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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가상방 개망나니-4화 (4/313)

적가상방 개망나니 4화

갑작스러운 어떤 사건이 터졌을 때, 사람이 그 상황을 제대로 인지하는 데 시간은 얼마나 걸릴까?

당연히 사람마다 차이가 있고 어떤 사건이 터진 것이냐에 따라 달라지는 일이겠지만, 풍백은 상황을 인지하는 데 무려 사흘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다.

얼핏 보면 너무 오래 걸린 것 아니냐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풍백과 같이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사건이라는 걸 감안하면 그리 늦은 것도 아니다.

사흘이라는 시간동안 풍백은 지금이 꿈이나 환상이라는 것이 아니라는 걸 확인하기 위해 바쁘게 돌아다녔다.

적가상방을 둘러보는 것은 당연했고, 상산현을 구석구석 돌아다니며 자신과 인연이 있는 사람들을 찾아다니기도 했었다.

그리고 사흘이 지난 지금, 이제는 인정을 해야 했다.

“과…… 거로 돌아온 것인가?”

의자에 앉아 멍하니 밖을 보며 중얼거리는 풍백의 모습은 반쯤 얼이 빠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렇게 말하면서도 그의 머릿속은 여전히 매우 복잡했다.

‘정말 과거로 돌아온 건가? 사실은 과거로 돌아온 것이 아니라, 내가 무려 십 년이라는 세월을 그냥 꿈에서 환각처럼 본 것은 아닐까? 그것도 아니라면…… 죽기 전에 믿을 수 없을 만큼 현실적인 꿈을 꾸는 것은 아니겠지?’

이렇게 복잡하게 생각하고 있는 풍백의 옆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가 돌아왔다는 겁니까?”

“씨, 씨발! 깜짝이야!”

갑자기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풍백이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그의 눈에 투박하게 생긴 건장한 사내가 순진해 보이는 눈망울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게 보였다.

적가상방에서 일하는 하인이자, 풍백의 옆에서 온갖 수발을 드는 왕삼이었다.

사실 왕삼은 어렸을 적부터 자신의 옆을 지키며 수발을 들어왔기에 풍백에게는 거의 친구와 같은 존재였다.

물론 이건 풍백의 생각이다. 왕삼에게 물어보면…… 풍백 때문에 온갖 고생을 해 왔기에 전혀 다른 말이 나올지도 모르는 일이다.

“뭘 그렇게 놀라십니까?”

“기척 좀 내고 다녀라!”

“문까지 두드리고 들어왔습니다만…….”

소처럼 큼직한 눈망울로 꿈벅거리는 왕삼의 모습을 보며 풍백은 욕을 한 바가지 쏟아 내려다가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에휴…… 됐다. 알아차리지 못한 내가 병신이지.”

과거로 돌아오기 전이라면 당연히 왕삼의 기척을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내공이라곤 손톱만큼도 없는 일반인이었다. 거기다가 깊게 생각에 잠겨 있기도 했고 말이다.

“그런데 뭐가 돌아왔다는 겁니까?”

“그런 게 있어. 네가 알 필요는 없고.”

“그런가요? 저는 혹시 총관 어르신 돌아오셨냐고 묻는 줄 알았습니다.”

사흘 전 풍백이 상방회의에서 말했던 청송무관과 함께 표국을 만드는 일은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래서 바쁘게 조사를 마치고 진덕양 총관이 청송무관에 표국을 만드는 것을 제안하기 위해 구주현으로 떠난 것이 이틀 전이었다.

진덕양 총관이 돌아오려면 며칠은 더 있어야 할 것이다. 구주현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시간부터 협의를 하는 시간까지 생각하면 그 정도가 적당했다.

가만히 왕삼을 보고 있던 풍백이 문득 떠오른 생각에 입을 열었다.

“그런데 너는 언제 수월이를 만나 볼 생각이냐?”

“떠헙!”

이상한 소리를 내며 눈을 커다랗게 뜬 왕삼이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고는 식은땀을 흘리며 말했다.

“그, 그게 무, 무슨 말씀입니까? 제가 수월이를 만나다니요, 하! 하! 하!”

수월이는 적가상방에서 일하는 시비였다. 제법 예쁘장하게 생긴 외모로 굳이 왕삼이 아니더라도 수월이를 좋아하는 사람은 상방 내에 제법 많았다.

“숨기는 것도 더럽게 못하는구나. 모르는 척 넘어가 주려고 해도 넘어갈 수가 없어.”

누가 봐도 바로 눈치를 챌 수밖에 없도록 행동하는 왕삼의 모습에 풍백이 혀를 찼다. 대체 숨겨 보겠다는 건지, 아니면 제발 알아 달라는 건지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였다.

“진짜 오해입니다! 저는 수월이하고 아무 상관이 없다니까요!”

“물론 상관은 없겠지. 네가 일방적으로 좋아하는 것일 테니까.”

“절대 아니라니까요! 수월이는 그냥 치, 친한 동생일 뿐입니다!”

답답하다는 듯이 가슴마저 두드리는 왕삼에 모습에 풍백은 고개를 저었다. 여전히 더럽게 연기를 못해, 답답하다는 듯이 가슴을 두드리는 모습마저 어색한 왕삼이었다.

