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3화
로치오 단장, 미하엘 코치, 곽찬구 감독 마지막으로 천지원 이사까지 이렇게 4명이 함께 술자리를 가졌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
곽찬구 감독은 술자리에 모인 이들의 면면을 살피며 조금 난감해했다.
사실 곽찬구 감독은 외국어를 거의 할 줄 몰랐다. 영어도 그저 간단한 바디랭귀지를 통한 대화가 전부였다.
실제로 로치오 단장이나 미하엘 코치와 무언가 이야기를 주고받을 때, 통역이 함께했다.
그런 상황에서 통역 없이 이렇게 함께 한 경우는 처음이었다.
천지원 이사가 지갑에서 카드 하나를 꺼내며 말했다.
“대표님께서 저희 넷이 좀 더 친해질 필요가 있다고 하시면서 이렇게 법인 카드까지 주셨습니다.”
“대표님께서요?”
그제야 이 자리가 왜 만들어졌는지 알게 되었다.
알고 보니 지태훈 대표가 친해지라며 만든 자리였다.
“저, 천지원 이사. 나는 영어도 잘 못하는데…….”
곽찬구가 난처한 얼굴을 하며 천지원의 귓가에 속삭이듯 말했다. 그러자 천지원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걱정 마세요. 안 그래도 통역은 제가 하려고 했으니까요.”
“아!”
다행히 로치오와 미하엘 모두 영어를 사용할 줄 아는 사람들이었다.
“감독. 나 할 줄 안다. 한국어. 조금이지만.”
“오!”
어설프지만 한국어를 사용하는 로치오의 모습에 곽찬구 감독이 화들짝 놀랐다.
자신의 앞에서 단 한 번도 한국어를 사용한 적이 없었기에 놀라움은 배가 되었다.
“연습했다. 부족하다. 더 잘하겠다.”
곽찬구 감독은 그제야 자신의 괜한 걱정을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 그럼 한잔하시죠.”
천지원 이사가 각자 빈 잔에 소주를 따라주었다.
가볍게 잔을 부딪친 그들은 각자 몸을 돌려 소주를 비웠다.
소주를 비우고 눈앞에 안주를 한입 집어먹던 곽찬구 감독이 문득 위화감을 느꼈다.
“두 사람 다 외국인치고 한국식으로 드시네?”
로치오와 미하엘 모두 술을 마실 때, 얼굴과 몸을 살짝 옆으로 돌린 다음 마셨다.
그리고 젓가락질하며 안주까지 집어 먹는 모습이 그냥 한국 사람 같았다.
“배웠다.”
로치오와 미하엘 모두 한국문화를 겪으면서 자연스럽게 배웠다.
그렇게 네 사람은 술을 마시며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고 보니 두 사람은 서로 아는 사이라면서요. 어떻게 알게 된 겁니까?”
천지원은 로치오와 미하엘이 예전부터 서로 아는 사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에 관해서 로치오가 대답했다.
“콘라드 감독이 이탈리아 사람이라는 것은 아시죠? 콘라드 감독이 선수시절 저하고 유벤투스에서 함께 뛴 적이 있었죠. 그때 인연으로 서로 알고 지냈는데, 여기 있는 미하엘 코치는 유벤투스 단장 시절 알게 됐죠.”
당시 벤피카 감독이었던 콘라드 감독은 미하엘 코치를 섭외해서 사단에 합류시켰다.
콘라드와 깊은 친분이 있던 로치오는 자연스럽게 미하엘 코치와도 안면을 트게 되었다.
“그랬던 두 사람이 여기서 한 팀이 되셨군요.”
“저희도 신기합니다.”
유럽에서 알던 인연이 머나먼 동북아시아까지 이어질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나.
“단장님과 코치님 모두 K리그를 겪어보니 어떠십니까?”
천지원의 물음에 이번에는 곽찬구 감독이 귀를 쫑긋했다.
K리그의 감독으로서, 평소에도 두 사람의 생각이 궁금했던 그는 이 기회에 제대로 알고 싶었다.
그러자 두 사람이 서로를 쳐다봤다가 이내 미하엘이 먼저 대답했다.
“저부터 이야기하죠. K리그는 무척 흥미로우면서도 안타까운 리그라고 생각합니다.”
“좀 더 자세히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K리그에는 매년 재능 있는 선수들이 나옵니다. 그런데 환경 자체가 많이 열악한 편이죠. 이것도 많이 나아진 거라고 들었지만, 좀 더 탄탄한 시스템이 갖춰진다면 재능 있는 선수들이 화수분처럼 나올 겁니다. 그건 곧 대한민국의 축구 발전에도 기여할 것이고요.”
“그렇군요.”
