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2화
AFC챔피언스리그 8강 2차전이 치러지는 울산 문수경기장.
오늘 경기를 보기 위해 찾아온 팬들로 인해 푸른 물결이 요동쳤다.
그런 푸른 물결 사이로 노란 물결도 함께 요동치고 있었다.
Vamos Champion 고양-!
울산까지 원정 온 고양 팬들의 외침이 경기장을 가득 채웠다.
그러는 사이 주심의 휘슬과 함께 양 팀 선수들은 공을 차며 그라운드를 질주했다.
삐이익!
와아아아!
앞서 1차전을 3:3 스코어로 끝마친 두 팀이기에 오늘 경기에서 반드시 승리가 필요했다.
원정 다득점 제도가 폐지되었기에 이 경기의 승리자가 4강에 진출하게 된다.
“진용아!”
오늘 선발로 나온 황진용이 공을 잡았다.
황진용은 특유의 감각적인 패스로 전방으로 패스를 찔렀다.
마치 대지를 가르는 환상적인 패스를 선보이며, 공은 울산 선수들을 가로질러 나아가더니 이내 측면에서 뛰어 들어가는 박형우의 발밑으로 정확하게 들어갔다.
“좋아!”
34세의 나이에도 여전히 폭발적인 드리블 능력을 보여주는 박형우의 플레이에 울산의 측면이 순간적으로 허물어졌다.
“위험해!”
울산의 수비가 흔들리는 사이, 중앙에서 페널티박스 안쪽으로 쇄도하는 선수가 있었다.
팡!
박형우는 쇄도하는 동료를 향해 크로스를 올렸다.
정확하게 포물선을 그리며 올라간 공이 밑으로 뚝 떨어졌다.
떨어지는 공을 향해, 사무엘이 머리를 들이밀었다.
툭.
정확하게 위치만 바꾸는 헤딩이었다.
그렇게 공은 각도를 틀면서 그대로 골망 안으로 빨려들어 갔다.
출렁-.
상대 골키퍼가 손을 쓸 틈도 없이 벌어진 일이었다.
골망이 흔들리자 사무엘이 두 팔을 벌려 카메라 앞으로 뛰어갔다.
우와아아아아!
『사무엘이 전반 3분 만에 선제 득점을 만들어냅니다!』
『이야~ 오늘 곽찬구 감독이 사무엘을 모처럼 선발로 기용했는데, 바로 이거였습니다!』
『사무엘 선수가 예전과 달리 많이 노쇠화되었다고 해도, 한 방이 있는 노련한 선수거든요!』
박형우의 어시스트에 이은 사무엘의 득점으로 고양이 시작부터 앞서 나갔다.
“분위기 좋아! 계속 가는 거야!”
곽찬구 감독도 터치라인에 서서 선수들에게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뭐야, 애들 기세가 달라.”
일부 울산 선수들이 당혹스러웠다.
1차전에 맞붙었던 모습과 달리 오늘 상대하는 고양 선수들의 모습은 기세 자체가 달랐다.
울산은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김지우의 은퇴 발언으로 고양 선수들의 사기와 투지가 급격하게 올라갔다는 것을.
이런 분위기는 전반전 내내 이어졌다.
결국 고양은 전반전에 추가 득점까지 만들어냈다.
『골입니다! 이번에는 김지우의 골입니다!』
김지우가 직접 페널티박스 근처까지 올라와서 때린 중거리 슈팅이 그대로 울산의 골망을 흔들어 버렸다.
득점한 김지우의 곁으로 골키퍼를 제외한 필드에 있던 고양 선수들이 모두 다가와 격하게 축하했다.
평소보다 거친 축하에 상황을 모르는 중계진과 팬들은 어리둥절했다.
『주장의 득점이어서 그런가요? 동료들이 상당히 거칠게 좋아해 주네요!』
그렇게 전반전에 터진 2골은, 경기 결과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경기 끝났습니다! 고양이 울산을 꺾고 4강에 진출합니다! 계속해서 역사를 쓰고 있는 고양 유나이티드입니다!』
『정말 대단합니다!』
구단 역사상 AFC챔피언스리그 4강에 진출하게 된 고양 유나이티드.
마침 비슷한 시간에 경기를 진행했던 다른 팀 경기에서, 가와사키가 승리를 거두며 4강에 올랐다.
