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6화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던 리그 30라운드 결과가 나왔다.
【오피셜】K리그1 상·하위 스플릿 확정!… 고양, 서울, 전북, 울산, 포항, 인천 확정. 수원 블루는 하위 스플릿으로.
직전까지 리그 5위였던 수원 블루가 하위 스플릿으로 향하는 대반전이 일어났다.
포항이 울산을 2:1로 꺾고, 인천이 수원 블루를 3:1로 잡으면서 순위 변동이 일어난 것이다.
세 팀 사이에 승점 차이는 고작 1~2점 차이였다.
수원 블루는 무승부만 기록해도 상위 스플릿을 확정할 수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결국 홈 경기에서 하위 스플릿으로 향하는 굴욕을 맛봤다.
이에 실망한 수원 블루의 서포터스들이 경기 후 선수단 버스에 몰려가 집단으로 항의하거나 야유를 퍼붓기도 했다.
이에 구단은 장문의 사과 편지를 개재하며, 추후 더 좋은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팬들은 구단을 향한 믿음보다 의심이 더욱 커질 뿐이었다.
한편, 리그 1위 고양과 3위 전북의 맞대결은 양 팀 모두 소득 없이 0:0 무승부로 마무리 지었다.
그에 반해 페리시치의 해트트릭을 앞세운 2위 서울이 대구를 상대로 무려 6:0 대승을 거두면서, 고양과의 승점 차이를 좁혀갔다.
올 시즌 고양의 패배는 적었지만 유독 무승부 숫자가 많은 편이었다.
그것도 하반기 들어서 무승부가 많이 나왔다.
그렇기에 서울과 고양의 승점 격차가 크지 않았던 것이다.
이제 두 팀의 승점 차이는 단 3점.
앞으로 남은 8경기를 치르는 동안 한 번이라도 미끄러지면 우승을 놓칠 수도 있었다.
그렇게 K리그는 스플릿라운드 일정에 돌입하며 시즌 막바지로 향하고 있었다.
* * *
스플릿라운드와 AFC챔피언스리그 준비로 구단 전체가 분주한 가운데, 나는 뜻밖의 연락을 받았다.
“대표님. AFC에서 초청 메일이 왔습니다.”
“AFC에서?”
“네. 그것도 AFC 회장이 직접 초청했습니다.”
아시아축구연맹을 이끄는 회장이 직접 나와 만나고 싶다고 연락이 온 것이다.
“정말 보고 싶으면 그쪽에서 나를 찾아와야죠.”
“으음. 아무래도 대외적인 위치가 있지 않습니까?”
“그렇게 따지면 나는 영신그룹 회장인데요?”
“…….”
당황하는 천지원 이사를 보며 나는 피식 웃었다.
“농담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어디서 보자고 합니까?”
“AFC 본부가 있는 쿠알라룸푸르입니다.”
“쿠알, 음, 아무튼 그 말레이시아 수도 맞죠?”
“맞습니다.”
이름도 무지하게 어려운 그곳에 AFC 본부가 있다.
여기서 아챔, 월드컵 지역별 조 추첨 등이 진행되기도 한다.
“왜 나를 보자고 하는 걸까요?”
“세간에 저희가 화제가 되고 있지 않습니까? 그쪽도 저희에게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을 겁니다. 게다가 대회 첫 출전에 준결승전에 올라왔으니 하고 싶은 말들이 많겠죠.”
“흠. 우리가 좀 대단하죠.”
어차피 언젠가는 만나봐야 할 이들이다.
우리가 K리그에서 계속 활동하는 이상, AFC와는 계속 함께해야 할 파트너이기도 하니까.
고민은 길지 않았다.
“좋습니다. 한번 만나죠. 날 잡아보세요.”
“네.”
* * *
며칠 후, 말레이시아 수도 쿠알라룸푸르.
공항에서 나와 차를 타고 부킷 자릴 국립경기장을 지나면 부킷 자릴 레저공원이 나오는데, 바로 그 근처에 AFC 본부가 있었다.
새하얀 색의 2층 통유리로 된 본관 건물 위에 [AFC] 로고가 걸린 간판이 크게 걸려 있다.
더불어 본관 앞에는 AFC 소속 국가들을 상징하는 국기들이 일렬로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런 본관 앞에 검은색 고급 외제차가 멈췄다.
먼저 열린 조수석 문에서 박준후 팀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빠르고 절제된 동작으로 뒷좌석 문을 열었다.
열린 문으로 내가 밖으로 나왔다.
