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가상방 개망나니 12화
누군가가 자신을 의심하는 경우에는 어떻게 대응하는 것이 맞을까?
아쉽지만 정답은 없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 대응하는 방법 중 가장 범용적으로 쓸모가 있는 것은 있다. 바로 주도권을 쥐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 풍백과 같은 경우는 주도권을 가져오는 일이 쉽다. 애초에 암향거에서는 상대의 출신이나 신분을 묻지 못하도록 되어 있으니, 저들이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한 순간 이미 주도권을 내준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아마도 앞에 있는 여인은 이런 훈련을 받은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그럴 수 있다. 애초에 기루에서 정보를 수집하는 것이 목적인 사람들이니 굳이 이런 훈련을 받을 필요는 없으니 말이다.
차가운 풍백의 대답에 여인은 당혹스러운 표정이 되었다. 적어도 처음 입을 열면서 이렇게 각을 세울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누구지?”
“……네? 무슨 말씀이신지.”
“누가 내 신분을 물어보라고 시켰냐는 말이다. 설마 정칠품에 불과한 지현대인(知縣大人)은 아닐 것이고. 그 위에서 내려온 지시인가?”
“그, 그게 아니라…….”
차가운 눈으로 용의자를 취조라도 하는 듯이 싸늘한 풍백의 말에 여인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갔다.
“이런…… 내가 너무 몰아붙였던 것 같군.”
풍백은 그런 여인을 보며 빙긋 웃으며 술병을 들어 그녀 앞에 있는 잔을 채웠다.
“마셔.”
여인은 가늘게 떨리는 손으로 술잔을 들어 마셨다. 솔직히 술을 마실 생각은 없었지만, 감히 풍백의 말을 거역할 수 없었다.
“너무 긴장하지 않아도 돼. 나는 그저 이름만 들으면 되거든.”
“…….”
“누군가? 포정사(布政使)? 안찰사(按察使)? 솔직히 말하면 네 목숨 하나는 살려 준다고 약속을 해 주마.”
풍백의 입에서 종이품, 정삼품의 고관이 언급되자 손이 눈에 띄도록 벌벌 떨었다.
단지 안면이 너무 없던 사람이라 혹시나 싶어서 한마디를 던져 봤을 뿐이다. 최대한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자연스럽게 던진 말이었는데, 그 결과가 이것이다.
풍백이 폭풍처럼 몰아치더니 이제는 은근한 말투로 회유를 하고 있다. 이미 자신의 머리 꼭대기에 앉아 있다는 것처럼 쥐락펴락하는 풍백의 언변에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였다.
‘어사다! 어사님이야!’
그 결과 여인은 풍백이 황제 직속으로 명을 받고 암행을 하고 있는 어사라고 믿었다. 그것도 이제 막 관직에 오른 신임 어사라고 말이다.
나이가 어리고 이제 관직에 올랐다고 무시할 일이 아니다. 오히려 신임 어사일수록 무서운 존재다. 자신을 피력하고 더 높은 관직에 오르기 위해 불물을 가리지 않는 것이 바로 신임 어사니까.
“아, 아닙니다! 누가 시킨 것이 아니고…….”
“시킨 것이 아니다? 그러면 왜 내 신분을 물어본 거지?”
“으음…….”
감히 풍백이 의심스러워서 한 번 떠본 거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행여나 그 말을 듣고 풍백이 분노할까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국 그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없는 말을 꾸며 낼 수도 없으니까.
“처, 첩자가 아닌가 싶…… 어서 확인하기 위해…….”
“미쳤구나.”
“아닙니다!”
“네가 맡은 임무가 암향거에 출입하는 인사를 판단하고 시험하는 일인가?”
“……아닙니다.”
“네가 독단적으로 시험을 했다는 것은 잘못을 했다는 말이고, 그렇다면 지금 당장 죽어도 상관이 없겠구나.”
“헉! 사, 살려 주세요!”
여인은 그대로 의자에서 내려와 머리를 지면에 박았다.
‘이 정도로 할까?’
이미 목적은 달성했다.
사실 과거에도 간혹 암향거에 가면 이런 식의 시험이 있기는 했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난장을 부리지는 않았다. 어차피 앞으로 계속 정보를 받으러 찾아올 테니 굳이 문제를 만들 필요는 없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그때와 상황이 조금 달랐다. 그때는 어쨌든 풍백이 암향거를 이용할 권리가 있었지만, 지금은 그런 권리가 없으니까 말이다.
아마 이 정도라면 자신의 신분에 대해 의심을 하지도 않을 것이고, 앞으로도 쓸데없는 수작을 부리지 않을 것이다.
