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5화
“오늘 꿈에서 아버지가 나왔어.”
“정말요? 회장님께서 뭐라 하셨나요?”
“응. 아버지가 우리에게 내려온 천사를 직접 선별해서 보냈다고 하더라고. 아이 잘 키우래. 나중에 큰일 할 거라고.”
내 말에 김 비서는 놀란 눈이 되었다.
믿어지지 않겠지.
나 같아도 쉽게 믿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믿을 수밖에 없었다.
꿈도 생생했지만, 무엇보다 아버지가 마지막에 했던 말이 걸렸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왔다는 그 말.
돌아가신 아버지는 내가 회귀했다는 것을 알고 계신 모양이었다.
평생 비밀로 안고 갈 내용을 꿈에서 아버지를 통해 듣게 되니 놀라웠다.
물론 이 꿈이 그저 내 의식을 반영한 결과일 수도 있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런 꿈을 그냥 꾸지는 않았을 거라는 생각도 함께 들었다.
“회장님. 아니, 아버님에게 감사해야겠네요.”
“응?”
“어쨌든 아버님은 저희 사이를 인정하셨다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뱃속에 천사도 보내주신 거고요.”
김 비서는 조심스럽게 자신의 배 위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그러고는 환한 미소를 드러내었다.
“고마워.”
나는 김 비서가 고마웠다.
* * *
김 비서의 임신 소식이 구단을 넘어 영신그룹까지 퍼졌다.
“김유리 비서가 신임 회장님하고 굉장히 뜨거운 사이였는데 결국 속도위반 하셨군.”
“그러게 말이야. 그래도 다행이야. 돌아가신 회장님 자식 중에서 결혼은 했어도 아이가 있는 사람은 없었잖아?”
“맞아. 뭐, 재벌가가 암묵적인 혈족 계승으로 이루어진 것은 공공연한 사실인데, 이렇게 가면 자칫 영신그룹도 대가 끊어지는 상황이었지.”
“신임 회장에게 아이까지 생긴 이상, 권력 구도는 앞으로 더 신임 회장 쪽으로 갈 수밖에 없겠네.”
영신그룹 임원부터 직원들까지 신임 회장의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신경 쓰고 있었다.
신임 회장이 어떤 행동을 보이느냐에 따라 각자의 목숨줄이 걸려 있으니 신경을 안 쓸 수 없었다.
“벌써 잘려나갈 사람들은 다 잘려나갔지?”
“그렇지. 뭐. 지태완 라인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숙청됐다고 봐야지.”
지태완의 왼팔이나 다름없었던 오 비서를 비롯해 관련 인물들이 모두 회사를 떠났다.
눈치껏 떠난 사람도 있지만, 강제로 잘려 나간 사람도 있었다.
“신임 회장 취임식을 왜 이렇게 늦게 하나 싶었는데, 다 이런 이유가 있었구만.”
“우리는 그저 잘려 나가지 않은 것으로 감사해야지.”
“아무튼 신임 회장은 정말 무서운 사람이야. 가차 없이 다 잘라버렸잖아.”
“맞아. 정말 목이 붙어 있는 것으로 감사해야 한다니까.”
사실 영신그룹 사람들은 이 모든 상황을 지태훈이 지시해서 벌어진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건 사실과 달랐다.
이 모든 상황은 김진철 이사의 작품이었다.
김진철 이사가 주도적으로 지태완과 관련된 무리들을 앞장서서 숙청했다.
“애송아. 내가 해줄 만큼은 해줬다. 이제부터는 네 몫이다.”
죽은 회장을 위해,
그리고 앞으로 신임 회장 곁에서 함께 동반자로 살아갈 딸을 위해,
김진철은 부하와 아버지로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해냈다.
“신임 회장. 네가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판은 만들었다. 어디 한번 마음껏 뛰어놀아봐라.”
김진철은 조용히 웃었다.
* * *
김 비서가 임신하면서 나의 일과가 바뀌었다.
거의 모든 일정이 김 비서를 중심으로 돌아갔다.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아니면 하고 싶은 거 있어? 말만 해. 다 해줄게!”
“음. 그럼 저기 보이는 달도 따다 줄 수 있어요?”
“어? 달? 어, 음. 잠시만. 으음.”
밤하늘에 떠 있는 달을 가리키며 따달라고 하는 김 비서의 말에 나는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정말 그녀가 이렇게 스케일이 큰 여자일 줄은 몰랐다.
“어떻게 달을 따지?”
그러자 김 비서가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농담이에요. 농담. 정말 달을 따달라고 했겠어요?”
“나는 진짠 줄 알았어.”
“뭐에요. 그게.”
웃고 있는 김 비서의 모습에 나는 그제야 흐르는 땀을 닦아낼 수 있었다.
“그건 그렇고…… 여보.”
“어?”
순간 내가 뭔가 잘못 들었나 싶었다.
“저, 김 비서, 아니, 유리야. 지금 뭐라고?”
“……여보.”
“…….”
와, 심장이….
