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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가상방 개망나니-15화 (15/313)

적가상방 개망나니 15화

“도련님, 차 가져왔습니다.”

왕삼이 탁자에 앉아 책을 보고 있는 풍백의 앞에 찻잔을 내려놨다.

“오냐.”

풍백은 차를 들어 입을 축이는 와중에도 책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던 왕삼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도련님, 진짜 괜찮은 겁니까? 곧 청송무관에서 연락이 올 거라고 하더니, 벌써 나흘째입니다.”

나흘 전 청송무관주 우검학과 대화를 마치고 나오자 왕삼이 득달같이 달려와 물어봤었다. 그리고 풍백은 객잔에서 조금만 기다리면 연락이 올 거라고 말했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풍백은 전혀 아무렇지 않았다. 어차피 결과는 정해져 있었다. 최악의 경우라면 상인은 이제 아무도 못 믿겠다고 다 꺼지라고 하는 경우인데…… 아마도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정말 무관이 망하는 꼴을 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하지만 왕삼은 자세한 얘기를 모르기 때문인지 오히려 더 난리였다.

초조하게 돌아다니는 것은 물론이고, 은근히 풍백에게 일이 잘 풀리겠냐고 묻더니, 이제는 보이는 것처럼 방방 뛰고 있었다.

“내 얼굴을 봐라.”

“보고 있습니다.”

“불안해 보이냐?”

“아니오.”

“그런데 뭘 묻고 지랄이야? 정 답답하면 가서 낮술이라도 한잔하고 자빠져 자라.”

오전 내내 단련하고 약간의 휴식을 취하려고 책 좀 읽고 있었는데, 왕삼이 매달려서 징징거리는 것을 보니 차라리 단련이나 계속하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았다.

하지만 풍백이 자리에서 일어남과 동시에 점소이가 별채의 문을 두드렸다.

“손님? 여기 청송무관에서 누가 찾아오셨는데요.”

왕삼이 눈이 동그랗게 변해 후다닥 달려가 별채의 문을 열었다. 그러자 점소이와 함께 문인처럼 생긴 중년의 사내가 함께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청송무관주 우검학이었다.

풍백이 웃는 얼굴로 나오며 반겼다.

“관주님께서 직접 오실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조용히 얘기 좀 하고 싶소.”

“넵! 두 분이서 조용히 얘기를 나누십시오! 저는 나가 보겠습니다!”

우검학의 말에 왕삼은 언제 죽상이었냐는 것처럼 싱글벙글하며 대답하더니 얼른 별채를 나가 문을 닫았다.

이제야 한시름 놓인 왕삼이었다.

항상 풍백을 보면 물가에 내놓은 아이처럼 불안했었다. 평소 행실이 그 모양이었으니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정신을 차린 것처럼 술도 안 마시고 운동까지 하더니, 이번에 드디어 상방의 중요한 업무를 처음으로 맡게 되었다.

그러니 당연히 풍백이 하는 일이 잘되기를 바랄 수밖에 없다.

풍백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모시는 것이 바로 자신이다. 그 말은 풍백이 잘되면 자신이 잘되는 것과 같다는 말이다.

‘청송무관주가 직접 온 걸 보면 당연히 협의를 하려고 온 거겠지?’

아직 확실한 건 아니지만 최소한 긍정적인 신호라고 볼 수는 있을 것이다.

기분이 좋아진 왕삼이 점소이를 끌고 객잔으로 향했다.

우검학은 자리에 앉아 차를 대접받을 때 인사한 것을 제외하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풍백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역시 아무런 할 얘기가 없다는 것처럼 조용히 맞은편에 앉아 차를 마시기만 할 뿐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마침내 지루한 시간의 종지부를 우검학이 찍었다.

“어떻게 알아냈던 것이오?”

그 말에 풍백은 환하게 웃으며 물었다.

“확인을 해 보신 겁니까?”

“해 봤소.”

“증거는 찾으셨고요?”

“찾을 필요도 없었소. 현승이 모든 걸 시인했으니까.”

사실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우검학은 현승을 현승 나리라고 불렀다. 원래라면 이것이 맞고 말이다.

하지만 모든 사실을 알고 난 이후에는 도저히 그렇게 부를 수 없었다. 그래서 풍백이 그런 것처럼 그냥 관직명을 불렀다.

“직접 시인을 했다고요? 흐음…… 생각보다 능력이 대단하십니다. 시인을 하는 순간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를 리가 없으니 죽어도 잡아뗄 거라 생각했습니다.”

