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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가상방 개망나니-24화 (24/313)

적가상방 개망나니 24화

과거에 받았던 중요한 훈련 중 하나가 상대의 감정 및 거짓과 진실을 파악하는 방법이었다. 아무래도 풍백이 맡은 임무의 특성상 심문을 하는 경우가 많았으니 필수적인 훈련이라 말할 수 있었다.

하지만 문약란의 감정을 파악하는 것에 이런 훈련 기억까지 떠올릴 필요는 없었다. 그녀의 얼굴빛은 누구라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변했다. 그저 기호 문제로 싫어하는 수준이 아니었다.

‘두려움?’

문약란의 얼굴에는 너무나 확실하게 두려운 감정이 극명하게 떠올라 있었다.

“……지 ……말아 ……세요.”

힘겹게 달싹거리는 문약란의 입술 사이로 거의 들리지도 않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네?”

풍백이 다시 묻자, 작은 입술을 꼭 깨문 문약란이 조금 힘이 들어간 목소리로 말했다.

“청해상방에 알리지 말아 주세요. 부탁드립니다.”

그 말에 풍백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이러면 계획했던 것과 달라지는데…….’

이전 계획은 말했듯이 문약란을 구해서 청해상방에 무사히 인계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문약란을 구해 준 공로를 기반 삼아 적가상방이 소화할 수 있는 적절한 매물이나 거래를 체결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런데 정작 구해 낸 당사자가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할 줄은 몰랐다. 그것도 두려움을 감추지 못하면서 말이다.

당연하게도 과거 풍백이 읽었던 보고서에는 어디에도 이런 내용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때는 문약란을 구해 내지 못했었으니까.

풍백은 문약란을 바라봤다. 문약란은 아까와 달리 풍백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눈동자와 미세하게 떨리는 표정은 매우 간절하게 절박함을 담고 있기도 했다.

“이유를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그냥…… 연락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건가요?”

그 말에 풍백은 곤란하다는 듯이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시겠지만 청해상방은 거대 상방입니다. 저희가 그런 거대 상방을 상대로 납치되었던 소저를 구했으면서도 알리지 않는다면…….”

뒷말은 흐렸지만 풍백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모두 이해한 문약란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잠시 후, 고개를 숙인 그녀의 입이 열렸다.

“저에게 청해상방은…… 지옥과 같은 곳이었어요.”

“청해상방이 소저의 가문이 아닙니까?”

“그래서 더 벗어날 수 없었던 감옥이었고요.”

문약란은 떨리는 목소리로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자신이 살아왔던 세월에 대해.

쌓인 것이 많았던 것 같았다.

자신이 태어났을 때부터 이야기가 시작해 현재까지 이어진 온갖 사소하고 중요한 많은 이야기들. 그리고 더 이상 그런 이야기를 만들기 싫어서 탈출을 계획했던 일들.

결국 문약란은 성공했다. 하지만 동시에 실패했다.

그녀의 계획에 우연히 만난 인신매매범에게 납치된다는 것은 없었으니까.

풍백은 문약란의 긴 이야기를 차분히 모두 들었다. 중간중간 문약란이 눈물을 흘릴 때는 어제 전육에게 건네줬던 싸구려 손수건이 아닌 고운 비단 손수건을 건네주기도 했었다.

긴 이야기를 마친 문약란은 눈물 자국이 가득한 초록빛 눈망울로 풍백을 바라보며 간절히 말했다.

“제가 여기에 있다고, 살아있다고 알리지 말아 주세요. 다시 집으로 돌아간다면…… 저는 더 이상 살 수 없을 거예요.”

풍백은 미간을 찌푸리며 대답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문약란은 그런 그가 제발 옳은 결정을 하길 바라며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마침내 풍백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일단 알겠습니다. 지금은 다른 걱정을 하지 말고 체력을 회복하는 것에만 전념해주십시오.”

“그러면 청해상방에 연락하지 않는 건가요?”

자리에서 일어난 풍백은 문약란을 보며 따스한 미소를 보여 주고는 방에서 나갔다.

‘골치 아프게 됐네.’

방에서 나온 풍백의 얼굴에는 방금 전 문약란에게 보여 줬던 따스한 미소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아마 다른 사람이라면 문약란의 눈물 젖은 모습과 간절한 부탁에 완전히 그녀에게 공감하며 무조건 알았다고 했을 것이다. 그녀의 미모는 남자에게는 무지막지한 무기가 될 수 있으니까.

하지만 문약란에게는 안타깝게도 풍백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물론 그렇다고 무조건 청해상방에 연락을 하겠다는 말은 아니었다.

‘적어도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야.’

그건 확실했다. 사람의 속내를 파악하는 데 능숙한 풍백은 문약란이 진심이라는 것을 손쉽게 꿰뚫어 볼 수 있었다.

