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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가상방 개망나니-1화 (1/313)

적가상방 개망나니 1화

쏴아아아!

세상을 씻어 내릴 것처럼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그렇게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무릎을 꿇은 상태로 가만히 앉아 있었다.

이렇게 쏟아지는 비를 온몸으로 받고 있는 중인데도 빗방울의 감촉은 잘 느껴지지도 않았다. 지금 이 모든 것이 꿈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내 시선에 보이는 것은 온통 시신이었다. 지금까지 죽어라 나를 쫓아오던 적들의 시신이었다.

그렇다고 이들이 습격에 실패했다는 말은 아니었다. 적들은 전멸했어도 그들이 목표했던 일은 완수했다.

결국 모든 대원이 목숨을 잃었고, 아직까지 숨을 쉬고 있는 것은 나 하나였으니까.

그리고 나 역시 곧 숨이 멎게 될 것이다.

“씨익…… 씨익…….”

마지막 놈이 내 몸에 박아 넣은 검이 영 좋지 못한 곳을 건드린 것 같았다.

마치 노환으로 곧 숨이 넘어갈 노인이 마지막 내쉬는 것과 같은 숨소리가 나의 입을 통해 새어 나오고, 점점 숨 쉬는 것이 불편해지는 것을 보면 말이다.

‘이렇게 끝나는 건가?’

언젠가는 이런 결과를 맞이하게 될지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렇게 죽기에는 너무 궁금한 것들이 많았다. 어떻게 자신들을 찾았는지, 어떻게 우리가 모두 모이는 이 시기를 정확하게 알 수 있었는지…….

가장 먼저 떠오른 단어가 있었지만 애써 지워 버렸다. 설마 그럴 리는 없다고 생각하면서.

고개를 숙이니 바로 앞에 누워 있는 대장의 시신이 보였다. 무엇이 그리 원통한지 눈도 감지 못하고 죽어 있는 대장의 얼굴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굳어져 있었다.

“우리 모두 다시는 이렇게 살지 말자…….”

죽어 가는 대장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는 와중에도, 숨이 끊어지는 그 순간까지 다짐을 하듯이 그렇게 계속 말했었다.

사실 대장이 했던 말은 대원들과 자신이 간혹 나누던 말들이었다. 하지만 대장은 우리가 이런 대화를 나눌 때마다 호통을 쳤었다. 나약한 마음으로는 임무에 실패할 수 있다고 말하면서.

하지만 대장 역시 우리와 같은 마음이었던 것이다.

‘우리라고 이렇게 살고 싶었던 건 아니지 않소? 다들 이유가 있어서 이러고 있던 것이지…….’

억울하지는 않았다. 그저 안타까웠다.

이번 임무는 자살과 같다고 생각할 정도로 어려운 임무였다. 어쩌면 이번이 마지막 임무였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두두두두두!

소리가 들리기 전에 먼저 지면이 울려서 알 수 있었다. 제법 멀리서 수백의 말들이 달려오는 소리였다.

마지막 남은 자신의 목숨을 끊어 놓기 위해 달려오는 적들이었다.

으득!

이를 악물고 검을 지팡이 삼아 일어나려고 했다. 그렇지만 지금 내 몸의 상태는 그것조차 버틸 수 없었던 모양이다.

탱!

지팡이 삼으려던 검이 손에서 미끄러지듯이 튕겨 나갔다.

나는 멍하니 바닥을 굴러다니는 검을 보며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너무…… 피를 많이 흘렸어…….’

지금도 구멍 난 가슴에서 굵은 핏줄기가 끊임없이 흐르고 있었다. 이제 곧 숨이 끊어질 거라는 것을 모를 수 없을 정도였다.

이 정도라면 설령 일어섰다고 하더라도 검을 휘두르지도 못했을 것이다.

‘안타깝구나. 적어도 한 놈은 저승으로 같이 데리고 갈 생각이었는데…….’

어느새 적들이 눈에 보일 정도로 다가와 있었다. 아직 거리가 수백여 장은 떨어져 있지만, 말을 타고 있으니 곧 순식간에 다가올 것이다.

‘그냥 가기는 억울하니, 가기 전에 이것을 처분하기는 해야지.’

품에서 임무였던 그것을 꺼냈다.

이것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겉으로 봤을 때는 그저 몇 장의 부적처럼 생겼을 뿐이었다.

설마 겨우 부적일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정말 부적일 뿐이라면 그렇게 신줏단지 모시듯이 온갖 고수들을 배치해서 지키고 있었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화르륵!

화섭자(火攝子)를 꺼내 부적에 불을 붙이자, 순식간에 불길이 부적 전체를 집어삼켰다.

‘잘 타네.’

점점 흐려지기 시작한 눈에 부적이 타오르며 허공에서 산산이 부서져가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흐릿한 시선에는 타오르는 부적에서 피어오른 흐릿한 연기가 기묘한 움직임으로 자신을 휘감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아마도 이건 나의 착각일 것이다.

눈꺼풀이 더 이상 들 수 없을 정도로 무겁게 느껴졌다.

마지막이었다.

나는 더 이상 감기는 눈꺼풀에 대해 저항하기를 포기하기로 했다.

마지막 순간이라는 걸 직감했기 때문일까.

문득 언젠가 동료들과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언젠가 동료 하나가 내게 물었다.

“단 한 번! 딱 단 한 번만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언제로 돌아가고 싶냐?”

굳이 논할 필요도 없고, 논한다고 하더라도 나중에는 허무함밖에 남지 않는, 쓸데없이 기력만 낭비한다고 할 정도로 의미가 없는 질문이었다.

하지만 생사의 고비를 넘는 와중에 긴장감을 풀기 위해서라도 이런 화두는 온갖 이야깃거리를 꺼내도록 만들었다.

실제로 점점 열을 내며 얘기하는 동료들의 모습을 보면 웃음밖에 나오지 않기도 했다.

이 질문은 동료들 사이를 돌고 돌아 결국 나에게까지 돌아왔다.

“너는 어때? 언제로 돌아가고 싶어?”

동료들 중에서는 한참을 고민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나는 깊게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스물두 살, 여름 즈음.”

그때 처음으로 아버지가 운영하던 상방(商幇)의 회의에 들어갔었다.

그리고 아버지가 나에게 깊은 실망을 하셨다. 얼굴에 실망감을 숨기지도 못할 정도로.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그런 결정을 하면 안 된다고 말하고, 이 아들이 그저 놀기만 좋아하는 놈팡이가 아니라는 걸 보여 줄 수 있을 텐데…….’

정신이 아득해지며 어쩌면…… 영원할지도 모르는 어둠에 잠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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