“능력이 좋았다면 이런 간교한 수작에 넘어갈 일도 없었을 것이오.”

그리고 현승에게 추궁하는 방법은 그리 어렵지도 않았다.

풍백은 직접 현승을 만나 본 적이 없었기에 몰랐겠지만, 애초에 우검학은 현승이 얼마나 심약한 사람인지 빤히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감히 현승이 자신에게 수작을 부릴 거라고 생각하지도 못했던 것이고.

그저 청송무관으로 불러들여 절정 고수의 기세를 그대로 드러내며 위압하자 모든 것을 술술 불었던 현승이었다. 이렇게 쉽게 겁을 먹는 놈이 수작을 부렸다는 것이 허탈해질 정도로 쉬웠다.

풍백은 자조적으로 말하는 우검학을 보며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원래 눈앞에서 날아오는 칼보다 뒤에서 은밀히 찔러 오는 칼이 더 위험한 법이라고 했습니다. 관주님이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으니 자책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소방주의 말이 틀린 말은 아니지만, 무관의 수장으로서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잘 방비를 했어야 하오. 은밀히 찔러 오는 칼을 미리 경계하는 것이 수장이 할 일이란 말이오.”

풍백은 우검학이 무관을 이끌어 갈 자격은 있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자신이 당한 것을 합리화하지 않고 스스로 되돌아보며 자기비판을 하고 있지 않은가.

아마 이제 우검학은 이번 경험을 떠올리며 언제나 암중에서 자신을 노리는 누군가를 경계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한 무리의 수장이 반드시 가져야 할 것들 중 하나였다.

“그래서 염치도 없지만 이 말을 하기 위해 직접 찾아왔소.”

“무슨 말을 말입니까?”

“부디 적가상방이 우리 청송무관을 도와줬으면 합니다.”

우검학은 말투도 존대로 바꾸고 머리가 거의 탁자에 닿을 정도로 정중히 굽혔다.

솔직히 풍백도 이 순간만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우검학이 청송무관의 관주라거나 그의 나이가 많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풍백이 놀란 것은 그가 알기로 과거에 우검학이 누군가에게 고개를 숙였다는 말을 들어 본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의외의 행동에 풍백이 잠시 멍하니 있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 얼른 두 손을 흔들며 사양했다.

“관주님, 어서 고개를 들어 주세요! 제가 감히 감당할 수 없습니다!”

“적가상방이 우리를 도와주지 않는다면 제가 고개를 들 수 없습니다.”

“일단 고개를 들어 주세요! 그렇지 않으면 저는 이대로 일어나 나가겠습니다!”

이후로도 한참을 실랑이질 하고 나서야 간신히, 그것도 미적거리며 우검학이 고개를 들었다.

깊은 한숨을 내쉰 풍백이 우검학을 보며 말했다.

“너무 그렇게 과례(過禮)를 표하지 말아 주십시오. 저희야말로 청송무관과 함께 표국을 만드는 일이 아주 급한 상황이라 불감청(不敢請)이언정 고소원(固所願)입니다.”

“그래도 제가 충분히 고개를 숙여야 할 일이었습니다. 소방주 덕분에 저는 물론이고 청송무관이 농락을 당하고도 알지 못한다는 말로 다하지 못할 치욕을 피할 수 있었으니 말입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관주님께서 고개를 숙이시면 안 됩니다. 적가상방과 청송무관은 서로 완전히 대등한 관계입니다. 옳은 관계라는 것은 이렇게 대등한 관계에서부터 시작을 하는 것이니까요.”

솔직히 궤변(詭辯)이다.

세상에 어떤 관계라도 대등할 수 있는 경우는 많지 않다. 아주 사소한 무언 하나라도, 약간의 마음에 부담이라도 있는 경우가 더 많다.

실제로 아무리 말을 이렇게 한다고 하더라도 우검학과 청송무관은 적가상방에 부채의식(負債意識)을 가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또한 서로 대등하지 못한 관계에서 시작한다고 옳은 관계가 아니라고 누가 말하던가? 대등하지 못하더라도 추후에 어떤 관계로 변할지는 서로 관계를 맺으며 정해 가는 것일 뿐이다.

하지만 듣기는 좋다.

실제로 풍백의 얘기를 들은 우검학은 얼마나 감동을 받았는지 눈망울이 그렁거릴 정도로 흔들리고 있었다.

물론 중년의 사내가 이런 눈망울로 바라보는 것이 그다지 유쾌하지만은 않았지만…….

“그러면 청송무관은 저희 적가상방과 표국을 만드는 걸 찬성하시는 겁니까?”