갑자기 심장이 아프다.
“하, 한 번만 더 불러줘.”
“여보.”
“하, 한 번 더.”
“그만 해요. 부끄럽게!”
“흐흐흐.”
여보라니.
김 비서가 나에게 여보라고 불러주다니.
그냥 단순한 호칭 하나일 뿐인데, 너무 행복했다.
“이제 서로 여보라고 불러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그럴까?……여보?”
“…….”
우리 둘은 얼굴을 붉히고 어색하게 반응했다.
그러다가 김 비서가 헛기침하며 분위기를 바꿀 말을 꺼냈다.
“혹시 요즘에 고민 있어요?”
“어? 고민?”
“네. 요즘 들어 생각하는 시간이 많은 것처럼 보여서요.”
“고민이라.”
김 비서는 예리했다.
내가 지금 어떤 상황인지 단숨에 파악하고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숨기지 않고 이야기했다.
“사실 로치오 단장이 곽찬구 감독을 교체하자고 제안을 했어.”
“예? 정말요?”
“응. 처음에 제안받고 나도 당황스러웠는데, 어떻게 보면 로치오 단장의 말도 일리가 있어서.”
“그럼 교체할 건가요?”
“으음. 고민이야. 그래도 곽찬구 감독이 우리에게 지금까지 해준 업적들이 있는데, 갑자기 내쫓으면 뭐가 되겠어. 심지어 계약기간도 남았는데.”
“하긴. 곽찬구 감독도 평소 주변이나 언론에 우리 팀을 향한 충성심도 제법 드러냈잖아요?”
“그렇지. 그래서 쉽게 감독을 교체할 수 없어.”
김 비서는 고민하는 나를 살며시 안으며 말했다.
“너무 고민하지 말아요. 분명 뭔가 방법이 있을 거예요.”
“응. 여보 말대로 뭔가 방법이 있을 거야. 그렇게 생각해.”
여태까지 넘어온 산들이 많다.
그만큼 나도 경험이 쌓였고, 이제는 예전처럼 쉽게 불안해하고 걱정하지 않는다.
그저 해결책을 찾으려고 노력할 뿐이다.
“분명 방법은 있을 거야. 분명.”
그리고 그 방법은 생각지도 못한 일로 나타났다.
* * *
아시아챔피언스리그 결승전 준비로 바쁜 곽찬구 감독에게 모처럼 에이전트가 찾아왔다.
“형님. 오랜만이네요. 어떻게 결승전 준비는 잘 되세요?”
“정신없다. 그래도 트로피 딸려면 열심히 해야지.”
“하하. 네. 아, 최근에 리그 우승하신 거 축하드려요. K리그 역사상 처음으로 1, 2부 리그 모두 우승한 감독이 됐다면서요?”
“아, 뭐, 나도 기사 보고 알았어. 그냥 감사할 따름이지.”
“하하. 역시 형님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았네요. 그래서 제가 형님을 좋아합니다!”
넉살 좋은 에이전트의 말에 곽찬구 감독도 피식 웃었다.
그러다가 곧 굳은 얼굴로 말했다.
“그건 그렇고 갑자기 무슨 일로 나를 찾아온 거야?”
“아, 그게…….”
에이전트는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면서 말했다.
“저희 쪽으로 형님을 영입하고 싶다는 이적 제안이 들어왔어요.”
“……!”
예상치 못한 말에 곽찬구 감독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적 제안이라니. 나는 혹시 재계약 준비하자는 이야기하러 온 줄 알았어.”
“하하. 저도 원래 그럴 생각이었는데요. 음, 생각보다 꽤 좋은 조건으로 이적 제안이 들어왔거든요.”
곽찬구 감독은 테이블 위에 있는 서류를 흘깃 쳐다본 다음 조심스럽게 말했다.
“어디서 들어왔는데?”
“우선 중국하고 일본. 각각 광저우 유나이티드와 고베FC고요. 두 팀 다 아시죠? 둘 다 자국리그 명문 클럽인 거. 그리고 두 팀 모두 이번 시즌 우승팀이고요.”
“음. 알고 있어. 그런 데서 나를 영입하고 싶다고 연락이 온 거야?”
“네. 세부 조건들은 눈앞에 있는 서류에 적혀 있기는 한데, 연봉하고 수당 그리고 계약기간 모두 좋아요.”
“으음.”
“그리고 이게 끝이 아니에요. 중동하고 동남아에서도 러브콜이 왔어요.”
“뭐?”
중동과 동남아 쪽에서 추가로 제안이 들어왔다는 소식에 깜짝 놀란 곽찬구 감독이었다.
에이전트는 살짝 웃으며 말했다.
“중동은 UAE 리그에 있는 알 자르파, 동남아는 베트남 호치민. 이렇게 왔네요.”
“…….”
“알 자르파는 칼리드 왕의 입김이 닿은 모양이고, 호치민은 이번 아시아챔피언스리그에서 보여준 활약을 보고 영입 의사를 보였더라고요. 여기서 내세운 조건은, 음, 앞에 중국과 일본에서 제시한 조건보다 큽니다.”
