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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가상방 개망나니-18화 (18/313)

적가상방 개망나니 18화

도박장으로 들어온 사람은 흔히 장사(壯士)라고 부르는 사람과 비슷한 체구를 가지고 있었다.

무인처럼 균형 잡힌 몸이 아니고 거의 모든 신체부위가 두껍고 탄탄해 보였다. 간단히 말하자면 그의 목둘레가 어지간한 아이 몸통보다 두꺼워 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아무리 전체적으로 탄탄해 보이는 몸이라고 하더라도 살이 찐 것처럼 보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저러니 돼지라고 불리는 거군.’

그는 도박장 입구에 서 있던 사내가 풍백을 향해 손가락질을 하며 뭐라고 말하자, 시선을 이쪽으로 돌렸다.

풍백은 그런 사내의 시선에 씨익 웃으며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사내가 풍백을 향해 걸어오기 시작했다. 동시에 그의 뒤를 십여 명의 흑도패가 쫓아왔다.

‘두 명이네.’

앞장서서 걸어오는 사내의 바로 뒤에 있는 두 사람은 무인이었다. 걷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수준은 그리 높아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풍백의 호위무사에 대한 얘기를 듣고 급하게 낭인무사 두 명을 구해 온 모양이었다.

사내가 풍백의 앞에 도착하자 부리부리한 눈으로 쏘아보며 입을 열었다.

“대체 누구시기에 내 도박장에 와서 우리 애들한테 손을 댔을까? 덕분에 작살난 녀석 치료비 많이 나오게 생겼더라.”

“네가 돼지냐?”

너무 직설적인 말에 돼지라 불린 사내가 움찔했다.

하지만 그는 분노로 폭발하는 대신 풍백 뒤에 서 있는 호위무사를 한 번 쳐다봤다.

사내의 시선을 받은 호위무사는 눈을 가늘게 뜨며 검파에 손을 올렸다. 별것 아닌 움직임이었지만 대단히 위협적이었다.

그걸 본 사내 뒤에 있던 낭인무사 두 명이 앞으로 나서려고 했다. 싸우려던 것은 아니었다. 단지 만약을 대비하여 고용인을 지키려는 행동이었을 뿐이다.

하지만 사내는 그런 두 낭인무사를 막았다.

“싸우러 온 건 아닌 것 같고, 무슨 일로 왔을까?”

“네가 돼지냐고. 두 번째 묻는다.”

풍백의 말에 사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사내는 애써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내가 맞다. 하지만 기왕이면 이름으로 불러 줬으면 좋겠는데.”

“네 이름이 뭔지 몰라. 그냥 여기서 돼지를 찾으면 된다고 하더라.”

“적웅이다.”

“우리 돼지 이름이 적웅이었군. 잊어버리지 않도록 잘 기억해 두도록 하지.”

다시 한번 나온 돼지라는 말에도 사내, 적웅은 움찔하기는 했지만 결국 참아 냈다.

풍백은 이런 적웅을 묘한 눈으로 바라봤다.

‘이렇게 보니 신기하기는 하군. 혈불(血佛) 적웅을 면전에 두고 돼지라고 부를 수 있다니.’

혈불 적웅.

과거 절강성에서 활동하던 사파 거두(巨頭)의 이름이었다.

용유현 뒷골목 출신이었던 적웅은 어느 날 갑자기 신묘한 무공을 사용하는 무인으로 거듭났다.

하지만 바로 인근에 있는 구주현에 절정 고수인 유검학을 의식하고 수하들과 함께 절강성 북부로 거점을 옮긴다.

그곳에서 차근차근 힘을 모은 적웅은 불과 몇 년 만에 절강성 최대의 사파로 거듭나게 되고, 그 위세는 전통적인 절강성의 명문정파인 서문세가(西門世家)마저 성도인 항주(杭州)에서 몰아내게 된다.

이후 청송문의 영향력이 닿는 절강성 남부를 제외한 다른 곳들은 적웅의 온갖 패악질을 모두 당해야 했었다.

