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1화
K리그 팀이 아시아 무대에서 대단히 큰 선전을 하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하지만 클럽월드컵 같은 세계 무대에서는 그리 뛰어난 활약을 보이는 경우는 드물었다.
2009년 포항과 2010년 성남이 각각 3위와 4위를 기록한 이후, 그 이상의 성적을 낸 클럽은 없었다.
어떻게 보면 자존심 상할 일이기도 했다.
아시아 최강이라 일컬어지는 K리그 팀이 세계 무대만 나가면 나약한 모습을 보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번 대회는 달랐다.
고양이 아메리카FC를 3:0으로 꺾으면서 4강 진출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무려 18년 만에 K리그 클럽이 4강 무대를 밟았다.
“4강은 남미 챔피언인 리버플레이트입니다. 결코 쉽지 않은 상대지만, 꺾기만 한다면 K리그 최초로 클럽월드컵 결승 무대에 진출합니다.”
“상당히 기대되는 일이지만, 김칫국 마실 필요는 없죠. 지금은 기록보다 최선을 다할 필요가 있습니다.”
“회장님 말씀이 맞습니다.”
고양 유나이티드의 다음 상대는 남미 챔피언 리버플레이트.
아르헨티나의 전통 있는 명문 클럽이다.
“쉽지 않습니다.”
“그렇습니까?”
4강전을 준비하는 곽찬구 감독은 상대 수준을 인정했다.
“전, 현직 아르헨티나 대표팀 출신 선수들이 대거 포진되어 있습니다. 아메리카FC도 다수의 멕시코 국가대표 출신 선수들이 포진되어 있었지만, 리버플레이트는 수준 자체가 다릅니다.”
“하긴.”
마라도나와 리오넬 메시를 배출한 나라다. 그런 나라의 명문 클럽이 쉬운 상대일 리가 없다.
조금은 고민이 되는 상황인데, 의외의 조력자가 등장했다.
“반갑습니다. 회장님.”
“어? 이태수 코치? 여기는 어쩐 일이십니까?”
“조만간 있을 U20 대회 때문에 관전 좀 하려고 왔습니다.”
“오?”
“우리와 같은 조에 아르헨티나가 있거든요.”
“아!”
이태수 코치는 전력 분석을 이유로 일본까지 방문했다고 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이번 리버플레이트에는 아르헨티나 U20 대표팀에 차출되는 선수가 있다고 했다.
“제가 조금은 도움을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오, 그렇습니까?”
이태수는 자신이 분석한 리버플레이트에 대한 자료를 곽찬구 감독에게 공유해주었다.
곽찬구 감독은 이태수 코치의 실력을 진즉에 인정하고 있었던 터라, 기쁜 마음으로 공유받았다.
“고마워. 나중에 보답하지.”
“예. 부디, 승리하시길.”
훗날, U20월드컵에서 아르헨티나에게 대승을 거둔 이태수의 자료가 이렇게 쓰이게 되었다.
* * *
“여기가 일본이구나.”
리버플레이트의 말단 코치 출신인 사무엘은 팀을 응원하기 위해 일본까지 방문했다.
“예전에 료토에게 들은 적이 있었지만, 실제로 방문하는 것은 처음이야.”
사무엘은 과거 스페인리그에서 뛰었던 적이 있었다. 그때 함께 뛰었던 동료 중에 일본인 동료가 있었다.
“그나저나 다음 경기가 한국 클럽하고 붙는다고 했지? 고양이라던가.”
사무엘에게는 조금 생소한 팀이었다.
사무엘뿐만이 아니었다.
리버플레이트의 관계자들에게 있어 고양 유나이티드는 낯선 팀이었다.
“몇 달 전에 맨체스터시티와 맞붙었던 팀이라는 것 정도만 알뿐. 그래봤자, 우리를 이기기는 어려울 거야.”
사무엘은 자신의 팀이 질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리버플레이트는 아르헨티나를 넘어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명문 클럽이었으니까.
아무리 상대가 아시아 챔피언 팀이라고 해도, 리버플레이트를 꺾을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리버플레이트 0:1 고양 유나이티드】
“뭐, 뭐야?”
경기장 돌아가는 상황이 심상치가 않다.
멀리 일본까지 따라온 소수의 리버플레이트 팬들은 물론이고, 벤치에서 대기하고 있던 코칭스태프들 모두 충격받고 있었다.
팡!
호프만의 날카로운 패스 한 번에 리버플레이트의 수비가 붕괴됐다.
