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4화
“올겨울에 선수단 개편이 필요합니다.”
로치오 단장이 냉정히 이야기했다.
“지금까지 우리가 해왔던 선수 영입은 즉시 전력감 위주로 해왔습니다. 당장의 성적이 중요했기 때문이죠. 하지만 이제는 다릅니다.”
선수단 개편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로치오 단장은 당장 겨울부터 개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유가 있었다.
“이제 우리는 리그를 이끄는 리딩 클럽입니다. 우리가 리딩 클럽으로서 확고한 위치에 오르려면 세대교체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리딩 클럽으로 확고한 위치를 다지기 위해서는 지금보다 비교도 할 수 없는 단단한 스쿼드가 필요했다.
“김지우의 은퇴는 시작에 불과합니다. 올해를 시작으로 팀의 베테랑 선수들이 우후죽순 은퇴하거나 팀을 떠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 팀은 30대 베테랑 노장 선수들을 주축이 되어 활약하는 팀이었다. 다른 팀들과 비교했을 때 평균 연령도 조금은 높은 편이었다.
“올해 유럽으로 이적했던 박요한 같은 어리고 앞날이 유망한 선수가 앞으로도 우리 팀을 거쳐 가는 팀으로 인식하는 일을 만드는 것도 방지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세대교체를 진행하기 위해서는 20대 초, 중반의 선수들을 대거 데려와야 합니다. 팀 내 실력 있는 유소년을 1군 콜업하거나 이적료를 주고 영입해야죠.”
“어느 정도 걸릴 것 같습니까?”
“이 과정은 올해와 내년 여름 이적 시장까지는 거쳐야 완성될 겁니다.”
“흐음.”
“그리고…….”
“음?”
갑자기 로치오 단장이 내 눈치를 살피더니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감독 교체를 고려하셨으면 좋겠습니다.”
“……!”
뜻밖의 말에 나는 두 눈을 부릅떴다.
갑자기 감독 교체를 고려해 달라니.
“곽찬구 감독이 마음에 안 드십니까?”
“개인적으로는 충분히 잘 지내고 있습니다. 그는 멋지고 훌륭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팀을 위한다면 이야기가 다릅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곽찬구 감독이 능력은 있지만, 냉정히 이야기해서 빅클럽을 이끌기에는 아직 부족함이 많습니다. 세대교체를 넘어 우리가 역사적으로 한 단계 더 도약하려면, 코칭스태프 전면 교체도 고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로치오 단장의 제안은 파격을 넘어 충격이었다.
나는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겨우 진정하면서 말했다.
“우리가 조금은 기다릴 수 없는 겁니까?”
“어떤 일이든 시기가 있는 법입니다. 곽찬구 감독은 대표님이 이끄는 이 팀의 초창기 멤버로서 훌륭히 그 역할을 다했습니다. 이제는 좀 더 나은 인물이 바톤을 받고 뛰어야 할 차례라고 봅니다.”
머릿속이 복잡하다.
“계약 기간이 남은 걸로 아는데요.”
“위약금이 따로 없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위약금 문제가 아니지 않습니까?”
나는 마른세수를 했다. 그런 나에게 로치오 단장이 차분하게 말했다.
“강요하는 것은 아니지만, 부디 신중히 생각해서 결정을 내려주십시오.”
“알겠습니다.”
“그럼 나가보겠습니다.”
로치오 단장이 나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나갔다.
“하아. 도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갑자기 너무 뜬금없잖아.”
곽찬구 감독이 세운 업적을 생각한다면, 함부로 팽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하지만 로치오 단장의 말도 어느 정도는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구단의 규모는 날이 갈수록 커지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곽찬구 감독의 한계가 어느 정도 보였으니까.
“아시아챔피언스리그 일정이 남아 있으니, 생각을 좀 해보자.”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정리하려는데 김 비서로부터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흑.
“……!”
갑자기 울먹이는 김 비서의 목소리를 들은 나는 가슴이 철렁했다.
나는 바로 간다고 이야기하고 대표실을 박차고 나갔다.
‘최근에 몸이 안 좋았던데 설마 큰일이라도 생긴 걸까?’
불안한 마음을 잔뜩 안고 집으로 향했다.
현관문 앞에 도착한 나는 긴장된 마음을 조금이라고 가라앉히기 위해 숨을 골랐다.
“후우.”
조심스럽게 현관문 비밀번호를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유리야!”
김 비서는 거실 소파에 앉아 있었다. 그녀의 두 눈은 붉게 변해 있었다.
“태훈 씨.”
그녀가 울먹이면서 내 품에 안겨 왔다.
“무슨 일이야? 설마 병원에서 뭐라고 했어?”
김 비서는 대답하지 않고 내 품에 안겨 엉엉 울기만 했다.
그 모습이 무척 답답했지만 그렇다고 그녀를 재촉할 수 없었다.
나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진정시키려고 노력했다.
