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가상방 개망나니 2화
따악!
“악!”
정수리에서 느껴지는 극통에 풍백은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며 눈을 번쩍 떴다.
그러자 그의 눈에 한 사람이 들어왔다.
얼굴이 붉게 변할 정도로 잔뜩 화가 나 곰방대를 쥔 손을 부들부들 떨고 있는 사십대 중반으로 보이는 중년인.
그 중년인을 본 풍백의 눈이 찢어질 듯이 커지더니 너무 놀라 벙긋거리던 입으로 간신히 말했다.
“아, 아…… 버지?”
그랬다.
풍백의 아버지인 적호경이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의 아버지인 적호경은 무려 구 년 전에 죽었으니까 말이다.
적호경은 이런 풍백에게 무시무시한 기세로 고함을 질렀다.
“상방 회의에서 잠을 자? 그것도 지금 우리 적가상방(狄家商幇)의 미래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회의에서? 네가 지금 제정신이더냐!”
풍백은 곰방대로 맞은 정수리를 부여잡고 적호경의 불호령을 멍하니 들었다. 그 모습이 적호경에게는 너무나 바보 같이 보여 속이 터졌다.
“네가 밤새 술을 먹고 다니고 온갖 사고를 치고 다녔어도, 언젠가는 정신을 차릴 것이라 여기며 기다려 왔다! 그런데 상방 회의에서, 그것도 처음으로 들어온 상방 회의에서 졸고 있다니! 그러고도 후에 네 손으로 적가상방을 지켜 나갈 수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
연이은 적호경의 불호령에 풍백은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대체…… 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풍백은 황급히 주변을 살펴봤다.
이곳은 분명히 적가상방의 대소사를 논하는 전당이었고, 눈앞에는 꿈에서도 보고 싶었던 아버지 적호경이 있었으며, 적가상방의 총관이자 적호경의 의형제인 진덕양이 상방의 각종 품목들을 담당하는 주요 인사들과 함께 앉아 있었다.
풍백은 깨달았다.
‘그때다……. 바로 그때야!’
그가 가장 돌아가고 싶다고 말했었고, 후회로 점철된 그의 인생 중에서도 특히나 고치고 싶었던 바로 그 순간.
적호경에게 거의 내침을 받았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호통과 같은 질문이 적호경의 입에서 튀어나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어디 네 생각을 말해 보거라! 만약 지금 논하고 있던 상황에 대한 네 생각이 터무니없는 말이라면…… 이번만큼은 절대로 그냥 넘어가지 않을 테니 신중하게 대답을 해라!”
적호경은 질문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말하지 않았다. 어차피 풍백이 자고 있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했으니 제대로 대답할 거라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풍백은 질문이 무엇인지, 적호경이 무엇을 묻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어떻게 모르겠는가? 과거를 떠올릴 때마다 회한에 잠기도록 만들었던 질문이었는데 말이다.
풍백은 아직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제대로 인지하지도 못했으면서도 적호경의 질문에 반사적으로 대답이 튀어나왔다.
“표국을 만들어야 합니다.”
이 대답에 적호경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그게 대체 무슨 말이더냐! 표국을 만드는 것이 적가상방과 무슨 상관이라는 말이냐! 향후 당면한 위기를 극복하고 적가상방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논하는 자리에서 표국을 만들어야 한다니…… 네가 지금 제정신으로 하는 말이냐?”
적호경은 풍백이 당장 이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입에서 나오는 대로 지껄인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인지 적호경의 얼굴에는 점점 풍백에 대한 짙은 실망감이 깔리고 있었다.
평범한 농민의 자손이었던 적호경은 현재의 풍백보다 어린 나이부터 온갖 고생을 하여 지금은 절강성(浙江省) 상산현(常山縣)에서 세 손가락에 꼽히는 상방으로 만들어 냈다.
그런데 이런 자신의 뒤를 이어야 할 풍백이 실망만 안기고 있으니 속이 썩어 들어가고 있었다.
적호경이 말한 위기는 그냥 내뱉은 말이 아니었다. 실제로 적가상방은 현재 심각한 위기에 휩싸여 있었다.
원래 상산현에는 상권(商圈)을 양분하고 있는 두 개의 역사가 제법 긴 상방이 있었는데, 바로 백건상방(白巾商幇)과 금호상방(金虎商幇)이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적가상방이 급속히 클 수 있었던 이유는 상산현에 억매이지 않고 근방에 있는 강산현(江山縣)이나 작은 화전민 마을과 같은 작은 상권을 상대로 장사를 했기 때문이었다.