“쯧쯧…… 아깝군. 누구 하나 걸리기만 했으면 좋았을 텐데. 일어나라.”
여인은 고개를 들어 풍백을 바라봤다. 풍백은 그런 여인의 시선을 받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원칙대로 하자면 쓸데없는 짓을 벌인 네 목을 자르는 것이 맞겠지만 이번에는 넘어가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네가 예뻐서 살려 주는 것이 아니야. 되도록 내가 주목을 받으면 안 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살려 주는 거다.”
“이 은혜는 절대로 잊지 않겠습니다!”
“역시 미쳤구나. 그냥 이대로 목을 자를까?”
그 말에 화색이 돌던 여인의 얼굴이 다시 사색이 되었다.
“헉! 죄송합니다!”
“뭐를 잘못한지 알고 있는 거냐?”
황급히 머리를 굴린 여인이 무언가를 깨달고 소리쳤다.
“잊겠습니다! 하나도 기억나지 않습니다!”
“당연히 내가 누군지 몰라야지.”
“맞습니다!”
“그래서 내가 누구라고?”
“누구신지 모르겠습니다!”
실제로도 누군지 몰랐다.
만족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 풍백이 의자에 몸을 묻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이곳에 청송무관이라고 있더구나.”
“네, 있습니다!”
“그곳에 관련된 중요한 정보 및 수면 아래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해 확보하고 있는 정보를 모두 가져와라.”
“알겠습니다!”
말을 마친 여인이 황급히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처음 방에 들어올 때 단아했던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찾아볼 수도 없었다.
혼자 남은 풍백은 여인이 돌아올 때까지 그대로 앉아 있었다. 술을 당분간 먹지 않을 생각이고, 이전에 식사를 하고 나왔으니 딱히 음식에 손이 가지 않았다.
일각 정도 시간이 지나자 여인이 책자 몇 권을 들고 헐레벌떡 방으로 들어왔다.
“여기 가져왔습니다!”
“놔두고 나가도록 해.”
“예, 필요한 것이 있으면 불러 주세요.”
책자를 풍백의 앞에 놔둔 여인은 이제 확실히 살았다고 느꼈는지 환하게 웃으며 뒷걸음질로 방에서 나갔다.
풍백은 책자를 들어 읽기 시작했다.
책자에는 온갖 내용이 모두 담겨 있었다.
청송무관의 현재 재정 상태는 물론이고, 무관에 등록된 무인은 대략적인 내용과 그들의 무공 수위마저 정리되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청송무관에 수강하고 무공을 배우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내용마저도 있었다.
풍백은 그런 내용은 빠르게 읽었다. 주의 깊게 볼 필요는 없는 내용이었다. 지금 풍백이 찾는 건 이런 제반사항이 아니라 이들이 적가상방의 제안을 거절한 이유를 찾는 것이었으니까 말이다.
한참 동안 책자를 읽던 풍백이 어느 한 부분에서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곤 지금까지 빠르게 읽던 것과 다르게 무언가 집중해서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풍백은 실소를 터뜨렸다.
‘이것 봐라?’
* * *
“여기가 청송무관입니다.”
왕삼의 안내를 받아 청송무관에 도착한 풍백은 잠시 멈춰 서서 현판을 바라봤다.
현판에 용사비등(龍蛇飛騰)하게 새겨진 청송무관이라는 글씨는 아주 대단했다. 이전의 풍백이라면 서예에 대해 조금도 몰랐기에 봐도 가치를 알아볼 수 없겠지만, 풍백은 군부에서 기본 소양을 조금이라도 상회할 수 있도록 훈련을 받았기에 알아볼 수 있었다.
‘현호자는 무공뿐만이 아니라 서예에 대해서도 경지에 도달했구나.’
현판은 청송무관주의 사부인 무당파 장로 현호자가 직접 쓴 것이다. 아마도 무관을 차리는 제자의 앞날이 밝기만을 기원하며 써 줬을 것이다.
그런 현호자의 기도가 하늘에 닿은 것인지 과거의 청송무관은 언제 자금 위기에 빠졌냐는 것처럼 빠르게 규모를 키워 나갔었다.
청송표국을 시작으로 자본금을 손에 넣고, 그 자본금으로 정기적으로 수입이 들어올 수 있도록 반점이나 객잔 등을 인수했다.
그 이후 어느 순간 청송무관은 없어지고 구주현에는 청송문(靑松門)이라는 문파가 생겨나게 된다.
‘우리와 손을 잡는다고 하더라도 청송무관이 문파로 발전하는 것은 문제가 없을 거야.’