“그러다가 속마음도 얘기를 못하고 놓치면 억울해서 어쩌려고 그러냐?”

“아이고! 미치겠네! 아닙니다! 절대로 아니에요! 죽어도 아닙니다! 으아아아!”

아마 과거의 풍백이었다면 이런 왕삼의 발악을 그냥 봐주지 않았겠지만, 지금의 풍백은 그저 피식 웃고 말았다.

‘왕삼이 태도를 보니 내가 가진 기억이 틀린 것은 아니네.’

이런 생각을 한 풍백은 곧 얼굴이 심각해졌다.

‘그 말은…… 앞으로 일 년 뒤에 우리 적가상방이 멸문(滅門)한다는 것도 틀림이 없겠구나.’

적가상방의 멸문.

이렇게 말하면 대단히 심각하고 주변에 큰 여파를 줬던 일인 것 같지만, 사실 적가상방이 멸문을 당했던 일은 겨우 상산현에서나 화제가 되었던 일이었다.

그나마 적가상방이 멸문을 당할 때 즈음에는 백건상방이 주도하고 금호상방의 방조하에 적가상방은 몰락에 몰락을 거듭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심지어 상산현에서조차 적가상방이 망해서 없어졌다고 생각한 사람들도 꽤 많았을 정도였다.

그러다 보니 상산현에 거주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적가상방이 멸문을 당한 것이 아니라, 상방이 망해 야반도주한 것이라 알고 있는 사람도 상당했다.

그렇다면 정말 모든 망하는 상방이 그렇듯, 상방의 일이 계속 실패를 거듭하며 규모가 줄어들다가, 결국은 막대한 빚을 지고 빚쟁이에 의해 멸문을 당한 것일까?

전체적인 맥락은 비슷하다. 백건상방의 수작으로 인하여 적가상방은 점점 운신이 힘들어지기 시작했고, 이 위기를 벗어나고자 적호경이 야심만만하게 시작한 사업은 모두 실패로 돌아가게 되었다.

급격히 규모가 줄어든 적가상방은 결국 상산현의 사람들은 기억 속에서 잊히며 망해서 없어졌다고 알려지게 된 것이다.

하지만 사실 적가상방이 멸문한 이유는 단순히 사업에 실패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적가상방을 습격한 놈들은…… 흔히 볼 수 있는 놈들이 아니었어.’

풍백은 십 년이 지난 지금도 기억이 선명했다. 달도 뜨지 않은 어두운 밤에 나타난 수십 명의 흑의인들이 적가상방의 사람들을 향해 병장기를 휘두르던 모습이.

흑의인들의 무공은 적가상방이 고용한 무사들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런데 숫자마저 압도적이었으니 적가상방을 지키던 소수의 무사들은 순식간에 쓸려 나갔다.

무사들을 처리한 흑의인들은 적가상방 내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도륙했었다. 여자, 남자, 노인, 심지어 아이까지 구분하지 않고 철저히 잔인한 손속을 보여 줬다.

풍백은 그 참사에서 혼자 살아남았었다.

겨우 한 사람 정도만 피할 수 있는 비밀 공간에 아버지인 적호경이 그를 밀어 넣어 간발의 차이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던 것이다.

비밀 공간에 숨은 풍백은 작은 틈으로 흑의인들이 적가상방의 사람들을 죽이는 걸 모두 목격했었다. 사람들이 죽어 가며 흘린 피가 비밀 공간까지 흘러들어 풍백의 온몸을 붉게 물들였었다.

그를 흠뻑 적신 피 중에는 아버지인 적호경의 피도 있었다.

그때의 풍백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었다. 분노는커녕 혹시 흑의인들에게 숨소리라도 들릴까 싶어 숨도 겨우겨우 쉬며 숨어 있었을 뿐이었다.

왕삼이 수월이를 좋아한다는 건 그렇게 숨어서 봤던 것 중 하나였다.

수월이를 지키기 위해 맨몸으로 무사의 앞을 가로막았던 왕삼.

하지만 왕삼은 칼질 몇 번에 목숨을 잃게 되었고, 넋을 잃고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주저앉아 있던 수월이는 심장에 검이 박혀 죽어 갔었다.

과거의 기억을 떠올린 풍백은 눈을 감았다. 미세하게 떨리는 그의 눈꺼풀이, 지금 풍백이 얼마나 크게 동요하고 있는지 알려 주고 있었다.

이제 이것은 과거가 아니라 곧 들이닥칠 미래의 일들이다. 또다시 이 더러운 기억을 현실로 만들 것이 아니라면 대책을 세워야 했다.

풍백이 생각했을 때, 적가상방이 멸문을 당하는 것을 막으려면 두 가지 방법이 있었다.

하나는 풍백 자신이 강력한 무공을 익혀 막아 내는 방법이었다.

하지만 이 방법을 떠올렸던 풍백은 곧 고개를 저었다.

적가상방을 습격했던 흑의인들의 무공은 적어도 일류 고수라고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과거로 돌아오기 전에 풍백이 가진 무위가 일류 고수 수준이었다.