『결국 동아시아 지역 4강전은 한일전이 되었습니다!』
『한때 삼분화되었던 AFC챔피언스리그였지만 중국 슈퍼리그가 몰락하면서 현재는 한일 클럽 간의 자존심 대결처럼 되었는데, 이번에도 4강은 한일전으로 치러집니다!』
『K리그를 대표해서 4강에 진출한 고양이 반드시 승리해서 결승전까지 올라갔으면 좋겠습니다!』
* * *
우리 팀의 4강 진출 장면을 TV로 지켜본 나는 포효했다.
“이거지!”
함께 TV로 경기를 지켜보던 석종호도 기뻐했다.
“됐다! 됐어!”
UEFA가 주관하는 UEFA챔피언스리그의 명성에 비하면 격이 조금 떨어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아시아에서 뛰는 선수들이라면 1번쯤은 뛰고 싶어 하는 대회가 바로 AFC챔피언스리그였다.
아시아 클럽에서 뛰는 선수들의 자존심이 걸려 있는 대회였다.
그런 대회에서 4강에 진출했으니 선수로서 기쁘지 않을 수 없었다.
“석종호 선수.”
“네? 넵.”
“몸 관리 잘하세요. 4강에 결승까지 뛰려면 말이죠.”
“……네!”
그렇게 다음날이 되었다. 울산에서 승전보를 들고 돌아온 선수들을 찾아간 나는 축하와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여러분이 우리 클럽에서 뛰고 있어서 무척 자랑스럽습니다. 앞으로 4강과 결승전까지 잘 부탁드립니다!”
“네!”
그러고 나서 나는 김지우와 짧게 면담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경기를 앞두고 라커룸에서 이야기했다고요?”
“네. 상황이 어쩔 수 없었습니다.”
“이해합니다. 자칫 분위기에 말려 준비했던 일들이 어그러질 수 있었으니까요. 주장으로서 잘 하신 겁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나는 김지우가 안타까웠다.
“아직 번복할 수 있는 기회는 있습니다. 최소 1년은 더 뛰지 않으시렵니까?”
“이미 굳힌 마음입니다. 최선을 다해 남은 경기에 집중하겠습니다.”
“끙. 어쩔 수 없군요. 아쉽지만, 남은 경기 잘 부탁드립니다.”
김지우는 그런 나를 빤히 바라보다가 이내 짧게 웃었다.
“대표님은 정말 좋은 분입니다.”
“제가요? 에이, 그런 말 마세요. 착각입니다.”
“아니요. 대표님은 정말 좋은 분입니다.”
내가 좋은 사람이라니.
괜히 머쓱한 기분이 들었다.
“대표님. 반드시 대표님 손에 우승 트로피를 안겨 드리겠습니다.”
* * *
“선수들에게 투자, 도박 관련 방지 교육을 진행했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석종호 선수의 사건 이후, 우리는 그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게 A매치 기간 재발 방지 교육을 자체적으로 진행했다.
교육은 천지원 이사와 로치오 단장의 주도로 이루어졌다.
“대표님, 프로축구연맹에서는 뭐라고 하던가요?”
“다행히 별일 없었습니다. 재발 방지 교육까지 진행했다고 하니, 알겠다고 하더군요.”
“다행이네요.”
프로축구연맹에서도 석종호의 일을 알게 됐다.
나는 석정원 회장과 직접 이야기를 나누며 재발 방지를 약속하고 조용히 넘어갈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번 A매치는 우리 팀 경기장에서 진행하죠?”
“맞습니다.”
월드컵 지역 예선전이 펼쳐지는 10월 A매치.
이번 예선전은 2경기 연속 홈에서 치러지는데, 그중 한 경기를 고양에서 진행한다.
“우리 팀 선수들한테는 좋겠네요.”
“그럴 겁니다.”
우리 팀 선수들도 이번 A매치 때 국가대표로 발탁됐다.
지난번 발탁된 정성진이 이번에도 발탁되었고, 최근 활약이 좋은 한석원도 국가대표에 뽑혔다.
“오, 이렇게 보니까 우리 팀 출신 선수들이 많네요?”
이번에 뽑힌 국가대표 명단에는 과거 우리 팀을 거쳤던 선수들도 제법 포진되어 있었다.
도르트문트에서 활약하는 장현우, 최근 셀틱으로 이적한 박요한도 이번 국가대표에 뽑혔다.
23명 뽑은 국가대표 명단에 전현직 멤버들이 4명이나 있는 것은 고무적인 일이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국가대표에 단 1명도 보내지 못했던 것을 떠올리면 격세지감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필립 호프만도 여전히 독일 국가대표로 꾸준히 차출되고 있었고, 카초도 폴란드 국가대표로 차출되었다.