아니, 어쩌면 더 빨리 청송문을 개파(開派)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풍백은 앞으로 적가상방을 절강성 제일의 상방으로 만들 예정이니까 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오늘 협의를 무조건 성공해야 했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풍백의 귀에 왕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서 주무시는 겁니까? 어제 술을 드시고 오더니, 희한한 재주를 배워 오셨네요.”
그 말에 풍백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어제 천화루를 다녀왔다는 얘기를 호위무사에게 듣고 난 이후부터 계속 이렇게 툴툴거리고 있는 왕삼이었다.
왕삼의 말에 뒤에서 눈을 지그시 감고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호위무사의 모습에 하마터면 욕을 할 뻔했다.
아무튼 풍백이 술 한 잔도 마시지 않았다고, 심지어 입을 벌리고 바람까지 불기도 했다. 그렇지만 뭐가 불만인지 왕삼은 지금까지 툴툴거리는 걸 멈추지 않고 있었다.
“작작 좀 해라, 새끼야. 내가 술 안 마셨다고 했잖아. 뭐가 그렇게 불만이기에 계속 이 지랄 중인 거냐?”
호위무사에게나 욕을 못한다는 말이지 왕삼에게 못한다는 말은 아니었다.
왕삼은 그런 풍백의 말에 과장되게 상처를 받았다는 듯이 고개를 홱 돌렸다.
“너무하십니다, 도련님! 어떻게 그런 말을…….”
하마터면 주먹을 날릴 뻔했다.
저 투박한 얼굴로 잘도 저런 짓을 하고 있다. 대체 저런 건 계속 어디서 배워 오는 건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목적이 풍백을 열 받게 하는 거라면 훌륭히 성공하고 있다고 알려 주고 싶었다.
“네가 뭐를 좀 알아보고 가야 하는 것 아니냐며? 그래서 좀 알아보려고 기루 좀 갔다고 했잖아. 술도 안 먹었다고.”
“술은 안 드셨다고 하더라도 아리따운 기녀하고 그…… 뭐시기냐…… 운…… 운…….”
“운우지락(雲雨之樂)?”
“그거! 아주 끝내주는 시간을 가졌을 것 아닙니까?”
“아니, 천화루 기녀가 예쁜지 아니면 박색(薄色)인지도 모르게 무슨 개…… 어?”
풍백이 호위무사를 홱 쳐다봤다. 그러자 호위무사가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이 새끼가 뭐라고 말했구나!’
“오늘 엄청엄청 중요한 협의가 있으시면서 기녀하고 운우지락을 즐기고 오셨다니…….”
“야! 운우지락을 즐기긴 뭘 즐겨?”
“상방주님과 총관 어르신이 이 사실을 알면 얼마나 크게 실망을 하시겠습니까? 네?”
열변을 토하는 왕삼의 모습에 깊게 한숨을 푹 내쉰 풍백은 결국 참지 못하고 주먹으로 왕삼의 머리통을 후려쳤다.
딱!
“아이쿠! 도, 도련님이 사람을 팬다! 사람을 패!”
꿀밤보다 조금 더 세게 때렸을 뿐인데 왕삼은 죽겠다는 것처럼 소리쳤다.
그 모습을 한심한 눈으로 바라보던 풍백이 입을 열었다.
“청루(靑樓)였다고.”
“……네?”
“천화루는 청루라고, 이 새끼야. 청루 몰라?”
기루는 두 가지 종류로 나뉘게 된다.
하나는 홍루(紅樓)로 방금 전 왕삼이 말한 것처럼 몸을 파는 기녀들이 있는 곳이고, 다른 하나는 청루로 이곳의 기녀는 기예(技藝)를 팔거나 웃음을 판다. 간혹 슬쩍슬쩍 몸을 건드리는 건 관대하게 넘어간다고 하더라도 몸을 팔지는 않는 곳이 바로 청루다.
이번에는 풍백의 말을 들은 왕삼이 호위무사를 홱 돌아봤다. 호위무사는 이번에도 어색한 기침과 함께 왕삼의 시선을 피했다.
‘이 새끼가 알면서 말해 주지 않았구나!’
풍백은 이런 왕삼과 호위무사를 보며 혀를 찼다. 특히 풍백은 호위무사를 보며 더욱 격렬하게 혀를 찼다.
헛기침을 한 왕삼이 다시 입을 열었다.
“험험! 아무튼 아무리 청루라고 하더라도…….”
“야.”
“……네?”
“적당히 해.”
“그럴까요?”
냉큼 수긍한 왕삼이 어설프게 웃으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약속은 확실히 잡았지?”
“네, 지금 이 시간이면 청송무관주가 시간이 된다고 해서 약속을 잡았지 말입니다.”
과도한 몸동작으로 대답하는 왕삼의 모습에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쉰 풍백은 청송무관 대문으로 다가가 문을 두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