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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가상방 개망나니-16화 (16/313)

적가상방 개망나니 16화

상산현에 있는 많은 건물과 장원들 중에서 가장 큰 규모를 가진 곳이 있었다.

바로 금호상방이다.

지역 유지로서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금호상방이었던 만큼 상산현에서는 관부보다 더 거대한 장원을 가지고 있는 것이 당연했다.

사람들은 상산현에서 가장 큰 상방을 얘기하면 금호상방과 더불어 백건상방을 논하고는 하지만, 실제로 상산현 안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곳은 금호상방이다.

만약 금호상방이 백건상방과 전면전을 벌인다면 어떻게 될까?

정확하게 맞출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길어야 이 년이면 백건상방을 지금보다 절반 이하의 규모로 축소되게 만들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금호상방은 굳이 백건상방을 적으로 삼지 않았다. 만약 정말로 백건상방과 전면적으로 싸우게 된다면 금호상방 역시 그만한 출혈을 감당해야 하니까.

아무튼 이런 금호상방의 넓은 장원의 내원을 한 사람이 걸어가고 있었다. 중년의 서생처럼 생긴 그는 바로 금호상방의 모든 일을 총괄하고 있는 모심천 총관이었다.

모심천은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원래 모심천은 실제로 원시(院試)에서 실시하는 과시(科試)까지 합격하여 생원이라 불리기까지 했었다. 그래서 일부 사람들은 지금도 모심천을 모생원이라 부르기도 했다.

이런 모심천이 거인을 선발하는 향시(鄕試)를 치르지 않고 금호상방의 총관이 된 건 아주 흔한 이유였다.

바로 돈이다.

가정 사정으로 많은 돈이 필요했던 모심천은 결국 관리가 되겠다는 꿈을 포기하고 금호상방에 투신하게 되었다.

워낙 뛰어난 능력을 가진 모심천이었기에 금호상방에서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펼치게 되었고, 아직 총관을 하기에는 젊은 나이임에도 파격적으로 임명이 될 수 있었다.

금호상방 내원을 걷고 있는 모심천의 얼굴은 심각했다. 평소 얼굴에 감정을 드러내지 않던 모심천이라는 걸 감안하면 대단히 심각한 일이 벌어진 것이 분명했다.

모심천은 내원 깊숙한 곳에 있는 금호상방주의 집무실에 도착하여 안을 향해 말했다.

“모심천입니다. 급히 전할 사항이 있습니다.”

“들어오게.”

노인이 허락하는 목소리가 들려오자 의관을 정제한 모심천이 안으로 들어갔다.

집무실 안에는 날카로운 인상을 가진 이순(耳順, 60세) 정도로 보이는 노인이 붓을 들고 수묵화(水墨畫)를 그리는 중이었다.

이 날카로운 인상을 가진 노년의 사내가 바로 금호상방의 방주인 조태명이었다.

조태명은 시선을 들지 않고 화폭에 그림을 그리면서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인가?”

“구주현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구주현에서? 무슨 일로? 어지간하면 연락하지 말자고…….”

“청송무관주가 모두 알아차렸다고 합니다.”

그 말에 조태명이 수묵화를 그리던 붓을 우뚝 멈췄다. 그 바람에 붓에 맺혀 있던 먹물이 뭉치더니 한 방울 떨어졌다.

그걸 본 조태명이 혀를 차며 말했다.

“쯧…… 망쳤군.”

그의 말은 그리고 있던 수묵화를 두고 한 말인지, 그게 아니면 우검학이 알아차렸다는 것을 두고 말하는 것인지 모호했다.

붓을 내려놓고 상체를 세운 조태명이 모심천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의 시선은 마치 칼날처럼 예리했다.

“자세하게 설명을 해 보게. 어떻게 된 것인가?”

“아직 자세한 내용은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급한 일이라 간략한 내용만 왔을 뿐입니다. 하지만 일이 틀어진 것은 확실한 것 같습니다.”

“흐음…… 그러면 아직 어디까지 일이 틀어진 것인지, 청송무관주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 것인지 아는 바가 없다는 건가?”

