신이 더러운 계략에 걸렸던 일을 떠올리니 입맛이 쓴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청송무관은 적 공자에게 큰 빚을 졌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청송무관이 나아가려면 적가상방과 끈끈한 관계로 묶여야 한다는 것도 인지했습니다.”
“빚을 지셨다고요?”
우검학은 이번에 풍백과 관련된 일에 대하여 간략하게 설명을 해 줬다. 어차피 나중에 풍백이 돌아온다면 어련히 자세히 설명할 것이니, 지금은 돌아가는 상황에 대해서 파악할 수 있을 정도로만 이야기를 전달했다.
하지만 정작 우검학의 얘기를 듣는 두 사람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백아가 그런 정보를 알고 있었다고?’
‘아니, 그런 고급 정보를 대체 어디서 입수했다는 말이야?’
‘자네는 알고 있었나?’
‘제가 알 리가 있겠습니까?’
적호경과 진덕양은 서로 시선으로 얘기를 나누며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대체 풍백이 어디서 이런 정보들을 얻어 왔는지 알 수 없었다.
“적 공자는 제게 적가상방이 지금 많이 곤란한 상황이니 서둘러 달라고 요청했었습니다. 그래서 이곳에 협의를 하기 위해 오면서 제자들까지 데리고 온 것이지요.”
“그렇다면…….”
“청송무관은 표국을 만드는 것에 동의했습니다. 하지만 정식으로 표국을 개국(開館)하려면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동안 적가상방이 상행을 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도울 겁니다. 그리고 협의가 끝나고 표국을 설립하면, 그때부터는 정식으로 표행을 시작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만 해 준다면 적가상방으로서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다. 그동안 상행을 나가지 못해서 몇몇 상품은 창고에서 상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얼굴이 환해진 적호경과 진덕양은 연신 감사의 인사를 했다.
“그렇게만 해 주신다면 정말 감사할 따름입니다.”
“표국 설립에 관한 협의는 걱정하실 필요도 없습니다. 최대한 청송무관에 유리하도록 협의 사항을 조절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이전에 진덕양 총관님께서 제안하셨던 내용 그대로 받아들이도록 하겠습니다. 그때 역시 저희 입장에서는 차고 넘치는 조건이었으니까요.”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서로 원하는 것이 확실하고, 협의 사항마저 서로를 배려할 의지가 넘치니 문제가 될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할 수 있었다.
이러는 와중에 적호경은 우검학에게 궁금했던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왜 제 아들과 같이 오시지 않았던 건지…….”
“하하! 적 공자는 잠깐 들러야 할 곳이 있다며 먼저 적가상방으로 가 주기를 원하더군요. 아마 며칠 안에 돌아올 겁니다.”
‘또 무슨 일을 벌이려고 하는지는 몰라도 무사히 돌아왔으면 좋겠구나. 내가 궁금한 것이 아주 많아.’
지금까지 속을 썩이고 한숨만 유발하던 풍백이었다. 그래서 항상 몽둥이부터 손에 쥐고 풍백을 찾고는 했었다.
지금처럼 좋은 의미로 빨리 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적은 없었던 적호경이었다.
* * *
상행을 나갈 수 없다는 것은 다음 상행을 위해 새로운 물품을 구매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그렇기에 적가상방에서 나가는 상행도, 상행을 위해 구입한 물건이 들어오는 일도 없었다.
이렇게 일이 없다 보니 사람들도 바삐 움직일 만한 일도 없고, 전체적으로 상방의 분위기가 처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적가상방에 청송무관의 마차 세 대가 도착한 이후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었다.
“강산현(江山縣)으로 상행을 나가는 마차가 저쪽이야?”
“그쪽은 개화현(開化縣)으로 가는 거고! 강산현은 저쪽이라니까!”
“으악! 조심해! 그거 떨어뜨리면 부서진다!”
“쌀은 어디로 나가는 거야?”
“이쪽이야, 이쪽!”