“허어.”
곽찬구 감독은 참지 못하고 서류를 손에 집어서 내용을 확인했다.
빠르게 내용을 모두 확인한 그는 두 눈을 부릅떴다.
“저, 정말 나에게 이렇게까지 제안을 한다고?”
“네. 형님. 예전에 파주에서 나와서 중국 가려고 했을 때하고 비교하면, 조건이 정말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좋습니다.”
“허어.”
곽찬구 감독은 계속 서류를 보며 감탄했다. 그러나 곧 한숨과 함께 서류를 테이블에 다시 내려놓으며 말했다.
“뭐, 조건들이 상당히 좋긴 하다만, 나는 우리 팀을 떠날 생각이 없어. 솔직히 돈이라면 지금 고양에서 만족할 만큼 받고 있고.”
“역시 형님이라면 이렇게 이야기하실 것 같았어요.”
에이전트의 말에 곽찬구 감독은 작게 미소를 지었다.
“이제는 여기가 내 집이고 고향이다. 정도 많이 들었고, 애들, 아니, 우리 선수들 성장하는 모습 보면 뿌듯하고 그래.”
“이야, 형님 파주 레전드 맞아요? 이거 완전 고양 레전드인데?”
“뭐…… 나는 이제 배신자지. 뭐. 파주 팬들한테는 늘 미안하고 죄송스러워.”
에이전트는 농담 삼아 한 이야기에 진지하게 반응하는 곽찬구 감독을 보고 움찔했다.
“아이, 형님. 형님이 그렇게 반응하시면 제가 뭐가 됩니까? 형님은 충분히 잘하셨어요. 그 상황에서는 누가 와도 형님하고 다 같은 선택을 내릴 거고요.”
“말이라도 고맙다.”
“그건 그렇고…… 사실 한 군데서 더 제안이 왔어요.”
“음?”
에이전트는 주변을 살핀 다음 조심스럽게 말했다.
“형님. 혹시, 형님이 국가대표 감독이 될 수 있다면 어떻게 할 건가요?”
“갑자기 국대? 뭐, 국대 감독은 독이 든 성배긴 해도, 다들 꿈꾸는 자리 아니냐? 나도 마찬가지고.”
“그렇죠?”
“근데 갑자기 국대 이야기는 왜…… 너, 설마?”
에이전트가 담담히 반응했다.
“대한축구협회에서 은밀하게 저희 쪽으로 제안이 왔어요. 형님을 차기 대한민국 국가대표 감독 후보로 올려놨데요.”
“……뭐?”
곽찬구 감독은 믿을 수 없는 표정을 드러냈다.
갑자기 대한민국 국가대표 감독 후보라니.
“형님. 최근 국대 상황 알고 계시죠?”
“잘 모르겠는데?”
“정말 모르세요?”
“어. 요즘 바빠서 다른 데 집중할 틈이 없다.”
“으음.”
에이전트는 다시 한번 주변을 살핀 다음 목소리를 내리깔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형님. 김용수 감독하고 대한축구협회장하고 대판 붙었습니다.”
“뭐?”
“이게 한 두 번 붙은 게 아니랍니다. 자세한 이유까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형님도 아시겠지만 김용수 감독이 워낙 성격이 있지 않습니까?”
“뭐, 그렇다만…….”
“아무튼 대한축구협회 쪽에서 김용수 감독을 경질한다는 이야기가 돌고 있거든요.”
“나는 정말 그런 얘기 못 들었는데…… 진짜 경질한다고?”
에이전트는 슬쩍 주변을 둘러보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형님, 대한축구협회 관계자가 저희 쪽에 직접 이야기했습니다. 경질 준비 중이라고.”
“아니, 미친. 그렇다고 이런 식으로 감독을 경질한다고?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냐?”
황당해하며 목소리를 높이는 곽찬구 감독의 태도에 놀란 에이전트가 황급히 그를 진정시켰다.
“형님. 목소리가 너무 큽니다. 진정하세요.”
“크흠. …아무튼 그래서 어떻게 되는 건데?”
“현재 협회 쪽에서 김용수 감독의 경질을 두고 후임 감독 선임을 준비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후임 감독으로 유력한 후보자가 바로 형님이라고 하더군요.”
“……허어.”
여전히 믿기지 않았다.
에이전트는 그런 곽찬구 감독에게 단호히 말했다.
“형님. 잘 생각해 보십시오. 이런 기회 없습니다.”
“아니, 기회고 나발이고, 이러면 소방수 감독인 셈이잖아.”
“그래도 2년 남았습니다. 형님. 형님이 생각보다 좋은 결과를 내면, 연장 계약도 가능하다고 답변이 왔습니다.”
“…….”
“아무튼 형님, 잘 생각해 보시고 연락해 주십시오. 기다리겠습니다.”
그렇게 에이전트가 떠나고 홀로 남게 된 곽찬구 감독은 쉽사리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