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2화
“내가 잘했을까?”
“잘했어요. 너무 걱정 말아요.”
김진철 이사와 만나고 나는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아빠가 자고 가라고 얘기할 줄은 몰랐어요.”
“조금 놀랐어.”
술을 먹어서 그럴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어서일까?
김진철 이사는 굳이 오늘 가지 말고 자고 가라고 했다.
덕분에 나는 김 비서의 방에 들어와 있었다.
“조금 부끄럽네요.”
“크흠.”
김 비서의 방에 이렇게 단둘이만 있는 일은 처음인 것 같다.
게다가 자고 간다는 생각에 묘하게 두근거렸다.
이미 서로 많은 것을 겪었지만, 우리는 묘한 두근거림을 숨길 수 없었다.
“유리야.”
침대에 걸터앉은 나는 그녀를 가볍게 끌어안았다.
“응큼해.”
“그만큼 네가 매력적이라서 그래.”
그녀의 몸에서 나는 기분 좋은 향기가 내 코를 자극했다.
“유리야.”
“태훈 씨.”
우리는 묘한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술을 맞대기 시작했다.
벌컥.
“이봐, 나하고 같이 산…… 크흠.”
“자, 장인어른.”
키스하려다가 갑자기 문을 열고 들어온 김진철 이사 때문에 화들짝 놀랐다.
김진철 이사도 상황을 파악하고 이내 어색하게 헛기침을 하고 말했다.
“산책이라도 갈까 싶었는데, 내가 눈치가 없었군.”
“아, 저, 가시죠! 산책!”
나는 당장 이 어색함을 풀기 위해 김진철 이사의 팔을 붙잡고 어색하게 웃으며 밖으로 이끌었다.
홀로 남은 김 비서가 작게 웃음을 흘렸다.
* * *
김진철 이사와 단둘이 동네 주변을 뚜벅뚜벅 걸었다.
한동안 말이 없이 조용히 걷기만 했다.
조금은 지루해지려는 찰나, 김진철 이사가 말했다.
“저 귀찮은 녀석들은 네가 데려온 거냐?”
“음?”
“저기 봐라.”
김진철이 턱짓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그러자 그곳에는 몸을 일부 숨기고 있는 경호원들이 보였다.
“아무래도 박 팀장님이 지시한 것 같네요.”
“참 애지중지하는군.”
김진철 이사가 비웃는 것처럼 보여도, 나는 비웃는 것 같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박준후 팀장은 평소에도 내 경호에 엄청 신경을 쓴다.
내가 굳이 말하지 않더라도 알아서 이동 경로를 파악해서 경호원들을 배치한다.
내가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냐고 물으면, 박준후 팀장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회장으로서 자각을 하시라고.
그 말에 나는 뭐라 할 말이 없었다.
몇 번 살해 위협을 받을 뻔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박준후 팀장은 더욱 나를 신경 썼다.
“박 팀장님은 제 경호를 맡아주는 책임자니까요.”
“여기는 내 영역이다. 설령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있는데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
아무래도 김진철 이사는 다른 이유로 불만인 모양인 것 같았다.
“됐다. 어차피 회장이란 자리가 그러한 거니까. 이 이상 이야기는 불필요하겠지.”
그렇게 그는 이 이상 경호에 관한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얼마를 더 걸어가니 한적한 공원이 나왔다.
공원에는 있는 작은 놀이터에는 아이들이 웃으면서 뛰어놀고 있었다.
우리는 그 모습을 잠시나마 우두커니 서서 지켜보았다.
“지태훈.”
“네.”
“네가 아까 나한테 말했지? 상생하겠다고.”
“예.”
“그 말, 반드시 지켜라.”
“네.”
그는 뛰어놀고 있는 아이들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뛰어놀고 있는 저 아이들 중에 누군가는 동료가 될 수도 있고 누군가는 너에게 칼침을 놓을 수도 있겠지.”
“저, 이사님. 그건 좀 냉혹한 이야기가 아닌가요.”
“이 아이들이 어떤 미래를 가지게 될지 아무도 모르지 않나. 그게 세상 사는 이치야.”
“…….”
“네가 아까 했던 그 말은, 굉장히 오만하고 황당한 말이야. 하지만 누군가를 이끌어야 하는 사람에게는 필요하지.”
김진철은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았다.
“기대하겠다. 네가 펼칠 세상을.”
“……!”
“그리고 내 딸을 잘 부탁한다.”
* * *
ACL 결승 2차전을 앞두고 고양 유나이티드 선수단은 상당한 결의를 각오하고 있었다.