정말 오랜만에 사람들이 바쁘게 뛰어다니고 있었다. 아니, 아마도 적가상방이 생긴 이후로 지금이 가장 바쁘게 사람들이 뛰어다니는 것 같았다. 그동안 나갔어야 할 물건들이 한꺼번에 움직이고 있으니 바쁠 수밖에 없었다.
상행 준비가 끝나자 적가상방의 정문이 활짝 열리고 두 개의 상행이 동시에 출발했다.
각 상행에는 지금까지 밀렸던 거의 모든 물품을 가져가야 했기에 각각 일곱 개가 넘는 수레가 있었고, 상행을 떠나는 상인과 짐꾼 수십 명이 이동하게 되니 꽤 장관이었다.
“드디어 적가상방이 상행을 나가는구먼.”
“그런데 산적이 노린다면서 무사가 별로 없는 것 같은데?”
“설마 아무런 대책도 없지는 않겠지. 고수가 숨어서 쫓아가고 있는 건지도 모르고.”
“고수가 상행을 왜 숨어서 따라가?”
“저러다가 크게 사고가 나는 것 아닌가 모르겠다니까.”
“적가상방의 방주님이 참 사람이 좋은 분인데……. 부디 상행이 잘되기를 바라야겠어.”
사람들이 적가상방의 상행을 보며 두런두런 얘기를 하고 있을 때, 사람들의 시선이 많이 닿지 않는 구석진 곳에서 한 사람이 예리한 눈으로 상행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상행이 향하는 방향을 대충 훑어보더니 그들이 어디로 향하는지 짐작하고 바쁘게 달려갔다.
그리고 어떤 집에 도착한 그는 안으로 들어가 작은 쪽지에 몇 글자를 휘갈기더니 전서구를 꺼내 작은 쪽지를 발목에 매달린 전통에 넣고 날렸다.
적가상방에서 출발한 두 무리의 상행은 상산현을 나오자마자 헤어졌다. 한 상행은 남쪽 관도를 따라 강산현으로, 다른 상행 하나는 북쪽 관도를 따라 개화현으로 향했다.
최종 목적지는 각각 강산현과 개화현이겠지만, 가는 길에 있는 작은 마을과 화전민 마을에 들르며 그동안 밀렸던 물품을 판매할 예정이었다.
두 상행 중 남쪽 강산현으로 향하는 상행이 인근에 있는 이름 없는 산을 지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산에는 일단의 사람들이 산자락에 있는 울창한 숲에서 모습을 감추며 지나가고 있는 상행을 지켜보고 있었다.
숲에 숨어 있는 사람들 중 대감도를 들고, 호피 옷을 입은 사내가 음흉한 웃음을 흘렸다.
“흐흐흐! 망할 때까지 상산현에 처박혀 있을 줄 알았더니만 결국 이렇게 나왔구나.”
“헤헤! 한동안 상행을 나오지 않았으니 저희가 지금쯤이면 다른 곳으로 갔을 거로 생각한 것 같습니다. 끄나풀 심어 놓고 감시하는 것은 까맣게 모르고 말입니다.”
간사하게 생긴 사내의 추임새에 호피 옷을 입은 사내가 물었다.
“그래서 전서구에는 무사가 몇이나 있다더냐?”
“다 합쳐도 열다섯 정도라고 합니다.”
“열다섯? 이전보다 더 적은데?”
“상행을 나올 때마다 무사들이 죽어 나가는데 누가 적가상방을 위해 목숨을 걸고 상행을 나서겠습니까?”
“하긴, 자기 목숨은 소중한 법이지. 그보다 전서구에서 이쪽이 더 비싼 물품을 운송한다고 쓰여 있던 것 맞지?”
“확실합니다.”
상행 두 군데를 동시에 습격할 수 없었던 사내는 가장 돈이 되는 이곳을 노리기로 했었다.
하지만 욕심이 많은 사내는 그냥 보내 줘야 했던 다른 상행 하나를 떠올리며 아쉽다는 듯이 입맛을 다셨다.
“좋아, 백건상방에서는 뭐하고 하더냐?”
“이전과 똑같습니다. 상행에서 노획한 물품을 가져오면 이전처럼 시세의 팔 할 가격으로 사 준다고 합니다.”
