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7화
돌아가신 아버지가 그러셨다.
“네가 무겁다는 것을 안다는 건, 그만큼 성숙해지고 있다는 뜻이다.”
아버지가 병상에 있을 때, 나에게 해주셨던 말이다.
그때는 그 말의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말의 의미가 점차 제대로 와닿고 있었다.
“반갑습니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일전에 지태선 의원에게 전달받은 대로, 나는 VIP와 만났다.
현 대통령 이현승.
그가 웃으며 나에게 악수를 청했다. 나도 웃으며 그의 손을 맞잡았다.
청와대 접견실에서 나는 대통령과 단둘이서 대화를 나눴다.
“언젠가 제대로 인사를 나눌 날이 올 것을 생각했는데, 그게 오늘이었군요.”
“그렇네요.”
영신그룹 회장 자리에 있는 이상,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수밖에 없다.
그게 대통령이라고 한들.
“향후 이 나라의 경제가 지 회장님에게 달렸습니다.”
이현승은 내 손을 꼭 붙잡고 그렇게 말했다.
대한민국에서 영신그룹이 차지하는 경제적 시장 비율은 엄청나다.
이것은 대통령도 어떻게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다.
그런 상황에서 영신그룹의 수장이 짧은 시간 내에 연속해서 바뀌었다.
자칫 혼란이 올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그룹은 생각보다 빠르게 안정세를 보이고 있었다.
“지 회장님께서 적절한 인사 분배로 빠르게 그룹을 안정화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능력은 그 정도가 전부거든요.”
“하하. 겸손하시군요.”
대통령은 나에게 겸손하다고 칭찬했지만, 실상 겸손이 아니다.
현실이다.
내가 아무리 잘났다 한들, 이 거대한 기업을 혼자 악으로 깡으로 이끌어갈 수 없는 상황이다.
이제 TH투자회사를 모기업으로 둔 영신그룹을 이끌기 위해서는 수많은 사람이 필요했다.
그렇기에 나는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모두 활용해야만 했다.
다행히 김진철 이사와 용준형 사장 같은 인물의 도움으로 내 편을 빠르게 확보할 수 있었다.
“최근 영신그룹이 동남아시아 시장에 관심을 보인다는 이야기가 들려오던데, 맞습니까?”
“맞습니다. 정확히 이야기하면 없어질 뻔한 걸 다시 되살린 거지만요.”
“호오.”
동남아시아 사업장을 되살리려는 이유는 여럿 있다.
단순히 지태완이 벌인 업보를 되돌리기 위함이 전부가 아니었다.
“거기다 AFC에서 저희가 투자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투자라면……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요?”
“기본적으로 아시아 축구에 대한 투자이지만, 여기에 서아시아 쪽에 집중된 AFC의 기존 세력을 새롭게 재편성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달라는 뜻이죠.”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요?”
이현승은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하긴, 이 이야기는 축구 분야에 관심이 있거나 사업을 하지 않으면 도통 알아들을 수 없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대통령님도 아시겠지만, 축구는 거대한 놀이입니다. 전 세계 사람들이 다 같이 즐길 수 있죠. 실제로 그러고 있고요.”
“월드컵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단순히 월드컵만이 전부가 아닙니다.”
월드컵 이야기에 살짝 머리가 아파왔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아무튼, 아시아에서, 특히 동남아시아의 축구 열풍은 상상을 초월하죠. 그런 관심을 한국 기업이 적절히 이용한다면, 전체적으로 기업의 성장과 더불어 국내 경제에도 도움이 됩니다.”
“호오.”
“현재 대한민국을 먹여 살리는 경제 분야는 전자, 중공업, 건설이 전부가 아닙니다.”
어느샌가 이현승도 내 이야기를 집중 있게 듣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힘을 주어 말했다.
“콘텐츠입니다.”
“콘텐츠라면…… K-POP 같은 걸까요?”
“K-POP은 콘텐츠에 포함되는 ‘일부’에 불과하죠. 콘텐츠는 그 어떤 것도 포함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들으면 들을수록 신기하군요. 그 어떤 것도 포함할 수 있다니. 그럼 영신그룹의 주요 사업인 전자, 중공업, 건설 등도 콘텐츠 사업이 될 수 있다는 뜻으로도 들리는군요.”
“맞습니다.”
콘텐츠 산업의 가장 큰 장점이 바로 경계선 구분이 없다는 것이다.