뛰어 들어가는 박형우를 그 어떤 선수도 막지 못했다.
“위험……!”
팡!
골키퍼의 선방이 아니었다면, 리버플레이트는 또 한 번 실점할 뻔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관중석에서 경기를 지켜보고 있던 사무엘은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런 그의 시야에 문득 한 남자가 들어왔다.
그 남자는 바로 이태수였다.
시종일관 여유로운 자세로 경기를 관람하던 그는 종종 무언가 메모를 하고 있었다.
사무엘은 본능적으로 그가 자신과 같은 업계인이라는 것을 눈치챘다.
그러다가 생각보다 낯이 익었다.
“아!”
일전에 U17 월드컵에서 본 적이 있던 인물이었다.
티아고 감독이 이끄는 연령별 대표팀에서 코치를 하면서 마주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조사하러 온 건가?”
의문은 여기까지였다.
지금 그에게 있어 이태수보다 리버플레이트의 상황이 중요했으니까.
“제기랄. 잘 좀 해보라고!”
어쩌면 두 사람의 인연은 이때부터 시작됐을지도 몰랐다.
* * *
고양 유나이티드가 아메리카FC를 격파했을 때만 해도, 운이 좋았다는 이야기들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 리버플레이트와의 경기는 상황이 달랐다.
“어려울 것 같다더니. 의외로 우리가 더 밀어붙이는데요?”
“아무래도 이태수 코치가 준 정보가 꽤 큰 힘이 된 것 같습니다.”
“흐음.”
우리 팀이 4강에 진출한 이후 나는 서둘러 일본까지 왔다.
원래 다른 일정들이 있었지만, 팀이 4강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다른 일정들을 모두 미루고 일본으로 넘어와서 지금 리버플레이트와의 4강전 경기를 지켜보고 있었다.
“선수들이 잘해주고 있어서 뿌듯하군요.”
나는 예상과 다른 전개에 조금은 편하게 경기를 지켜볼 수 있었다.
* * *
준결승전은 모두의 예상을 뒤집고 우세한 경기력을 선보인 고양이 승리를 거머쥐었다.
물론 중간에 위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전반전에 호프만의 득점으로 1:0으로 앞서나갔다가, 후반전 이른 시간에 실점하며 1:1이 되었다.
위기일 수도 있는 상황에서, 오늘 경기의 주인공이 나타났다.
바로 호프만이었다.
선제골의 주인공이기도 했던 호프만은 이 경기에서 2골을 더 터트리면서 해트트릭을 달성했다.
그 결과 고양은 3:1로 리버플레이트를 꺾을 수 있었다.
그렇게 고양은 K리그 역사상 최초로 클럽월드컵 결승전에 오르게 되었다.
클럽월드컵 결승전의 상대는 바로 ‘맨체스터시티’였다.
세계적인 명장 콘라드와 월드클래스 강철인이 버티고 있는 맨체스터시티는, 준결승전에서 만난 가와사키를 무려 5:2로 꺾고 결승에 올라왔다.
J리그 우승팀 자격으로 출전한 가와사키는 준결승전까지 올라갔지만, 아쉽게 3, 4위전으로 가야만 했다.
“강철인이 해트트릭했다는데요?”
“미쳤다. 요즘 강철인이 골맛 보더니 득점 기계가 됐어.”
주로 골보다 도움 위주로 스탯을 쌓아가며 팀에 대단한 영향력을 끼치던 강철인은, 지난 시즌 도움왕을 달성한 뒤 이후 득점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콘라드 감독은 강철인을 아예 주요 득점 테마로 잡고 활용했다.
그 결과 현재 강철인은 이번 시즌 프리미어리그 득점 1위를 기록하고 있었다.
이어 클럽월드컵에서도 해트트릭을 기록하는 저력을 보이며 팀을 결승전으로 이끌었다.
“강철인의 무서운 점은 슈팅 대비 득점이 상당히 높다는 점이죠. 시즌 총 슈팅 숫자가 48번인데, 이 중에 득점이 24가 나왔습니다. 2번 때리면 1번은 들어간다는 거죠.”
“무섭네. 진짜.”
코칭스태프 회의를 진행하던 곽찬구 감독은 소름 돋는 강철인의 기록에 몸을 떨었다.
“강철인을 막는다고 해서 끝이 아닙니다. 호드리고, 오데사, 라비 이런 선수들도 건재합니다.”
