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1화
한국에 돌아온 뒤, 나는 여전히 업무로 바빴다.
하지만 다가올 결전의 날을 위한 준비도 함께 이루어졌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고 나는 굳은 각오를 지니고 김진철 이사 집으로 향했다.
“후우.”
“너무 긴장하지 마세요.”
“긴장이 안 되는 게 이상하지 않나. 나, 괜찮아 보여?”
“네. 늘 멋있어요.”
“……고마워.”
김 비서, 아니, 김유리의 손을 잡고 함께 예비 장인어른의 집에 도착한 나는 들어가기 전에 한 번 더 점검하고 들어갔다.
집에 들어간 나는 힘차게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호호. 어서와요. 어서와.”
김 비서의 어머니이자 예비 장모님이신 박지연 여사님께서 나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런 그녀 옆에는 김 비서의 동생 김예리가 있었다.
“형부. 어서 와요.”
“바, 방금 뭐라고 했어?”
“네?”
“아니, 지금 나한테 뭐라고 했어?”
“형부요?”
“크으.”
김예리.
그녀는 분명 좋은 사람이다.
역시 김유리의 동생답다고 해야 할까?
조금은 기분 좋아지려는 찰나, 어디선가 강렬한 기운이 느껴졌다.
강렬한 기운이 느껴지는 곳으로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김진철 이사가 무시무시한 기세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오시오. 지태훈 회장.”
평소에 애송이라고 부르던 태도와 달리 나에게 존댓말을 하는 김진철 이사였다.
근데 이 존대가 왜 이렇게 무섭게 느껴질까?
나는 어떻게든 침착함을 유지하며 김진철에게 인사했다.
“장인어른, 안녕하십니까?”
“장인어른?”
순간 우리 사이에 싸늘한 분위기가 몰아쳤다.
여기가 순간 북극이나 남극인 줄 알았다.
“나는 아직 회장님에게 그런 호칭을 허락한 적이 없습니다만?”
그 말에 나는 무릎을 꿇고 외쳤다.
“장인어른! 유리, 아니, 따님과 결혼하고 싶습니다! 허락해주세요!”
어떻게 보면 막무가내로 보일 수 있었다.
하지만 여태까지 내가 봐왔던 김진철 이사의 성향을 봤을 때, 오히려 정면돌파가 해답일 수 있었다.
“호오.”
김진철 이사가 나를 보고 눈을 빛냈다.
그러다 곧 그는 팔짱을 끼며 가소로운 표정을 드러내며 말했다.
“이 결혼, 반대한다면 어떻게 할 겁니까?”
“반대해도 진행할 겁니다. 회장의 힘을 이용해서라도요.”
“그건 나와 붙어보겠다는 뜻입니까?”
“아니요. 그건 어디까지나 최후의 상황인 거고, 저는 장인어른으로부터 인정받아서 당당하게 유리와 결혼하고 싶습니다.”
김진철 이사가 나를 쳐다봤다.
마치 맹수와 같은 눈동자를 한 그는 보이지 않는 힘으로 나를 짓누르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눈을 피하라고 본능이 외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피하면 모든 게 끝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절대 피하지 않고 당당하게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
“제법이군.”
시선을 피하지 않는 내 모습에 그가 그렇게 말했다.
“영신그룹 지태훈 차기 신임회장.”
“예.”
“애송이가 많이 컸군.”
그는 피식 웃더니 곧 이 상황을 조용히 지켜보던 박 여사님에게 말했다.
“여보, 여기 술상 하나 내줘.”
“호호. 알았어요.”
곧 준비한 술상이 나와 김진철 이사 사이에 만들어졌다.
간단한 안주들 몇 개와 양이 제법 큰 술병 하나가 등장했다.
그는 술병을 쥐고 뚜껑을 열었다.
그러자 독한 향기가 내 코를 찌를 정도로 강렬하게 다가왔다.
“받아.”
그가 나에게 내민 술잔을 공손하게 받았다.
그는 술잔에 술을 가득 따라주었다.
“마셔.”
나는 그 자리에서 바로 술을 마셨다.
확실히 독한 술이다.
혓바닥과 목구멍이 얼얼할 정도다.
동시에 속에서 용암이 치솟는 것 같았다.
“받아.”
그는 또 술을 가득 따라주었다.
“마셔.”
뒷수습할 시간도 없이 나는 바로 술을 마셔야 했다.
그는 또 술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그렇게 나는 연속해서 3잔을 마시게 되었다.