“괜찮아. 어떤 일이든 나는 유리, 너와 함께 할 거야. 나는 네 편이야. 너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나는 목숨 걸고 너를 지켜낼 거야.”
진심을 가득 담아 말했다.
사랑하는 그녀가 엉엉 울고만 있으니 내 속도 타들어 가다 못해 재가 되어 부서지고 있었다.
나는 어떻게든 그녀를 진정시키고 싶었다.
그렇게 내 진심이 통한 것일까?
한참을 울던 그녀가 다행히 눈물을 멈추고 나를 바라봤다.
“정말 나하고 끝까지 함께 할 거야?”
그녀가 평소처럼 존댓말이 아닌 반말로 나에게 함께 할 수 있냐고 물었다.
나는 그런 그녀에게 단호히 대답했다.
“물론. 당신이 어디를 가든, 나는 당신과 끝까지 함께 할 거야. 그러기 위해 이 자리에 있는 거고.”
그제야 김 비서가 미소를 드러냈다. 그러다가 금방 굳은 얼굴로 내 곁을 살짝 벗어났다.
한 걸음 떨어진 상태에서 그녀가 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태훈 씨. 놀라지 말고 들어요.”
“응.”
놀라지 말고 들으라니.
심장이 터질 것 같다.
도대체 뭘까?
설마 심각한 병에라도 걸린 걸까?
아니야. 그러면 안 돼.
그렇다면 어떻게든…….
머릿속이 터질 것 같았다.
그런데 이어지는 김 비서의 말에 모든 사고가 멈췄다.
“저 임신했어요.”
“역시 나하고 병…… 뭐?”
“임신했어요. 태훈 씨가 아빠가 됐다고요. 저는 엄마가 됐고요.”
“……!”
한 3초 정도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러다가 빠르게 상황파악이 되면서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정말이야!?”
“네? 네.”
한껏 높아진 목소리에 김 비서가 놀랐다.
순간 힘이 풀렸다.
나는 주저앉으면서 그녀를 끌어안고 울었다.
“다행이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나는 김 비서가 큰 병이라도 걸린 건 줄 알고 너무나도 무서웠다.
그런데 병이 아니라 오히려 천사가 내려왔다.
“훌륭한 남편과 아빠가 될게. 평생 좋은 아빠가 될게. 너무 고마워. 유리야, 내 곁에 와줘서 고마워. 정말 나는 행복한 놈이야. 정말…….”
나도 모르게 아무 말이나 마구 쏟아져 나왔다.
그런 나를 김 비서가 품에 안고 쓰다듬어주었다.
“고마워요. 태훈 씨.”
* * *
김 비서가 임신했다.
처음에는 놀랐지만, 곧 기쁨과 행복으로 가득했다.
하지만 한편으로 걱정도 있었다.
“김진철 이사님이 알면 나를 죽일지도 몰라.”
그래, 다른 것보다 이게 제일 걱정이다.
결혼도 안 했는데 무턱대고 딸을 임신하게 만들었으니, 김 이사가 당장 나를 바닥에 내리꽂아도 할 말이 없다.
“호호. 설마 아빠가 그렇게 할까요? 우리 아빠 그렇게까지 무섭지 않아요.”
김 비서도 내가 무슨 걱정을 하는지 알고 이야기했지만 하나도 공감되지 않았다.
“아니야. 김 이사님이라면 정말…….”
지이이잉.
“헉.”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고 했던가?
갑자기 나한테 김진철 이사가 전화를 했다.
“여, 여보세요?”
나도 모르게 떨리는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다음 달 신임 회장 취임식 관련해서 몇 가지 물어보려는데, 잠깐 시간 되나?
“죄, 네? 아, 넵. 됩니다.”
나는 김진철 이사와 회장 취임식 관련해서 이야기를 나눴다.
-흠. 그 정도면 되겠군. 끊는다. 수고해라.
“자, 잠시만요. 이사님.”
-음?
통화를 끝내려던 김진철 이사를 붙잡았다.
-뭐야. 말을 해. 여보세요?
“그,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나는 한참 망설이다가 두 눈을 질끈 감고 큰 목소리로 외쳤다.
“이사님! 할아버지 되셨습니다!”
-……뭐라고?
“죄송합니다!”
옆에서 지켜보던 김 비서가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갑자기 김진철 이사가 침묵했다.
그러다가 곧 분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깐만! 뭐!? 이 새끼가 감히----!
“죄송합니다!”
-너 어디야!
결국 김진철 이사가 우리 집으로 찾아왔다.
나는 바로 무릎 꿇고 머리를 바닥에 박고 용서를 구했다.
내가 아무리 천하에 영신그룹 회장이라도, 김진철 이사는 너무나도 무섭다.
그런 내 옆에는 김 비서도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런 우리를 내려다보는 김진철 이사는 뭐라 말하려다가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하아. 됐다.”