적가상방이 공격적으로 상산현에 물건을 팔고 있는 건 아니었지만, 이렇게 급속히 커진 적가상방이 상산현에서 점점 영향력을 행사해 갈 것이라는 건 불을 보듯 뻔한 일.
그렇기 때문인지 백건상방은 적가상방을 겨냥하여 화살을 날렸다. 바로 상산현의 유일한 표국이자, 절강성에서도 제법 이름값이 나가는 풍운표국(風雲驃局)에게 더 이상 적가상방의 표물을 받지 말라고 종용한 것이다.
사실 풍운표국은 백건상방과 서로 사돈지간이었기에 이 요청의 기저에 깔린 의미가 무엇인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 후 풍운표국은 백건상방의 요청을 받아들여 적가상방의 표물을 거부하기 시작했다. 풍운표국에게 상행을 거의 전담시키고 있던 적가상방에게는 가히 치명타나 다름없었다.
궁지에 빠진 적가상방은 결국 풍운표국의 도움 없이 상행을 나설 수밖에 없었는데, 그들이 자체적으로 상행을 나서면 번번이 산적이 나타나 물건을 빼앗기고 심지어 사람마저 다치는 일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당연히 이것은 백건상방이 상행위에 대한 정보를 흘렸기 때문인 것이 뻔했다.
산적을 대비하여 낭인(浪人)을 고용해 보기도 했지만, 안타깝게도 산적들의 무위가 보통이 아니었다. 보호를 위해 고용한 낭인무사들이 오히려 몰살을 당하고 말았으니 말이다.
더 이상 방법이 없다고 판단한 적가상방은 관부의 도움을 받고자 했다.
그렇지만 관부는 강호의 일에 관부가 나설 수 없다는 궤변을 늘어놨다. 분명 이것은 강호의 일이 아닌, 단순한 상행위였는데도 말이다.
이렇게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난관을 어떻게 헤쳐 나갈 수 있을지 방법을 모색하기 위한 회의가 바로 오늘의 회의였다.
그런데 이런 중요한 회의에서 졸고 앉아 있는 풍백의 모습은 적호경이 난생 처음으로 풍백의 머리를 곰방대로 후려치게 만들고 말았다.
“표국을 만든다고? 표국을 만드는 것이 말 몇 마디로 할 수 있는 것이더냐? 돈을 떠나서 고수 한 사람도 없는 판국에 표국을 만들어야 한다니……. 넌 우리가 상방이 아니라 무가(武家)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더냐?”
적호경의 불호령을 듣는 풍백은 미친 듯이 뛰고 있던 심장이 점차 진정되고 있었다.
‘이것이…… 나의 가장 큰 회한이었던 것이구나…….’
풍백은 이것이 환상이라고 생각했다.
흔히 사람은 죽기 전에 자신의 지나온 모든 세월이 주마등(走馬燈)처럼 지나간다고 한다. 아마도 자신에게 바로 오늘이 가장 크게 후회를 했던 날이기에 마지막 숨을 거두기 전에 이런 환상을 보고 있는 것이리라 생각했다.
어차피 이 모든 것이 자신만의 환상일지 몰라도 적호경에게 다시 한번 실망의 눈길을 받고 싶지 않았다.
아니, 환상이었기에 더욱 대견해 하는 눈길을 받고 싶었다. 그렇게 하기 위해 마지막 숨을 거두기 전에 보는 환상일 테니까.
풍백은 차분히 입을 열었다.
“표국을 만들어야 한다고 했으나, 우리가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더냐?”
“우선 이것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버지와 여러 어르신께서는 관부에 뇌물을 바쳐셔라도 산적을 토벌해 달라 요청해야 한다 생각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풍백의 말에 적호경이 살짝 놀라 눈두덩이 추켜올렸다.
‘이 녀석…… 진짜 졸고 있던 것이 아니었나?’
방금 전까지 나온 회의에서 관부에 뇌물이라도 바치자는 제안이 나왔었다. 아직 확정은 아니었으나 모두가 머리를 끄덕였던 현실적인 제안이었다.
풍백은 고개를 저었다.
“절대로 그렇게 하시면 안 됩니다. 관부는 차일피일 시간을 미루고 온갖 변명을 대면서 시간을 끌기만 할 겁니다.”
“관부가 그렇게 나올지 어떻게 알고 그렇게 말하는 것이지?”
“확실합니다. 관부는 금호상방의 요청으로 움직이지 않고 있는 것이니까요.”
금호상방은 이곳 상산현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를 가지고 있고, 가장 대표적인 지역 유지 중 하나였다.