그 어떤 것도 콘텐츠의 힘으로 엮을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최대의 단점으로도 돌아올 수 있었다.
“잘 될 때는 모두가 잘 되는 시너지 효과를 이룰 수 있습니다. 허나, 망하면 싸그리 다 같이 망하죠.”
“그럼 말씀하신 콘텐츠 사업은 굉장히 큰 리스크를 동반하는 것이 아닙니까?”
되묻는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단순히 리스크로만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현재 세계가 돌아가고 있는 모습만 봐도, 시대를 바꿀 수 없는 흐름으로 향하고 있죠.”
이현승은 침묵했다.
대통령의 침묵에 나도 침묵했다.
잠깐이지만 어색한 시간이 흘렀다.
그러다 갑자기 이현승이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하!”
“……?”
“이거 기대 이상이군요. 새로운 회장의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궁금했는데, 이 정도일 줄이야.”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칭찬 맞습니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벌떡 일어나는 모습에 나도 덩달아 같이 일어났다.
그는 나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그의 손을 맞잡으며 미소를 지었다. 그런 나에게 이현승이 말했다.
“필요한 것들이 있다면 부담 없이 이야기하십시오. 대통령 선에서 지원할 수 있는 일은 다 해드리죠.”
“고맙습니다.”
그렇게 대통령과의 첫 만남이 끝났다.
* * *
주말에 김 비서와 오붓하게 시간을 보냈다.
“이사님이 뭐라 안 하셔?”
“뭐를요?”
“요즘 주말마다 우리 집에 있잖아. 이사님이 뭐라 안 하셔?”
“별말씀 없으시던데요.”
“음.”
다행인가.
김진철 이사는 언제봐도 무섭다.
그런 그가 별말 없다고 하니 다행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요즘 이사님 뭐하고 계셔?”
“평일에는 일하시잖아요. 아시면서.”
“아니. 아니. 주말에.”
“주말에는…… 음. 가끔 등산이나 낚시하러 가시기도 하고, 부부동반 모임 가시기도 하네요.”
“그렇구나.”
“그런데 그건 왜 물어봐요?”
“아, 그냥.”
김진철 이사가 무섭기는 해도, 나에게는 곧 장인어른이 될 분이다.
향후 평화를 위해서 잘 보일 필요가 있다.
“주말에 이사님하고 같이 낚시라도 할까?”
“정말요?”
어째서인지 김 비서가 더 좋아하는 것 같다.
초롱초롱한 얼굴로 정말이냐고 되묻는 그녀의 모습이 당황스럽지만 예뻤다.
“그간 나 때문에 고생 많으셨는데, 이래저래 잘 챙겨드리지 못한 것 같아서. 그리고…… 장인어른께 잘 보이고 싶은 마음도 있고.”
“뭐래요. 히히.”
장인어른이란 말에 김 비서가 내 가슴팍을 아주 힘없이 쳤다.
“아빠한테 연락해 볼까요?”
“응.… 아니, 내가 직접 연락할게.”
그렇게 김진철 이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돌아오는 주말에 나는 김진철 이사와 단둘이 있었다.
“저, 이사님?”
“왜?”
“그 김 비, 아니, 유리한테 들었는데, 주말에 낚시나 등산 가신다고 하시지 않으셨나요?”
“음. 평소에 그렇지.”
“그런데 왜 저희는 축구장에 있는 건가요?”
“…….”
예비 장인어른과 단둘이 축구장 데이트라니.
김진철 이사도 이 상황이 상당히 멋쩍다는 것을 알고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더니 고개를 반대편으로 획 돌리며 말했다.
“흥. 싫으면 집에 가던가.”
“아, 싫은 건 아니고요.”
김진철 이사와 단둘이 축구장에 온 것까지는 그렇다 치자.
그런데 문제가 좀 있었다.
왜 하필 우리 팀도 아니고, 다른 팀 축구장인가.
【수원 블루 3:0 부산】
우리는 수원 블루의 홈 경기장 빅버드에 있었다.
스플릿라운드 첫 경기에서 마주한 부산을 상대로 수원 블루는 그야말로 제대로 분풀이하고 있었다.
리그 5위에서 7위로 떨어지면서 충격적인 하위 스플릿 추락을 겪은 그들의 분노는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안 그래도 조금은 위험한 곳에 왜 남의 팀 경기를 지켜봐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이봐. 애송이.”