“그렇지 않아도 사안이 중대하여 보고만 올리고 바로 구주현으로 달려가서 직접 확인을 해 볼 생각입니다.”

상방에게 가장 무서운 존재는 당연히 관부다. 어떤 상방이든지 관부가 작정하고 괴롭힌다면 장사하는 것을 포기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로 무서운 것이 바로 강호의 고수다.

그나마 관부는 목숨까지 노리는 경우가 그리 많지 않다. 하지만 강호의 무인이, 그것도 고수가 분노한 것이라면 목숨이 위험해진다.

고수가 작정하고 달려들면 막아 내기 어려웠다. 하다못해 그 고수를 견제하기 위해 다른 고수를 초빙해야 되는 짜증 나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고수라 불리는 무인은 몸값이 엄청나게 비쌌다.

“기왕 알아보는 것이니 확실하게 알아보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그리고 현승은 어떻게 할까요?”

“왜? 그쪽에서 실수한 것 같아서?”

“실수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일이 틀어진 것에 대해서 책임을 지도록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모심천의 말에 조태명이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냥 둬.”

“……그쪽에서 실수한 거라고 해도 말입니까?”

“그 녀석이 실수한 거라면 더욱 놔둬야지.”

그 말에 모심천의 얼굴은 딱히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모심천을 오래 봐 왔던 조태명은 그가 납득하지 못했다는 걸 알았다.

“구주현으로 가는 김에 현승을 만나면 수고했다고 적당히 챙겨 줘. 관리는 그렇게 다루는 거야. 평범한 사람 대하듯이 할 거라면 관리하고 같이 일을 하면 안 돼.”

“명심하겠습니다.”

모심천이 허리를 깊숙이 숙이며 인사를 하고 집무실을 나갔다.

혼자 남은 조태명은 슬쩍 미간을 찌푸렸다.

‘손해가 막심하겠군…….’

아무리 그가 지원하는 돈을 받으며 공부해서 급제를 했다고 하지만, 한 지역의 장인 지주대인을 움직이는 일은 절대로 그냥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일반 사람이 들으면 간이 철렁할 만큼 큰돈이 들어간 일이라는 말이다.

거기다가 향후 청송무관을 얻고 다른 지역으로 진출하기 위해 사람을 보내 그 지역에 대해 분석을 하고, 그 지역에 진출할 물품을 생산하는 점포를 구입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청송무관이 이렇게 날아가 버리면 이 모든 것이 허공에 돈을 뿌린 것과 마찬가지 상황이 되어 버린다.

사실 돈을 날린 것은 별것 아닐 수 있다. 단지 앞으로 금호상방의 미래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그 모든 것이 송두리째 날아갔다는 것이 더욱 쓰릴 뿐이다.

‘대체 어떻게 내 계획을 알아챘던 걸까?’

그 고지식한 우검학이 스스로 눈치를 챘을 리가 없다. 분명히 중간에서 야료를 부린 놈이 있을 것이다.

먹물이 번져 망쳐 버린 수묵화를 바라보던 조태명은 화선지를 와락 뭉쳐서 한쪽으로 치우고는 새로운 화선지를 준비하고 붓을 들어 다시 수묵화를 그려 갔다.

‘그림을 그리다가 망쳤으면 새로 그림을 그리는 것이 당연한 이치겠지.’

수묵화를 그리는 조태명은 예리한 눈빛을 흘리고 있었다.

* * *

구주현에서 용유현까지 마차를 타고 달리면 사흘이 걸리는 거리다. 그렇다면 사흘이 걸리는 거리를 최대한 단축시킬 수 있는 방법은 뭐가 있을까?

단순하다. 그저 최대한 빨리, 오랫동안 달리면 된다.

풍백이 타고 있는 마차가 바로 그랬다.

구주현을 출발한 마차는 선불 맞은 멧돼지처럼 미친 듯이 달렸다. 그러다 보면 마차를 끄는 말이 지치는 것은 당연했다. 그래서 역참(驛站)이 나오면 말을 바꿔 가며 계속해서 달렸다.

그것만이 아니라 밤에도 계속 달렸다.

