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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가상방 개망나니-25화 (25/313)

적가상방 개망나니 25화

“당장은…… 그래요.”

“잠깐만요. 분명히 오랫동안 계획한 일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어느 곳으로 갈지도 정하지 않았었다는 겁니까?”

“처, 처음에는 있었어요.”

문약란은 처음 계획을 세울 때, 어머니의 외가로 향할 예정이었다.

어머니의 친가로 갈 수는 없었다. 어머니의 친가는 청해상방의 지배를 받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의지하는 관계였다.

그에 반하여 어머니의 외가는 대단한 집안은 아니지만, 꾸준히 관부에 관리로 들어가는 유가였다.

그러니 자신의 처지를 안다면 보살펴 주고, 청해상방이 압박을 한다고 하더라도 관부와 연이 깊으니 막아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생각은 외가에 도착하기도 전에 깨졌다. 외가 역시 청해상방의 의지에 따라 문약란을 찾는 모습을 목격한 것이다.

그리고 다른 계획을 찾기 전에 인신매매범에게 잡혀 의탁할 다른 곳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고 말이다.

대충 이야기를 끝낸 문약란이 풍백을 바라봤다.

풍백은 그 시선에서 불길함을 느꼈다. 본능적으로 또 질문을 던지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래서 얼른 말했다.

“그러면 어디로 가시든지 노잣돈이 부족하지 않도록 넉넉히 준비를 해 드리도록 하지요.”

이 정도라면 충분히 문약란과의 인연에 마침표를 찍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문약란의 생각은 달랐다.

“저기…… 공자님. 면목이 없지만…… 공자님 댁에 의탁할 수 없을까요?”

“……네?”

“그, 그냥 의탁하겠다는 건 아니에요. 어떤 일이든지 시켜만 주신다면 성실히 하도록 할게요.”

문약란이라고 지금 자신의 말이 얼마나 무리한 것인지 모르는 게 아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지금 그녀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은 풍백밖에 없으니 어쩔 수 없었다.

아름다운 여인의 미모는 무기가 될 수 있지만, 반대로 독이 될 수도 있다.

문약란은 자신이 충분히 아름답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하지만 스스로 지킬 힘이 없으니 그녀의 미모는 독으로 작용했다. 실제로 얼마 지나지 않아 인신매매범에게 잡히지 않았던가.

인신매매범이 아니라 이 험한 세상에서 어떤 몹쓸 놈을 만날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자신을 지킬 수 있을 리는 만무했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자신을 구해 준 사람이 있다. 자신의 미모에 전혀 홀리지도 않았고, 오히려 담담한 모습은 적어도 몹쓸 짓을 당할 일은 없다는 확신을 주었다.

또한 나중에 청해상방에 압박을 받을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자신을 돌려보내지 않겠다고 한다. 심지어 돈까지 지원을 해 준다고 하고 있다.

이보다 더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그리고…… 떨어지고 싶지 않기도 하고…….’

이런 생각을 하는 문약란의 얼굴에는 빨갛게 홍조가 떠올랐다.

문약란의 얼굴에 떠오른 홍조를 보고 풍백은 생각했다.

‘자기도 염치가 없다는 건 알고 있나 보구나.’

일이 점점 복잡해지고 있었다.

문약란과 지금 헤어지는 편이 가장 편하고 좋은 방법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청해상방에 문약란에 대해 알려질 방법은 전무하지만, 정말 만에 하나 그들이 정보를 얻어 문약란에 대해 물어 온다면, 불쌍한 여자가 인신매매범한테 잡혀서 구해 주고 노잣돈 조금 쥐여 보내 줬다고 말하면 된다.

상방의 자제로 의기(意氣)가 충천(衝天)하여 불의(不義)를 참지 못해 사람을 구해 주고 잘 가라며 노잣돈까지 챙겨 줬다는데 뭐라고 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문약란을 적가상방에서 데리고 있다가 나중에 청해상방에서 알게 된다면…… 적어도 그 끝이 그리 아름답지는 못할 것이다.

‘무지하게 골치 아플 것이 뻔하지.’

풍백의 표정에서는 아무것도 읽을 수 없다. 감정을 숨기는 것은 아주아주 기초적인 것이니까.

그러나 문약란에게는 여자의 육감이라는 것이 있었던 모양이다. 풍백이 뭐라 말하는 것을 기다리지 않고 간절히 말했다.

“갈 곳도 없는 제가 이대로 혼자 남게 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부디 제가 살아남을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원래라면 이런 것은 풍백에게 씨알도 먹히지 않을 소리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마음이 흔들렸다. 불과 얼마 전에 과거와 같은 삶을 살지는 않겠다고 다짐하지 않았던가.

그런데도 지금 문약란을 혼자 놔두고 간다면…….

‘아마 별로 좋은 꼴을 보기 힘들겠지?’

문약란은 지나치게 아름답다. 운이 좋다면 이후의 삶이 나쁘지 않게 흘러가겠지만, 삶도 불우하고 얼마 전에 인신매매범에게 잡힌 것을 보면 그리 운이 좋아 보이지도 않았다.