그가 벌이는 패악질이 얼마나 악랄했던지, 인근 성에 있는 사파는 혈불을 가리키며 적어도 자신들은 혈불처럼 짐승 수준은 아니라고 할 정도였다.

그래도 누구 하나 적웅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그가 가진 무공은 적어도 절강성 내에서는 적수가 거의 없을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아마 이번에는 이런 이름이 강호에 알려질 일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적웅 때문에 피눈물을 흘렸던 이들도 그런 고통을 겪지 않을 것이고 말이다.

‘내가 적웅이 얻었던 걸 가로챌 생각이니까.’

적웅은 헛기침을 한 번 하고 풍백에게 물었다.

“그래서 원하는 게 무엇이기에 나를 찾은 건가?”

“듣자 하니 장물(贓物)을 취급한다면서?”

“장물을 취급하는 건 아니고…… 도박장을 운영하다 보니 담보를 받고 돈을 빌려주는 일은 하고 있지.”

“다 알고 왔으니까 괜히 시간 낭비하지 말자고. 장물도 받아서 좋은 건 암상(暗商)한테 팔고, 암상이 관심을 보이지 않으면 암시장에서 팔고 있잖아.”

풍백이 여기까지 말하자 적웅은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렇다 치자고. 그래서 장물을 취급하면 나한테 물건이라도 팔려고?”

“미친놈. 장물 받는 새끼들 중에 제대로 값을 치르는 놈이 어디 있냐?”

“장물을 사 주는 것도 고마워해 줘야지. 포두(捕頭)에게 잡힐 수 있다는 부담 때문에 장물을 구입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라는 말씀이야.”

“웃기고 있네. 세상에 장물아비가 포두에게 떡값도 안주고 영업하는 놈이 어디 있어.”

이쯤 대화를 나누니 적웅은 풍백이 이 바닥에 정통한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내가 장물을 취급하는 건 왜 물어보는 건데?”

“암상으로 물건 넘기기 전에 내가 필요한 것 좀 사자.”

그 말을 들은 적웅의 눈에 이채가 흘렀다.

“아…… 그러면 내 고객이 되고 싶은 사람이었구만.”

“지랄하고 자빠졌구만. 네 고객이 될 생각은 없고, 이번에 좀 급해서 이용하려는 것뿐이야.”

“원래 다 그렇게 시작하는 법이지.”

적웅은 긴장하고 있던 몸을 풀었다. 혹시나 자신을 노리고 온 것은 아닌가 싶어서 긴장하고 있었는데, 자신이 가진 장물에 관심이 있는 거라면 괜히 긴장하고 있을 필요가 없었다.

‘제길…… 낭인무사 부르는데 들어간 돈이 얼만데. 처음부터 장물을 보고 싶었으면 그렇다고 말을 할 것이지 왜 애꿎은 애들을 조졌던 건데?’

적웅이 이래저래 돈을 많이 버는 것 같아도, 이렇게 번 돈을 여기저기 상납을 주면 생각보다 많이 남지는 않았다.

원래 뇌물이라는 것이 단순히 포두 한 명에게 주는 것이 아니기에 그 윗선까지 적당히 찔러 줘야 했고, 심지어 여기 도박장 역시 염왕채(閻王債, 사채)를 끼고 차린 것이라 나가는 돈이 많았다.

아무리 적웅이 용유현 뒷골목에서 손가락에 꼽히는 흑도패라고 하지만, 염왕채를 무시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오죽하면 염라대왕에게 진 빚이라고 이름이 붙었겠는가?

아무튼 속으로 투덜거리던 적웅이 풍백에게 말했다.

“일단 따라와. 장물을 보여 줄 테니까.”

풍백은 순순히 의자에서 일어나 적웅을 따라 도박장 계단을 올랐다. 듣기로는 삼층에 적웅의 집무실이 있다고 들었는데, 장물 역시 그곳에 모아 놓은 것 같았다.