다만 문약란이 눈물로 호소하며 말해 준 그녀의 인생은 사실 풍백이 들어 봤을 때 너무 흔한 얘기였다. 거짓말을 조금 더하면 한 성에 십여 명은 문약란과 비슷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정략 혼인으로 인해 두 번째 부인이 된 어머니, 아버지에게 받지 못한 사랑, 아버지의 본처인 큰어머니의 보이지 않는 구박, 큰어머니가 낳은 나이 많은 형제의 괴롭힘, 아버지의 방관 등등…….

솔직히 아까 이야기를 들으면서 하마터면 하품을 할 뻔했다.

겨우 그 정도 이야기를 가지고 풍백을 설득하려면 십 년은 멀었다.

‘적어도 나처럼 아버지부터 키우는 강아지까지 몰살을 당한 것은 아니잖아.’

굳이 비교하려는 마음은 아니지만, 그냥 그렇다는 것이다.

어차피 공감을 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고, 청해상방의 달콤한 보상을 필요로 하는 상황이다. 그러니 문약란에게는 살짝 거짓말을 하고 몰래 청해상방에 연락을 넣은 이후 그들이 데리러 올 때까지 문약란을 지키기만 하면 된다.

하나 풍백은 그렇게까지 할 생각은 아직 없었다. 문약란이 말해 준 것에 문제가 조금 있었기 때문이다.

문약란이 거짓말을 했다는 건 아니었다. 분명 그녀의 이야기는 모두 진실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단지 그녀가 모든 이야기를 다 해 준 건 아닌 듯하다는 것이다.

‘중간중간 이야기 맥이 끊어지는 부분, 이야기 도중 표정의 변화를 보면 진짜 집으로 돌아가기 싫은 이유는 언급하지도 않았고.’

단순히 구박을 받는 것 때문이라면 이렇게 고민할 이유도 없다. 하지만 문약란에게는 무언가 더 심각한 이유가 있는 게 분명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그저 자신만 생각한다면 문약란이 어떻게 되든지 말든지 청해상방에 연락을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러면 적어도 일 년 후 그날이 오기 전까지 대비하는 것이 더 쉬워질 테니까.

하지만 자신의 목적을 위해 문약란이 죽을 것처럼 고통스러운 상황에 빠질 수 있다는 걸 무시한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과거에는 그런 삶을 살아왔었다.

누가 착하고, 누가 나쁜 놈이며, 이로 인하여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임무를 받으면 그것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어떤 피해가 발생하더라도 무시했었다. 그것이 착한 사람이든 나쁜 놈이든 말이다.

그러나 이제는 조금 달라졌다.

원인이 무엇인지, 이유가 뭔지도 모른다. 그저 과거로 돌아왔을 뿐이다.

누가, 어떤 존재가 자신에게 두 번째 기회를 준 것인지 몰라도 이렇게 돌아오게 된 이상 적어도 약간의 편리함을 위해 아무런 죄도 없는 누군가를 짓밟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과거를 돌아보며 부끄럽지 않게 살고 싶었다.

‘뭐, 적가상방이 다시 멸문당할 상황이라면 어떤 선택을 할지 모르겠지만…….’

지금 문약란의 일이 그 정도까지는 아니다.

애초에 풍백의 계획에 문약란과 청해상방은 없었다. 그러니 그냥 없었다고 치고 그냥 넘어가면 되는 일이다.

‘그러려면 적어도 청해상방에 문약란을 들키면 안 되는 일이겠지?’

만약 청해상방이 알게 된다면 적가상방은 광동성 오대거상 중 하나를 적으로 삼게 되는 것이다.

아무리 서로 멀리 떨어져 있다고 하지만, 그들이 노골적으로 영향력을 펼친다면 적가상방에게 적어도 금호상방이나 백건상방 수준 이상의 골칫거리가 될지도 몰랐다.

괜히 문약란을 구해서 일이 복잡해지고 말았다는 생각에 풍백은 머리를 벅벅 긁었다.

* * *

“으갸갸갸갸!”

침상에서 일어난 왕삼이 뻐드러지게 기지개를 켜고는 아직 잠이 덜 깬 눈으로 방을 둘러보며 목을 긁적였다.

“쩝쩝……. 근데 여기 어디지?”

입맛을 다시며 말하던 왕삼의 눈이 점점 커졌다. 이제야 자신이 어제 밥 먹고 기절하듯이 잤다는 것을 떠올린 것이다.

창문 틈으로 들어오는 햇살을 보니 아무래도 시간이 사시(巳時, 오전 9시~11시)는 족히 된 것 같았다.

“으악! 죽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왕삼이 서둘러 침상에서 내려와 아무 곳에나 벗어 놨던 옷을 허겁지겁 걸쳤다.

원래 왕삼은 한참 전에 일어나 풍백이 세안할 물부터 식사까지 모두 준비를 했어야 했다. 하지만 며칠 고생했던 것 때문에 완전히 녹초가 되어 제시간에 일어나지 못한 것이다.

문제는 과연 이것을 풍백이 웃으며 넘어가 주느냐였다.

요즘 풍백의 모습을 보면 웃으며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으면서도, 불과 한 달 전의 모습을 떠올리면 웃으며 발차기를 할 것 같기도 했다.