“네, 오히려 저희 청송무관이 부탁을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좋습니다.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표국을 만드는 과정에서 필요한 금액은 저희 적가상방에서 전액 지불할 예정입니다. 이후 오 년 동안 적가상방의 표물을 운송할 때는 표국 평균 운송비의 팔 할을 지불하는 것으로 합니다. 이 부분에 동의하시는 거지요?”

“동의합니다.”

이미 진덕양에게 모두 들었던 내용이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표국을 만드는 데 들어가는 금액은 절대로 만만치가 않다. 이 모든 금액을 온전히 감당해야 하는 적가상방도 일반적인 상황이었다면 부담스러워 절대로 하지 않았을 결정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당장 상행을 나가지 못하면 고사할 지경에 빠진 적가상방이었다. 그러니 당장 목돈이 들어간다고 하더라도 빨리 상행을 나갈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또한 무조건 손해는 아니다.

오 년이라는 시간 동안 운송비 이 할을 아낄 수 있었다. 사 년 정도라면 투자한 돈을 뽑아낼 수 있을 터였다.

그리고 표국을 만들면서 사용한 목돈을 운용하면 벌 수 있을 금액은 남은 일 년으로 대충 비슷하게 맞출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니 적가상방과 청송무관 모두 손해는 거의 없는 상황이었다.

물론 지금 얘기한 것으로 모든 협의가 끝난 것은 아니다. 지금은 가장 중요한 부분만 서로 확인을 한 것이고, 자세한 협의 사항은 다시 진덕양이 나서거나 아니면 적호경이 직접 나서서 의견을 나눠야 할 것이다.

대략적인 협의를 마친 우검학이 돌아갔다. 그러자 객잔에서 기다리고 있던 왕삼이 돌아가는 우검학을 봤는지 나는 듯이 별채로 달려왔다.

“도련니임!”

길게 부르짖으며 달려오는 왕삼의 얼굴에는 함박웃음이 자리 잡고 있었다.

“왜 그렇게 가증스럽게 부르는 거냐.”

“어떻게 된 겁니까? 우검학 관주가 엄청 좋은 얼굴로 돌아가던데요. 협의가 잘된 겁니까? 성공하신 거예요?”

“협의에 성공이고 자시고가 어디 있어? 서로 적당히 이득이 되는 선에서 얘기가 끝난 것일 뿐이지.”

“성공하셨군요! 으아아! 정말 축하드립니다, 도련님! 드디어 도련님이 어엿한 어른이 되신 거군요! 이 왕삼은 도련님이 대견합니다! 정말 눈물이 앞을 가릴 정도로…… 으흐흑…….”

과거에 합격한 아들을 보고 우는 부모님처럼 과장되게 우는 연기를 하는 왕삼의 모습은 정말로…… 짜증 나게 만들었다.

“야, 그냥 평범하게 행동 좀 하라니까. 대체 어떤 놈이 이 새끼한테 계속 이런 걸 가르쳐 주는 거야?”

“기뻐서 그런 것 아닙니까, 기뻐서! 상방에서 사람들이 그렇게 개새…… 흐흠! 무시를 당하셨는데, 이렇게 엄청 중요한 협의를 이끌어 내셨으니까 말입니다. 이제 상방에서도 도련님을 보는 시선이 완전히 달라질 겁니다.”

“과연 그럴까?”

누군가를 평가하는 사람의 시선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번 일로 자신에 대한 평가가 조금 달라지겠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바뀌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어쩌면 그저 술주정뱅이 망나니가 운이 좋았다고 할지도 몰랐다.

상관없었다.

어차피 천천히 이런 시선도 바뀌게 될 테니까.

“어쨌든 협의를 끝냈으니 출발할 준비를 해라.”

“알겠습니다! 마부에게 얘기를 해서 최대한 서둘러 상산현으로 돌아가자고 하겠습니다요!”

“최대한 서두르는 건 맞는데, 상산현이 아니니까 이상한 소리는 하지 말고.”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상산현으로 가는 게 아니라니요?”

원래 계획은 제법 거리가 있는 곳이었으니, 적당히 몸이 만들어지면 움직일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미 여기까지 온 거리만 하더라도 사흘 거리다. 이곳 구주현에서 조금만 더 가면 한 번 들러서 일을 처리해야 하는 곳이 나온다.

어차피 가야 할 곳이니, 이 기회에 처리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용유현(龍游縣)으로 간다.”

풍백의 입가에는 진한 미소가 자리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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