“K리그에서 뛰는 선수들의 피지컬만 놓고 보면 분명 세계 무대에서도 통할 정도는 됩니다. 문제는, 개인을 받춰 줄 수 있는 환경적인 요소나 팀 컬러가 많이 부족하죠. 현실 축구는 게임이 아닙니다. 선수가 경기를 많이 뛰어서 레벨 업을 할 수 있지만, 기본적인 시스템이 받춰주지 않는다면 제한적인 레벨 업을 할 수밖에 없죠.”
“그렇군요.”
미하엘의 이야기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던 천지원을 향해 곽찬구가 팔을 툭 쳤다.
“무슨 말이야?”
“아.”
천지원이 통역을 해주자 곽찬구도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미하엘 코치 말이 맞아. 그나마 다행인 건 우리 팀은 선진화되고 있다는 거지.”
그 말에 미하엘 코치도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고양 유나이티드는 미하엘과 로치오를 중심으로 유럽의 선진화된 시스템을 받아들여 K리그에 맞게끔 시스템을 강화하고 있었다.
아직 초기 단계이기는 하지만 점진적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이는 경기 내용과 결과를 통해서도 알 수 있었다.
K리그의 전문가들도 고양 유나이티드만큼은 계속해서 발전하고 있다고 입을 모아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럼 단장님의 의견은 어떻습니까?”
로치오는 소주 한잔을 더 마시고 대답했다.
“나도 미하엘 코치와 어느 정도 의견이 같습니다. 예전에 처음 대표님을 만났을 때도 이야기했지만, K리그의 실력 자체는 낮잡아볼 수 있지 않지만, 부족한 인프라가 계속 발을 잡고 있죠. 하지만 이 부족한 인프라를 보완하거나 채워 줄 인력이 없었죠.”
“…….”
“그래서 K리그는 우리 팀에 고마워해야 합니다. 우리의 성장이 곧 리그의 성장과도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죠.”
그러면서 로치오는 툭 던지듯 말했다.
“리딩 클럽.”
“……!”
“우리는 현재 리딩 클럽으로 변모하고 있습니다. 리그 전체를 선도하는 리딩 클럽의 존재 유무에 따라 리그 전체 수준 자체가 달라지죠. 그것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유럽 5대 리그도 마찬가지고요.”
로치오의 이야기를 듣던 세 사람의 심장이 점점 강하게 뛰기 시작했다.
어느 리그든, 리딩 클럽이 된다는 것은 큰 의미로 다가온다.
리딩 클럽의 활약을 보고 해당 리그의 평가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얼마 전까지 K리그의 리딩 클럽은 전북과 울산이었지만, 앞으로는 달라질 겁니다. 세상 모두가 우리를 리딩 클럽으로 바라볼 겁니다.”
그 말에 술자리 분위기가 후끈 달아올랐다.
조용히 있던 곽찬구 감독이 각자 술잔에 술을 따라준 뒤, 잔을 들어 올리며 외쳤다.
“바모스 리딩 클럽!”
그의 외침에 세 사람이 동시에 반응했다.
“바모스!”
그날 술자리는 새벽까지 이어졌다.
* * *
지태훈이 부임한 이후, 고양 유나이티드 변화 중 하나는 바로 ‘선수 마케팅’이었다.
선수들을 적극적으로 마케팅 대상으로 내세워, 팬들과 좀 더 적극적으로 소통하는 방식이었다.
이 마케팅은 매년 발전하고 있는데, 최근 A매치 기간을 맞이해서 고양이 마케팅 하나를 발표했다.
그건 바로 ‘일일 선수 생활 프로젝트.’
이것은 고양 유나이티드를 응원하는 팬이 직접 소속팀 선수가 되어 하루 동안 선수로서 생활해 보는 이벤트였다.
여기에 뽑힌 팬들은 실제로 선수들과 함께 아침부터 훈련에 참여하고 같이 밥도 먹으며 전술 회의에도 참여해 경청할 수 있다.
이벤트에 참여하는 팬은 영상 촬영에 동의해야 하며, 해당 영상은 향후 TH미디어가 서비스할 OTT플랫폼에도 서비스될 예정이었다.
이러한 이벤트가 개최된다는 소식이 들렸을 때, 팬들의 반응은 기대 이상의 폭발적인 반응을 보였다.
【오피셜】고양 유나이티드 주최 ‘일일 선수 생활 프로젝트’ 경쟁률 75:1…… 팬들 반응 뜨거워.
-와, 제발 뽑히게 해주세요!
-제발! 제발!
-저기 당첨되면 내가 진짜 박형우나 호프만 카초하고 같이 공 차고 훈련하는 거 아냐? 대박이다!
-진짜 저거 뽑히면 평생 술안주 생김.
