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4화
다닐손의 발끝을 벗어난 공이 수비수들 틈으로 날아갔다.
혼란한 상황 속에서 공은 누군가의 몸에 맞고 살짝 굴절되었다.
미묘하게 틀어진 궤적이 그대로 골문 구석으로 향했다.
출렁-
와아아아아!
골키퍼 박지원도 미처 반응할 틈도 없이 벌어진 일이었다.
득점에 성공한 다닐손이 가와사키 팬들 앞으로 뛰어가 포효했다.
“VAR 봐야 해요! 이거, 맞고 굴절된 거예요!”
이진수가 주심에게 다가가 VAR 확인을 요청했다.
오늘 경기를 맡은 사우디아라비아 출신의 주심은 규정상 득점하면 VAR 확인을 해야 했다.
『오늘 주심은 모하메드 알리 주심인데요. VAR과 교신하고 있는데요. 저희도 영상을 한번 보고 싶네요.』
곧 중계진 화면에서 리플레이가 흘러나왔다.
『이게 지금 맞고 굴절되서 들어갔거든요? 지금 이 공이 누구를 맞았느냐에 따라 오프사이드 판정이 나올 수 있는데요.』
다닐손의 슈팅이 느린 장면으로 다시 나왔다.
페널티박스 바깥쪽에서 오른발로 힘껏 때린 슈팅이 수비수 사이를 관통하듯 지나가는 것 같았다가 누군가의 몸에 맞았다.
다른 각도에서 해당 부분을 좀 더 느린 화면으로 잡고 다시 보여 줬다.
화면을 면밀히 지켜보던 중계진이 탄식했다.
『아, 유태준 선수 다리에 맞았네요.』
『이러면 가와사키의 득점이 맞죠.』
VAR과 교신하던 주심도 곧 가와사키의 득점을 인정했다.
삑.
우와아아아!
주심의 판정을 기다리고 있던 다닐손의 모습이 화면에 잡혔다.
그는 다시 동료들과 포옹하며 기쁨을 드러냈다.
『이게 기록이 어떻게 될지 모르겠는데요. 다닐손의 득점으로 기록될지, 아니면 유태준 선수의 자책골로 기록이 될지 봐야겠습니다.』
『아, 유태준 선수 표정이 좋지 않네요. 사실 지금 실점하기 전까지 상당히 좋은 모습 보여주고 있었거든요.』
『이건 경험적인 차이도 있는데요. 괜찮습니다, 유태준 선수. 힘내서 다시 뛰면 됩니다.』
중계진이 안타까워하는 목소리로 유태준을 응원했다.
동료 선수들도 표정이 좋지 않은 유태준을 격려했다.
『아, 지금 유태준 선수의 자책골로 기록이 됐네요.』
[고양] 1:1 [가와사키]
한석원 (23) | 유태준 O·G (42)
대회 관계자로부터 실시간으로 전달받아 기록되는 스코어보드 판에 유태준의 자책골로 공식 기록으로 인정되었다.
『종합 스코어는 2:1이 됐습니다만, 이렇게 되면 고양이 쫓기는 상황이 될 수 있습니다.』
『고양은 지금의 실점은 잊고, 최대한 본인들의 플레이에 집중해서 경기 주도권을 계속 잡아야 합니다!』
중계 카메라는 고양 벤치를 화면에 잡았다.
근심스러운 얼굴을 드러내고 있는 곽찬구 감독의 뒤로, 벤치에 앉아 있는 베테랑 선수들의 모습이 잡혔다.
『지금 화면에도 고양이 내세울 수 있는 카드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요. 허허, 보기만 해도 대단하죠?』
『그렇습니다. 박형우, 김지우, 오세진 이 선수들 모두 공격적인 카드거든요. 체력적으로 문제만 없다면 후반전에 이 선수들이 나올 텐데요. 이 선수들이 나오기 전에 가와사키의 공격을 얼마나 틀어막을 수 있느냐가 중요하겠습니다.』
그렇게 전반전이 끝났다.
“아.”
전반전을 마치고 라커룸으로 돌아온 유태준은 자책골로 공식 기록됐다는 이야기를 듣고 좌절했다.
좌절하는 그에게 다가간 한비오가 말했다.
“야, 이게 위로가 될지 모르겠지만, 나는 데뷔전에서 전반에 3골이나 먹혔다. 1골 정도는 괜찮아. 힘내.”
“……뭔가 웃프네.”
한비오 외에 다른 선수들도 그를 위로했다.
“야, 데뷔전에서 이 정도면 잘하고 있는 거야. 자책골은 재수가 좀 없었던 거고. 너 잘하고 있어.”