“방심하다가 나락간다.”
1차전에서 상대가 생각보다 기대 이상의 플레이를 보여주었다. 그로 인해 당황했던 고양은 2차전에서는 정신적으로 중무장이 된 상태였다.
“상대도 우승컵을 노리기 때문에 모든 전력을 쏟아붓는 일은 당연하지. 하지만 우리가 방심만 하지 않는다면 충분히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을 거라고 본다.”
곽찬구 감독도 선수들에게 방심하지 말 것을 주문하면서, 코치진들과 상의해서 전술을 좀 더 세밀하게 조정했다.
이 과정에서 로치오 단장도 선수단이 원활하게 훈련할 수 있도록 옆에서 모든 힘을 다해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1차전에서 뛴 선수들의 모든 패턴이 담긴 문서입니다.”
“감사합니다. 단장님.”
로치오 단장의 능력으로 연결된 정보센터들에게서 받은 정보로 선수들을 면밀하게 분석해서, 선수 개개인에게 알맞은 방식으로 훈련을 진행했다.
그런 와중에 영상 하나가 고양 유나이티드 공식 계정에 업로드되었다.
뚜벅뚜벅.
누군가가 어두운 복도를 따라 천천히 걸어 나갔다. 카메라가 그의 뒷모습을 따라가며 담았다.
그렇게 걸어가던 그의 앞에 우승트로피들이 놓여 있는 장식장이 있었다.
그 장식장 위로 사진 하나가 크게 걸려 있었다.
사진 속에는 우승 메달을 목에 건 김지우가 환한 얼굴로 우승 트로피를 번쩍 들어 올리고 있었다.
그런 그를 중심으로 동료들이 환하게 웃으며 환호하고 있었고, 그들 사이로 폭죽이 터졌다.
그 사진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김지우’.
그는 다시 천천히 어딘가로 걸어갔다.
그렇게 길을 따라 걸어가니 저 앞에 밝은 빛이 보였다.
빛이 나는 곳으로 걸어가자 곧 거대한 경기장의 모습이 나타났다.
바로 고양 유나이티드의 홈, 고양 더블은행파크였다.
그는 관중석 앞 난간을 가볍게 붙잡았다.
그리고 곧 영상에서는 그가 뛴 경기를 보여주기 시작했다.
-김지우, 때리는데요! 들어갔어요!
-팀이 어려운 순간! 주장이 해냅니다!
-이게 바로 김지우죠!
-고양의 캡틴 김지우, 그가 계속해서 기록을 만들어 갑니다!
짧은 영상이 끝나고, 작게 웃는 김지우의 얼굴이 화면에 잡혔다.
그리고 곧 그의 시선이 골대 뒤쪽 서포터스 좌석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김지우의 사진이 담긴 거대한 현수막이 펄럭이고 있었다.
그걸 본 김지우가 주먹을 꽉 쥐었다. 곧 웅장한 음악과 함께 김지우의 나레이션이 흘러나왔다.
“아직 1경기 남았다.”
『AFC챔피언스리그 2차전, 고양 유나이티드 VS 알두하일』
┖영상 ㅅㅌㅊ
┖비장함이 느껴지네.
┖꼭 이겨라. 진짜. 이거 지면 안 된다.
┖아ㅠㅠㅠ 우리 캡틴 이제 한 경기 남았다니 ㅠㅠㅠ
┖우리 캡틴 지우를 위해서라도 꼭 이겨야 한다.
┖왠지 김지우가 결승골 넣을 것 같은 기분 듦.
경기 예고 영상을 본 팬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대부분 승리를 바라고 있었다.
여기에 시기에 맞춰 기사까지 업로드되었다.
【ACL프리뷰】최초 트로피 노리는 양 팀, 누가 왕좌의 주인공에 올라설까?
『카타르 명문 알두하일과 최근 K리그에서 급격한 성장을 이룬 고양 유나이티드가 아시아 왕좌를 차지할 수 있는 마지막 한 경기만을 남겨두고 있다.
지난 1차전에서 이 두 팀은 2:2 무승부를 기록했다. 원정 다득점이 존재하던 과거였다면 고양 유나이티드가 상당히 유리한 고지를 밟았다고 봐도 무방하지만, 원정 다득점이 사라진 현재에서 아직 두 팀 모두 누가 우위에 섰다고 말할 수 없다.
고양 유나이티드는 이번 경기에서 반드시 승리를 거두어야 한다.