서둘러 옷을 입은 왕삼이 손가락으로 눈곱을 대충 떼고 마른세수를 했다. 지금 물을 떠와서 세수를 할 시간은 없었다.

후다닥 방에서 나간 왕삼이 바로 옆에 붙어 있는 별채의 가장 큰 방으로 달려가 문을 벌컥 열었다.

“도련님, 살려 주세요! 제가 죽을 것처럼 피곤해서 까무룩 잠든 통에 아침에 일어나질 못…… 엉?”

말을 하던 왕삼이 이상한 소리를 내며 하던 말을 멈췄다. 그리곤 멍청한 얼굴로 멍하니 침상을 바라봤다.

백옥과 같이 희고 고운 피부에 미려하게 그려진 눈썹, 그린 듯이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는 콧대와 붉고 심금을 뒤흔드는 붉은 입술. 무엇보다 왕삼의 넋을 나가게 만드는 건 여인의 두 눈동자였다.

초록빛 눈동자는 별빛처럼 반짝이며 왕삼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봉목에 자신의 모습이 담기고 있다는 사실이 죄스럽게 느껴질 수 있다는 처음으로 깨달은 왕삼이었다.

‘선녀다! 선녀가 침상에 있다! 선녀가 도련님의 침상에 있다! 선녀가 도련님과…….’

여기까지 떠올린 왕삼이 울상이 되어 소리쳤다.

“도련놈아! 설마…… 설마…… 우리 도련놈이 그런 건 아니죠? 그렇죠?”

“네?”

대뜸 무엇을 말하는 건지도 모르는 질문에 문약란은 당황해서 되물어 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대답을 제대로 듣기도 전에 왕삼은 또 다른 절규를 하고 있었다.

“아악! 만약 그러면 어쩌지? 이렇게 선녀 같아서 감히 바라보기도 황공하신 분께! 내가 이 도련놈 다리몽둥이를 그냥……!”

그때 절규하고 있던 왕삼의 뒤통수에 불이 났다.

딱!

“아악!”

두 눈이 튀어나올 듯한 고통에 뒤를 돌아보니 풍백이 혀를 차며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도련님!”

“도련놈이겠지. 그치?”

“아…… 들으셨어요?”

“시종이라는 놈이 늦잠을 자고 있지 않나, 뒤에서 욕하다가 걸리지 않나. 아주 충성스러운 시종이라니까.”

“하, 하하하…… 그러게 말입니다. 아마 그 시종은 충언(忠言)을 한다는 마음으로 그런 것 아닐까 싶은데요.”

“웃어?”

“헙!”

왕삼이 두 손으로 자신의 입을 막았다. 그 모습을 삐딱하게 바라보던 풍백이 왕삼의 이마에 다시 한번 꿀밤을 먹이며 말했다.

“그리고 무슨 상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싶지도 않은데, 괜히 오해받기 싫으니까 자세한 얘기는 호위무사한테 듣도록 해.”

“어제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재미있는 일이 있었지. 그리고 너 문 소저를 바라보는 눈에 아주 불꽃이 타오르더라. 이런 모습을 수월이가 알면 참 좋아할 거야. 그렇지?”

“에, 에헤이! 도련님은 무슨 그런 말씀을……. 수월이랑 아무 상관이 없다고 몇 번을 말해야……. 설마 진짜 말할 건 아니죠?”

절박한 얼굴의 왕삼을 보고 있으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심각했던 조금 전의 고민들이 대수롭지 않게 느껴질 정도였다.

“여기서 네가 할 일은 없으니까, 가서 제대로 세수하고 밥부터 먹고 와. 눈곱이 그대로 달렸다. 더러워 죽겠네.”

“아까 뗀 줄 알았는데…… 아무튼 알겠습니다! 그럼 두 분은 좋은 시간 보내시…….”

“계속 그런 식으로 헛소리하면 수월이한테 진짜 말한다.”

“으헉!”

왕삼은 후다닥 달려 나갔다.

그제야 문약란이 방으로 들어오는 풍백에게 물었다.

“시종이었나요?”

“왕삼이라고 합니다. 기억할 필요는 없을 겁니다.”

의자에 앉은 풍백이 문약란을 잠시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청해상방에 알리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정말요? 가,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어차피 여기에 일이 있어서 왔다가 우연히 알게 되어 도와 드렸던 겁니다. 당사자가 알려지는 걸 원하지 않는다니 제가 어쩔 도리는 없지요.”

“아니에요, 정말 감사합니다!”

문약란의 거듭된 감사를 들으며 풍백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면 당분간 여기서 쉬면서 몸조리를 할 수 있도록 미리 계산을 해 놓도록 하겠습니다.”

“아, 공자님은 그럼…….”

“저도 집으로 가야지요. 소저는 몸 좀 추스르면 어디로 가실 생각이십니까?”

질문을 던지기는 했지만, 사실 관심은 없었다. 어차피 이제 앞으로 다시 만날 일이 없는 사람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풍백의 질문은 문약란은 쉽게 대답을 못 했다. 그 모습에 조금 어이가 없어진 풍백이 물었다.

“아니, 설마 갈 곳이 없는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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