안주도 없이, 중간에 어떠한 텀도 없이 연달아 3잔을 마시니 순간적으로 취기가 확 치고 올라왔다.
취기가 올라온 상태에서 김진철 이사가 내 앞으로 잔을 내밀었다.
“따라봐.”
나는 살짝 떨리는 손으로 그에게 술을 따랐다.
김진철 이사는 술을 쭉 마셨다.
“한잔 더.”
나는 바로 한잔 더 따랐다.
그러자 이번에도 김진철 이사는 바로 술을 마셨다.
“한잔 더.”
김진철 이사도 나처럼 똑같이 3잔을 연거푸 마셨다.
서로 안주도 없이 3잔을 마신 상황에서 김진철 이사가 말했다.
“버틸 수 있나?”
“이 정도는 별거 아닙니다.”
“흐음. 그래? 잘됐군.”
김진철이 씩 웃어 보였다.
“여기까지 왔다는 건 충분히 그만한 각오를 했을 터. 맞나?”
“그렇습니다.”
“좋아. 이 정도 기세는 가져야지.”
애초에 쉽지 않을 거라고 생각은 했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상황이 오든 나는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결혼하지 말라는 이야기만 제외하고.
“내가 네 아버지를 언제 만났는지 알고 있나?”
“이사님이 말단 사원일 때 만났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그래. 일전에 내가 이야기를 좀 했었지.”
김진철 이사는 영신그룹의 살아 있는 전설이었다.
돌아가신 아버지 못지않게 그룹 내에 상당한 명성을 가지고 있다.
그런 그와 아버지 사이는 거의 형제와 다름없을 정도로 끈끈한 관계를 유지했다.
“너희 아버지가 나를 처음 봤을 때 나보고 이런 이야기를 했었다.”
“……?”
“새끼 호랑이.”
왠지 어울리는 말이다.
지금보다 젊었던 그의 모습을 추측해 보면 충분히 그런 말이 나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회장님은 나한테 선택하라고 했어. 그저 덩치 큰 고양이가 될 건지, 아니면 제대로 된 호랑이가 될 건지. 선택하라고 말이야.”
“그랬군요.”
“그래서 그때 내 대답은 딱 하나였어.”
그는 빈 잔에 술을 따르며 말했다.
“나를 호랑이로 만들어 줄 수 있겠냐고.”
뭔가 김진철 이사다운 말이다.
말단 사원 중 회장에게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인물이 과연 얼마나 될까?
“회장님은 흔쾌히 말했지. 네가 원한다면 만들어 주겠다고. 하지만 혹독한 과정이 필요할 거라고.”
“…….”
“그렇게 회장님은 나를 일본으로 보내셨지. 그리고 그곳에서 나는 호랑이가 되는 과정을 밟았다.”
듣다 보니 문득 궁금한 부분이 생겼다.
“장인어른. 어째서 호랑이가 되시려고 했습니까?”
“살기 힘들었으니까.”
“네?”
의외의 답변이었다.
“그때가 20대 후반이었다. 한창 우리나라가 외환위기를 겪었던 시절이기도 했지. 집안이 몰락하고 죽음을 택하는 사람들이 수도 없이 나왔던 때였어. 그때 우리 집이라고 다를 것도 없었지.”
처음 듣는 김진철 이사의 과거였다. 그 누구도 알기 어려운 그의 젊은 시절 비화가 나오고 있었다.
“사업을 하셨던 아버지가 극단적인 선택을 했고, 아버지가 졌던 빚을 내가 모두 끌어안은 상태였다. 충격으로 몸져누운 어머니와 아직 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동생들이 있었어. 식구들까지 책임져야 하는 상황에서 나는 살기 위해 닥치는 대로 뭐든 했었다.”
“아빠.”
김유리와 김예리가 놀란 눈으로 김진철 이사를 쳐다보고 있었다.
돌아가는 상황을 보아하니 그녀들도 처음 듣는 이야기였던 것 같았다.
김진철에 대해선 다양한 소문들이 떠돌고 있었다.
과거에 조폭 또는 야쿠자 출신이었다든가, 특수부대 출신이었다든가 하는 그런 이야기들이 지금도 돌고 있었다.
하지만 무엇 하나 제대로 밝혀진 사실은 없었다.
그런데 지금까지 감춰졌던 과거를 본인에게 직접 듣게 된 것이다.
“그렇게 살기 위해 험한 일까지 손을 댔었어. 그러던 중에 알게 됐지. 아버지가 누구의 손에 죽게 됐는지.”