“예.”
세상 그 누구도 영신그룹 차기 회장을 애송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아마 김진철 이사 하나밖에 없을 거다.
“우리 팀 경기는 내일이지?”
“네.”
“누구랑 붙냐?”
“인천이요.”
“걔들 축구 잘하냐?”
“잘 모르겠네요.”
“쯧. 구단주가 모른다고 대답하면 쓰나.”
김진철 이사의 말에 나는 그저 허허 웃을 뿐이었다.
나는 손에 든 팝콘을 한 입 먹은 뒤 김진철 이사에게 건넸다.
“드실래요?”
“됐다. 내 나이에 그런 거 먹으면 탈 나.”
“건강하시잖아요.”
“관리하니까 건강한 거지.”
뭔가 투박한 대화들이 오고 갔지만, 나는 조금씩 깨닫고 있었다.
김진철 이사도 나름대로 나를 배려하고 어울리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예전 같으면 벌컥 화를 내거나 면박을 줬던 양반이다.
그랬던 그가 이제는 내가 하는 말에 대꾸도 해주고, 역으로 말도 먼저 걸어주지 않은가.
오늘 이렇게 축구장에 온 것도, 나와 어울리기 위한 노력으로 보였다.
그렇기에 나는 불만 없이 있을 수 있었다. 오히려 고마웠다.
‘김 비서가 보면 좋아할지도?’
그런 생각을 하는데, 경기가 끝났다.
“가자.”
“예.”
경기가 끝난 우리는 미련 없이 경기장을 벗어났다.
* * *
스플릿 라운드 첫 번째 경기가 시작됐다.
하위 스플릿이 먼저 치러진 뒤, 다음 날에 상위 스플릿 경기가 진행됐다.
리그 1위로 상위 스플릿에 진출한 고양은 인천을 홈으로 불러들여 상대했다.
그리고 고양은 인천을 폭격했다.
『호프만이 리그 첫 번째 해트트릭을 기록합니다!』
전반전에 필립 호프만이 해트트릭을 기록하며 다득점의 포문을 열었다.
이어서 진행된 후반전에서는 다양한 선수들이 득점포를 가동했다.
『박형우 득점합니다!』
『골! 한석원의 다이나믹한 골이 나왔습니다!』
『백종수의 헤딩골! 사실상 끝내기 득점입니다!』
도합 6:0으로 인천을 대파한 고양은 이어서 가와사키와 일전을 준비했다.
“가와사키는 이번 시즌 J리그 1위 팀이다. 다른 무엇보다 실점량이 극도로 적어.”
곽찬구 감독의 설명에 선수들이 귀를 기울였다.
“현재 J1리그는 30라운드까지 경기를 진행했는데, 가와사키는 30라운드 동안 28실점밖에 하지 않았어. 경기당 1점이 되지 않은 최소 실점이지.”
“저게 말이 되나.”
일부 선수들이 감탄하기도 했다.
경기당 실점 1점도 되지 않는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었다.
“반대로 가와사키의 득점력은 그렇게 높지 않아. 30라운드 동안 60골을 넣었는데, J1리그 전체를 통틀어서 4위에 해당되는 기록이지.”
“탄탄한 수비로 승점을 획득했군요.”
“그래. 정확한 말이다.”
김지우의 말에 곽찬구가 가볍게 손뼉을 치며 반응했다.
“가와사키의 수비력은 아챔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났지. 조별리그에서 5실점밖에 하지 않았어.”
“와.”
“가와사키는 공격적인 팀이 아니야. 오히려 지키는 축구를 하지. 그런데 어떻게 이런 팀이 상위권을 유지할 수 있을까?”
곽찬구 감독은 두 명의 선수를 가리키며 말했다.
“유토 유키. 다닐손. 이 두 선수가 가와사키 역습 전술의 핵심이다.”
이에 스즈키가 반응했다.
“저 두 사람 알아요.”
“그래, 스즈키, 너라면 겪어봤겠지.”
스즈키가 우라와 레즈에서 뛰던 당시, 두 선수 모두 겪어봤던 경험이 있었다.
“두 명 다 준수하게 하던 친구들인데, 요즘에는 엄청 잘하나 보네요.”
“그래. 제대로 물이 올랐지. 그래서 동영상 하나 준비했다.”
곽찬구 감독은 동영상 하나를 실행했다.
“이, 이건……!”
동영상을 본 선수들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