검은 보잉 미러 선글라스에 고양 유나이티드 엠블럼이 박힌 정장을 입은 나는 마중 나와 있는 AFC 관계자들을 보고 반갑게 미소 지었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별말씀을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마중 나온 AFC 회장 야지드와 반갑게 인사를 나눈 뒤,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응접실로 향한 우리는 서로 소수의 관계자만 대동한 상태에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쿠알라룸푸르는 어떻습니까?”
“처음 와봤는데 멋진 곳이네요. 뭔가 여유도 느껴지고요.”
“그렇습니까?”
“회장님이 말레이시아 출신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말레이시아 국적인 그는 작년에 회장직에 오른 인물이었다.
일반적으로 중동에서 AFC 회장을 많이 배출한다고 생각하는데, 역대 AFC 회장들을 살펴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
의외로 홍콩과 말레이시아 쪽에서 회장을 많이 배출했다.
특히 초대 회장인 로만 캄은 홍콩 사람이었다.
하지만 AFC가 본격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한 2000년대에 들어 중동 쪽에서 장기집권하면서 우리가 아는 그런 이미지로 변모했다.
그런 상황에서 이번 야지드 회장은 모처럼 동남아시아 쪽에서 배출한 인물이었다.
야지드 회장은 눈앞에 놓인 차를 한 모금 마신 뒤, 말했다.
“우리 AFC는 고양 유나이티드에 대해 상당한 관심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렇습니까?”
“짧은 시간 내에 폭발적인 성장과 그걸 증명하듯 처음 나온 아시아 대회에서 준결승전까지 오르는 행보를 보였죠.”
“…….”
“마치 과거 중국 슈퍼리그를 누볐던 광저우를 보는 것 같습니다. 아니, 그쪽보단 여기가 더 우수하다고 봐야 하죠.”
이렇게 칭찬을 아끼지 않으니, 그 이유가 궁금했다.
그런 내 생각을 읽기라도 했을까?
그가 점점 본심을 꺼냈다.
“예전부터 한국은 특이한 나라였습니다.”
“특이하다라. 왜 그렇게 생각하시죠?”
“한국은 전쟁을 겪고, 여기 동남아시아에 있는 국가보다 못한 삶을 살았죠. 그랬던 국가가 지금은 아시아를 선도하고 있는 선진 국가로 발돋움했고요.”
“…….”
“그래서 더 이해가 안 됩니다. 어째서 한국은 축구 투자에 인색하는지.”
이거였군.
나는 그의 본심을 듣고 얼굴이 굳어졌다.
“한국이 AFC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상당히 큽니다. 최근 치러지는 챔피언스리그에서의 성적, 연령별 아시아 대회 그리고 세계적인 무대인 월드컵에서의 성적만 놓고 봐도, 한국의 영향력은 대단하죠.”
야지드 회장은 손에 쥔 찻잔을 내려놓고 나를 똑바로 응시했다.
“그토록 영향력이 큰 국가에서, 왜 유독 아시아 축구에 대한 투자가 인색한지 궁금합니다.”
나는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야지드 회장의 말은 어느 정도 사실이었다.
한국 유수의 기업들이 FIFA 또는 UEFA에서 주관하는 주요 리그에 투자하는 경우는 있었지만, 아시아 축구에 대한 투자는 상대적으로 빈약했다.
그 안에는 여러 이유가 있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아시아 축구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 때문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나는 가능성을 봤습니다.”
“가능성이요?”
“네. 회장님에 대한 가능성을 말이죠. 회장님이라면 충분히 저희와 좋은 파트너가 될 수 있겠다는 그 가능성을 말이죠.”
“제가 무엇을 해드릴 수 있다고 그렇게 생각하시는 건지 알 수 없군요.”
내가 조금 빼는 듯이 이야기하자 야지드 회장은 말없이 웃었다.
“그건 우리가 계속 이야기하면 알 수 있겠죠.”
* * *
야지드 회장과 대화를 마친 그날 밤, 나는 호텔에 돌아와 휴식을 취했다.
침대에 누워, 가만히 천장을 바라보던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세상에 쉬운 일 하나 없네.”
회장 자리에 오른 뒤, 이전과는 전혀 다른 무게감이 나를 짓누르고 있었다.
“아버지 도대체 어떤 삶을 살아오셨습니까.”
아직 정식으로 회장이 된 것도 아니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나를 압박하는 이 무게가 때론 숨을 턱 막히게 만들 때가 있었다.
“보고 싶다. 김 비서.”
역시 힘들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사람은, 역시 김 비서뿐이다.
“전화나 걸까?”
생각난 김에 전화나 걸어야지.
스마트폰을 꺼내 바로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의 수신음 끝에 김 비서가 전화를 받았다.
-네, 태훈 씨.
“보고 싶어. 유리야.”
-후훗. 일은 잘 보셨어요?