“그래, 짜샤. 데뷔전에서 꽤 잘해서 이 형은 좀 놀랐다?”
동료들의 응원과 격려에 유태준은 조금이라도 힘을 낼 수 있었다.
그러는 사이 곽찬구 감독이 돌아왔다.
“너희들.”
굳은 얼굴을 하고 있는 감독의 모습에 일순간 모두 얼어붙었다.
“겨우 이 정도야?”
꿀꺽.
곽찬구 감독이 화를 내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하지만 한번 화를 내면 어지간한 강심장인 선수들도 두려울 정도로 무서웠다.
선수들은 긴장하며 그를 쳐다봤다.
“휴.”
곽찬구 감독은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자책골은 재수가 없었다고 치자. 그런데 말이야. 오늘 전반전만 놓고 보면 나는 정말 실망했다. 내가 아는 너희들이 맞나 싶을 정도였어.”
실망감 가득한 목소리로 선수들을 질책하던 곽찬구 감독이 유태준과 눈이 마주쳤다.
“아, 태준아. 너는 잘했다.”
“아, 넵.”
머쓱한 표정을 드러내는 유태준을 가리킨 곽찬구 감독이 일갈했다.
“너희는 어떻게 된 게 오늘 처음 뛴 막내보다 못하면 어떡하나! 어! 너희들 수준이 그 정도밖에 안 되는 것 아니라는 거, 알잖아! 어!”
일부 선수들은 눈을 질끈 감거나 고개를 떨어뜨렸다.
하지만 곽찬구 감독은 일갈을 멈출 수 없었다.
평소 부드럽게 타이를 때도 필요했지만, 이렇게 중요한 순간에는 일갈하며 선수들의 정신력을 일깨워야 했다.
“여기가 지금 가와사키 홈이야? 아니야! 여기는 우리 고양의 홈이야! 홈이라고! 홈팬들이 일부러 시간 내서 너희들 보려고 여기까지 와서 응원하고 있다고! 그런데 지금 우리가 이기고 있다고 해서 다 끝났어? 너희들이 그따위로 플레이하면, 어떤 팬들이 진심으로 너희들을 응원하겠어! 맞아? 틀려?”
“…….”
“좋아. 이렇게 해서 어찌어찌 결승전에 올라갔다고 하자. 그런데 이따위로 플레이할 거면 무슨 우승을 할 수 있다는 거야! 정말 너희들은 우승할 생각이 있는 거야? 우승할 수 있어?”
자존심 강한 선수들도 지금 이 순간은 아무 반응도 보일 수 없었다.
곽찬구 감독이 구구절절 맞았기 때문이다.
외국인 선수들도 통역하지 않아도, 분위기만으로도 어떤 말을 하는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때, 카초가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는 어색한 한국말로 외쳤다.
“하수 있다!”
“……?”
“하수 있다!”
주먹을 불끈 쥐고 외치는 그의 모습을 본 동료들이 그제야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깨달았다.
그러자 사무엘이 벌떡 일어났다.
“그래, 할 수 있어! 감독님! 애들아! 우리 할 수 있어!”
베테랑 사무엘의 외침에 동료들도 할 수 있다고 외쳤다.
그제야 라커룸 분위기가 다시 한번 살아나기 시작했다.
곽찬구 감독이 선수들에게 말했다.
“그래, 바로 그 기세로 가는 거야! 너희들이 누군지 똑바로 보여줘! 저 놈들이 여기가 어디인지 제대로 알려줘! 알겠나!”
“네!”
선수들이 힘차게 대답했다.
* * *
“걱정할 필요 없겠군.”
라커룸 밖에서 대화를 들은 나는 미련 없이 관중석으로 돌아갔다.
* * *
후반전 시작과 동시에 박형우가 투입됐다.
박형우 선수가 투입 준비를 하자 고양의 모든 홈팬들이 환호하며 그의 이름을 외쳤다.
팀 내 최고 에이스에 대한 팬들의 반응은 남달랐다.
『박형우 선수가 투입을 준비하는데요. 사무엘 선수가 빠지고, 박형우 선수가 들어가는군요.』
『이렇게 되면, 한석원 선수가 최전방으로 올라가거나 아니면 제로톱 전술로 갈 수 있겠네요.』
중계진의 예측대로, 박형우는 한석원이 뛰던 왼쪽 측면으로 이동했다.
공격적인 한석원보다 경험 많고 수비 가담도 어느 정도 가능한 박형우를 측면에 배치한 것이다.
비록 전문 측면 수비수는 아니지만, 지금 상황에서 박형우 말고 측면을 볼 수 있는 자원이 없었다.
한석원은 최전방으로 올라가 스트라이커로 활약하게 되었다.