‘하긴 여기는 경비를 위해서라도 흑도패가 제일 삼엄하게 경비를 서는 곳이니 안전하기는 하겠군.’

그런데 적웅이 이 층에 오르자 아까 풍백이 봤던 쥐상의 사내가 불쑥 튀어나왔다.

“넌 또 뭐야?”

“아, 아닙니다! 바쁘신 것 같으니 조금 이따가…… 헤헤헤!”

아무래도 평소와 다른 분위기를 느꼈는지 쥐상의 사내는 얼른 뒤로 물러섰다.

‘내가 어디서 분명 보긴 봤던 사람 같은데…….’

가까이서 보니 확실히 느껴졌다. 정확하게 떠오르지는 않아도 분명히 얼굴을 아는 사람이다.

풍백이 군부에서 받은 훈련 중에 사람 얼굴을 기억하는 훈련도 있었다. 그러니 자신에게 낯이 익다는 말은 분명 어디선가 스쳐 지나가기라도 했다는 말과 같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중요한 사람은 아니니까 기억나지 않는 거겠지…….’

가볍게 생각한 풍백이 쥐상의 사내는 이내 무시하고 적웅을 따라 삼 층으로 향했다.

지금은 적웅에게 얻어 낼 것이 더 중요했다. 어쩌면 향후 풍백이 할 어떤 일들보다 더 중요할지도 몰랐으니, 지금은 적웅에게 집중하는 것이 옳았다.

삼 층에 있는 집무실로 들어갔다.

“돈 많이 벌었나 보네. 어울리지도 않게 돈을 아주 처바른 걸 보니.”

적웅의 집무실은 아주 호화롭게 꾸며져 있었다.

어지간한 책상이나 탁자 등은 모조리 자단목(紫檀木)으로 만들어져 있었고, 심지어 책상 위에는 화려하게 세공된 단계연(端溪硯)까지 있었다.

단계연은 단계석(端溪石)으로 만든 벼루로, 어지간한 학사들조차 비싸서 사지 못하고, 유생들은 꿈에서나 볼 수 있다는 명품 벼루였다.

“뒷골목 흑도패가 미쳤다고 단계연을 쓰고 있네. 글자나 쓸 줄 아냐?”

“흐흐흐! 꼭 글자를 알아야 쓸 수 있나? 다 여기저기 사용하는 방법이 있지. 왜? 어디에 쓰는지 알려 줄까?”

음흉하게 웃으며 말하는 꼴을 보니 들어 봤자 귀만 더러워질 그런 얘기일 것 같았다.

“그런 건 그냥 너 혼자 알고 있어. 괜히 귀만 더러워질 것 같으니까.”

“알고 있으면 다 뼈가 되고 살이 되는 그런 얘기라고.”

“잡소리는 그만하고 빨리 장물이나 보자고. 내가 지금 너하고 노닥거릴 시간이 있어 보이냐? 누군가하고 노닥거린다고 하더라도 절대 너하고는 안 해.”

“까칠하구먼.”

이제 완전히 풍백을 고객이라 생각했던 것인지 적웅은 실실 웃기만 할 뿐이었다.

적웅은 책상에 가서 손을 아래로 집어넣고 뭔가를 조작하더니, 한쪽 벽으로 가서 바닥에 놓여 있는 항아리 몇 개를 만졌다. 그러자 큰 소음도 없이 한쪽 벽이 스르륵 열렸다.

‘허…… 기관(機關)이라고?’

기관이 대단히 보기 드문 그런 것은 아니다. 그러나 뒷골목 흑도패가 운영하는 도박장에 설치되어 있다는 건 어이가 없는 일이기는 했다.

심지어 적가상방조차 딱 한 사람이 숨을 수 있는 기관이 달랑 하나 있을 뿐이었으니까.

이런 풍백의 마음을 눈치챘는지 적웅이 득의양양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원래 사람을 잘 안 믿거든. 사람을 믿다가 뒤통수를 맞느니 차라리 돈을 써서 이런 걸 만들었지.”