“야지드 회장, 야망 큰 사람이더라. 나한테 돈 달라고 하더라.”
-네?
“아무튼 그런 일이 있었어. 자세한 이야기는 만나서 해줄게. 그건 그렇고 나 없는 동안 별일 없었지?”
-네. 늘 똑같이 바빴죠.
“그럼 됐어. 퇴근했어?”
-네. 지금 집이에요.
우리는 여느 커플들처럼 대화를 나눴다.
“네가 없으니까 허전하다.”
-저도요. 보고 싶어요.
“정말? 정말 보고 싶어?”
-네.
“일 끝나고 돌아가면 우리 데이트할까? 하루 휴가 내고.”
-그러기는 어렵다는 거 아시죠?
“에휴. 알지.”
점점 내 마음대로 시간도 못 내는 상황이 아쉽기만 하다.
-대신 돌아오면 주말에 태훈 씨 집에서 좋은 시간 보내요. 어때요?
“어? 정말? 나야 너무 좋지!”
-그럼 돌아와서 봐요. 잘 자요.
“응. 너도 잘 자.”
내 입가에는 미소가 지어졌다.
전화를 마친 나는 조금은 편안해졌다.
“그토록 고단했던 피로도 안 느껴지네.”
이래서 연인이 있으면 좋다는 건가.
김 비서의 존재가 너무나 고맙고 사랑스럽다.
* * *
말레이시아에는 영신전자 지사가 존재했다.
나는 차기 신임 회장으로서, 그곳을 방문하였다.
“회장님! 어서 오십시오!”
해당 지사를 총괄 담당하고 있는 지사장이 입구에서부터 나를 깍듯이 모셨다.
“이곳에서는…… 그리고 여기서는…….”
지사장은 직접 나를 안내하며 지사 내부를 소개했다.
내부 소개가 얼추 끝나고 이어서 지사에서 준비한 내부 PT 발표까지 모두 들었다.
“이상 PT를 마치겠습니다.”
PT를 진행한 본부장이 땀을 뻘뻘 흘리며 나에게 허리 숙여 인사했다.
신임회장에게 처음 선보이는 PT였기에 상당히 긴장한 모양이었다.
나는 싱긋 웃어 보인 뒤, 말문을 열었다.
“PT 잘 들었습니다.”
첫 마디에 모두의 시선이 나에게로 모였다. 조금은 경직된 분위기를 느꼈지만, 나는 신경 쓰지 않고 말을 이었다.
“확실히 미래 가능성이 느껴지는 내용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일부 내용은 뜬구름 잡더군요. 무엇보다 본사가 추진하는 사업적인 방향성과 맞지 않는 부분도 더러 보이고요.”
“…….”
“만약 PT대로 진행한다면, 이득보다 손실 규모가 클 겁니다. 이러한 사업을, 회장인 저나 이사회가 승인할 수도 없고요.”
“아.”
“그렇다고 긴장하실 것들은 없습니다. 내가 지적한 부분들은 여러분이 충분히 보완하실 수 있을 거라고 보니까요.”
내 말에 지사 관계자들의 표정은 썩 좋지 못했다.
나름 열과 성의를 준비한 첫 PT에서 좋은 말은 듣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내 말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제 형인 지태완 회장은 그동안 동남아시아 사업장 규모를 축소하고, 유럽과 북미 쪽으로 사업 쪽으로 늘려 갔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다릅니다.”
오늘 이 말을 하려고 여기에 왔다.
그들은 설마 하는 마음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동남아시아 시장의 가능성은 예전부터 증명해왔습니다. 우리가 이 시장을 포기하기에는 너무 이릅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들을 더욱 적극적으로 지원할 생각입니다.”
“……!”
본부장이나 되는 사람이 직접 내 앞에서 PT를 한 이유는 단순히 신임회장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지태완은 동남아시아보다 유럽과 북미 시장을 더 높게 쳐주었고, 이로 인해 동남아시아를 비롯한 다른 지역에 있는 사업장들의 규모가 축소되는 일이 벌어졌다.
동남아시아, 특히 이 말레이시아 사업장의 경우 예정됐던 프로젝트가 줄줄이 취소되고, 인력들이 대거 해고되는 일까지 벌어졌다.
본사의 지원이 줄어들면서 사업장을 운영할 자금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이곳 지사장을 포함한 남은 이들조차 언제 어디서 잘려 나갈지 모르는 불안한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내가 저들에게 형과 달리 적극적으로 지원해 주겠다고 약속한 것이다.
“감사합니다!”
진심으로 감사 인사를 하는 그들에게 한마디 했다.
“보여 주세요. 당신들의 힘을.”
“네! 반드시 보여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나는 회장으로서 동남아시아 사업장의 신뢰를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