“하, 산 넘어 산이구만.”
“아메리카FC나 리버플레이트는 생각보다 조직력이 단단한 팀은 아니었죠. 그 점을 노려 우리가 기회를 잡고 오히려 큰 선방을 날렸지만, 맨시티의 조직력은 우리보다 훨씬 앞섭니다.”
“끙.”
역사적인 첫 결승 무대이기는 했지만, 그 기쁨도 오래가지 못했다.
결승전에 마주한 상대는 훨씬 더 무서운 존재였으니 말이다.
“정말 고민이구만.”
그들의 밤은 길었다.
* * *
일본에 있어도 나의 할 일은 끊임없이 있었다.
“이곳입니다.”
“오, 사진으로만 봤는데, 여기였군요.”
도쿄에 있는 영신전자 일본지사에 방문했다.
일전에 동남아시아 쪽 지사를 방문한 이후, 다른 국가에 있는 지사를 방문하는 일은 두 번째였다.
신임 회장의 방문 소식에 일본 지사가 뒤집혔다.
“어서 오십시오! 회장님!”
지사에 있는 거의 모든 이들이 문 앞에 나와 나를 정중하게 맞이했다.
조금은 부담이 될 정도였지만, 나는 아무렇지 않게 반응했다.
“반갑습니다. 지태훈 회장입니다.”
“앗! 회장님! 저는 영신전자 도쿄 지부 지사장 이관우라고 합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아, 반가워요.”
나이는 나보다 한참이 많은 아저씨였지만, 그는 나를 깍듯하게 대했다.
박준후 팀장이 내게 귓속말로 속삭였다.
“일본에도 회장님의 소식이 모두 전해진 상태입니다.”
“아, 그렇군요.”
그럼 이렇게 과할 정도의 반응이 이해가 간다.
현재 한국 본사는 내가 취임한 이후 완벽하게 내부 물갈이가 된 상태였다.
과거 지태완의 사람들은 모두 쫓겨나거나 좌천됐고, 빈자리에는 새로운 인물들이 배정되었다.
이러한 본사의 소식을 전해 들은 일본 지사는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괜히 밉보였다가 정리대상이 될 수도 있었으니까.
이관우는 과도할 정도로 나에게 충성심을 드러냈다.
“회장님이 오신다는 이야기를 듣고 여러 가지 준비했습니다! 우선…….”
“됐고, 일본 지사 실적 브리핑을 좀 듣고 싶군요. 제가 미리 보고 받은 내용들이 있기는 한데, 직접 듣고 싶어서 말이죠.”
“아, 넵! 그럼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브리핑하라는 말에 이관우를 비롯한 일본 지사 관계자들이 모두 긴장했다.
그들은 내 앞에서 준비한 브리핑을 선보였다.
브리핑을 모두 들은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휴.”
한숨을 쉬는 내 모습에 모두가 침을 삼키고 긴장했다.
“이 상태로 가면 위험하겠군요.”
“……!”
“일본의 가전제품은 영신과 미국 기업 간의 싸움으로 이어 간 지 오랩니다. 특히 스마트폰은 영신전자와 미국 기업인 에이플의 자존심 대결로 굳어졌죠.”
“…….”
“에이플이 일본 내에 점유율을 조금씩 늘리고 있는 동안, 우리는 그간 뭐 했는지 모르겠군요.”
내 질타에 이관우의 얼굴에는 먹구름이 잔뜩 드리워졌다.
“그간 수고 많이 해주신 것은 압니다만, 누군가는 이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겁니다. 아시겠습니까?”
“……넵.”
이관우는 입술을 깨물었다.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그에게 나는 가볍게 웃어 보이며 말했다.
“그렇다고 바로 책임을 묻겠다는 것은 아닙니다. 마지막 기회를 드리죠.”
“……저, 정말입니까!?”
“기한은 내년 상반기까지. 올해와 상반기 결과가 다를 게 없다면, 우리 지사장님께서 그 책임을 지셔야 할 겁니다.”
“……!”
두 눈을 동그랗게 뜨는 이관우를 뒤로 한 채, 나는 모두에게 들으라는 듯 큰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영신은 누구에게나 기회가 열려 있습니다. 자신의 재능을 마음껏 드러내 보세요. 그렇게 한다면 그에 대한 대가는 반드시 지급하겠습니다. 회장의 이름을 걸고!”
“……!”
그렇게 일본 지사에도 한바탕 폭풍이 몰아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