‘망할…… 그냥 예전처럼 살까?’

한번 해 본 생각이다.

적어도 과거를 떠올리며 부끄럽게는 살지 않고 싶다고 하지 않았나.

크게 한숨을 푹 내쉰 풍백이 물었다.

“후우……. 정말 아무 일이나 상관이 없습니까?”

그 말에 얼굴이 밝아진 문약란이 환하게 웃으며 힘차게 대답했다.

“네!”

“제가 적가상방의 사람이지만, 누군가를 고용할 입장은 아닙니다. 제가 고용할 수 있는 건 기껏해야…… 전속 시비 정도뿐입니다.”

“할 수 있어요! 제가 할게요!”

문약란은 오히려 기뻤다.

‘그러면 매일 모든 순간을 공자님과 함께할 수 있겠지?’

이런 생각에 얼굴이 절로 빨갛게 변했다. 물론 풍백은 그런 문약란을 보며…….

‘시비를 할 생각을 하니 창피한가 보군. 하긴 지금까지 시비를 부리는 입장이었을 테니까.’

이런 생각을 했지만 말이다.

과거에는 전혀 행한 적이 없었던 행동을 했기 때문인지 뭔가 뒤통수가 근질거렸다. 하지만 풍백은 의식적으로 그 느낌을 무시했다.

‘그러면 일단 돌아가는 길에 구주현에 하루 더 머물러야겠구나. 거기서 몇 가지 준비를 좀 하고 집으로 돌아가야 하겠어.’

문약란을 책임지기로 했으니 만약의 사태에 대비를 할 생각이었다.

이런 풍백의 생각을 모르는 문약란은 확실히 어젯밤보다 생기가 넘치는 얼굴로 풍백을 몰래 훔쳐보고 있었다.

* * *

하오문 용유현 지부장인 노인은 밤새 일을 끝마치고 마지막 결산을 하는 중이었다. 이것만 끝내면 쉬러 갈 수 있다는 생각에 졸린 눈에 힘을 주며 서류를 읽어 갔다.

하오문은 많은 하오문도가 가지고 오는 사소한 정보들까지 모두 구입한다. 그리고 그 정보를 다른 정보들과 조합 및 가공하여 정말 쓸 만하고 값비싼 정보로 탈바꿈시킨다.

그런데 꼭 모든 정보가 이렇게 사소한 것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간혹 대충 생각하도 만만치 않겠다는 정보가 들어오기도 했다.

이런 것은 지부를 책임지고 있는 지부장이 판단하여 자세히 조사를 할 것인지, 아니면 정보를 조합하는 곳으로 보낼지 결정하게 된다.

지금 노인이 보고 있는 서류가 바로 그런 경우였다.

‘대단한 미모를 가진 여자의 눈동자가 초록색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적가상방의 자제가 비싼 돈을 들여 누군가를 구했다는 것에 제법 흥미가 생긴 상황이었다. 특히 그 적가상방의 자제가 불과 얼마 전까지는 상산현의 개망나니로 불렸던 것을 생각하면 더욱 더.

그에 어젯밤에 임무를 나갔던 일류고수 중 하나가 구해 낸 여자의 범상치 않은 미모와 특이한 눈동자 색깔을 확인하고 보고를 올린 것이리라.

‘초록색 눈동자라…….’

어디선가 이야기를 들어본 것 같은데 정확하게 생각이 나지 않았다. 머리를 긁적이던 노인은 일단 이것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기로 결정했다.

알아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으로 판단했다. 전 중원을 뒤져도 눈동자가 초록색인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대박일지도 모른다는 예감에 노인은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 * *

적가상방이 위치한 곳은 상산현 중심가에서 제법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굳이 분류하자면 외곽에 가깝다고 할 정도였다.

이건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적가상방이 수입은 대부분 상산현이 아닌, 주변의 작은 현이나 화전민 마을이나 고을 같은 곳에서 나온다. 정작 상산현에는 점포 몇 개 정도를 가지고 있을 뿐이다.

이렇게 상산현 밖으로 오가는 일이 많은 적가상방에서 굳이 중심가까지 들어갈 이유는 없었다.

또한 어디를 가든지 중심가의 땅값은 비싸다. 그러니 더욱 중심가로 들어갈 이유가 없다고 할 수 있었다.

적가상방의 모습은 이전과 달리 썰렁했다. 아무래도 산적 때문에 상단이 마음대로 나가지 못하니, 물건을 실은 마차가 나갈 일도 별로 없어서 사람들의 유동조차 많이 줄어든 것이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상산현 인근에 자리하고 있는 작은 마을에는 상단이 나갈 수 있다는 점이었다. 아마 여기까지 막혔다면 적가상방은 벌써 두 손을 모두 번쩍 들었을지도 몰랐다.

아무튼 이런 적가상방을 향해 마차 세 대가 다가오고 있었다. 상단이 나갈 일이 줄어들면서 손님조차 찾아오는 일이 드물게 변한 적가상방이었는데, 이렇게 세 대의 마차가 찾아오는 일은 아주 이례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적가상방에 도착한 마차가 멈추고, 마차 중 한 대에서 사람 한 명이 내렸다. 무복을 입고 허리에 검까지 착용한 사내의 가슴에는 청송이라는 글자가 수놓아져 있었다.