마부가 너무 힘든 일정에 불만을 토했지만, 풍백은 그런 마부에게 충분히 만족할 만한 보수를 약속했다. 특히 도착하는 시간이 빨라지면 빨라질수록 더 많은 보수를 약속했다.

그러자 마부는 그때부터 정말 물불을 가리지 않고 관도를 달렸다.

이렇게 달리다 보니 용유현에 도착했을 때는 무려 하루의 시간을 단축시킬 수 있었다. 이 정도면 마차 없이 혼자 말을 타고 달리는 것과 같은 시간이었을 정도였다.

하지만 마차가 이렇게 빨리 달린다는 말은, 마차의 승차감을 포기한다는 것과 같았다.

“도착했습니다!”

용유현에 들어온 마부가 적당한 객잔에 멈춰 서자 마차 문이 열리며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왕삼이 주둥이를 막고 튀어나오더니 그대로 속에 있는 모든 것을 게워 내기 시작했다.

“우웨에에엑!”

미친 듯이 요동치는 마차를 타고 있으면서 속이 뒤집어지게 된 왕삼이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미친 듯이 달리는 마차에서 제대로 된 음식을 먹을 수 없었으니 그다지 나오는 것이 없었다는 점이었다. 그 대신 왕삼의 입에서 노란색 쓴물이 흘러나오고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풍백은 마차에서 내리며 왕삼을 보고 혀를 찼다.

“쯧쯧…… 겨우 이틀 마차를 타고 달렸다고 토하고 난리를 치고 있네. 넌 평소에 몸 관리 좀 하는 것이 좋겠다.”

“우우웩! 여기서…… 몸관리가…… 왜 나옵…… 우우욱!”

“몸이 튼튼하면 그렇게 속이 뒤집어지지도 않는 법이지.”

왕삼은 풍백의 말 같지도 않은 말에 뭐라 한마디 해 주고 싶었으나 아무런 말도 못했다. 입만 벌리면 뭔가가 속에서 올라오고 있으니 어떻게 말을 하겠는가?

마부석에서 호위무사가 내렸다. 그 역시 풍백처럼 아무렇지 않았다. 아무래도 강호를 많이 돌아다녔던 호위무사였던지라 이 정도 마차를 탔다고 왕삼처럼 꼴불견의 모습을 보일 리는 없었다.

“먼저 들어가서 숙소를 잡아 놓겠습니다.”

호위무사의 말에 살짝 멈칫한 풍백은 아직도 노란물을 쏟아 내고 있는 왕삼을 보고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음…… 그렇게 하시오.”

원래 풍백은 오늘 모든 일을 끝내고 바로 용유현을 떠나려고 했었다.

하지만 지금 왕삼의 상태를 보니 바로 출발을 했다가는 내일쯤 송장을 치울 것 같았다. 그러니 어쩔 수 없이 오늘은 여기서 머물고 내일 출발을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호위무사가 객잔으로 들어가 숙소를 잡는 동안, 풍백은 이제 더 이상 입에서 노란물도 나오지 않고 있는 왕삼의 등을 두드렸다.

“다 쏟았냐?”

“더 쏟고 싶은데…… 안 나오네요…….”

“그럼 됐네. 죽지는 않겠어. 그만 들어가서 속이라도 풀어. 속이 많이 다쳤을 테니까 어지간하면 자극적인 음식은 먹지 말고.”

간혹 보면 풍백이 왕삼을 구박하거나 막 대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풍백은 엄연히 왕삼을 대단히 친근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왕삼이 믿을 만한 녀석이라는 건 이미 지난 과거에 모두 겪어 봤다.

적가상방의 모든 사람이 멸시 섞인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와중에도 왕삼 만큼은 정말 혈육처럼 자신을 쫓아다니며 정신을 차리게 하려고 노력했었다. 심지어는 상방 사람들과 풍백을 대신해서 싸워 주기도 했었다.

아무리 바쁘다고 하더라도 이런 왕삼을 위해서라면 하루 정도 시간을 빼 주는 건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도련님…….”

방금 전까지 구역질을 하는 바람에 눈가에 물기가 가득한 왕삼이 말했다.

“기왕이면 비싸고 맛있는 걸로 사 주세요…….”