지태훈 영신그룹 신임회장이 구단주로 부임한 이후 상상을 초월하는 투자로 고양은 약 4년 만에 아시아 정상에 오를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 이 기회를 결코 놓칠 수 없다.
고양은 충분히 2차전에서 반전을 노릴 수 있는 팀이다.
고양은 이번 시즌 홈에서 무패행진을 달리고 있는데, 그 이유에는 막강한 공격력이 있다.
원정에서 경기당 평균 2.1의 파괴력을 보여줬다면, 홈에서는 무려 3.08골로 상대를 괴멸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특히 지난 4강 2차전에서 J리그 우승팀인 가와사키를 4:1로 대파했다. 원정에서 가까스로 1:0 승리를 거둔 것과 비교하면 대조적이다.
알두하일도 이 부분을 알고 있는 것 같다.
크레스만 감독은 “고양의 공격력은 아시아 최고 수준이며, 우리는 상대의 공격을 잘 막고 기회를 만들어 나갈 것이다.”라고 현지 인터뷰를 통해 밝히기도 했다.
이제 두 팀의 운명은 얼마 남지 않았다. 과연 어떤 팀이 우승을 차지할 수 있을지 지켜봐야 할 것이다.』
* * *
결승 2차전을 앞두고 나는 석정원 회장하고 만났다.
“남은 경기는 잘 준비하고 있나?”
“네. 사활을 걸고 하고 있죠.”
“자네가 고생이 많네.”
“고생은요. 다 저희 선수들과 프런트들이 고생하고 있죠.”
석정원 회장이 가볍게 미소를 머금었다.
“그건 그렇고 이야기는 들었네. 김진철 이사의 딸하고 결혼한다고?”
“네. 그렇게 됐습니다.”
“음. 축하하네. 잘 됐구만. 솔직히 마땅한 배필이 없으면 내 딸아이를 붙여주고 싶었지만, 이미 처음부터 임자가 정해져 있으니 노려볼 수도 없었지.”
아쉬워하는 석정원 회장의 반응에 나는 멋쩍은 표정을 드러냈다.
“그나저나 저번에 전화로만 이야기해서 마음에 걸렸는데…… 곽찬구 감독은 어떻게 하기로 했나?”
“음.”
곽찬구 감독과 관련된 이야기에 나는 입가를 씰룩이다가 천천히 대답했다.
“대승적인 차원에서 보내주는 것으로 합의했습니다. 최근에 협회에서 공식적으로 제안이 들어오기도 했고요.”
“그랬군.”
“대외적인 발표는 아시아챔피언스리그 결승 2차전 이후가 될 겁니다.”
석정원 회장은 내 반응을 슬쩍 살폈다가 말했다.
“자네 기분은 어떤가?”
내 기분이라…….
“글쎄요. 잘 됐으면서도 아쉬운 상황이죠. 저희 팀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데 크나큰 공을 세운 사람이니까요.”
“그렇지. 허나, 사람의 인연이라는 것이 꼭 붙잡는다고 다가 아닐세. 멀리 떠나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좋은 대우를 받고 성장해서 떠난다는 것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내 말에 석정원 회장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더니 곧 허허롭게 웃었다.
“자네는 이제 정말 회장이 다 되었구만.”
“아직 정식 취임도 안 했습니다만.”
“허허허.”
왠지 전에도 비슷한 이야기를 누구한테서 들은 것 같단 말이지.
그때였다.
석정원 회장의 스마트폰이 울렸다.
“여보세요.”
전화를 받은 석정원 회장의 얼굴이 갑자기 일그러졌다.
“정말이야? 어, 그래. 알겠어.”
통화를 끝낸 그를 어리둥절한 시선으로 쳐다봤다.
그가 곧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천산그룹의 백우진 명예회장이 방금 돌아가셨다고 하네.”
“……!”
나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 * *
나는 남은 일정을 취소하고 곧장 서울의 어느 병원으로 향했다.
그곳 장례식장에 도착하자 이미 대기하고 있던 수백 명의 기자들이 나를 발견하고 몰려들었다.
박준후 팀장과 경호팀의 도움으로 무사히 장례식장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그곳에는 망연자실한 얼굴로 상주로 서 있는 백태현을 볼 수 있었다.
“태현아!”
“……태훈?”
그는 놀란 얼굴을 하고 나를 쳐다보았다. 주변을 보아하니 내가 제일 먼저 온 것 같았다.
“괜찮냐?”
그 말에 백태현이 말없이 내 품에 안겼다.
그는 곧 내 품 안에서 말없이 울었다. 그런 그를 한동안 조용히 받아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