백건상방이 풍운표국과 사돈을 맺으며 금력(金力)과 무력(武力)을 손에 넣었다면, 금호상방은 관부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금력과 무력에 더해 권력(權力)까지 손에 넣고 있다고 할 수 있었다.
“금호상방?”
“그들이 관부를 막고 있다고?”
풍백의 말에 사람들이 눈살을 찌푸리고 서로를 보며 혹시 아는 것이 있는지 확인했다. 지금까지 백건상방만이 자신들을 치는 중이라 생각했는데, 여기서 생각지도 못한 금호상방의 이름이 튀어나왔으니 당연했다.
겉으로 나선 것은 백건상방일지 몰라도 금호상방 역시 적가상방이 위협이라 생각하고 있다는 말이다.
적호경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네가 그것을 어찌 안다고 그런 말을 하는 것이지? 설마 이 중대한 자리에서 거짓을 고했다가는…….”
“거짓말이 아닙니다. 소자(小子)가 자랑스럽지 못하게 살아오기는 했지만, 뒷골목 술자리에서만 들을 수 있는 얘기들도 있습니다.”
“으음…….”
적호경과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얼굴이 극히 심각해졌다. 만약 풍백의 말이 사실이라면…… 적가상방은 지금 손도 발도 움직이지 못할 판국이라는 말이었으니까.
평소 망나니처럼 살아오던 풍백의 말이었기에 완전히 신뢰하는 상황은 아니었다.
하지만 일단 풍백의 말이 일리는 있다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지금 관부에서 보이는 이해하지 못하는 행태가 금호상방 때문이라고 한다면 관부에서 협조적으로 나오지 않고 있는 이유가 설명되기 때문이다.
‘그러면 백건상방에 이권을 조금 넘겨주며 이 상황을 넘기는 방법을…….’
“그렇다고 백건상방과 협상을 하셔도 안 됩니다.”
풍백의 말에 적호경이 크게 움찔하며 그를 바라봤다. 풍백은 뭔가 묘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전혀 어울리지 않게도 그 묘한 눈에는 그리움, 애절함 등이 가득했다.
하지만 지금은 왜 이런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지 물어볼 상황이 아니었다. 지금은 먼저 풍백의 말을 들어야 했다.
“왜 협상하면 안 된다는 것이냐?”
“백건상방과 협상을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장은 풍운표국이 다시 표행을 나서고 상황은 조금 나아질지 몰라도, 점점 표행을 축소해 가며 적가상방을 말려 죽이려 할 겁니다.”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먼저 백건상방의 방주인 곽자억은 편협한 사람입니다. 자신의 것을 나누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 말에 적호경이 눈살을 잔뜩 찌푸렸다.
“네가 그를 언제 봤다고 그런 얘기를 하는 것이냐? 곽자억이 이득에 민감하기는 하나, 상산에서 그는 나름 대인(大人)으로 불리는 사람이다.”
“그건 장사를 하기 위해 자신을 감추는 것이지요. 고급 주점과 기루(妓樓)를 중심으로 물어보십시오. 그가 어떤 사람인지 전혀 다른 평을 들어 볼 수 있으실 겁니다.”
사실 주점과 기루에서 곽자억에 대한 험담을 쉽게 꺼내지는 못한다. 아무리 곽자억이 위선자라고 하더라도 그는 상산현의 유지 중 하나였으니까 말이다.
하나 어차피 지금 당장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그리고 실제로 곽자억이 편협한 사람이라는 것은 사실이기도 했다.
또한 이 모든 것은 과거에 적가상방이 실제로 행했던 것들이었다. 관부에 뇌물을 바치고, 백건상방에 이권을 넘겨줬었으나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어려워져 갔다.
“그러면…… 네 말대로 표국을 만드는 것만이 살길이라는 말이더냐?”
“그렇습니다.”
“어떻게? 말했다시피 표국을 세우려고 하더라도 방법이 없다. 표국을 세울 돈이라면 어떻게 마련할 수 있다고 하지만, 그 표국의 중심이 될 고수도 없고 무사들도 없어. 낭인 위주로 고용하여 표국을 만들어도 산적에게 위협이 될 수 없으니 결국 아무 소용없는 일이 아니더냐.”
“낭인으로 표국을 세우자는 말이 아닙니다. 말했듯이 우리 적가상방이 표국을 직접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면?”
“돈이 필요한 곳에 우리가 도와줄 테니 표국을 만들자고 해야지요.”
“돈이 필요한 곳이라…… 상산현에 그 정도 무위를 가지고 있는 산적들이 위협을 느낄 문파는 없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