“……미쳤구나? 내가 방금 전에 뭐라고 했더라?”

“자극적이지 않고 비싸면서 맛있는 걸로…….”

“그냥 만두나 처먹어라.”

* * *

객잔 별채를 잡은 풍백은 저녁 식사를 마치고 시간이 되기를 기다렸다.

사실 지금 출발해도 괜찮지만, 그가 알기로 너무 일찍 출발하면 원하는 사람을 만나기 힘들 기에 시간을 보내는 중인 것이다.

“드르렁!”

별채에는 당연히 방이 몇 개로 나뉘어 있다. 그중 방 하나를 차지하고 있는 왕삼은 식사를 마치자마자 들리는 것처럼 기절한 것처럼 잠이 들었다.

이틀 만에 용유현에 도착하기 위해 마차를 달린 여파는 속이 뒤집혔던 것만이 아니다. 말했듯이 밤에도 미친 듯이 달리는 마차에서 제대로 잘 수 있었던 사람은 아마 풍백밖에 없었을 것이다.

풍백이야 과거에 여러 훈련과 실전으로 인하여 이제는 직진으로만 간다면 말을 몰면서 잠을 잘 수 있는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아무튼 잠도 제대로 못자고, 속도 뒤집어졌던 왕삼은 체력이 바닥까지 떨어져 식사를 마친 이후 기절하듯이 쓰러지고 말았다. 참고로 왕삼은 결국 제법 비싼 요리를 먹었다.

댕!

창밖을 바라보고 있던 풍백의 귀에 은은한 종소리가 들렸다.

자시(子時, 11시~1시)를 알리는 종소리였다. 그리고 풍백이 슬슬 움직일 시간이기도 했다.

미리 말을 해 놨기 때문에 자시를 알리는 소리가 들리자 호위무사가 방으로 들어오며 말했다.

“말씀하신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럼 출발하도록 합시다.”

“어디로 가는지 아직도 얘기를 해 주지 않으실 겁니까?”

호위무사의 물음에 풍백은 오히려 질문을 던졌다.

“사람을 죽여 본 적은 있소?”

그 말에 대답 대신 호위무사는 미간을 찌푸렸다. 대체 이 망나니 도련님이 왜 이런 질문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하긴 지금까지 이해가 됐던 적이 있었나?’

객잔에서 유금성을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풍백이 하는 모든 일은 이해가 잘 되지 않는 일들이었다.

하지만 그 결과는 모두 좋았다. 지금도 아마 호기심과 같은 이유로 물어본 것은 아닐 것이라 생각됐다.

“있습니다.”

“그러면 사람을 죽일 때 망설임 따위는 없겠구려.”

“망설임을 가지면 내가 죽는 곳이 강호입니다.”

풍백은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자신이 강호에서 활동을 했던 건 아니지만, 강호가 어떤 곳인지 대충 알고 있었다.

간혹 그런 생각을 하고는 했다. 알고 보면 자신이 하는 일들과 강호에서 살아가는 무인이 큰 차이가 없는 것 같다는 그런 생각 말이다.

“그러면 어느 정도 마음에 준비는 하도록 하시오.”

“……사람을 죽여야 할 일이 벌어질 거라는 말입니까?”

“내가 인간 백정(白丁)도 아니고 사람을 죽여야 할 일을 벌일 리가 있겠소?”

“그렇다면 왜 그런 얘기를 하는 겁니까?”

“일이 틀어지고 재수가 없으면 당신이 칼춤을 춰야 할 수 있으니 미리 알려 주는 것일 뿐이오.”

호위무사의 얼굴이 굳었다. 그리고 그걸 본 풍백이 담담한 말투로 물었다.

“부담스럽다면 그냥 여기에 있어도 괜찮소.”

“일부러 사람을 죽이려는 것이 아니라면 괜찮습니다. 어떤 거래가 틀어지고 싸움이 일어나면 고객을 호위하는 것이 제가 할 일이니까요.”

“그럼 다행이구려. 가 봅시다.”

“어디를 가는 것인지 아직 얘기를 해 주지 않았습니다.”

풍백은 미소를 지으며 호위무사를 보고 입을 열었다.

“뒷골목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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