김진철 이사는 우리를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는 다 같이 거실 소파에 앉았다.
한동안 긴 침묵이 우리를 짓눌렀다.
그러다가 김진철 이사가 말문을 열었다.
“이렇게 된 거 그냥 날짜 잡자.”
“예?”
“날짜 잡자고. 너, 이 자식 설마 우리 유리 말고 다른 여자 있는 거 아니지?”
“마,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시죠! 저는 유리 말고 다른 여자는 눈에도 안 들어옵니다!”
“끙.”
그때, 김 비서가 끼어들었다.
“아빠. 이제 우리 사이 인정하는 거죠?”
“내가 인정하고 말 게 있나. 너는…… 하아.”
“아빠. 미안해.”
“네가 미안할 게 뭐가 있겠냐. 다 저놈이……!”
김진철 이사는 모든 상황이 내 잘못이라고 결론을 내린 것 같았다.
하지만 김 비서는 달랐다.
“아빠. 내가 빼고 하자고 했어.”
“무, 뭐?”
두 부녀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나도 그녀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고 벌겋게 달아올랐다.
“저, 장인어른.”
“장인어른은 무슨……!”
“예비 장인어른.”
“너……!”
김진철 이사는 화를 내려다가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후. 됐다. 어차피 너희들이 내가 뭘 어떻게 한다고 해서 달라질 사이도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는 나와 김 비서를 번갈아 쳐다보며 말했다.
“가정을 만들고 이끌어 나가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아. 너희들의 인생이 완전히 바뀔 거다.”
그는 나를 보며 말했다.
“지태훈 회장. 정말 내 딸과 결혼할 생각이라면, 정식으로 우리 집으로 오십시오.”
갑자기 변한 태도에 깜짝 놀랐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신임 회장님.”
그 말을 끝으로 김진철은 자리를 떠났다.
“아.”
그렇게 한차례 거대한 폭풍이 지나갔다.
힘이 빠진 내 곁으로 김 비서가 다가와 말했다.
“괜찮을 거예요.”
“응. 그러기를 바라고 있어.”
나는 호흡을 고르고 눈을 감았다가 떴다.
“좋아. 조만간 정식으로 장인어른 뵙고 허락받겠어.”
* * *
그날 밤. 나는 꿈에서 너무나 그립고 반가운 얼굴을 만났다.
“태훈아. 그동안 잘 지냈느냐?”
“아, 아버지?”
“그래. 나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꿈에서 나타났다. 아버지는 늘 출근할 때 입는 정장과 멋들어진 중절모를 쓰고 한 손에는 지팡이를 짚고 있었다.
그는 나를 보며 인자하게 웃어 보였다.
“아버지! 보고 싶었어요!”
“그래. 나도 보고 싶었다.”
나는 아버지와 포옹을 나눴다.
마치 꿈속이라는 것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아버지의 품은 포근했다.
“많이 성장했구나. 정말 대견스럽다.”
“저 아직 부족한 놈이에요. 아직 회장이 되지도 않았는데요.”
“그건 그저 형식적일 뿐이다. 너는 이미 회장으로서 자격이 있다.”
아버지의 따스한 말 한마디에 힘이 난다.
“그건 그렇고, 이제 너도 아버지가 되겠구나.”
“어? 어떻게 아셨어요?”
“허허.”
김 비서의 임신 사실을 알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에 화들짝 놀랐다.
그런 나를 보며 아버지는 너털웃음을 터트리더니 곧 지팡이 끝으로 내 어깨를 가볍게 툭 치며 말했다.
“알다마다. 너희에게 보낸 그 천사를 내가 보냈으니 말이다.”
“네!?”
“너희들이 키울 그 아이, 앞으로 정말 중요한 위인이 될 게다. 너와 유리, 그 아이의 역할이 크다.”
아버지가 하는 말이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 알아서 깨닫게 될 게다. 그건 그렇고.”
“……?”
“진철이를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마라. 생각보다 마음이 여린 녀석이야.”
“…….”
말을 하던 아버지가 갑자기 손목에 찬 시계를 보더니 움찔했다.
“이런, 약속된 시간이 다 됐구나.”
“아버지?”
갑자기 간다뇨?
“어디 가세요?”
“죽은 인간이 살아 있는 인간을 만나는 일은 쉬운 게 아니다.”
내가 뭘 어떻게 할 겨를도 없이 아버지는 떠나기 전에 말했다.
“정말 미안하고 고맙구나. 부족한 나 때문에 네게 너무 많은 것을 짊어지게 했어.”
“아버지, 저는…….”
“다 안다. 죽어서 하늘로 올라가서야 알게 되었구나. 네가 시간을 거슬러 올라왔다는 것을 말이다.”
“……!”
“미래를 부탁하마. 앞으로 네가 해야 할 역할이 크다.”
그 말을 끝으로 아버지는 내 앞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그렇게 나는 꿈에서 깨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