사내가 굳게 닫혀 있는 문을 두드렸다.

쿵! 쿵! 쿵!

그리고 잠시 후 누군가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살짝 열리며 일꾼 복장을 한 사람이 나왔다. 그는 무복을 입고 있는 사내와 그의 허리에 걸린 검을 보더니 슬쩍 눈을 내리며 물었다.

“누구신지…….”

“구주현에 있는 청송무관에서 왔습니다. 혹시 안에 상방주님이나 진덕양 총관님이 계십니까?”

“어…… 아마 계실 겁니다.”

“그러면 말씀 좀 전해 주시겠습니까? 지금 저희 청송무관의 관주님께서 두 분을 만나시려고 직접 찾아오셨다고 말입니다.”

“이 녀석은 일이 어떻게 되었기에 아직도 안 오고 있는 건지……. 아직 연락이 온 것도 없다고 하던가?”

“아직 아무런 소식이 없습니다.”

“에잉…….”

진덕양의 말에 적호경은 못마땅하다는 소리를 냈다.

벌써 풍백이 구주현으로 떠난 지 열흘도 훌쩍 넘었다. 구주현까지 왕복으로 엿새면 충분하고, 협의를 한다고 하더라도 열흘이면 돌아왔어야 했다.

“너무 늦어.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 아니겠지?”

이미 장성한 자식이지만, 이렇게 연락이 없으니 더럭 겁부터 나는 것은 아버지인 이상 어쩔 수 없는 일일 것이다.

하지만 적호경의 말에 진덕양이 고개를 저었다.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백아가 사고는 많이 치고 다녔지만, 그렇다고 눈치가 없는 아이도 아니지 않습니까. 아마 지금 청송무관이 왜 협의를 거절했는지 알아보고 정보를 수집한다고 늦는 걸 수 있습니다.”

“쯧쯧……. 협의를 해 봐서 이빨도 안 들어갈 것 같으면 적당히 포기하고 돌아오는 것이 좋은데 말이야. 차라리 그 시간에 다른 방안을 생각하는 것이 나을 수 있거늘.”

“백아가 처음으로 발의한 일이고, 직접 협의를 하는 것도 처음입니다. 백아가 어떻게든 협의를 끌어내려고 발버둥 치는 것도 이해가 되지요.”

“그래도 너무 시간을 끌고 있어. 지금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건 시간인데…….”

“적어도 이번에 거절당하는 경험을 하면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겁니다.”

“그래야지.”

이제 정신을 차린 것처럼 보이는 풍백이었다. 그러니 지금의 고난이 풍백을 크게 성장시킬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리고 그렇게 성장한 풍백이 앞으로 자신의 뒤를 이어 적가상방을 이끌어 갈 수 있도록 지금 위기를 어떻게든 극복해야 했다.

“판관(判官)은 뭐라고 하던가?”

“아직 산적 토벌에 대한 준비는 시작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종칠품 판관은 상산현의 실무 책임자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니 이들이 모른다면 정말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고 있는 거라 할 수 있었다.

“동지(同知)는? 아직도 만나 주지를 않고?”

“아무래도 금호상방의 입김이 닿는 사람들이라…….”

지주대인을 보좌하는 종육품 동지까지는 금호상방과 선이 닿아 있었다. 몇몇 금호상방에 선이 닿지 않은 동지들은 백건상방과 긴밀한 사이였고 말이다.

적가상방의 입장에서 지금처럼 정보라도 받을 수 있는 관리는 종칠품 판관까지였다.

단순히 선이 닿는 관리를 논한 것이지만, 상산현에서의 적가상방 위치를 여실히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했다.

답답한 마음에 한숨만 나오려는 그때, 멀리서 누군가가 바삐 달려오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 집무실 밖에서 일꾼 하나가 소리쳤다.

“방주님! 총관님!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손님?”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봤다. 혹시 찾아올 사람이 있냐는 시선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

진덕양이 물었다.

“누가 찾아왔다고 하더냐?”

“그게…… 구주현? 거기서 청송무관을 운영한다는 사람이 제자들이 데리고 왔다는 뎁쇼?”

그 말에 적호경과 진덕양은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고 말았다.

“뭐? 우검학 관주가 직접 찾아와?”

“어…… 이름은 듣지 못했습니다! 청송무관의 관주님이라고…….”

일꾼의 얘기를 모두 듣고 있을 필요도 없었다. 서로 눈을 마주친 두 사람이 동시에 말했다.

“가 보세!”

“가 보시죠!”

그리곤 다시 동시에 집무실을 뛰쳐나와 접객당으로 달렸다.

미친 듯이 달려 접객당에 도착하니 기골이 장대한 열 명의 무인 사이에 문인처럼 고아한 인상의 중년인이 차를 마시고 있는 것이 보였다.

“우검학 관주님!”

진덕양의 외침에 달려온 두 사람을 확인한 우검학이 찻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공손히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다.

“구주현 청송무관의 우모가 적가상방주님과 총관님을 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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