『가와사키도 교체하는군요. 유토 선수를 빼네요?』
『어, 이거 상당히 과감한 결정인데요. 아무래도 유토 선수가 전반전에 유태준 선수에게 막히면서 고전했거든요? 이건 하시모토 유지 감독의 과감한 승부수로 볼 수 있겠습니다.』
『유토 선수가 빠진 자리에는 20살의 어린 공격수 가가와 신지가 들어갑니다.』
『그 과거에 유럽에서 뛰었던 그 가가와 신지와 동명의 이름을 가진 선수입니다. 일본 연령별 대표팀을 거쳤는데요. 이 선수도 올해 프로에 데뷔했거든요? 주로 교체로 뛰긴 했어도 22경기를 뛰면서, 리그에서만 8골을 넣었고요. 빠른 스피드와 기술적인 플레이가 아주 좋은 선수입니다.』
『그렇군요!』
양 팀이 후반전 시작과 동시에 승부수를 띄었다.
고양도 조금은 안정적으로 플레이하려면 지키는 것보다 득점이 더 필요했고, 가와사키는 무조건 득점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교체로 들어간 가가와 신지 같은 경우에는 과거 유태준 선수하고 연령별 대표팀에서 맞붙은 적이 있습니다. 아무래도 상대를 잘 아는 가가와 신지에게 유태준 선수를 상대하라고 지시를 내린 것 같습니다.』
유태준도 가가와 신지를 의식하고 있었다.
과거 U17 지역 예선과 월드컵에서 모두 마주쳤던 적이 있는 두 선수였다.
지역 예선에서는 가가와 신지에게 통한의 실점을 당했지만, 월드컵 본선에서는 그를 꽁꽁 묶으며 복수하면서 한국의 8강 진출에 기여했다.
그렇기에 두 사람 모두 서로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가와사키가 공격합니다! 고바야시가 다닐손에게 패스하는데요! 다닐손이 반대편에 있는 신지를 봅니다! 신지 뛰어가는데요! 유태준이 막아섭니다!』
드리블 질주하는 가가와 신지 앞을 막아선 유태준.
신지는 그를 앞에 두고 드리블 돌파를 시도했다.
하지만 이미 진로를 파악하고 있던 유태준은 발을 뻗어 정확하게 공만 가로채는데 성공했다.
“읏!”
당황한 신지를 뒤로 한 채, 유태준은 곁에 있던 석종호에게 패스했다.
공을 받은 석종호가 스즈키에게 흘리듯 주었다.
스즈키는 측면에 있던 박형우를 봤다.
팡!
길게 올라간 공이 뛰어가는 박형우 앞에 정확히 떨어졌다.
그리고 무시무시한 파괴력 있는 질주가 시작됐다.
체력을 비축한 박형우와 달리 가와사키 선수들은 힘이 빠진 상태였다.
순식간에 가와사키의 측면을 휘저었다.
당황한 가와사키 선수들이 그를 막기 위해 사방에서 달려들었다.
하지만 박형우는 무리한 돌파보다, 노련하게 주변 동료를 이용했다.
툭.
자신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료타의 뒤쪽으로 로빙패스를 했다.
마침 그 뒤에는 기다렸던 호프만이 다가와 가볍게 공을 잡았다.
순식간에 뻥 뚫린 가와사키의 수비 라인이었다.
노마크 상태로 왼쪽 페널티박스 바깥쪽에서 호프만이 시원하게 슈팅을 때렸다.
팡!
궤적을 그리며 날아간 공이 골문 쪽으로 정확히 꺾였다.
거의 UFO 같은 슈팅에 놀란 가와사키의 골키퍼 김신후가 황급히 몸을 날렸지만, 공은 그런 김신후의 손끝을 넘어 골망을 흔들었다.
출렁-
우와아아아아!
지켜보던 홈팬들이 함성을 내질렀다.
동료들도 호프만의 괴물 같은 슈팅에 화들짝 놀랐다.
벤치에 있던 곽찬구 감독과 다른 선수들도 마찬가지였다.
『세상에! 이게 무슨 골이죠? 엄청난 골이 나왔습니다!』
『이야, 역시 호프만이네요! 이런 한 방이 있는 선수죠? 정말 대단합니다!』
『고양이 다시 한번 달아나는 득점에 성공합니다! 스코어는 2:1, 종합 스코어는 3:1 됩니다!』
득점에 성공한 호프만은 홈팬들이 있는 관중석으로 뛰어가면서 유니폼 엠블럼에 키스했다.
그렇게 카메라 앞으로 뛰어온 그는 양손으로 카메라를 붙잡고 힘차게 외쳤다.
“Vamos!”
호프만! 호프만! 호프만!
팬들은 호프만의 이름을 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