“…….”
“영신그룹.”
“……!”
“그 당시에는 영신전자였지. 아버지는 그들에게 물품을 공급하던 하청업체 공장주였지.”
그 말에 나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나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우리 영신그룹은 과거에 많은 죄를 지었다. 그 죄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고. 가장 큰 죄는 우리가 살기 위해 남을 죽였다는 거야.
-살인을 저지른 겁니까?
-살인이나 다름없지. 우리가 살기 위해 남을 죽이고 그들이 가진 모든 것을 빼앗았으니까.
순간 소름이 끼쳤다.
“말도 안 돼.”
충격적인 나와 달리 김진철 이사는 담담했다.
“영신전자는 아버지에게 지불해야 할 돈을 주지 않았어. 충분히 줄 수 있었는데도 말이야. 그래서 나는 복수하기로 결심했지.”
김진철 이사는 복수를 위해 영신전자에 입사했다.
마침 영신전자는 초대 회장이었던 지유환에서 아버지인 지종윤으로 경영권이 넘어가던 시기였다.
당시 후계자 교육을 받고 있던 지종윤과 말단 사원이었던 김진철의 만남은 그렇게 시작된 거였다.
“복수는 쉽지 않았어. 내가 입사할 때만 해도 영신전자는 엄청난 도약을 하고 있었던 시기였으니까.”
“…….”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 다 할 생각이었어. 그래서 내린 결론은 이 회사에서 최대한 높은 곳으로 올라가서 회사를 무너뜨리자고 생각했지.”
하지만 김진철은 높은 곳에 올라갔음에도 불구하고 회사를 무너뜨리지 않았다.
오히려 아버지를 돕고, 나를 도와 회사를 살렸다.
왜 그런 반전이 있었을까?
“네 아버지였던 지종윤 회장님은 나의 계획을 이미 눈치채고 있었어. 애초에 나를 채용하게 힘을 썼던 사람이 바로 회장님이었지.”
“어째서죠?”
자칫 위험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김진철 이사를 왜 뽑았을까?
“그건 지금도 의문이야. 하지만 회장님은 처음부터 나를 신뢰했고, 나의 능력을 의심하지 않았어.”
“…….”
“무엇보다 회장님은 모든 상황을 알고 나와 우리 가족에게 사죄했고, 그 죗값을 치르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런 말을 하는 김진철의 눈은 약간 슬퍼 보였다.
“나는 회장님을 용서했다. 그리고 회장님 같은 분과 함께 하면 더 좋은 일들을 많이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지.”
용서.
정말 쉽지 않은 선택이다.
하지만 김진철은 용서를 택했고, 더 나아가 용서한 상대를 파트너 삼아 더 높은 곳으로 도약했다.
정말 대단한 사람이다.
“지태훈.”
“네.”
“너에게 한 가지 묻겠다.”
“말씀하십시오.”
“너는 앞으로 어떤 사람이 되고 싶으냐.”
뼈가 있는 물음이었다.
그 누구도 쉽게 대답할 수 없는 물음.
어쩌면 인생의 철학이 담겨 있는 질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나의 대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어쩌면 이 대답을 하기 위해 지금까지 이토록 달려온 것이 아닐까?
“저는…….”
김진철 이사를 비롯해 모두가 나에게 집중하는 것이 느껴졌다.
“상생(相生)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상생?”
“예.”
회귀 전부터 회귀 이후까지 걸어온 나의 삶을 돌이켜봤을 때까지 나온 결론이었다.
“원치 않았던 서자의 삶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저질러진 일을 돌이킬 수는 없습니다. 서자의 삶을 피하고 싶어도 늦었죠.”
“…….”
“운이 좋아 기회를 부여받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리라 마음먹고 달려왔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정말 쉽지 않더군요.”
무늬만 있던 영신그룹 막내아들이란 타이틀이 때론 독으로 작용할 때도 있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쉬운 일 하나도 없었다.
때론 목숨도 걸어야 하는 상황이 올 때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게는 저와 상생하는 사람들이 존재했습니다. 그 안에는 유리도 있고, 장인어른도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 덕분에 저는 지금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고요.”
혼자서 왕좌를 차지할 수는 없다.
그것을 깨달은 나는 주변에 감사했다.
그랬기에 나는 나와 함께 하는 이들을 챙길 필요가 있었다.
“함께 살아갈 동료들과 상생하는 그런 사람이 될 겁니다.”
그 말을 끝으로 내 두 눈이 번뜩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