“평소에 착하게 살면 그런 걱정할 필요는 없었겠지.”

“흐흐! 착하게 살면 내가 이런 위치까지 올 수 있었겠나?”

마치 지금 위치에 대단히 높은 위치인 것처럼 말하는 적웅이었다.

“혹시나 해서 말하지만, 나중에 여기를 털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기관 만지는 법은 나밖에 모르고, 잘못 만지면 안에 있는 물건들은 물론이고 도박장 자체가 모조리 무너지도록 만들어 놨으니까.”

풍백은 적웅의 말에 피식 웃었다.

만약 자신이 여기를 털어야 한다면 적웅을 잡고 반각만 시간을 주면 열 수 있었다. 적웅과 같은 놈이 반각 이상 자신의 손에서 비밀을 지킬 수 없다고 자신할 수 있었으니까.

아무튼 그렇게 열린 비밀 공간에는 온갖 물건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시(詩), 서(書), 화(畵)는 물론이고, 온갖 보석이 박힌 장신구부터 도자기, 심지어 예사롭지 않아 보이는 병장기까지 있었다.

“여기 있는 물건들이 다음에 암상에게 넘기려고 했던 물건들이다. 이것 말고 따로 원하는 것이 있다면 얘기를 해. 적어도 뒷골목에서 돌아다니고 있는 물건이라면 몇 다리 건너서 구해 주는 것도 가능하니까.”

풍백은 자신만만한 적웅의 말을 가볍게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장물들을 살펴봤다.

“물건들이 생각보다 별로군.”

“무슨 소리! 이 정도 물건은 항주에 가지 않는 이상 다른 곳에서 찾아볼 수 없는 수준이라고!”

솔직히 이건 적웅의 말이 맞았다. 생각보다 장물의 질이 좋기는 했다. 작은 용유현에서 이 정도 수준의 장물이라면 깜짝 놀랄 수준이라 할 수 있었다.

풍백은 장물을 모두 둘러본 다음에 몇 가지를 골라냈다. 그가 고른 장물은 그림 한 폭, 호박이 박혀 있는 여성용 장신구와 고려에서 왔다는 도자기, 마지막으로 흔히 볼 수 없을 정도로 질이 좋아 보이는 검이었다.

“항주고 나발이고 내 마음에 드는 것이 별로 없어.”

“하! 이건 자존심이 상하는군. 결국 그래 놓고 네가 고른 장물이 여기에 있는 다른 것보다 비싼 건 아니거든!”

적웅의 말에 풍백이 비웃음을 지으며 혀를 찼다.

“쯧쯧…… 천박하기는. 나는 그냥 비싼 걸 찾는 게 아니라는 말이야. 돈보다는 품위와 희귀도를 본다고. 여기에 있는 장물 중에서는 겨우 이렇게 네 개만 기준에 부합되는 수준이고.”

틀린 말은 아니었다. 풍백이 고른 물건은 가격을 떠나서 흔히 볼 수 없는 물건들이었다. 특히 그림은 송대의 유명한 화가인 곽희(郭熙)의 것이었다.

시대적으로 빠른 송 화가의 작품이 그 이전 수대, 당대의 화가 작품보다 싼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곽희는 고원(高遠), 심원(深遠), 평원(平遠)의 삼원(三遠)의 법칙을 정립한 사람이다. 그렇기에 화가들 사이에서 가치는 아주 높다.

풍백의 말에 적웅은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 역시 장물의 가치를 파악하며 이러한 사실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끄응…… 할 말이 없군. 그래서 그렇게 네 개만 산다고?”

“얼마야?”

“은자 칠백 냥. 한 푼도 깎아 줄 수 없는 건 알고 있겠지?”

“으하하하! 이 새끼가 미쳤구나? 돌았냐? 이걸 칠백 냥에 사라고?”

“물건의 가치는 알고 있을 텐데? 그 정도면 적당한 가격이 맞다.”

풍백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적당한 가격이 맞기는 하지.”

“그러면 칠백 냥으로…….”

“장물이 아니라면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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