선택받는 인원은 딱 3명.
그렇게 행운의 주인공으로 뽑힌 3명은 A매치 기간이 끝난 후에 바로 참여하게 된다.
이 이벤트는 일시적으로 서버가 다운될 정도로 몰렸다.
그렇게 A매치가 끝나고 3명의 당첨자가 훈련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안녕하십니까! 31세 조준호라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26살 최윤이라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22살 신준우라고 합니다!”
훈련장에 모여 있던 선수들이 뜨겁게 박수 치며 환호했다.
그런 그들의 모습을 미리 대기하고 있던 카메라 감독이 모두 영상에 담아내고 있었다.
카메라를 의식한 곽찬구 감독이 직접 선수들에게 이야기했다.
“이미 구단을 통해 들어서 알고 있겠지만, 오늘 하루 동안만 이 세 분은 너희와 같은 선수로서 생활하게 된다. 옆에서 잘 챙겨주기를 바란다.”
“네!”
“자, 그럼 세 분은 코치의 지시를 따르면서 선수들하고 훈련 진행하겠습니다.”
행운의 세 명은 잔뜩 상기된 얼굴로 선수들과 뒤섞여 함께 훈련을 받았다.
물론 훈련이라고 해서 선수들하고 동일한 수준으로 진행하지는 않았다.
함께 훈련하다가 힘들면 자연스럽게 빠지는 식으로, 컨디션을 조절하면서 진행했다.
“조준호 님? 반가워요.”
“오! 반갑습니다!”
같은 30대이자 주장인 김지우가 조준호에게 다가와 살갑게 대했다.
살짝 긴장하던 조준호는 곧 긴장을 풀고 헤실헤실 웃어 보였다.
“저, 김지우 선수님. 은퇴는 미루면 안 되실까요?”
AFC챔피언스리그 8강 2차전 경기가 끝나고 며칠 지나서 김지우의 은퇴 소식이 언론을 통해 전해졌었다.
이 소식에 고양 팬들은 큰 충격을 받고, 제발 1년 만이라도 더 뛰어달라며 외치기도 했다.
경기장에서 팬들이 내거는 현수막에 [오, 캡틴 김지우! 조금만 더 함께 해줘!]라고 적혀 있기도 했다.
김지우는 조준호의 간절한 부탁에 그저 말없이 웃기만 했다.
훈련 중에 간단한 미니게임을 진행하기도 했다.
“자, 5명씩 한 팀이 돼서 미니게임 진행하겠습니다!”
이벤트로 참여한 세 명의 팬들도 미니게임에 참여했다.
“받으세요!”
백종수가 같은 팀인 최윤에게 패스했다. 유일한 여자인 그녀는 생각보다 공을 잘 다루었다.
공을 잡은 그녀가 과감하게 선수들 사이로 드리블 돌파를 시도했다.
드리블하는 최윤을 배려하기 위해 일부 선수들이 설렁설렁 움직였다.
그렇게 골대 앞까지 도달한 최윤이 슈팅을 하려는데, 누군가가 갑자기 앞에서 끼어들었다.
“앗!”
슈팅하려던 최윤이 깜짝 놀라며 순간적으로 자세가 무너졌다.
무게중심이 뒤로 향한 최윤이 그대로 엉덩방아를 하려는 순간, 누군가가 황급히 팔을 뻗어 넘어지려는 그녀를 붙잡고 품에 안았다.
“미안해요. 제가 승부욕이 좀 있어서요. 괜찮으세요?”
“아!”
따가운 햇살 아래로 얼굴을 드러낸 이는 바로 오세진이었다.
오세진은 미안한 얼굴을 하며 품에 안은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헉!”
화들짝 놀란 그녀가 황급히 그의 품에서 벗어났다.
심장이 세차게 뛰는 그녀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외쳤다.
“저, 저는 괜찮아요!”
“괜찮으면 다행입니다.”
그때, 김지우가 다가와서 한마디 했다.
“야, 세진아. 너 여성분한테 그렇게 플레이하면 어떡하냐?”
“죄송해요.”
오세진은 한 번 더 사과했다.
그런 그에게 최윤이 손을 내저었다.
“저, 진짜 괜찮아요!”
그렇게 한바탕 해프닝이 벌어지는 사이, 정성진이 자신과 비슷한 또래인 신준우에게 다가갔다.
“할 만해요?”
“네? 아, 넵.”
“우리 나이도 비슷한데 편하게 이야기하자. 어때?”
“좋아.”
두 사람은 생각보다 금방 친해졌다.
이 모든 광경은 고스란히 카메라에 담겨 있었고, 영상을 찍던 카메라 감독의 입가에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분량 제대로 뽑았고! 좋아! 아주 좋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