“수고료는?”
“그것도 당연히 계산을 해 준다고 했지 말입니다.”
호피 옷을 입은 사내는 아주 마음에 든다는 것처럼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안휘성(安徽省)에서 산적질을 하다가 남궁세가(南宮世家)에게 산채(山寨)가 토벌 당했을 때는 앞이 깜깜했었다.
하지만 사람이 죽으라는 법만은 없는지, 절강성에 들어오자 묘한 제안을 받았다.
적가상방의 상행을 노리면 수고비와 함께 노획한 물품을 장물로 파는 것보다 비싸게 사 주겠다는 제안이었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보아하니 상방끼리 밥그릇 싸움을 하는 것 같은데, 이 기회를 잘 노리면 제법 두둑한 수입을 올릴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특히 적가상방이 완전히 망할 때까지 상행을 못하도록 해 준다면 꽤 큰 거액의 보상을 백건상방이 약속했다. 절강성이 아니라 어디에서든 자리를 잡고 산채를 세울 수 있는 그런 금액을 말이다.
지금까지는 이 계획이 아주 순조롭게 이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번만 제대로 끝장을 내 주면 적가상방도 얼마 버티지 못하고 현판을 내려야 할 거야.’
곧 새로 만들어질 산채를 눈앞에 그려 보던 사내는 곧 적가상방의 수레들이 산자락 인근에 도착한 것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소리쳤다.
“애들아, 가자!”
“우오오오오!”
“가자! 약탈이다!”
스무 명이 넘는 산적들이 소리를 치며 앞장서서 뛰어가고 있는 사내를 따라 달렸다.
애써 숨으려고 하지도 않았기에 상행을 가고 있던 무사들과 상인, 일꾼들이 산자락에서 튀어나오는 산적들을 보고 소란스럽게 변했다. 상인들과 일꾼들은 수레 밑으로 기어들었고, 무사들은 각자 자신들의 병장기를 뽑으며 싸울 준비를 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적가상방의 무사들 중 여섯 명은 크게 당황하지 않고 가만히 서서 산적들이 뛰어나오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는 점이다.
적가상방의 수레 앞을 가로막은 호피 옷을 입은 사내는 병장기도 뽑지 않고 있는 여섯 명의 무사들을 보며 가소롭다는 듯이 웃었다.
‘일단 땅을 박차고 뛰어올라 가장 가까이 있는 놈을 두 쪽으로 만들어야지.’
원래 산적은 무작정 사람을 죽이는 경우가 거의 없다. 싸움이 일어나면 산적들 중에서도 다치는 사람도 나오기 때문에 적당한 통행료를 받고 보내 주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상황이 아니다. 언제나 그랬듯이 적가상방을 완전히 망하게 하기 위해 약탈을 하는 것인 만큼 협상을 진행할 이유가 없었다.
미리 생각했던 것처럼 땅을 박차고 뛰어오르려던 사내의 눈에 문득 수레에서 펄럭이고 있는 깃발이 보였다. 장대 하나에 두 개의 깃발이 휘날리고 있었다.
‘하나는 청송이라고 써 있고…… 어라? 내가 뭔가 잘못 본 것 같은…….’
“어허헉!”
이상한 소리를 낸 사내가 자신을 지나치며 적가상방 무사들을 향해 들이닥치려는 산적들에게 소리쳤다.
“멈춰라! 멈춰! 모두 그대로 멈춰!”
처음에는 상방의 무사를 향해 외치는 줄 알았던 산적들이 곧 사내의 말을 알아듣고 달리던 것을 멈췄다.
간사한 얼굴의 사내가 다가와 물었다.
“두목님, 왜 멈추신 겁니까?”
“……야, 저거 보이냐?”
“뭐를 말씀하시는…… 으헉!”
간사한 얼굴의 사내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의 시선은 장대에 걸린 청송이라는 깃발 위에 펄럭이는 푸른빛의 깃발에서 떨어지질 않았다.
“무…… 무당파?”
그랬다. 그들이 보고 있는 깃발에는 독특한 문양과 함께 선명하게 무당이라는 글자가 수놓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