두 선수 모두 해당 국가대표에서 중요한 활약을 하는 선수들이다.
여전히 더 성장해야 하지만, 분명한 건 지금도 과분할 정도로 성장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나는 반가운 얼굴들을 만났다.
“대표님!”
장현우가 나를 보고 반가운 표정을 드러냈다.
“독일에서 계속 멋진 활약하는 소식은 잘 듣고 있습니다.”
“전부 대표님 덕분입니다.”
대표팀 훈련이 끝나는 시간에 맞춰 경기장을 찾아간 나는 그곳에서 장현우를 만날 수 있었다.
“도르트문트와 재계약한다는 이야기가 있던데 사실인가요?”
“네. 도르트문트도 제가 좀 더 오랜 시간 활약해 주기를 바라고 있어요. 근데…….”
“……?”
“최근에 오퍼가 와서 고민 중입니다.”
“오퍼라면…… 어느 팀인가요?”
“프리미어리그의 첼시입니다.”
“오.”
첼시면 프리미어리그에서 한 축을 담당하는 팀이 아닌가.
그런 클럽에서 장현우를 원한다니!
“축하할 일이네요.”
“하하, 네.”
그래도 장현우 입장에서 좋은 일이면서도 고민이 되는 일이었다.
도르트문트 이적 후, 팀 내에서 다양한 공격 옵션으로 활약한 그는 이제 없어서는 안 될 선수가 됐다.
“동료들, 코칭스태프, 팬들 모두 만족스럽기는 한데, 그래도 고민이네요.”
이제 20대 후반이 되어가는 장현우에게 있어 어쩌면 이번이 마지막 대형 이적이 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어떤 선택이든 저는 장현우 선수를 응원합니다.”
“감사합니다.”
이 부분은 내가 어떻게 해줄 수 있는 게 없다.
그저 조용히 응원해주는 것뿐.
“그래도 도움이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이야기하세요.”
“고맙습니다. 대표님.”
* * *
A매치 기간에 뉴욕 버팔로에서 사람이 찾아왔다.
“안녕하십니까. 칼리드 왕자님의 명을 받고 온 알리라고 합니다.”
“오, 어서 와요.”
뉴욕 버팔로를 온전히 인수한 칼리드 왕자는, 본격적인 구단 지원을 시작했다.
그중 알리는 칼리드 왕자의 측근이자, 이번에 뉴욕 버팔로 사장으로 임명되었다.
“왕자님의 뜻을 받들어, 고양 유나이티드와 형제 구단이 되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일전에 칼리드 왕자가 제안했던 일을 수행하기 위해 직접 나를 찾아온 것이다.
“정식 협약식을 진행한 후, 저희 쪽 유소년 선수들이 고양 유나이티드를 방문할 겁니다. 이후 고양 유나이티드 유소년 선수들을 미국으로 초청해서 축구 교류를 진행할 예정이고요.”
“우리에게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제안이네요. 자고로 견물생심(見物生心)이라고 했습니다. 많이 보고 배울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다면, 서로에게 좋은 효과가 나타날 겁니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정식으로 뉴욕 버팔로와 형제 구단이 되었다.
협약식 이후 또 다른 인물이 나를 찾아왔다.
“회장님.”
“아, 어서 와요. 이진우 사장님.”
과거 뉴욕에 있던 영신글로벌을 이끌던 이진우는 최근 영신전자 사장으로 인사명령을 받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약속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냥 드리는 자리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겠지요?”
“물론입니다. 최선을 다해 회장님을 보필하겠습니다.”
“좋습니다.”
나는 흡족하게 웃었다.
이진우는 완벽히 나의 사람이 되었다.
그토록 고대하던 영신전자 사장이 되었으니, 이제 그 대가를 받아야 한다.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영신전자 내부는 혼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사장님께서 내부 단속부터 해주세요.”
“알겠습니다. 그리하도록 하죠.”
“그리고 지태완의 강제적인 인사 개편으로 능력과 상관없이 피해를 본 이들이 내부에 존재합니다. 그들을 모두 구제하세요.”
“이미 관련 인사 파일을 가지고 있습니다. 회장님이 명령하지 않으셔도 진행할 계획이었습니다.”
“훌륭합니다.”
영신그룹은 바뀌고 있다.
그것도 내 손 안에서.
나는 조용히 웃었다.