그런데 심지어 이제 앞으로 겨우 일 년이 남은 지금부터 무공을 익혀 그들을 막아 낸다?

불가능한 일이었다.

……본래라면 말이다.

‘하지만 그것들을 내가 얻는다면…….’

자신이 살았던 십 년의 세월동안 강호에 흘러 다니던 많은 이야기와 정보를 알고 있었다. 그 말은 앞으로 십 년 동안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지 알고 있다는 말과 같았다.

안타까운 거라면 풍백은 대부분 새외(塞外)에서 활동을 했기에 중원의 소식에 정통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하지만 반대로 말하자면 풍백이 알고 있던 중원에 대한 소식과 정보는 정말정말 알짜배기 정보라는 말과 일맥상통했다.

만약 추후 드러날 비급과 영약을 중간에 먼저 손에 넣는다면 어떻게 될까?

그게 가능하다면 이전의 경지를 넘어서는 건 문제가 되지 않을 터다.

다만 문제는 그렇게 한다 하더라도 일 년 안에 흑의인들을 막아 낼 수 있는 수준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냐는 것이다.

‘알 수 없는 일이지…….’

무공 하나만 믿고 있을 수는 없었다. 행여나 자신이 막지 못한다면…… 다시 한번 아버지가 눈앞에서 목숨을 잃는 것을 목도하게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을 대비한 두 번째 방법이 필요했다.

‘감히 적가상방을 습격할 생각도 못하도록 상방의 규모를 키우고 스스로 보호할 수 있는 방법을 마련한다?’

어쩌면 이것이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었다.

무공은 자신의 역량이 어느 정도인지 모르는 상태이기에 명확하게 말할 수 없었다.

하나 적가상방의 일이라면 달랐다. 앞으로 벌어질 일들을 대략적으로 알고 있었으니까.

풍백은 슬슬 결론을 내렸다.

‘무공은 같이 병행을 하겠지만, 가장 중요한 건 적가상방 자체를 키우는 일이다. 그러려면 가장 먼저 청송무관과 협력하여 표국을 만드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청송표국이 성공적으로 표국을 만들게 된다면 적가상방과 대단히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될 것이다.

그 말은 표국이라는 무력단체가 생기는 것이기도 했지만, 그보다 무당파라는 간접적인 배경이 생기는 것에 더 관심이 갔다.

구파일방 중 하나이자, 정파의 가장 거대한 기둥 중 하나.

이런 무당파가 간접적인 배경으로 있으면 적가상방을 멸문시켰던 이들이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도록 억제하는 효과가 있을 것이다.

풍백의 머리가 바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지금부터는 조금도 시간을 낭비할 수 없었다. 벌써 멸문을 향해 시간은 흘러가는 중이었으니까.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어.”

“……도련님?”

왕삼이 조심스럽게 풍백을 불렀다.

“왜?”

“갑자기 심각해지신 것 같아서요. 그리고 뭐가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다는 겁니까?”

“쯧. 너는 왜 내가 혼자 말하는 걸 듣고 그래?”

“제가 듣고 싶어서 들었겠습니까? 그냥 옆에 있으니까 들었죠.”

왕삼의 말이 틀린 말은 아니다. 그저 너무 생각에 빠져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말을 흘린 자신의 잘못이다.

“그보다 괜찮으십니까?”

“뭐가?”

“아까부터 혼잣말을 하는 기색이 영…….”

왕삼의 검지손가락이 관자놀이를 가리키려다가 얼른 뒤통수로 너머 사라졌다. 굳이 끝까지 보지 않았어도 어떤 행동을 하려고 했는지 알 수 있었다.

가볍게 한숨을 내쉰 풍백이 퉁명스럽게 물었다.

“너는 왜 내 옆에 붙어 있는 거야? 할 일 없어?”

“제가 할 일이 바로 도련님 보필하는 건데요? 또 어디 나가실까 봐 이렇게 대기하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보필할 필요 없어. 이제 당분간 어디 나갈 일이 없으니까.”

“저번에도 그렇게 말씀해 놓고 나가고는 하셨으면서…….”

“잡소리 그만하고 그만 네가 할 일을 찾아서 해. 아니면 수월이한테 가서 뭐라도 해 보든가.”

“수월이한테 아무런 감정이 없다고 했는데…….”

왕삼은 끝까지 가당치도 않은 연기를 하며 미적거리는 걸음으로 물러났다.

혼자 남은 풍백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 년 후에 있을 혈사를 막기 위해서 준비할 일이 너무 많았다. 말했듯이 이제 시간이 없었다.

‘이게 모두 죽기 전에 보는 환상이 아니기를.’

마지막까지 의심하는 풍백이었다. 행여나 이게 모두 환상이고, 현실에서는 자신을 쫓아오던 놈들이 죽어 가는 자신을 내려다보며 ‘형님, 이 새끼 웃는데요’라고 말하고 있는 건 아닐지 걱정이었다.

하지만 환상이 아니라 진짜로 과거로 돌아온 거라면…… 멸문은 절대로 막아야 했다.

다시 한번 그 더러운 꼴을 보며 살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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